맑은 눈
1.
나는 사람들과 함께 살던, 좋은 것 같지만 복잡하고 무서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내가 엄마처럼 따르던 아주머니는 그 날 밤 삼겹살을 몇 점 구워 가루약을 감쪽같이 싸서 꼼짝못하고 누워있는 내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가끔 삽겹살구이를 얻어 먹기 했지만, 오늘처럼 나만을 위해 삽겹살을 구은 건 내가 약을 먹고 빨리 낫기를 바래서였습니다.
나는 마지막 순종의 행위로 먹고싶지 않은 것을 꿀꺽 삼켰습니다. 바늘을 뺀 작은 주사기로 넣어주는 물도 다 삼켰습니다.
거실에다 나와 나란히 잠자리를 편 아주머니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잘자 맑은눈, 엄마가 낫게 해줄게"
아주머니는 내가 죽음에 임박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주머니의 아들도, 병원의사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다른 개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무서운 대학 동물병원에 놔두지 않고 나를 집으로 데려온 것이었습니다. 의사인지 인턴인지 가운을 입은 젊은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여 당연히 입원시키고 가라고 했습니다. 기진맥진한 나를 쳐다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아주머니에게 나역시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시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호소했습니다.
'나를 두고 가지 마세요. 제발! 여긴 너무 무서워요.'
전신 마취에서 깨어나보니 내 머리에는 난생 처음 보는 스피커 같이 생긴 투명 프라스틱 깔대기가 씌여져 있었습니다. 손 하나가 들락거릴 정도의 틈새를 두고 얇은 비닐이 쳐진 작은 공간은 산소가 공급되는지 숨쉬기가 좀 쉬었습니다.
나는 토, 일, 월요일 사흘간이나 숨을 헉헉거리고 있었거든요.
동네 병원에서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 등허리에서 발끝까지 침을 잔뜩 꽂았는데, 나는 찍소리도 못한 채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치료가 끝나고 아주머니 아들이 포대기에 누운 나를 조심스럽게 안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나를 들여다보며 몹시 안타까워했지만 내 고통을 나누어 가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헉헉거리는 게 통증이 심해서 그러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니라 마비가 심해지자 통증보다는 숨을 쉬기가 힘들었어요.
아주머니는 내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툭하면 내쉬었던 한숨보다 훨씬 더 깊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때 한동안은 나를 예뻐해주던 언니들과 아저씨가 너무 보고싶어서 나도 절로 한숨이 폭 나왔었거든요.
그때마다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날 돌아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습니다.
"쪼고만 게 뭔 한숨을 그렇게 쉬어? 먼저집 애들이 생각나서 그러는구나."
아주머니는 어떻게 내 맘을 아는지 다가와 나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널 사랑해줄게. 그곳은 잊어버려."
나는 그곳의 사람들을 점차 잊어갔습니다. 날 버렸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이었는데, 흐르는 시간은 점점 내 기억을 어딘론가 실어가버렸습니다.
마비가 시작된 건 9월 27일 금요일이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아니고 엄마라고 불러야겠어요.
엄마는 그 날따라 문화탐방행사에 참여하느라 아침 일찍 아픈 나를 두고 나갔습니다. 내가 얼마나 몸이 안 좋은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 말 못하는 짐승들의 비극이예요.
새벽까지만해도 나는 엄마 침대에 뛰어오르고 싶었지만 왠일인지 도무지 힘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낑낑거리며 침대주위를 왔다갔다했어요.
엄마는 졸린 목소리로 말했어요
"왜 그래? 맑은눈. 엄마 좀 더 자야 돼."
엄마는 일어나 나를 들어올려 곁에 누이고 다시 잤어요.
엄마는 평소에 날 안고 자고 싶어했지만 내가 털이 보통 빠져야지요. 그래서 침대 아래에 내 잠자리를 만들어주었어요.
언제나 잠자기 전 다정하게 나를 쓰다듬어 주면서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우리 착한 맑은 눈, 잘 자."
그럼 나는 금방 사르르 잠이 들었어요.
때로는 꿈을 꾸면서 사람처럼 막 잠꼬대를 해서 엄마가 날 흔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새벽에 오빠가 일어난 걸 알면 재빨리 오빠방으로 달려가 얼굴을 햟고 부비며 재롱을 떨었습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내 귀에 알람소리가 크게 들리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우린 그냥 안답니다.
오빠는 내 털이 이불에 묻건 말건 상관치 않아요. 날 안아올리며 이렇게 말했어요.
"양털, 거위털 이불도 덮고 자는데, 우리 맑은눈 털 좀 묻으면 어때, 그치이~"
엄마는 청소할 때마다 아들의 이불에 잔뜩 묻은 내털을 테이프로 떼어내곤 했어요.
사실은 미안하게도 방마다 테이프가 놓여있어 수시로 내털을 떼어내야 했어요.
어떤 아저씨에게 들었는데, 우리가 밖에서 살면 여름 겨울 두 차례 털갈이를 하지만 온도가 늘 비슷한 실내에서 살면 추위 더위에 왕창 빠지지 않고 늘 조금씩 털이 빠진다고 하네요. 그래도 엄마는 늘 말없이 털을 떼어내곤 했어요.
또 언젠가 들었는데, 내 이름과 똑같은 첫번째 맑은 눈을 키울 때 '아이구, 내가 못살아. 맑은눈 털 땜에~'라고 불평을 했던 게 너무 미안하다고 했어요. 엄마는 내가 마치 그 맑은눈이 다시 온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맑은눈 덕을 많이 본거예요. 그 맑은눈 이야기는 좀 있다 들려드릴게요.
나는 그날처럼 엄마를 간절하게 기다린 적이 또 없었을거예요.
바쁘게 나갈 채비를 한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나를 안아 거실에 있는 내 분홍색 융단집에 내려놓으며 말했어요.
"맑은 눈, 엄마 다녀올께. 집 잘 보고 있어."
다른 때 같으면 쪼르르 쫓아나가 배웅을 했을텐데 난 움직일 수가 없어서 멀뚱멀뚱 엄마를 바라보기만 했어요. 가끔은 엄마가 나가는 게 싫어서 그냥 쳐다만 보면서 속으로 심통을 부린 적도 있었거든요. 엄마는 그런 줄만 알고 나간 거예요. 문이 닫히며 열쇠 잠구는 소리가 '찰칵' 들렸어요.
그때가 아침 일곱시였으니까 오빠가 돌아와 날 보고 깜짝 놀라기까지는 무려 열시간이 지난 뒤였어요.
"맑은눈, 왜그래? 아니, 이게 뭐야?"
나는 앞다리를 뻗친채 앉은 그대로 오줌, 똥을 다 눈 거예요.
아니 난생 처음 내 의사와 상관없이 그 찌찌들이 저절로 나와 버린 거예요.
내가 늘 엄마가 돌아오기를 몇 시간씩 기다리는 건 이제 이력이 나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날은 정말 괴로웠어요.
마치 시간이 멈춰버리고 나는 이대로 죽을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일인지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여러분은 한 자세로 열시간을 꼼짝없이 앉아있어 본 적이 있나요?
사실은 어젯밤에도 쇼파에 뛰어오르지 못해 오빠가 들어올려 주었어요. 내가 좀 어리광을 부리는 줄 알았던거지요.
우리보다 심하게 똑똑하다고 믿는 인간들이지만 자기 일이 아니면 이렇게 생각이 모자르고 무관심하답니다. 내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전혀 모르고 말입니다.
내 병의 시작은 9월 22일, 추석연휴 마지막 휴일에 당한 사고가 원인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작년에도 똑같은 일이 한 번 있었으니까 이미 그때부터 안 좋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때도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죽기살기로 도망쳤습니다. 산비탈길을 달려내려오는 산악자전거떼가 어찌나 무서운지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내달렸습니다. 내 조상이 영국의 사냥개라고 하니까 나도 달리기에는 한 소질 한다고 봐야겠지요.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어찌어찌 다니던 길을 찾아 혼자 집에 돌아왔습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 기다려섰다가 사람들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고, 엘레베이터도 기다려 타고 말입니다. 함께 탔던 6층 아줌마가 나를 알아보고는 5층으로 데리고 내려가 기다리자 엄마가 곧 왔습니다.
"아이구! 얘가 먼저 왔구나, 세상에!"
나는 반가운 나머지 괴성을 지르며 엄마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엄마는 날 끌어안고 아줌마에게 날 잃어버린 경위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부르며 늘 다니던 길을 서둘러 가보시고 다시 돌아내려와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보며 연락처도 알려주었답니다. 그리고도 산 입구에 있는 운동기구터에서 기다리다가 오지 않아 분실신고장이라도 붙이려고 부랴부랴 오셨답니다.
나는 혼자 집을 찾아오는 영리한 강아지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후로는 어쩌다 한 대 정도 지나가는 산악자전거는, 엄마가 붙잡는대로 뒤에 서서 피하며 마구 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엄마도 나도 커브길을 막 돌아 내려오다, 그만 미처 보지 못한 산악 자전거가 떼로 몰려 내려왔습니다. 엄마보다 몇 걸음 앞서 가던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미친듯이 내달렸습니다. 엄마의 부르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영리한 게 아니라 정말 바보였습니다.
조금만 길옆 숲으로 비켜서면 되는 일을, 그들이 내가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갈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달렸습니다.
작년에는 오르막 길이라 그들을 앞지를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내리막 길이라 나는 미친 듯이 달리다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했습니다. 그 인간들은 쪼그만 날 위해서 좀 멈춰 설 줄은 모르는 모양입니다. 오히려 내가 죽기살기로 뛰는데 뭐가 재미있다고 웃어대며 즐거워합니까?
나는 혼자 되어서야 숨이 턱에 차는 것을 간신히 고르고, 이번에도 길을 잘 건너고 아파트 엘레베이터도 기다렸다 탔습니다.
문이 열려 내리는데 오빠가 반가워하며 소리쳤습니다. 엄마가 전화를 해서 막 나를 찾으러 나가던 참이였다고 합니다.
"야! 맑은눈! 아이구~"
우린 얼싸안고 어쩔줄 몰라했습니다. 그날밤은 퍽 고단했지만 별일 없었다는 듯 우리는 모두 편안한 취침시간을 맞았습니다.
다음날도 엄마는 나를 데리고 산에 갔습니다. 아파트 맞은편의 이 산은 삼성산인데, 동네 사람들만 다니는 한적한 둘레길입니다.
찻길을 건너 산으로 들어가는 계단에서 엄마는 언제나 내 목줄을 풀어주십니다. 나는 신이 나서 뛰어올라갑니다. 그런데 그날은 다리가 좀 아파서 깡총깡총 뛰어오르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엄마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워낙 내가 산에 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엄마는 외출했다 돌아와 힘드신지 누워있다가도 나를 쳐다보며 일어납니다.
"하루종일 심심했지? 맑은눈, 산에 갈까?"
나는 엄마말을 금새 알아듣고 길길이 뛰며 좋아합니다. 어떻게 알아듣냐구요? 물론 사람들 말 자체를 알아듣는 건 아니예요. 그냥 어감으로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알아차리는거예요. 우린 말을 못하는 대신 본능적인 감각과 느낌으로 몇번 들은 말이나 행동을 기억한답니다.
엄마는 기다리는데 도가 튼 나를 늘 가엾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난 겨울부터는 주 일이회 가던 산책을 거의 매일 갔어요. 요즘 들어서는 다리가 좀 아프다고 하면서도 해가 지는 저녁시간이면 내가 기다리는 눈치를 알고 나가시곤 했습니다.
한번은 산에 다녀와 현관에서 늘 하듯이 날 번쩍 들어 안고 욕실에 내려 놓으며 말했습니다.
"에구, 힘들어. 맑은눈, 너랑 나랑 한 날에 죽어야겠다. 나 죽고나면 누가 널 돌보아주겠니?"
엄마는 우리들 개수명이 한 15 년쯤 전후라는 것을 알고 같이 한 십년쯤 더 살면 되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다리가 아프지 않아야할 텐데...' 생각하셨어요. 엄마는 늘 당신이 너무 오래 살까봐 걱정하시거든요. 사람들은 모두 아주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데 엄마는 이상하게도 아니었어요. 늘 낼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2.
내가 지금 엄마를 만난 건 4년 8개월전, 그러니까 2009년 2월 2일 산장아파트 앞마당에서였습니다.
나는 광명시에서 태어난, 이곳에 살던 강아지가 아니었는데, 왜 여기에 버려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천방지축인 나를 키우던 처음 주인은 늙수그레한 50 대 중반의 마음씨 좋은 아저씨와 예쁜 딸 둘이었습니다.
아저씨가 '공주야!' 부르는 언니들은 학교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내게 몰려와 도무지 잠을 잘 수도 없을 만큼 서로 안겠다며 귀찮을 정도로 예뻐했습니다. 사실 난 보는 사람마다 경탄을 자아낼 만큼 귀엽고 예쁘게 생겼던 것 같아요.
엄마는 산에서 혹 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앤 정말 예뻐서 구제된 애예요."
내가 유기견이었다는 걸 말하는 건 싫었지만 귀엽고 예쁘다는 걸 강조하시는 말이라 그냥 참았습니다.
내가 지금 엄마에게 오기까지의 이력은 이렇습니다.
진짜 우리 엄마가 낳은지 두 달도 안 된 나는 따뜻한 엄마품을 떠나 아저씨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아저씨는 쬐고만 나를 레인코트 속에 품고 지하철을 탔는데, 나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끄러운 굉음은 난생 처음이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날 밤 정신없이 잠에 떨어져 아침까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혼절을 했다가 깨어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나는 넓은 거실에서 혼자 잤다는 걸 언니들의 대화를 듣고 알았습니다.
"그냥 침대 밑에서 재웠으면 될 걸, 네가 이불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니까 엄마가 버릇된다고 떼어놨잖아."
"언니가 데리고 자려고 하니까 그랬지. 앤 내 꺼야!"
불멘 소리로 동생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빨리 밥먹고 학교 가라는 엄마의 성화에 못내 아쉬운 듯 나를 쓰다듬으며 "있다 보자!" 하고는 내곁에서 떨어졌습니다.
작은 애는 나가기 전 또 한번 날 들여다보다가 엄마가 내지르는 소리에 얼른 뛰쳐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 잘 지르는 무서운 아줌마는 집안청소를 하며 또 한 번 나를 기절초풍하게 했습니다. 나는 무서워서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며 있는대로 몸을 움크린 채 낑낑거리며 우리 엄마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울엄마의 품 같은 건 없었습니다. 이 집 식구들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우리 엄마는 황금빛 털이 굽실거리는 멋지게 생긴 중형사이즈의 7 살된 코카스퍼니얼이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나를 포함해 새끼를 네마리 낳았는데, 주인 할머니는 모두 내다 팔았습니다. 광명시에서 울엄마와 단 둘이 사는 할머니에게 엄마는 유일한 반려자이자 경제수단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국가보조를 받으며 혼자 사는 가엾은 분이었을 거예요.
작은 언니가 들어오고 한참 지나 큰 언니도 집에 왔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울긋불긋 반짝이는 예쁜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들고 왔습니다. 바로 내 목에 걸어주려고 사온 거였어요. 그래서 나는 본의 아니게 목걸이를 두 개나 걸게 되었습니다.
언니들은 나를 치장해주고 좋아라 박수를 쳤지만 사실 나는 걸리적거리는 목걸이들이 맘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아저씨는 거의 매일 늦게 들어왔지만 꼭 나를 들여다보며 쓰다듬어 주고는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작은 언니의 고집과 나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나는 넓디넓은 캄캄한 거실에서 혼자 잠자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층침대 옆에 조그만 상자를 놓고 방석을 깔아주었는데, 나는 그냥 작은 언니의 침대로 기어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면 언니는 나를 꼭 껴안아주어 마치 엄마품처럼 따뜻했답니다.
그래도 언니의 침대에 오줌을 누진 않았어요. 꼭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에 나가서 볼일을 보았지요. 언니들이 미처 닦지 못하고 학교에 가면 아줌마는 신경질을 있는대로 내면서 나를 쥐어박았습니다.
그럴 때 나는 얼른 달아나 언니들 방 침대 밑에 숨어서 숨죽이고 있다가 살금살금 나와 고개를 빠꼼이 내밀고 기다렸어요.
날 좋아하는 언니들이 돌아올 때까지...
예쁘게 생긴 이 아줌마는 나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이 아줌마가 싫었어요.
결국은 추운 겨울이 채 지나지도 않은 2월 2일, 아줌마는 똥오줌 못 가리고 털 날리는 나를 내다버릴 결심을 했습니다.
그날 아침, 아줌마가 거실에 (내 생각에는 마당 같이 넓은 곳) 내가 얌전히 싸놓은 응가를 밟고 말았습니다.
흥분한 아줌마는 구두주걱을 찾아 들고 나를 후려갈겼습니다. 어떨결에 한 대 얻어맞은 나는 비명을 지르며 언니들 방 침대 밑으로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그래도 이월이면 쌀쌀하게 추운 날인데 인정머리 없는 아줌마는 나를 넣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온 겁니다.
언니들이 강아지 타령을 할 때마다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던 아줌마 말을 어기고 맘씨 착한 아저씨가 나를 사온 거였으니 이제 나는 꼼짝없이 버려지는 신세가 된 겁니다.
아줌마가 나를 내려놓은 넓은 마당은 내가 살던 아파트와 비슷했습니다.
나는 우리 아파트 마당인지 알았다니까요. 해방된 기분에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아줌마는 온데간데 없어졌습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아줌마의 체취를 맡아보려고 애썼지만 도무지 어느 입구로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초조한 나머지 이리저리 왔다갔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내게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왜 그래? 주인을 잃어버렸니? 엄마 어디 갔어? 아유 예뻐라 "
나는 직감적으로 이 아줌마에게 의지해야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줌마 무릎에 머리를 비비며 손을 핧으며 애교를 떨었습니다.
아줌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안고 관리실로 내려갔습니다.
"이 강아지가 주인을 잃어버린 거 같아요. 방송을 좀 해 주세요."
그리고는 따라붙는 나를 밀어내며 말했습니다.
"아줌마는 은행에 가야 돼.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네 엄마가 데리러 올꺼야."
나는 낯선곳에서 어쩔줄을 몰라 똥마른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습니다.
"얘, 이리와, 여기 가만히 있어!"
사무보는 아가씨가 말했습니다.
"마이크가 고장 나서 지금 방송이 안 되는데 어떡하죠?"
"이기사, 빨리 안 오고 뭐하나? 주인 나타나면 이리로 오겠지 뭐. 근데 요즘 강아지를 버리는 사람이 많던데 혹시 버린 거 아닌가?"
늙수그레한 관리소장 아저씨는 안 됐다는 듯이 날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어머! 아직도 안 찾아 갔어요?"
볼일을 마치고 오다 들리신 아주머니 목소리를 듣고 나는 반가워 달려가 안겼습니다.
"지금 마이크가 고장 나서 방송을 할 수가 없어요. 제가 프린트물을 입구마다 붙일께요."
"그럼, 우선 제가 맡고 있을테니 주인이 나타나면 연락을 주세요."
아줌마는 동호수를 적어놓고 나를 안고 집으로 왔습니다.
저녁에 집에 온 아줌마의 아들이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니, 다시는 안 키운다고 하시더니 웬 강아지예요?"
자초지종을 들은 아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짐하듯 말했어요.
"끝까지 책임질 자신 없으시면 유기견 보호소에 보내세요. 주인을 찾아주던지, 아마 입양할 사람이 없으면 안락사를 시킬 거예요."
아줌머니는 안락사를 시킬 수도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조금만 시간이 안 맞았어도 만나지 않았을텐데, 저와 인연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보다는 먼저 키우던 맑은 눈이 두살 밖에 못 살고 죽은 게 아주머니 탓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미안했던 게
나를 그냥 키우시게 된 거 같아요. 언젠가 아주머니가 이웃에게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3.
십여년전 아줌마가 몸이 약해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있었던 일이예요.
어느 날 오빠집에 갔는데, 어미 개가 강아지 새끼를 세 마리 낳아서 분양을 하려고 했습니다.
"고모, 직장도 그만 두었으니까 한 마리 갖다 키워."
올캐가 강아지 한 마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아유! 못 키워. 그리고 나 개 싫어해."
아주머니는 질색을 했습니다.
"못 키우긴 뭘 못키워. 이제 한가할 텐데... 한 번 키워 봐. 키우다 정 못 키우겠으면 도로 가져오든지."
아주머니는 고물거리는 강아지들을 쓰다듬어 주면서 그 귀여운 모양에 그만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할머니들이 귀여운 손자들을 '아이고! 우리 강아지!' 라고 말씀하시는 건 우리들이 애기때 정말 귀엽기 때문이잖아요.
"강아지는 그냥 가져가는 거 아니니까 삼만원만 줘."
아주머니는 울며겨자 먹기로 지갑을 열고 삼만원을 건냈습니다.
강아지를 키워본 경험이 없는 아주머니에게 강아지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사전 지식은 알려주지도 않고 돈만 받았어요.
아주머니는 오빠네 집에 갈 때마다 두 마리 개가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면서 늘 꺼림직했습니다.
네 식구에 개 두 마리까지 함께 살기에는 집이 좁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혼자 버는 오빠의 월급으로는 좀 더 절약하며 살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아무튼 아주머니는 올캐의 권에 못 이겨 어떨결에 예쁜 갈색강아지를 안고 집에 왔습니다.
그때부터 자식이 없이 단 둘이 사는 부부에게 저는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아주머니는 화장실에다 내 오줌이 묻은 신문지를 놓아두어 저는 금새 화장실에서 배설을 하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심지어 아줌마 시댁에 갈 때 저를 한 번 데리고 갔는데, 제가 알려주지도 않은 화장실을 찾아가서 응가를 해서
아줌마를 감동시켰습니다. 그 집 할아버지는 대뜸 '무슨 놈의 강아지 새끼를 방안에서 키우냐!'고 마땅찮아 했기 때문에
난 아줌마가 곤란해질까 봐 아주 많이 신경을 썼거든요.
두 분은 주말이면 산에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저를 데리고 산 정상까지 올라갔어요.
난 좀 힘들때도 많았지만 신이 나서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일년 후 내 몸이 조금씩 자라서 중견쯤 되니까 음식점 같은 데는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음식점 주인이 손님들이 싫어할까봐 꺼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행지에서 모텔 같은 데는 아예 날 숨겨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반려견과 함께 묵는 숙소도 여럿 된다고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으니까요.
아주머니는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점차 나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아줌마 친정어머니의 맑고 큰 눈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딸에 대한 애착이 지나치게 강하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순간, '아이구! 저걸 두고 어찌 가나!' 하시는 듯 눈을 맞추며 안타깝게 찡그리시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흔하나에 낳으신 늦둥이 고명딸이 몸이 약해 늘 애물단지였습니다. 더구나 돌아가시기 전 사위가 속을 썩여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것을 참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집착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 집착의 인연이 윤회하며 업을 짓고 또 지으며 고통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주머니의 어머니는 무조건적인 신앙을 지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당신이 가는 천국을 딸은 가지 못할 것을 늘 염려했었습니다. 딸은 고단하다는 핑게로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천당에 있는데, 넌 지옥에 가면 어떡하냐?"
"엄마, 걱정마세요. 튼튼한 동아줄을 하나 준비했다 내려보내 주세요."
어머니는 눈을 흘기며 웃었습니다.
어머니의 못 배운 한을 시원하게 풀어준 착한 딸은 늘 아픈 몸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조건이 딸보다 나은데도 불구하고 딸이라면 지극정성인 남자친구와 결혼하게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물론 내 딸을 고생시키면 안 된다는 약속을 단단히 했습니다. 그러나 사위는 결혼한지 몇 년이 지나도록 돈을 벌지 않고 빈둥거리는 것도 모자라 다른 여자까지 사귀었습니다. 손주를 봐 주러 딸네 집에 가있는 동안 그 모두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친정어머니께서는 도저히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없었던 겁니다.
아주머니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달도 안 되어 이혼을 감행했습니다. 일부종사를 해야한다고 가르치신 어머니를 실망시킬 수 없어 참고 또 참으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는 위기를 겪으며 결단을 내려 해결을 한겁니다. 위자료도 없이 아들을 혼자 키우기로 했습니다. 아니, 어쩜 시아버지가 결혼할 때 주신 작은 아파트 전세비가 위자료를 대신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육신을 빠져나오자 얼른 슬퍼하는 딸 가까이 앉아있던 체격 좋은 한 총각의 몸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머니의 영혼은 도저히 딸의 곁을 아주 떠나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뿔싸, 그는 딸보다 여덟살이나 어린 사내였습니다. 좀 더 살펴볼 걸 급한 나머지 너무 서두르신 겁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동학년 대표로 교장선생님, 주임선생님과 함께 왔던 그 총각은 나이보다 퍽 성숙한 인물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들은 동학년을 하는 일년 내내 한 번도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는데, 갑작스레 가까워지면서 서로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사귄지 이년여만에 어렵사리 결혼을 했습니다.
그의 부모가 펄펄 뛰며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귀신이 씌웠다'고 말하는 게 바로 이런 거예요.
아줌마는 눈물을 참으며 어린 아들을 할아버지댁에 데려다 주어야 했습니다.
결혼을 허락하는 대신 아들은 제아비에게 보내야 한다는 시아버지의 강경한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경기도 근교로 발령을 받아 가면서 반대하는 시댁으로 아들을 데리고 들어갈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주머니는 학구 좋은 할아버지 집에 아들을 맡기며 '우린 헤어지는 게 아니다. 잠깐 떨어져 사는거란다.' 약속했습니다.
부부는 몹시 사랑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아줌마는 몸이 약한데 너무 무리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거듭되는 자연유산과 자궁외 임신, 시험관 아기를 다섯번이나
시도했지만 극도로 허약해진 심신은 씨앗을 품지 못했습니다. 술을 좋아했던 철없는 남편의 보살핌도 부족했습니다.
결국 지치고 지친 아주머니는 아이 갖는 일을 포기했습니다. 그녀는 죽을 것처럼 힘들고 외로웠습니다.
그들의 뜨거웠던 사랑이 옅어져 가는 만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냥 살아갔습니다.
그러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승진하기 위해 대학원 공부까지 하며 열심을 다했는데, 불쑥 사표를 낸겁니다.
'내가 일만 하다 죽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나?' 계속 누적되는 지나치게 피곤한 심신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수없이 이겨낸 역경들이 무엇 때문이었나 회의하기에 이른겁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고단한 인생,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마침 새로운 문교부장관에 의해 명예퇴직 제도가 나이를 앞당기면서 아줌마는 그만 둘 생각을 했습니다. 퇴직금을 받아 자그마한 향기롭고 아름다운 북카페를 하면서 심신을 좀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정 하고 싶으면 이혼하고 하라며, 퇴직금을 연금으로 신청하게 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개인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마땅찮은데다 더구나 유흥업소로 분류되는 커피숍이라니 번거롭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사업을 도와주는 일이나 책임져야 하는 행위 자체가 싫었는지 모릅니다.
죽을 때까지 받을 수 있는 연금이 금액이 적지만 안전하고 더 낫다고 믿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아쉽고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의 뜻을 따랐습니다.
첫번째 맑은눈은 마치 그들의 아이처럼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친정 어머니는 이제 맑은눈의 몸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줌마가 그런 생각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시골에 사시는 아버지를 뵈러갔을 때 일입니다. 좀처럼 낯선 이를 보아도 짖지 않는 맑은눈이 새할머니를 보기 무섭게 짖어대는 거였습니다. 아주머니는 민망해서 얼른 맑은눈을 꾸짖으며 건너방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렇지만 건너방으로 넘어온 친정 아버지 무릎에는 냉큼 올라가 앉아 손을 핥으며 좋아하는 게 아니겠어요.
"아니, 애가 왜 이래? 너 새할머니 보고 짖으면 안 돼!"
아줌마 말에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맑은눈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아버지 집을 나설 때까지 맑은눈은 새할머니와 익숙해지지 못하고 자꾸 짖어댔습니다.
아버지는 아줌마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시골에서 밥을 끓여드시니까 보다 못한 작은 어머니께서 서둘러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을 소개하여 함께 사시게 된 거였습니다.
"나 죽거든 아들네 가서 홀대받지 말고 참한 할머니 하나 얻어 살아요."
아줌마의 어머니는 살아 생전 마치 앞일을 내다보듯 어버지께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큰 올캐의 됨됨이를 잘 알고 있는 아주머니는 친정 어머니의 이런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게 한편 서운하면서도 다행스러웠습니다.
"거 참, 이상하네. 왜 새 할머니를 보고 그렇게 짖지? 어머니 귀신이라도 들어갔나?"
아줌마는 머리를 갸웃거렸습니다.
또 한번은 왕래가 없던 아줌마의 외사촌이 같은 아파트에 이사를 와서 아줌마 집에 놀러왔습니다.
맑은 눈이 생전 처음 보는 그들 가족 모두를 꼬리를 치며 반가워하는 게 아니겠어요?
특히 아주머니의 외사촌동생의 무릎에 올라앉으며 좋아하는 거였어요.
"어? 난 개 안 좋아하는데..."
어정쩡한 자세로 어쩔줄 몰라 하는 사촌에게 아줌마가 말했습니다.
"네가 특별히 좋은 가본데, 맑은 눈 이리와. 얘들하고 놀자."
아줌마는 맑은눈을 사촌에게서 떼어 놓았지만 다시 그의 무릎에 가 얼굴을 부벼댔습니다. 아줌마는 참 이상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아지들이 순하고 자기들을 예뻐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도 낯을 가리지 않는 게 신기했습니다.
이북에서 월남한 아줌마 부모님은 양쪽으로 형제가 딱 한 분씩 밖에는 오지 못한 채 이산가족이 되어 망향의 그리움을 달래며 살아야했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어렸을 때 친척이라고는 이웃에 사는 외갓집과 가장 친하게 왕래를 했습니다. 이 외사촌은 아주머니의 어머니께서 특별히 안스러워하던 유복자나 다름없는 조카였습니다. 아주머니도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란 이 착한 사촌을 좋아했습니다.
어느날 맑은 눈이 아주머니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야트막한 작은 동산을 산책하다 순식간에 없어졌습니다.
한참을 찾으며 이름을 불러댔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어느쪽으로 갔는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지난 뒤 맑은눈이 집을 찾아왔습니다. 아랫층 아줌마가 벨을 누르며 이집 개가 아니냐고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세상에! 맑은눈이 피를 흘리며 힘겹게 계단을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아줌마는 맑은눈을 안고 병원으로 내달렸습니다. 맑은눈은 가는 내내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조금만 참아라. 곧 괜찮아질거야. 도대체 어딜 갔다 온 거야?"
아줌마는 고통스러워하는 맑은눈을 달래며 십여분을 정신없이 뛰어갔습니다.
병원에서는 오토바이나 자전거에 치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만약 자동차에 치였다면 죽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맑은눈은 그날 밤 앉지도 못한 채 서서 밤을 지새우며 신음했습니다. 가엾은 맑은눈을 보며 아주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리고 며칠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만큼 맑은눈을 안고 뛰어갔던 팔이 아팠습니다.
맑은눈이 순식간에 없어졌던 건 암내를 맡고 씨를 퍼트리기 위해 본능적으로 달아났던 거였습니다. 어디까지 갔었냐구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찻길을 건너 자주 산책을 나가곤했던 안향천으로 이어진 개천까지 갔을 겁니다. 사람만 씨를 퍼트리는 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 개들도 종족보존 하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이제는 주인이 원하지 않으면 도저히 자기씨를 남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무리한 모험을 하는 겁니다. 결국 맑은 눈은 자기 새끼를 암놈 코카 스퍼니얼에게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새끼가 또 새끼를 낳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맑은눈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렇지만 개를 키워본 경험이 없어서 잘 몰랐습니다. 사람만 외로워서 죽는 게 아닙니다. 개도 외로워서 죽을 수 있습니다. 생명 지닌 모든 존재는 사랑어린 보살핌이 필요한 거예요. 아주머니를 끔찍이 사랑했던 친정 어머니도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살면서 많이 외로웠습니다. 남편이 있음에도, 하느님을 믿고 의지했음에도 외로웠습니다.
자신의 몸보다도 더 사랑했던 자식들, 그 자식들이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전혀 자신의 마음 따위는 몰라주는 남편은 위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해뜨면 밭으로 일 나가 해가 져야 돌아오는 남편은 때 맞춰 밥 해주고 밤이면 몸만 대주면 되는 존재였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바쁘게 살고 있으니 보고싶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평생을 자식들 키우는 일에 바친 것도 모자라 아주머니가 낳은 갓난 외손주까지 일년을 키워주었습니다. 자식을 돌보는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기쁘고 보람된 일이기에 힘들다고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이나 와야 하는 강원도 철원에서 남편과 둘이 사는 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 두 분이 철원에 오게 된 건 아줌마 아버지의 동생이 그곳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작은 아버지가 철원에서 살게 된 것은 이북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언제라도 통일이 되면 곧 고향으로 옮겨가리라 마음먹고 그곳에다 터전을 잡은 겁니다. 그만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강했던 겁니다. 이 크지도 않은 조그만 나라가 둘로 나뉘어져 서로 대립하고 있는 건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가족들과 헤어져 가슴에 슬픔을 묻고 살게 된 건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 걸까요?
4.
아주머니가 어렸을 때 집에 강아지가 잠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 뿐만 아니라 강아지에게도 공을 들여 거두었습니다. 생선가게에서 팔고 남은 생선머리 등을 얻어다 밥과 함께 끓여서 먹였습니다.
어느 날은 강아지 밥을 숟갈로 떠먹이셨습니다. 그것을 본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배 고프면 어련히 안 먹을까..."
"종일 아무 것도 안 먹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어요?"
강아지는 어머니가 떠먹여주는 밥을 아기처럼 받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살핌을 받던 강아지가 그만 어디선가 쥐약을 잘못 먹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방을 돌아다니던 쥐들를 잡으려고 밥에다 약을 버물려 구석진 곳에다 놓곤했습니다. 그 강아지가 고통을 견디지 못해 눈에서 파란불을 내뿜으며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발버둥쳤습니다. 어린 그녀는 겁에 질려 보았었습니다.
개를 묶어놓고 키우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그냥 개들이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습니다. 아침 학교 가는 길에 교미하고 있는 개들을 향해 짖궂은 남자애들이 돌을 던지는 것도 너무 싫었습니다. 돌을 던져도 꿈쩍않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붙어서 비척거리며 피하던 모습이 참으로 가엾고 민망해보였습니다. 더군다나 한번은 커다란 개한테 물린 적도 있어서 더욱 개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강아지는 쓰러져 숨을 거두었고, 아버지는 그 개를 뒷뜰로 데려가 재빨리 상한 내장을 도려냈습니다. 개를 잡는 과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주머니 기억에 어머니께서 눈물을 훔치며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납니다.
"세상에, 무지막지하기도 하지. 어떻게 키우던 개를 잡아 먹을 수 있담..."
"죽으면 쇠고기나 개고기나 매한가지지."
아버지가 무심히 말했습니다.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키우던 개를 잡아서 몸보신을 할 만큼 가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 못사는 집도 아니었지만 육이오 전쟁을 겪으며 배를 곯아보았던 어른들에게 죽은 개는 그저 먹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둥그런 원탁의 상에서 김오르던 보신탕을 늙으신 조부모님과 아버지, 그리고 이웃 사람들까지 배불리 먹었습니다.
인정많은 어머니를 보고 자란 아주머니는 내가 입맛이 없거나 고기 반찬이 없어 밥을 먹지 않으면 된장찌개를 한 숟갈 넣고 다른 반찬과 정성껏 비벼서 조금씩 손바닥에 놓아 먹이셨습니다. 그럼 나는 미안해서라도 아주머니가 주는 밥을 다 받아 먹었습니다.
"맑은눈, 이렇게 먹으면서 왜 안 먹고 그래?"
아주머니는 나를 쓰다듬으며 만족해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개에게도 공덕을 쌓으시더니 네 속에 들어가셨나 보다. 그리 공들이고 날 키웠는데 제사밥도 안 드리니까,
널 통해 그 공을 갚게 하시나 봐."
그릇을 치우며 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주머니는 여느 개주인들보다 내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외출했다 돌아올 때면 내가 먹을 것을 자주 싸오셨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가 가방을 놓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는 아줌마의 가방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 모양이 우습다며 말했습니다.
"아이구, 어린 애가 따로 없네. 맛있는 냄새 나? 좀 기다려. 사료하고 같이 줄께."
이 사료라는 게 아무 맛도 없어 싫지만 그래도 그걸 먹어야 탈이 안 난다고 의사들이 그러네요. 우리들에게 필요한 영양분이 모두 들은 음식이라나요. 그렇지만 울 아주머니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사람 먹는 음식을 가지고도 장난하듯 속이는 사람들이 개사료를 얼마나 잘 만들겠냐는 거지요. 분명히 방부제와 살균제가 대량으로 들어갔을테니 이롭지 않을 거라며 아주머니 드시는 음식을 남겨서 사료는 조금 섞어주십니다. 물론 짜거나 단 음식은 피하면서 신경을 쓰십니다. 사료도 보통 사료보다 좀 비싼 유기농사료를 주문해 주십니다.
우리 개들은 피부호흡을 못하기 때문에 짠것을 먹으면 절대 안 된다고 아주머니 아들은 누누히 말합니다. 심지어는 아줌마가 드시는 오곡밥에 된장국을 한 숟갈 넣어 다른 반찬과 함께 주다가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책을 보시고도 왜 자꾸 간이 들어간 음식을 주세요? 짠음식 때문에 귀에 염증이 생기는 거예요."
"얘는 내가 잘 돌볼테니까, 너나 인스턴트 식품 좀 먹지 말아. 얘 신경쓰지 말고 너나 잘해."
아들은 어머니 말씀에 몹시 기분이 나빠져서 계속 언쟁을 하고 어떤 때는 큰소리까지 납니다.
나는 한구석에 가만히 앉아서 두 사람의 기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나 때문에 다투기 시작한 것도 미안하고, 또 누굴 편들겠어요? 그럼 한 쪽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아들과 어머니는 의견차이로 이렇게 가끔씩 다투고 하룻밤 자고 나면 곧 괜찮아졌습니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산에 갈때 길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다 보면 꼭 오토바이 한 두대가 지나갑니다. 그러면 나는 몹시 짖어 엄마와 오토바이를 탄 사람을 놀라게 해서 꾸중을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을 부라리며 화를 내기도 합니다.
"죄송해요. 얘가 오토바이에 친 적이 있어서 그래요."
엄마는 제가 오도바이에 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먼저 맑은눈을 생각하며 선의의 거짓말로 사과를 합니다.
"맑은눈, 제발 짖지 좀 마. 너 땜에 내가 빌어야 되잖아!"
엄마가 멀리서 오는 오토바이를 미리 보시고 내게 단단히 주의를 줄 때는 짖으려다가 참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토바이만 보면 저절로 짖게 되는 것을 나도 왜그러는지 잘 모르겠어요. 엄마말처럼 전생에 오토바이에 친 적이 있어서 그 공포감이 내 무의식에 입력이 돼 버렸나 봅니다. 엄마는 참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맑은눈이 다시 온 거 같아. 귀때기만 다르고 똑같이 생긴데다 왜 오토바이만 보면 짖는지 모르겠어. 전에 어린 맑은눈 귀를 보고 어떤 어린애가 '똥개'라고 해서 내가 화를 냈더니, 귀만 예쁘게 바꿔 달고 다시 온 거 같아. 맑은눈이 죽을 때 서로 그리 안타까워했더니 다시 온거 같아."
엄마는 이웃의 친구에게 그렇게 말햇습니다.
먼저 키우던 맑은눈은 죽기 전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개가 무슨 우울증에 걸리느냐고요? 사람만 우울증에 걸리는 게 아니라니까요.
엄마가 아저씨와 헤어지고 맑은눈은 매일 문간에 앉아 오지 않는 아저씨를 기다렸습니다.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맑은눈을 안아다 곁에 앉히고 말했습니다.
"이젠 안 온단다. 그러니 기다리지 마. 그만 엄마랑 자자."
맑은눈은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 아저씨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엄마는 자주 여행을 떠나 집을 비웠습니다. 맑은눈은 엄마의 슬픔을 알아차렸습니다. 물론 가끔 오던 오빠가 아저씨 대신 와 있었지만 아침에 나가면 어두운 밤에나 돌아왔습니다. 대학을 다시 가기 위해 학원에 가서 밤늦도록 공부를 하다 온다고 했습니다. 아니 애써서 들아간 대학을 왜 그만 두고 또 다시 또 애를 쓰는지 참 어리석어요.
하루종일 우두커니 빈집을 지켜야 하는 맑은눈은 쓸쓸함이 지나쳐 몹시 슬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여행 갔다 한 달 만에 돌아온 엄마를 본 맑은눈은 반가움에 뛰어오르기는 했지만, 마치 자폐아이처럼 피아노가 있는 빈방에 들어가 구석에 움크리고 있었습니다.
"맑은눈! 어디 있어? 맑은눈!"
엄마는 여기 저기 들여다보며 맑은눈을 불렀습니다.
"어? 왜그래 맑은눈? 왜 그러고 있어?"
엄마는 맑은눈이 가엾어 안고 나왔습니다. 맑은눈의 행동이 심상치 않아 친구를 만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마침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오는데 태어난지 한두달이나 된 듯 싶은 고물고물한 강아지들을 팔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얼른 귀엽게 생긴 시쭈 한마리를 사 품에 안았습니다. 예방주사를 맞았는지 물어보고 돈을 치루었습니다.
강아지를 본 아들은 몹시 좋아하며 녀석을 들여다보느라 밥도 먹을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맑은눈은 시쿤둥하니 반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사람의 관심이 어린 강아지에게 쏠리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이 녀석은 쪼그만 게 어찌나 식욕이 좋은지 제 밥을 먹기 무섭게 맑은눈 밥그릇으로 돌진했습니다. 맑은눈은 짖고 으릉렁거리기는 커녕, 마치 어른이 어린애에게 먹을 것을 양보하듯 물러나 버렸습니다.
그 모양을 본 엄마는 아예 맑은눈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는 그 녀석을 다른 방에 두고 문을 닫아놓아야 했습니다.
엄마는 녀석의 커다란 검은눈이 초롱초롱 예쁘다고 '예쁜 눈"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런데 얘는 천방지축이라 사사건건 엄마의 주의와 보살핌을 필요로 했습니다. 맑은눈은 더욱 소외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맑은눈이 좀 더 원한 건 엄마의 관심과 애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날은 요 쪼고만 녀석이 얄밉게도 엄마 가방에 쏙 들어가 함께 외박을 하였습니다. 단순히 몸크기 때문에 이런 불공평한 처사라니...
그뿐이 아닙니다. 이 녀석이 예방접종을 했다는 건 거짓이었나 봅니다. 아니면 올해 맑은눈이 코로나 장염 예방접종을 안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엄마가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저씨와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한 엄마 속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빠는 어렵사리 엄마에게 와 살면서 공부보다는 여자친구 사귀는 데 정신이 빠져있었습니다. 엄마는 허물어질대로 허물어진 속을 붙잡느라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러 다녔습니다. 마음이 약해지면 몸도 약해지는 건 생명있는 존재는 모두 같은 가 봅니다.
몹시 상처 입은 엄마를 보면서 맑은눈 역시 상처가 컸었나 봅니다. 면역력이 약해진 맑은눈이 덜컥 장염에 걸렸습니다. 먹이를 먹지 않고 급기야 구토까지 하는 맑은눈을 동네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수액주사를 맞아야 한다며 입원을 시키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맑은눈을 병원에 맡기고 집에 왔습니다. 설마 죽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맑은눈을 뒷켠 병실 철창에 가둬 놓고 모두 퇴근한 병원은 적막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맑은눈은 버림받은 듯 밤새 외롭고 몹시 아팠습니다. 이제 내가 죽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병원에 들른 엄마는 깜짝 놀랐습니다. 증세가 나은 것이 아니라 맑은눈이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많이 울은 충혈된 눈에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초췌한 모습을 보자 울음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맑은눈! 맑은눈!"
엄마는 침을 닦아주며 함께 울었습니다.
"삼일을 버텨내야 살 수 있습니다."
의사는 도리 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엄마는 데려올 수도, 두고 올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에서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한 거지만 엄마는 그때 맑은눈을 병원에 두지 말고 통원치료를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습니다. 의사를 믿고 맡긴 것이 오히려 화를 불려 죽음에 이르게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맑은눈이 죽었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는 저녁에 병원으로 달려 갔지만 냉동실에 있다는 죽은 맑은눈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너무 끔찍했습니다. 병원에서 시체를 처리해준다고 해서 돈만 건네고 돌아왔습니다. 지금은 개도 장례식을 잘 치루어주는 곳이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는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엄마는 맑은눈이 자신의 부주의로 죽은 것 같아 자책감이 들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개를 키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엄마는 예쁜 눈마저 이웃에 사시는 아는 분께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 집 식구들은 모두 개를 좋아하는데다 이미 순한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아줌마가 늘 집에 계신다고 해서 마음 놓고 그 집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어머니, 쟤 좀 봐요. 이사가는지 아나 보네."
아들이 말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예쁜눈이 장난감들을 모두 제 집으로 물어다 놓았습니다. 전혀 그러지 않았었는데 말입니다.
"예쁜 눈, 미안해. 그 집에는 너랑 같이 놀 형아도 있고 주인 아줌마도 늘 집에 계신다니까 여기보다 더 좋을 거야."
맑은 눈과 예쁜 눈의 먹이며 장난감, 의약품 등 용품 일체를 싸들고 이웃집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랬던 엄마가 맑은눈과 귀만 다르고 거의 흡사한 나를 어떻게 키우지 않고 몰라라 보호소에 데려다 줄 수 있었겠어요?
며칠이 지나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너는 내 운명이구나.' 말씀하셨지요.
엄마는 일주일에 몇 번은 외출을 하셨는데, 그럴때 나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니며 그야말로 살림을 했습니다. 넓은 거실에서 커다란 휴지뭉치를 데굴데굴 굴리면서 신나게 뛰어다녔습니다. 휴지가 엉키면 입으로 질겅질겅 씹어 밷어놓았습니다. 또 현관에 있는 신발들을 물고 돌아다녔습니다. 끈이 있는 신발들은 그 끈을 물고 뒤흔드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애들도 어릴 때는 도저히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렇게 몇시간을 놀다 지치면 문앞에 움크리고 앉아 엄마를 기다립니다. 엄마가 신발을 모두 치우고 나가셔서 아무 것도 없을 때는 자라느라 근질근질한 이빨이 참을 수 없어서 맨아래 귀퉁이벽지를 물어 뜹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때 조금씩 찍찍 찢어지는 벽지가 무료함을 달래주었습니다. 그러다 엄마가 들어서면 깜짝 놀라 소리칩니다.
"아니, 얘 좀 봐! 이게 뭐야? 아이구 내가 못 살아!"
그래도 엄마는 날 혼내지 않고 음악을 트신 후 잠자코 청소를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풀을 쑤신 후 벽지를 잘라 말끔히 도배를 하십니다.
"또 뜯을 걸 뭘라 바르세요?"
오빠가 웃으며 말합니다.
"그래도 어떻게 그냥 놔 두니? 보기싫게.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해보아야지"
엄마가 웃으며 말합니다. 그렇게 부분 도배를 세번이나 하고 나는 한살이 되었습니다. 개로서는 이제 성견이 된 겁니다. 나는 이제 말썽을 그만 부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몇번 하니까 재미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꾸중도 하지 않는 엄마에게 미안했습니다. 우리 짐승들도 은혜를 안답니다. 나를 거두어 주는 엄마를 그렇게 계속 힘들게 하면 제가 싫어질 게 뻔하지 않습니까? 나도 다 생각이 있다니까요.
그런데 또 한 가지 성가신 일이 일어났어요.
어느날 내가 붉은 피를 한 두방울씩 흘리는거예요. 그게 생리를 하는건지 모르는 나는 당황하여 어절 줄을 몰랐어요. 엄마 침대 시트에, 거실 의자에 여기저기 묻는 게 싫어서 수시로 핥아먹어야 했어요. 나오지 않을 때도 수시로 햝았어요. 엄마는 놀라지도 않고 피가 묻은 부분을 쥐고 세탁을 하셨어요. 야단을 치시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저는 생리기간 내내 제 성기를 핥느라 온 신경이 곤두섰답니다.
"이제 네가 생리를 하니 새끼를 벨 수 있겠구나."
엄마는 내 몸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4년 8개월 사는 동안 나는 짝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맑은눈, 미안해. 세상에 왔으니 너도 새끼를 남기고 가야할 텐데, 엄마가 네 새끼까지 거둘 자신이 없구나."
엄마는 두 마리의 중견을 산책시킬 자신이 없었습니다. 개가 집에만 있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늘 나를 데리고 아파트 건너편 앞산을 산책했습니다. 예쁜 새끼들을 낳으면 분양을 해도 한 마리 정도는 함께 살도록 해야 새끼 낳은 보람이 있지 모두 줘버릴 거면 무엇하러 고생을 하며 새끼를 낳게 하겠냐는 겁니다. 나도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줄 알았다면 엄마께 예쁜 새끼를 남겨드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말을 힘겹게 보내고 월요일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난감해하며 고개를 가우뚱 했습니다. 혈액검사와 X레이를 찍은 결과 디스크라고 생각해 주사를 놓고 하반신 가득 침을 놓았습니다. 약도 이틀간 먹었습니다. 디스크라면 당연히 차도가 있어야 하는 일인데, 전혀 차도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이 움직이면 안 좋다고 나를 가둘 철망까지 사가게 했거든요.
"그럼 이제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엄마가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MRI를 찍어봐야 알겠어요. 정확한 원인을 알아야 그에 맞는 처방을 내릴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TV에도 나올 만큼-벽에는 상영 안내벽보가 붙어있었거든요- 실력있는 선생님께서 오진으로 잘못된 처방을 한거네요.
나의 병세는 악화되고 엄마는 이중으로 치료비를 지불하게 된겁니다. 또한 그 병원에는 MRI장비가 없었습니다. 강남 한 병원과 서울대학 동물병원에만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학 동물병원은 예약을 해야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강남에 있는 병원 이름을 물어서 전화를 해 위치를 묻고 차에 올랐습니다. 그때 오빠가 서울대학 동물병원이 가까우니 한 번 전화를 해보자고 했습니다. 문의결과 응급실은 50%가산제로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돈이 아쉬웠지만 비싼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나를 빨리 고치고 싶었습니다.
병원에는 아픈 개들이 많았습니다. 내가 병실에 들어가고 엄마는 기다리는 동안 다른 개들을 보았습니다. 주인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 개들은 돌봐 줄 사람이 없는 가엾은 사람들보다 훨씬 팔자가 좋았습니다. 엄마는 개를 키워보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들이 사람이 아닌 개를 그리도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과의 인연만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개들이 치유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절대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 무조건의 충성과 애정을 보내는 개들이 얼마나 많은 안정감과 기쁨을 주는지 알게 된 겁니다. 엄마는 말했습니다.
"웬만한 사람보다 훨씬 나아요."
엄마는 불을 끄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잠들기전 하는 잠깐의 호흡 명상입니다.
그런데 순간 나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캄캄한 사방이 쥐죽은 듯이 고요했습니다. 벌떡 일어나 스위치를 켰습니다. 그리고 나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아!"
잠자듯 고요한 내 얼굴에 엄마는 얼굴을 묻고 흐느꼈습니다.
잠시후 아들 방문을 노크하여 내 죽음을 알렸습니다. 막 잠이 들었던 오빠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 쫓아나왔습니다.
"맑은눈! 맑은눈!"
오빠가 울었습니다.
엄마는 내 몸에서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자세를 예쁘게 바로 앉히셨습니다. 다시 한번 내 이마에 입맞춤을 하셨습니다.
"꼭 다음 생에는 아름다운 인간으로 태어나 대접받는 삶을 살거라."
나의 명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훔치며 내 죽음을 일기장에 기록하셨습니다.
아침이 되자 오빠와 함께 컴퓨터에서 장례식장을 고르고 전화를 했습니다. 수없이 많이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장례식장에 보낼 사진을 골라 놓았습니다. 엄마와 오빠는 내가 가고 없는 시간을 말없이 매우 쓸쓸해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마음이 아프시겠지만 맑은눈을 임상용으로 기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인을 밝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공부하는 수의사들에게 큰 도움이 될것입니다."
엄마는 좀 망설였지만 장레식장에 연락한 것을 취소할 수 있으면 그리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오빠는 내몸을 갈기갈기 찢는 게 끔찍하다며 그냥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하자고 했습니다.
"화장하기 전에 의사들 공부를 도와준다면 맑은 눈이 이생에서의 공덕이 커지는 것일테니, 취소를 하자."
다행히 장례식장에서의 출장이 취소되고 내 죽은 몸은 다시 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엄마와 오빠는 손수 운전해서 나를 데려갔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받은 대학병원에서는 차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나도 맑은 눈 죽은 몸에 칼 대는 거 싫지만 이제 맑은 눈은 이 아픈 몸을 떠났으니 더 유용하게 쓰이게 하자. 그래야 그 공덕에 힘입어 더 좋은 몸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겠니? 나도 죽으면 병원에 시신기증을 할 거다."
엄마는 눈물을 닦으며 부질없는 집착을 버렸습니다. 오백 번의 전생을 거치며 부처가 되기전 두 눈까지 파주었다는 부처님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세상 일이 모두 그때 그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음을 재인식했습니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 글을 쓰며 내 삶을 또 엄마의 삶을 위안했습니다.
엄마가 두주일이나 기다려 나온 내 죽음의 병명은 '상행성 척수연화증'이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심한 운동과 충격으로 내 척수가 그만 녹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후 엄마는 오다가다 마주치는 이웃들이 나에 대해 물으면 간략하게 대답했습니다.
"맑은눈이 더 좋은 세상으로 갔습니다."
엄마는 여전히 나와 함께 갔던 산길을 걸으며 내 생각을 하십니다. 나는 늘 몇 걸음 앞서 걸으며 냄새를 맡다기 뒤돌아보고 엄마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엄마가 어쩌나 보려고 나무 뒤에 숨으면 깜짝 놀라 커다란 귀를 펄럭이며 달려오던 웃기던 모습...
무슨 식물탐사라도 하듯 킁킁거리며 나뭇잎 냄새를 맡던 귀여운 모습...
나무와 흙과 완벽하게 잘 어울리며 햇빛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곱슬거리던 빛나는 갈색털...
지난 겨울은 춥다고 엄마가 입지않는 모직 바지를 잘라 몇 번씩 입혀보면서 내 옷을 만들어 입혔던 일...
몇 번 강아지 옷가게를 기웃거려보았지만 도무지 맘에 드는 색상의 겨울 옷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엄마는 고구마가 강아지에게는 인삼효과라는 말을 듣고는 자주 고구마를 삶아서 잘라 꾸덕꾸덕 말려놓고 외출했다 돌아오면 괴성을 지르며 반기는 내게 몇 개씩 던져 주셨습니다. 내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척척 받아먹는 것을 보고 좋아하셨습니다. 기다리느라 지루했던 내마음을 그렇게 달래주었습니다.
내가 처음 엄마에게 왔을 때 오빠 여자친구가 개간식을 잔뜩 사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다 먹고는 체중이 불어났기 때문에 엄마는 되도록이면 개간식을 사지 않고 손수 만들었습니다. 때론 책을 읽으면서 그 고구마 간식을 함께 나누어 먹기도 했는데, 내가 너무 맛있어서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키는 모습을 보면서는 '에그, 돼지!' 하며 웃으셨습니다.
가끔은 엄마가 초코렛 같은 단음식을 드실 때도 고구마 간식을 얻어먹었습니다. 단 것은 내 이빨이 썩을까 봐 주시지 않았습니다.
산에 다녀와 발을 씻기기 위해 나를 욕실에 안아다 내려놓고 전화를 받는다든지 급한 다른 일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만 깜빡 나를 잊고 한참 다른 일을 하실 때도 있었읍니다. 그러다가 깜작 놀라 문을 열며 말했습니다.
"맑은눈! 문을 긁던지 짖던지 하지~ 엄마가 깜박 잊어버렸어. 아이구 미안해, 미안해~"
나는 엄마가 곧 올거라고 생각해 잠자코 기다린 겁니다. 엄마가 날 사랑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엄마곁을 떠났지만 우리가 나눈 애정어린 교감은 기억속에 각인되어 또 다른 어떤 모습으로든 다시 만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엄마! 안녕~
2013년 10 월 1일 0시 30분
'중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 숲을 나는 새 (0) | 2024.05.2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