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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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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그 희망에 관한 변설 선여사는 일상화된 배신에 길들여져 간다. 아들은 정신적 미숙아지만 그녀 역시 그를 포용할 만한 정신적 능력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제 아침 일만 해도 그렇다. 이십 년이 넘은 낡은 아파트에서 세 사는 일은 여러 가지 돌발적인 사소한 문제들을 겪어야 한다. 전날 늦게까지 TV 주말의 명화를 보고 잠들은 그녀는 아홉 시가 돼서야 일어났다. FM 클래식 음악방송 스위치를 누르고 늘 하듯이 거실로 나가 뒤 베란다 세탁기 위의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아들의 방을 환기하려고 창문을 여는 순간 짜증 섞인 ‘아!’ 하는 소리에 얼른 창문을 다시 닫았다.“미안해. 나간줄 알았어!”어젯밤 몇 시에 잤는지 알 수 없지만 아들은 그 시간까지 자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새벽 다섯 시 전에 일하러 나가는 것만 생각했다. ..
바람의 연정 은향은 30여 년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늘 갑갑함을 느꼈다.그래도 일기를 쓰면서 자신과 대화를 할 수 있어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그래서 자신을 ‘바람’이라 칭했다. 어디든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바람이 되고 싶었다. 마치 땅속에 박힌 식물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는 그녀는 일기를 쓰는 밤이면 이 세상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었다.주변머리 없는 자기 성격에 진력이 나서 여행에 관한 책을 잔뜩 쌓아놓고, 이곳저곳 발을 디디며 돌아다니다 달콤한 잠에 빠져들곤 하였다. 퇴직하면 가보고 싶은 곳들을 순서대로 빼곡하게 적어놓았다. 그곳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랑 먹어보고 싶은 음식까지...‘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책을 읽고는 체코를 여행해보고 싶었다.탱크가 밀고 들어오던 프라하의 거리를 가보고 싶었다. 연인들..
사랑이 떠난 자리 사랑이 떠난 자리 꿈결처럼 한 번 두 번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경희는 잠을 깼다. 전화를 받기 이전에 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가 좀 지난 시간이지만 늦잠을 자도 되는 일요일로는 이른 시간이었다.“여보세요?”“나, 형이야.” 좀 머뭇거리는 목소리였다.“아, 예. 안녕하세요.” 경희는 좀 더 몸을 일으키며 졸린 눈을 비볐다.“지난번엔 미안했어. 지금 나올 수 있어?” 순간 경희는 얼마전 다녀간 아주버니가 왠일이지? 하던 생각이 확 달아나며 놀라서 정신을 차렸다. 시숙이 아니라 지난주에 만났던 이지훈, 그는 일주일간 소식이 없었다. 아니, 경희는 그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누구라구요? 저...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그가 지훈인 것을 확인하고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와 더 이상 인연을 맺어..
선물 선   물 아름다운 신록이 꽃향기를 날리는 봄이다.그는 좀 달라 보였어. 뭐랄까... 네가 한 번 봐 줄래?네 맘에 들어?글쎄... 나한테 잘 해주긴 했어.         신아가 며칠 전 만났다는 준호의 이야기를 하면서 한 번 봐 달라고 하여 혜림은 그들이 만나는 자리에 함께 나갔다.그는 그들을 보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아마도 신아 혼자 나올 줄 알았다가 혜림이 함께 나온 것에 당황한 듯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잠자코 커피 잔을 바라보았다.혜림은 인사를 한 후 말없이 앉아있는 그들이 좀 우습기도 하여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내며 어색함을 지워보았지만 신아도 그도 너무 긴장한 것 같았다.혜림은 그의 세련되지 못한 어색함이나 말이 없음이 지나치게 말을 잘..
회상 회상                                                                                          여진은 집안일을 끝내고 한 잔의 커피잔을 마주하고 앉았다.베란다 밖으로 가을 산의 정취가 가득한 거실, 장미꽃이 그려진 러시아산 찻잔에서 커피향이 은은하게 번져간다.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선율에 이어 맑고 투명한 피아노음이 작은 공간을 커다랗게 팽창시키며 휘몰아 나가 춤추듯 넘실거린다.날 사랑한다던 남자들은 다 어디 갔을까...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아릿하게 떠오르는 스무 살 청년, 그의 이름이 또렷이 기억난다. 리. 영. 찬. 그의 내면적 가치를 가늠할 수 없었던, 스물두살 어린 나이의 여진은 전문대를 졸업하고 하릴없..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 1. 그 분  그녀에게 남자는 존경의 대상이어야 한다.그래야 그녀를 사랑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녀 또한 사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그녀의 남편이 죽었을 때 그녀는 그가 죽기를 바란 사실을 까맣게 잊고 몇날 며칠을 서럽게 울었다. 아니 이 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을 글썽인다. 증오하고 경멸하던 대상이 사라진 허전함...벗어나길 간절히 바라던 맘에 안 드는 감옥이 홀랑 사라지고 얼떨결에 맞은 자유는 날기를 잊어버린, 새장을 나온 새처럼 막막했다.장례식에 참석했던 남편의 친구인 그가 그녀에게 접근하기란 눈독을 들인 물건을 훔치는 일보다도 수월했다. 그녀를 위로해주겠다며 수시로 그녀의 부동산 사무실에 들러 말없이 버티고 앉았다 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없는, 부동산 중계사 자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