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은경
은경에게 특별한 날이었지만 남의 눈에 띄는 게 싫기라도 한 듯 평소대로 입던 옷에 운동화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사실은 여윳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자취생활의 어쩔 수 없는 궁색함이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천구백팔십이년 삼월 이일, 첫 출근이다.
이 년 동안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얻은 값진 결과였다.
혼자 지낸 칠백여 일의 고단한 일과는 과체중도 아닌 그녀의 체중을 5kg이나 감소시켰다. 그러나 예전보다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숙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반드시 해내겠다는 일념으로 무조건 버티며 견딘 시간은 그녀의 심신을 단단하게 다졌다.
이 년 내내 미장원이라고는 한 번 안 간 긴 생머리, 은경은 머리를 묶은 후 돌돌 말아 뒷머리에 단정하게 붙였다. 발레리나나 스튜어디스처럼 깔끔해 보였다.
헐렁해진 검은 코트, 낡았지만 깨끗이 세탁한 운동화도 그녀가 보기에는 괜찮았다. 이 희열감은 낡은 그 모두를 당당하게 해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나와 일 년 동안 고되게 일하며 저축한 돈은 간신히 일 년을 버티고 바닥을 드러냈다. 그리고 공무원 9급 시험은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동안은 늘 일등을 놓치지 않은 우등생이어서 시험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아니었다. 그 당혹스러운 절망감으로 날이 밝아오면서 긴 잠에 빠져들었다. 종일 잠을 자고 난 그녀는 툭툭 털고 일어나 마음을 다잡았다.
다음날 일자리를 알아보려 돌아다녔다. 그냥 고향으로 가기는 싫었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며 앞날을 개척하고 싶었다. 그만 집에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어머니의 우울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운 좋게 도서관 근처에 새로 생긴 슈퍼마겥에 취직이 되어 주경야독을 할 수 있었다.
작은 월세방으로 들어갈 때마다 어머니의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눈물 나게 그리웠다. 빵, 라면, 김밥 등으로 허기지는 배를 채우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쏟아지는 졸음을 내몰며 공부하다 쓰러져 잠들었다.
일 년을 일해 번 돈으로 다시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도서관에서 가끔 관심을 보이는 남자애들의 유혹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남자친구는 목표를 이룬 다음에 사귀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순전히 그녀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을 자각하면서 그녀는 평생이 보장되는 직장이 필요했다. 지금보다 안정된 사회적 위치가 된 후에 남자를 만나도 늦지 않다. 쓸쓸하고 외롭다는 생각은 사치라고 일축하고 아예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배정받은 자리에 앉아 근무를 시작한 첫 달,
그동안 고단했던 것에 비하면 이 생활은 식은 죽 먹기였다.
월급을 받아 들고 처음 한 번은 어머니에게 이 월급을 통째로 드리고 싶었다.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식당에서 일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어머니를 매정하게 떠나온 불효를, 그 미안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다.
어머니와 동생의 내의를 한 벌씩 사고 빳빳한 새 지폐로 모두 바꾸어 봉투에 다시 넣었다. 이 년간 명절에도 집에 가지 않은 딸에게 울먹이며 서운함을 드러냈던 어머니의 마음을 잠시라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명절에도 하루밖에 쉬지 않는 마트 일도 일이었지만 집에 돌아가면 그대로 주저앉고 싶어질까 봐 두려웠다.
은경은 어머니처럼 백령도에서 나서 백령도에서 죽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도시의 풍요로운 인생을 동경했다. 도시는 그녀에게 막연하나마 신기루 같은 환상을 품게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매일 보던 출렁이는 푸른 바다가 진저리쳐졌다.
떠들썩한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여름 한 철 장사 때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경험을 하면서 더욱 고향을 떠나고 싶었다. 장학금으로 버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곳을 떠나리라 결심하곤 했다.
세상이라고는 백령도밖에 모르는 어머니는 은경이 고등학교 일학년 되던 해에 어부였던 남편을 잃었다. 그 끔찍했던 상실감은 고스란히 자식들에게도 옮겨졌고 두려웠던 자식들은 말하지 않아도 열심히 어머니를 도와 장사를 거들었다. 그러나 해산물을 공급하던 가장이 사라진 식당을 혼자 운영할 수 없는 어머니는 근처에 살던 이모네에게 넘기고 종업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는 사월에서 유월이면 주로 까나리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고 8월 하순이면 멸치를 잡으러 멀리까지 배를 타고 나갔다.
어머니는 늘 바다를 내다보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풍랑이라도 일면 그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불안에 떨었다. 무사히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온 식구가 나가 얼싸안았다. 위험을 담보로 하는 삶은 늘 애틋하기 마련이었다.
아버지가 탄 배를 바다가 삼키기 전까지 은경의 식구는 부러운 게 없었다.
육이오 전쟁 이후 북에서 할아버지를 따라 넘어와 이곳에 정착한 아버지는 생활력이 강하고 성품이 반듯하였다. 또한 인물도 좋은 그는 부지런하여 주변의 궂은일들을 도맡아 하는 일꾼이었다. 한 마디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가족들에게 특별하게 애정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내와 자식을 정성껏 보살폈다.
어부들은 대개 술을 많이 마셨지만 아버지는 소주 한 잔에도 얼굴이 빨개지며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취하거나 주정하는 일이 없었다. 순한 어머니는 열 살이 위였던 아버지를 무조건 따르고 부부는 금슬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절망은 더욱 끔찍하게 이어졌다.
은경은 공부라도 더 잘해서 어머니를 위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세 살 아래 남동생까지 달래야 했다. 그 와중에 자신의 슬픔은 내보일 수조차 없었다. 그녀라도 정신을 차리고 이 가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애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쩌면 더는 그 우울함과 책임감에서 견딜 수 없어 탈출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는 맏딸인 자신이 아버지 대신 가족을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경은 최소한의 생활비와 월세를 제하고는 월급의 반 이상을 적금에 넣었다.
다행히도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에 입대하여 부담을 덜어주었다.
은경은 공무원 생활이 어느 정도 적응되면서 고단했던 심신이 회복되자 그해 겨울 방송 통신 대학 사회복지과에 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주경야독을 다시 시작했다.
일반 정규 대학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대학생이 된 것이다. 그녀는 10년 계획을 세우고 인생에 도전하였다. 결혼은 그 후에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함께 졸업한 동창 중에는 그새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친구도 있었다. 은경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던 한 동네 선배가 있었다. 은경은 모르는 척 싫은 척 단 한 번도 그에게 응하지 않았다. 그에게 마음을 주는 순간 백령도를 떠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 삼 년 내내 이어지던 그의 관심은 은경이 섬을 떠나 서울로 가버리자 그도 마침내 원양어선을 타며 사라졌다. 동창들 사이에 떠돌던 소문도 맥없이 함께 사라졌다.
그가 은경의 곁에 어떤 남학생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며 마치 제 여자 친구라도 되는 듯 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다른 여자애들은 그를 좋아할 수도 없었다. 그가 암암리에 은경의 남자로 행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직한 그는 다른 여자애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낙심했던 은경에게 그는 더욱 관심을 보였지만 은경은 학교 외에는 아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는 늘 곁을 주지 않는 냉정한 은경을 애태우며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 방통대를 졸업하면 7급 공무원 시험에 도전할 생각이다.
지금은 적은 월급이지만 10년 안에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도 함께 살고 싶었다. 동생이 원한다면 더 공부하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겪은 어려운 위기를 잘 극복하였다는 안도감과 함께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집을 떠날 생각이나 공무원 시험을 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섬에서 편안히 안주했을 것이다.
은경이 구청에서 하는 민원 업무는 어렵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드나들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이, 참 많은 부류의 인간 군상들을 경험하게 하였다.
동료들과의 친밀한 교류가 거의 없이 늘 묵묵히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은경을 동료들은 좀 어려워했다.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모든 서류를 컴퓨터로 처리해야 하는 사무가 서툰 상사들은 은경에게 많은 도움을 의존하였다.
은경은 자기 일을 능숙하게 처리한 후 가능한 한 군소리 없이 그들의 일을 도와주었다. 한참 모양내고 연애도 할 나이에 전혀 화장도 하지 않고 유행하는 옷차림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일 잘하는 그녀는 어린 동료들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그녀의 얼굴은 점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 짙은 눈썹과 반짝이는 눈, 적당히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품위가 있었다.
중간보다 조금 큰 키에 군살 없는 날씬한 몸은 거의 매일 똑같이 입는 옷이 초라하지 않았다. 그녀의 유니폼 같은 검은색 스웨터와 검은색 바지, 바뀌는 것은 스웨터 속의 셔츠 두 벌 뿐이었다.
주말이면 가끔 꽃무늬가 있는 빨간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거나 청바지를 입기도 하였다. 모두가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데 청바지 차림의 그녀는 눈총을 받았지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을 잘하는 데다 성품이 친절했기 때문이었다.
빨간 꽃무늬 스카프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어머니가 선물한 것을 아끼고 잘 간직했던 것이었다.
아버지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사주신 학생용 겨울 코트를 지금까지 입었다.
은경은 중3 때 이미 지금 키와 비슷할 만큼 훌쩍 자랐다.
인천에 있는 교복점에 같이 가서 제일 좋은 옷감의 비싼 코트를 맞춰주셨던 아버지! 그 코트를 입을 때마다 그리움이 몰아치며 눈시울이 뜨거워져 마음이 아팠다. 돌아가신 첫해는 아예 그 코트를 옷장에서 꺼내지도 못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옷을 입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나 자신을 휘몰아쳐야 했던 건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름의 투쟁이었다. 슬퍼한다고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는다는 사실, 이 암울한 현실을 이겨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은경은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그리 애틋하게 다정했던 사이도 아니었는데, 부모님의 사랑은 당연한 것인 줄만 알았는데 다시는 볼 수 없는 이별을 하자 주마등처럼 살아나는 옛 시간,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이 장면 장면 떠올라 마음이 저려 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 어깨에 목마를 타고 콩돌해안을 거닐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어머니는 돌 지난 동생을 업고 함께 걸었다. 여름 피서철이 지나고 나면 조용해지던 바닷가, 황홀한 노을이 붉게 물들던 바다를 바라보며 가족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아버지가 탄 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다 소리 지르며 달려 나갔던 일, 그때마다 은경을 번쩍 안아 올리던 아버지 몸에서 나던 비릿한 짠 내음.
아버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잡아 온 생선을 노릇노릇 굽고 해물탕을 끓여 식사하면서 나눈 즐거움...
서울에 나가서 혼자 지내는 이 년 동안 늘 눈물 나게 생각났던 어머니의 밥상이었다.
은경이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말수가 줄어들고 아버지에게 안기는 일은 자연스레 동생이 대신 하게 되었다. 좀 더 살갑게 아버지를 대하지 못했던 후회가 밀려들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아버지를 잃은 동생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자신의 슬픔을 이겨내려 애썼다.
은경은 머리를 흔들며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영어단어를 암기했다.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며 집안일도 돌보았다. 넋 놓고 누워있는 어머니를 대신해 밥을 하고 청소했다.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아버지의 잔상은 물러나지 않고 은경을 따라다녔다.
2. 박형규
건설행정 일로 두어 달째 구청을 드나들던 형규는 갈 때마다 은경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서툰 동료 대신 친절하게 업무를 처리해주곤 하는 주는 은경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식사 대접을 하겠노라 했지만 그녀는 사양했다.
그의 회사 일이 마무리되던 날 그는 은경의 부서 동료들까지 모두 식사에 초대하여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그가 그리던 이상형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은경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단정한 외모는 물론, 침착하고 조용한 성품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안정된 음색의 고운 목소리는 더욱 맘에 들었다.
늦둥이 형규가 서른이 지나면서 나이 많으신 어머니는 어서 결혼하라고 몇 년째 성화이다. 작년에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부쩍 잔소리하신다. 요지는 당신 살아생전에 손주를 보고 싶다는 바램이었다.
화사하게 벚꽃이 만발하는 봄날.
형규는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전화했다.
“은경씨, 김형규입니다.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은경은 서글서글한 형규의 목소리를 듣자 식사 대접받은 일도 고맙고 해서 그러자 하였다. 근처 커피숍에 마주 앉은 은경은 잠시 어색함을 느꼈지만 회사 일이 잘되고 있는지 물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형규는 말쑥한 신사복 차림을 하고 나왔는데 소년처럼 수줍어하는 것 같았다. 은경이 퇴근 후 무엇을 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7급 시험을 준비하려고 공부해요.”
은경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속마음을 자기도 모르게 솔직히 이야기하였다. 방통대를 졸업하자마자 쉬지 않고 다시 공부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아! 그렇군요. 사실은 주말에 은경씨와 데이트하고 싶어서요.”
은경은 그의 속내를 확인하자 설레임과 함께 약간은 부담스럽기도 하였다.
“고맙지만 제가 시간이 부족해서... 이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는 누굴 만날 생각이 없어요.”
“아, 네. 제가 방해할 수는 없지만 은경씬 아직 나이가 어리지 않나요? 좀 천천히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스물여섯 나이에 공무원 경력이 5년째이니 그의 말대로 이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친김에 더욱 달려가야 했다. 쉬면서 연애하고 결혼하여 가정에 안주하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을 언제 다 할 수 있겠는가? 가장을 자처한 은경으로서는 멈추거나 흔들려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알겠어요. 그러나 언제든 은경씨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연락주세요. 기다릴게요.”
그는 흔쾌히 말하며 이왕 만났으니 식사는 하고 헤어지자며 음식점으로 안내하였다.
은경은 집에 돌아와 씻으며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아는 남자라고는 아버지 외는 없었다. 그녀를 좋아하던 선배는 그녀를 보호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잘해주었을 뿐, 그녀는 구체적으로 바라는 이상형의 남자를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막연히 아빠처럼 믿음직한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위로받으며 쉬고 싶을 때가 많았다. 사실은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이 너무나 필요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어머니와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신이 세운 목표를 소리 내어 다짐하였다. 스스로 연약한 의지를 질책하며 하늘에 기도했다.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칠 년을 달려왔다. 아직 더 달려가야 할 길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형규는 은경의 거절에 자존심이 좀 상하였으나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목표가 확실한 그녀가 귀하게 느껴지며 그녀를 향한 마음을 굳게 먹기로 작정하였다. 결혼할 여자라면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여자가 아닌 그만큼 댓가를 치루고 얻어야 할 것이라고 위안했다.
그녀도 그를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니 기다리다 보면 잘 될 것이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했다.
서른네 살이 되도록 두어 번 연애를 해보았지만 결혼까지 생각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은경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결혼을 생각한 것은 나이가 들어서만은 아니었다. 검소한 차림에도 품위가 있던 은경에게서 느껴지던 고상함, 삶의 목표를 세워놓고 노력하는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성숙함, 이 모든 게 사랑만 받으며 살아온 자유분방한 형규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자연의 이치는 상반되는 기질의 남녀가 서로를 보완하기 위해 끌어당기는 것이다. 은경은 여태까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마음에 조금씩 형규의 관심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퇴근길에 찾아와 함께 저녁을 먹고 가던 세 번째 날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선물했다. 은경은 그 책을 방통대 교양 시간에 들어 알고 있었다. 사서 읽어보아야지 맘만 먹었을 뿐 늘상 시간에 쫓겨 사보지 못하였던 터라 반갑고 고마웠다.
그날 밤을 새다시피 그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인식하였다.
며칠 지나 형규가 찾아왔을 때 그들은 책 이야기로 풍부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여자와 남자의 시각에서 차이점은 있었지만 주인공 조르바의 삶에 대한 공감대를 지닐 수 있었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생전에 그의 묘비명을 미리 써놓았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들은 그 문장에 매료되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조르바와 현실에 갇혀있는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었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것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치열한 경쟁과 인내를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형규의 어릴 적 꿈은 철학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건설회사에서 일한다.
형규가 물었다.
“어릴 적 꿈이 무엇이었어요?”
“꿈이요? 섬을 벗어나는 거요. 고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졸업 후에는 안정된 직업으로 공무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은경은 담담히 말하였다.
형규는 그녀의 고향이 백령도이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자신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을 겪었던 차라 그보다 어린 나이에 겪은 은경의 심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공감되었다.
“혹시 교회에 나가거나 신을 믿나요?”
형규가 다시 물었다.
“아뇨. 어릴 때 친구 따라 크리스마스 선물 받으러 간 적은 있었어요.”
은경이 웃자 형규도 따라 웃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슬픔에 잠긴 어머니가 이웃에 이끌리어 교회에 나갔던 일이 생각났다. 어머니는 그녀에게도 교회에 가자고 했지만 은경은 마다했다.
신이 있다면 왜 우리 가족에게서 아버지를 데려갔단 말인가. 신은 인간들 머리에서 나온 신화에 불과한 건 아닐까. 시험에 들게 하여 신의 은총을 나타낸다는, 어머니가 배워 온 성경 말씀은 은경이 생각하기에는 신앙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았다.
“형규씨는 크리스찬인가요?”
“교회에 나가긴 하는데, 회사 생활하면서는 소원해졌어요, 모태신앙이에요. 어머니와 큰누나가 신앙심이 강하지 저는 그냥 어머니를 거역하지 않으려고요.”
은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많은 생각을 하며 앞날의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애썼다.
우선은 절망에 쓰러져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어머니의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일, 그것은 은경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 대신 저녁 식사를 준비해 밥숟갈을 놓자마자 책상 앞에 앉아 공부에 몰두했다.
어머니의 슬픔에 찬 얼굴과 마주하는 일을 피하고 싶었다. 함께 주저앉아 슬퍼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절감하면서 은경은 수시로 휘청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그렇게 고등학교 삼 년을 장학금을 받으며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은경에게 주경야독은 아예 습관이 되었다.
은경은 한 번도 형규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는 한 달에 두어 번 격주로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에게 전화했고 그들은 함께 식사하였다. 그렇게 일 년이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제는 그를 만나는 일이 처음처럼 부담스럽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공부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녀도 그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사실은 그가 자신에게 과분한 상대라고 생각하였다. 그리 흠잡을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대화가 잘 통하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그녀를 이해하며 보채지도 채근하지도 않는 그의 여유로움이 편안해서 좋았다. 사실 그도 회사 일로 많이 바쁜 것 같았다.
은경이 계획하였던 7급 공무원 시험을 보고 난 주말 처음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계속 몰아치던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다정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형규의 목소리는 반가움이 가득 묻어났다.
그는 일 년 동안 은경을 은근히 길들였다. 그녀는 어느새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보고 그에게 정이 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번 시험만 합격하고 나면 편안히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았다. 은경은 생전 처음 와보는 예술영화 극장이었다. 망치를 든 거대한 검은 철 조각상이 건물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붐비지 않는 조용한 곳이었다. 형규는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그녀를 데리러 와서 함께 가는 배려를 해주었다.
‘터치 오브 스파이스(A touch of space)’. 그리이스와 터어키를 배경으로 한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였다. 한없이 사랑하지만 상대방의 가정을 지켜주기 위해 이별을 감행하는 두 연인,
영화는 형규가 내민 손을 자연스럽게 은경이 마주 잡게 해주었다. 은경이 처음으로 맞잡은 형규의 손은 온 전신에 따스한 온기를 퍼뜨리며 생전 처음 이성의 짜릿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와 영화 속에서 향신료가 뜻하는 의미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향신료처럼 인생에 맛을 살리는 사랑...
영화는 서양 음식의 삼 단계 즉 에피타이저, 메인 디쉬, 디저트처럼 소년의 눈으로 본 가족들의 삶을 펼쳐 나갔다.
이별을 통하여 오히려 그들의 사랑을 완성시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서 느낀 성적 자극의 여운이 남아있는 듯 수줍음이 밀려왔다.
은경의 집 근처 어두운 골목길에서 형규는 순식간에 그녀를 안으며 가벼운 입맞춤을 하였다. 은경이 놀라서 그를 밀어내기도 전에 서둘러 ‘잘자요.’ 인사말과 함께 돌아서 뛰어갔다.
첫 입맞춤, 짜릿한 전율과 함께 느껴지는 감미로움.
은경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웃었다. 잠시 깊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3. 결혼
형규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은경을 소개하기로 마음먹고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
은경은 형규가 자신과 앞날을 계획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언젠가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일은 결혼에 장애가 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형규의 집은 성북구 삼선동 주택가의 이층주택으로 붉은 벽돌 담을 따라 마당에는 오래된 감나무와 라일락 나무가 운치를 더하며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담벼락 아래로는 채송화, 붓꽃, 옥잠화, 넝쿨 장미가 피어나 안주인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느끼게 하였다.
형규 어머니는 반백의 곱슬곱슬한 짧은 머리를 곱게 빗은, 화사한 한복차림으로 나오셨다. 평생 고생하지 않고 산 듯한 귀티 나는 어머니는 은경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출가하여 가정을 꾸린, 근처에 산다는 누님 두 분도 웃는 얼굴로 은경을 맞아주었다. 인상이 모두 선하고 세련된 옷차림으로 언행이 부드러웠다.
두 딸은 어머니를 많이 닮은 미인들이었다.
어머니와 큰누나는 조신한 은경을 보고 마음에 들은 듯 분위기가 좋았다.
단 한 가지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것을 염려하며 결혼하면 교회에 다녀야 한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은경은 말없이 미소로 답을 대신하였다.
이미 그들은 은경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형규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온 은경은 이제 결혼할 때가 되었구나 생각했다.
어머니가 여러 가지 해산물 말린 것과 김치를 가지고 오셔서 하룻밤 자고 가던 날, 은경은 결혼하자는 남자가 생겼다고 이야기하고 상견례 날짜를 말씀드렸다.
자기 일을 스스로 알아서 잘하는 딸인지라 어머니는 흔쾌히 허락하였다.
은경은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듯 말하였다.
“제가 결혼해도 엄마와 동생은 잘 돌봐 드릴게요. 염려하지 마세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간 남동생은 직업군인이 되기로 하여 어머니와 누나의 짐을 덜어주었다.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결혼해. 네가 혼기가 늦어져서 걱정했었는데 정말 잘 됐다.”
스물한 살에 결혼한 어머니에 비하면 늦은 나이였다. 어머니는 딸이 결혼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걱정했였다.
은경이 함께 살자 했지만 백령도 섬을 떠나지 않는 어머니는 딸이 배우자가 생긴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남편을 잃은 슬픔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잘 지내고 계셨다. 세월이 약이라는 옛말은 맞는 말이었다.
상견례도 무사히 마치고 그들은 함께 살 집에 대해서 상의하였다.
형규는 은경이 집에 들어와 어머니와 함께 살아도 좋고 어머니가 불편하면 집을 얻어 살아도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형규가 저축한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는 맘에 드는 전셋집을 구하기 어려웠다.
은경은 적금을 탈 때까지 결혼을 미루고 싶었지만 시어머니의 재촉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아 어머니와 함께 살겠다고 말하였다. 혼자 되신 어머니를 두고 나와 살 일이 은근 걱정이었던 형규는 몹시 기뻐하며 은경에게 고마워하였다. 은경은 형규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무슨 큰일을 한 것도 아닌데 생각하며 덩달아 마음이 좋았다.
결혼식 날, 웨딩드레스를 입은 은경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 백설 공주 같았다.
형규는 수수한 옷에 감춰졌던 은경의 눈부신 자태에 연신 싱글벙글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평소 화장하지 않았던 은경인지라 연하게 한 화장인데도 한 송이 피어나는 꽃처럼 청초하여 새하얀 예복에 드리워진 꽃다발과 함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사람들 입에서는 '선남 선녀'라는 찬사가 흘러나왔다.
신혼여행을 가면서 은경은 꿈을 꾸는 듯 행복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그들은 호텔에서 나와 잠시 손잡고 걸었다.
멀리 달빛에 드러난 불국사의 위용은 장엄하였다. 그 달빛이 사랑스러운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또한 환하게 비추었다.
형규가 제주도를 갈까 했지만 은경이 바다는 싫다며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경주에 가자고 했다.
서울 애들은 수학여행을 경주로 간다는데, 은경은 서울로 수학여행을 왔었다. 형규는 여행 준비를 하면서 불국사에 관한 책자를 찾아보았다. 그도 수학여행 때 한 번 가보고는 처음이었다.
뒤로 토함산을 등지고 왼편으로 울창한 송림을 끌며 앞으로는 광활한 평야를 바라보는 풍수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학창 시절 불렀던 ‘석굴암’ 노래가 생각났다.
내일은 석굴암도 둘러보고 은경에게 그 노래를 들려주어야지 생각했다.
첫날밤을 맞은 은경의 뛰는 가슴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가 건네준 포도주 한 잔에 볼이 발그레 물든, 눈웃음치는 은경을 꼭 껴안으면서 형규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벗은 그녀의 몸은 점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매끄러웠다. 수줍어서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부드럽고 따스한 몸 구석구석을 애무하며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하였다. 일방적인 성교로 그녀를 당황하거나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충분히 즐겁게 해주고 기뻐하는 그녀를 보면서 절정에 이르고 싶었다.
미세하게 떨리며 온몸에 퍼지는 전율과 함께 은경의 몸이 작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짝 수축되는 순간 형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있는 온몸을 다해 분출하였다. 있는 힘껏 그를 움켜쥐던 은경의 손길을 느끼며 형규는 그녀의 얼굴에 제 얼굴을 포개었다.
“아, 내 사랑, 나의 아내.”
형규는 가쁜 숨을 고르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살포시 감은 그녀의 눈에, 코에, 입술에 다시 가벼운 입맞춤을 하였다.
은경은 그의 입술에 입맞춤으로 화답했다. 그녀가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한 두려웠던 한 몸이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으로 온전히 그를 받아들였다.
아침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나는 불국사 경내를 걸으며 은경은 고즈넉한 고요함과 어우러지는 풍경의 아름다움에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머리 위를 날아가는 작은 새들의 명랑한 지저귐, 은은하게 물든 잎 새들이 선명하게 반짝거렸다.
은경의 밝은 얼굴을 보며 형규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옛날에는 이 잔디밭 자리에 깊은 연못을 파고, 네모난 발코니 같은 돌층층대가 아치가 되어 그 밑으로 맑은 물이 흐르고 그림배가 드나들었다고 해요. 상상해보면 참 멋진 광경이야. 여기 석가탑과 다보탑은 교과서에도 실렸으니까 당신도 알지?”
은경은 그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서 다 까먹었다며 웃었다.
화려한 솜씨의 다보탑과 간결미가 돋보이는 석가탑을 보면서 형규는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은경은 이런 지적 매력이 있는 그가 새삼 더 좋아졌다.
“한 층마다 돌 하나로 만든 이 석가탑은 무영탑이라고도 하는데 그 예술에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당나라에서 온 한 젊은 석수가 오랜 시간 탑을 건축하느라 멀리 두고 온 아내조차 잊고 지냈는데, 그의 아내 아사녀가 남편을 찾아 신라로 왔지만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연못에 비치는 완성된 탑을 보고 다시 오라는 말을 듣고 아무리 기다려도 탑의 그림자를 볼 수 없었어. 그래서 상심한 나머지 그만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지, 남편은 그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다가 아내의 환상을 보고 부처를 조각한 후 그 역시 연못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야.”
은경은 형규의 이야기를 듣고 천연의 돌에 석수가 조각했다는 돌부처의 자못 섬세한 선을 살펴보았다. 전설이라지만 마음이 짠해졌다.
석굴암에 이르러 두 손을 합장하는 남편을 따라 은경도 합장하였다.
웅장한 석불의 빼어난 위용까지 감상하고 내려오면서 그들은 조상들의 위대한 솜씨에 경탄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남편은 기독교인이지만 전혀 불교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는 것 같았다. 부처님이 어떻게 출가하여 성불하였는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불교는 종교 이전에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아.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가르치는 불법은 학문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어, 결국 종교란 마음의 구원을 얻기 위함이고 어떤 종교를 어떻게 믿든 나와 남에게 이로운 것이면 된다고 생각해. 당신 앞으로 교회를 다녀야 할 텐데 어떡하지?”
형규는 은경에게 내키지 않는 일을 하게 하는 것 같아 사실은 싫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다닐게요. 일주일 일하고 교회 가서 잠시 쉰다고 생각할게요. 뭐, 괜찮아요.”
신앙심은 없지만 남편의 가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니 그를 선택한 이상 따르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지나치게 기독교 신앙을 강요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은경은 그의 품에 안겨 며칠 밤을 보내면서 아버지를 잃으며 받았던 상실감을 모두 보상받는 듯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오랫동안 슬프고 쓸쓸했던 마음을 억누르며 지내 온 시간이 터지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다정한 그의 손길은 부부간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것인지 느끼게 해주었다.
형규는 첫날밤 그녀의 혈흔을 보고 더욱 그녀를 소중하게 안았다. 그녀의 순결을 원하는 마음 같은 것은 없었지만 은경이 성관계가 처음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감동했다.
“당신 몸 너무 예쁜데, 사진 한 장 찍자. 나중에 늙어서 보게...”
형규가 웃으며 말했다.
“싫어요!”
그녀는 시트를 끌어당겨 몸을 가리며 거부했다.
“늙으면 사랑하지 않을 건가요?”
은경이 정색하며 물었다.
“무슨 소리! 그럴 리가 있나, 아름다운 이 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서지.”
그는 웃으며 그녀를 껴안는다.
은경은 그들이 늙는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형규 역시 은경 못지않게 적당히 근육질의 균형 잡힌 몸이었다. 은경은 남자의 완전히 벗은 몸을 처음 보았다. 어릴 때 아버지가 수영복을 입은 것은 보았지만 남자의 몸으로 상대를 본 건 생전 처음이었다. 그의 품에 안기면 마치 아빠의 품속처럼 따뜻하고 편안했다. 그의 팔에서 전해지는 힘이 그녀를 언제나 보호해줄 것 같은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4. 신혼 생활
은경의 알뜰하고 바지런한 살림 솜씨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시어머니는 국 멸치를 우려내고 모두 버렸지만 은경은 멸치 똥을 발라내고 곱게 갈아 한 스푼씩 국이나 찌개에 넣었다. 또 마늘을 한 접 사서 매달아 놓으면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 정도는 덜어내어 모두 간 후 갈아서 비닐 팩에 먹기 좋게 담아 냉동시켰다. 시간이 급할 때 사용하기 편리하였다.
다 쓴 치약도 그냥 버리지 않고 가위로 갈라 남은 찌꺼기를 헝겊에 묻혀 가스레인지 등을 반짝반짝 닦아놓았다.
식당에서 일하며 배웠던 음식 솜씨 또한 칭찬받으며 고부 사이는 갈등 없이 잘 지냈다.
“며느리가 해주는 밥을 먹으니 정말 좋구나.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시어머니는 금방 눈시울을 붉히며 눈가를 닦았다.
아침이면 바쁘게 서두르는 은경에게 어머니는 설거지는 그냥 두고 출근하라고 하였지만 은경의 빠른 손놀림은 시어머니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설거지까지 끝내고 출근하였다.
형규는 부지런한 은경을 보면서 아내를 참 잘 얻었다는 만족감에 그녀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은경이 일요일이면 다 함께 교회에 가야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겠지만 자신을 따라 묵묵히 따라주는 것 또한 고마웠다.
교회에 다녀오고 나면 한 주간의 피곤이 몰려오는 듯 그녀는 손을 가리고 연신 하품을 하였다.
형규는 잠깐이라도 그녀를 쉬게 하려고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나갔다. 그리고 한적한 곳에 이른 둘은 차 속에서 손을 맞잡고 꿀 같은 낮잠을 한두 시간 즐기고 집에 돌아왔다.
은경은 매일 반복되는 직장업무와 가사, 잦은 성생활까지 늘 피곤함을 느꼈지만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이룬 행복감에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
형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제가 쓸 용돈을 제하고는 어머니께 월급을 모두 드리고 있었다. 은경은 그가 해오던 대로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월급만 착실히 모아나갔다. 칠순이 된 어머니이지만 며느리에게 경제권을 넘기지 않으셨다. 아직은 장도 봐오시고 살림살이를 돌보실 만큼 건강하셨다.
결혼한 지 일 년이 넘었는데 임신 소식이 없자 어느 날 어머니는 그들이 피임하는지 물어보셨다. 아니라고 하자 함께 병원에 가보라고 권하셨다. 당신이 결혼한 지 십여 년이 되도록 자식을 보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그 애타던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벌써 아들의 나이가 많은데 걱정이 되었다. 은경은 자식은 일찍 낳을수록 좋다는 어머니 말씀이 옳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젊은데 조급해하는 시어머니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순종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은경은 어렵게 형규와 시간을 맞추어 함께 병원을 찾았다.
“아내분 몸이 좀 허한 것 같은데, 자궁에는 별 이상 없으니 좀 더 기다려 보시고, 기다리는 게 싫으시면 시험관 아기를 시도해보셔도 됩니다. 이유 모를 불임이 더러 있으니까요. 편하게 안정을 취하시고 잘 드셔서 건강해야 합니다. 남편분도 별 이상 없습니다.”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은경이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자주 누나들이 집에 오는 편이라 그 시중드는 일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은 힘들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일까? 자라면서 별로 아픈 적이 없이 건강했는데 쉴 틈 없이 달려온 십여 년 넘는 세월이 피곤하다며 경고를 보내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규도 회사 퇴근 시간이 늦는지라 늘 피곤했다.
때론 술자리가 길어져 새벽녘에 들어오는 일도 잦았다. 은경은 형규가 전화하지 않는 날은 걱정이 되어 잠을 안 자고 기다렸다. 그런 날은 몇 시간 자지 못하고 일어나 아침을 해 먹고 출근하다 보니 종일 피곤함을 느꼈다.
시어머니 아침을 차려야 하니 좀 더 잘 수가 없었다.
은경의 몸은 자신도 모르는 새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시댁 식구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일은 생각보다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이었다. 늘 시어머니 기분을 살피고 맞추어야 하는 생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나날이었다.
은경이 오후에 화장실에서 소변 후 짜르르한 통증을 느껴 왜 그럴까 생각하며 미열이 나는 것을 느끼며 퇴근하였다.
집에 와서 시원하게 소변을 보지 못하고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옆구리의 통증과 함께 밤새 끙끙 앓았다. 형규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애쓰다 새벽에야 그를 깨워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서 산부인과로 옮겨지며 급성 신우신염이니 입원하라고 한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형규는 어머니께 은경을 부탁하고 서둘러 출근하였다. 결근하기 어려운 업무처리가 쌓여 있었다. 은경은 주사를 맞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난주 형규는 회사 직원들과 함께 지방 출장을 갔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결혼 후 처음으로 외도했다. 술이 많이 취하여 여자의 입맞춤을 거절하지 못한 채 순간 일어난 욕정을 자제하지 못하였다.
결혼 전의 있었던 그와 같은 경험은 술 취하여 상황이 바뀐 것을 이성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는 경계심에 콘돔을 사용했었는데, 이번엔 콘돔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오히려 곤란을 초래하였다.
아침에 정신이 들었을 때 무너진 자의식의 공허한 질책이 형규를 휩싸며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였다. 그동안 수 차례 있을 수 있었던 일이었지만 형규는 아내를 생각하며 결혼 후에는 그런 자리를 빠져나오곤 하였다.
동료들의 매춘은 배설에 불과하다는 궤변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다. 결혼 전보다 결혼 후의 정조를 서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은경은 그가 첫 남자였다. 세상이 말하는 순결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 아내가 순결한 것은 순결하지 않은 그를 더 기쁘게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만 지나치게 술 취해 자신의 몸을 지키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신앙인이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기었으니 하나님께 사죄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일곱 번씩 이른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한 말씀대로라면 나의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는 걸까? 그는 머리를 흔들며 자신의 허물을 그만 벗어버리고 싶었다. 그 일이 마음에 걸려 아내에게 몹시 미안하던 차에 이런 일이 벌어지자 자신의 잘못으로 벌을 받은 것 같아 양심에 가책을 심하게 느꼈다.
은경의 몸이 과로하면서 면역력이 약해지자 낯선 바이러스의 침투를 이겨내지 못하였다. 부부는 함께 항생제 처방을 받고 약을 먹었다. 은경은 별 의심 없이 성생활을 하니까 함께 치료를 받나보다 생각했다.
은경은 상상할 수 없는, 남편이 살아가는 사회생활의 한 이면이었다.
은경은 늘 모자랐던 잠을 자고 또 잤다. 쉴 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을 처음 편안히 쉬었다.
아버지의 사고 이후 우울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목표만을 향하여 내달리는 생활을 이어갔다. 형규와 나누는 가슴 뛰는 사랑으로 지친 심신을 위안하며 버티었지만 휴식이 필요했다.
은경은 지금까지는 계획했던 목표들을 성취하였다. 또한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형규가 다정하게 채워주었다. 지금은 이렇다 할 불만족스러운 것이 없었다. 다만 형규가 직장 때문인지 술을 자주 마셔서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아 걱정하였다.
시어머니는 은경을 위해 보약을 지어오셨다. 그리고 아침 식사는 자신이 준비할 테니 한 시간이라도 더 자라고 말씀하셨다. 거의 매주 오던 시누이들의 방문을 격주로 제한하고 큰딸 집에서 모이자고 제안했다.
후덕한 큰딸은 흔쾌히 응하였다.
김치며 밑반찬이며 항상 넉넉하게 만들어 딸들에게 나누어 주셨는데, 그 양을 줄이는 게 느껴졌다. 은경은 시어머니의 배려가 감사했다. 주위에서 홀시어머니 모시고 살기 힘들다고 했지만 은경은 지금 생활에 만족했다.
만족하면 행복한 법이다.
시어머니께 항상 맞추다 보니 고부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도꼭지만 열면 더운물이 나오는 화장실에서 몸을 닦으며 은경은 어린 시절 겨울이면 물을 데워 부엌에서 몸을 닦았던 기억, 또 자취생활을 하며 겪었던 여러 가지 불편했던 기억들...
빨래를 세탁기가 해주고 전기밥솥이 알아서 밥을 해주며 스위치만 돌리면 파랗게 일어나는 가스 불의 편리함, 등등 은경은 도시 생활의 편리함으로 고단한 몸을 위안하며 감사했다.
무엇보다 형규의 자상한 손길이 늘 고마웠다.
결혼할 때 신혼여행 가면서 입으라고 형규가 맞추어 준 이이보리색 원피스와 베이지색 코트, 그가 골라 준 정장용 흰 구두와 활동적인 검은 구두, 유행 타지 않는 고급스러운 검은색 핸드백, 그의 취향은 세련되어서 은경의 맘에도 들었다.
그와 명동거리를 구경하며 돌아다니던 날 은경은 세상의 어느 여자도 부럽지 않았다. 형규는 아내가 될 여자를 아름답게 변신시키며 즐거움을 감추지 않았다.
“야! 정말 예쁘다! 당신 완전 모델 같은데!”
그의 웃음 가득한 얼굴을 보면서 은경은 수줍게 따라 웃었다.
처음 신어보는 비싼 구두며 처음 가져보는 고급 가방이었다. 검소함으로 두드러지지 않던 은경의 자태가 순간 화사하게 빛을 발하였다.
거울에 비친 고급스러운 자태가 좀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는 결혼선물이 고맙고 즐거웠다.
은경은 제 손으로 옷이나 구두 등 자신을 꾸미는 물건들을 전혀 사지 않았다. 남편은 그런 검소한 은경을 잘 아는지라 생일이나 연말, 결혼기념일에는 은경을 불러내 유명 음식점에서 식사하고 그녀에게 소용될 물건들을 함께 골라 사주었다.
백화점에서 속옷과 스카프를 사주던 날 은경은 너무 비싼 가격을 보고 놀라서 싫다고 거절했다.
“당신은 내가 사주지 않으면 생전 이런 건 안 사잖아. 이건 선물이니까 사양하지 마. 당신은 누릴 자격이 충분해. 난 더 비싼 것이라도 사주고 싶어. 어서 색이나 골라 봐.”
그가 달아나는 은경의 손을 잡고 말했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사지 않는 은경의 생활 습관이었다.
그녀가 자라온 환경 탓도 있겠지만 쓸데없는 소비욕이나 허영심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반면 시어머니나 남편은 좋은 물건 사고 멋 내는 일을 즐겼다. 그들은 그녀의 검소한 살림살이를 보면서 놀라는 반면 내심 마음이 놓였다. 그녀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고 전보다 자신들의 소비를 좀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은경은 일 년에 단 한 번 형규의 생일에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지고 살짝 화장하였다. 그래봐야 화운데이션 엷게 바르고 립스틱을 좀 바른 정도이지만.
그녀는 형규가 사준 옷을 입고 그를 만나 저녁 외식을 하였다.
은경도 그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 한두 달 전부터 고심하지만 그에게는 필요한 것이 모두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을 못하고 물어보았다.
“당신은 무슨 선물을 받으면 기쁠까?”
은경이 잠자리에서 물었다.
“내가 원하는 거 해주는 거.”
형규는 은경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뭔데?”
은경이 그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당신 전라 사진.”
그가 웃으며 장난처럼 말했다.
“안 돼요, 사진 인화하려면 사진관에 맡겨야 하잖아?”
은경이 삐친 듯 몸을 돌아눕는다.
“내 친구 중에 취미로 사진 인화하는 녀석이 있어. 걔한테 부탁하면 돼.”
“뭐라구요? 친구한테? 그건 더 싫어.”
은경은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 아내의 벗은 몸을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건가. 남편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화가나 사진작가들은 여자들 나체그림이나 사진을 많이 작업해. 그만큼 여자의 몸이 아름답기 때문이야. 당신은 당신 몸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지 모르지?”
은경의 몸을 돌리며 형규가 입 맞춘다.
은경은 그런 문화 경험이 없어서 남편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편의 부탁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이는 건 사진이라도 싫었다. 결국 은경은 형규가 좋아하는 책이나 음반을 사라고 문화상품권 10장을 생일 카드와 함께 선물했다.
그는 또다시 사진을 찍자는 말은 안했지만 그녀의 몸을 더 공들여 애무하였다. 아예 그의 뇌 속에 각인하려는 듯...
어머니가 계셔서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않지만 그들은 방에 들어서면 형규의 장난스러운 애정 공세로 웃음소리가 아래층까지 들릴까 봐 은경은 조심했다. 혼자 주무시는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는 마음에서였다.
형규는 은경을 애무하면서 늘 ‘예쁜 내 아내!’라고 속삭였다.
은경의 모든 세포가 활짝 열리고 떨리는 희열감을 증폭시키면서 그들은 한 몸이 되었다.
은경은 제 손으로 입을 막으며 절정을 만끽하였다.
육체와 영혼이 합일하는 그 순간, 그녀는 그가 되고 그는 그녀가 되는 충만함, 이 순간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절대적 쾌감이었다.
은경은 서로 다른 남녀가 잦은 다툼에도 헤어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육체적 교섭이 있어 가능한 일인 것을 알게 되었다.
성생활에 소극적이고 늘 피곤한 은경이였지만 남편의 정성스런 애무는 그녀를 자주 무장 해제시켰다. 그는 언제나 은경의 절정에 맞추어 자신도 만족하는 성교를 하였다. 그러나 점차 직장에서의 술자리가 잦아지면서 매일 이어지던 그들의 성생활도 조금씩 줄어들게 되었다.
은경은 혼자 보약을 먹는 일이 민망하여 연로하신 어머님께도 녹용을 넣어 보약을 지어드리고 나서야 맘 편히 보약을 먹었다.
남편은 한약은 먹기 싫다며 극구 마다하여 피로회복에 좋다는 영양제를 샀다.
한 달 내내 집에서는 한약 끓이는 냄새가 퍼지곤 했다. 그러나 은경의 임신 소식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은경은 성교가 끝나고 화장실에서 정액을 닦아낼 때마다 희열 뒤에 도사린 씁쓸함이 몰려왔다.
은경은 바쁜 일과를 체바퀴 돌 듯 반복하며 임신을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언젠가는 소식이 오겠지 생각하고 정 안 되면 시험관 아기를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기로 하였다. 이 일은 은경이 계획을 세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5. 둘째 시누이
마당에 라일락꽃 향기가 은은하게 번지는 봄날.
둘째 시누이가 친정으로 왔다. 만삭의 그녀는 5살 아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훔치며 들어섰다. 남편은 빚쟁이들에 쫓겨 시골 삼촌댁으로 피신하였다고 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났단다.
얼마 전 시어머니는 아들 내외가 모르게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주었지만 그 정도로는 그들의 파산을 막지 못하였다. 시누이가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함께 살 수밖에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사실은 부모님 집이기에 시누이가 오는 것은 잘못된 일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한 불행이니 그녀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은경은 좋은 얼굴로 그들을 맞아들였지만 그녀의 일이 늘어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평일 은경이 출근을 하는 날은 저녁에만 그들과 함께 식사했다.
아침잠이 많은 시누이는 아침 식사를 그들과 하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뒤늦게 그들에게 다시 아침상을 차려주었다. 가만히 앉아서 밥을 먹지 않는 손주를 따라다니며 밥을 먹이는 일은 시어머니의 몫이었다.
휴일에는 은경이 꼬박 세 끼 식사를 준비하고 뒷정리를 한 후 한 주간 먹을 반찬거리를 마련하느라 자리에 앉을 새가 없이 분주했다.
잠자리에 들 때면 많이 피곤한 것을 느껴야 했다.
“언니, 미안해요. 힘들게 해서...”
말이라도 고마워 은경은 맘 편히 지내라고 선선히 말하였다.
시누이의 잔뜩 부른 배를 보면서 얼마나 힘들까 생각되었다.
갑자기 집도 가재도구도 압류를 당한 당사자는 심정이 오죽 했으랴 가엾게 생각했다. 형규는 조카를 사랑했지만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데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는 잠시 밖으로 피해 나가곤 했다.
그리고 그의 지방 근무가 시작되었다.
은경은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잠을 좀 더 잘 수 있겠구나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편 그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 보면 더 맘 놓고 술을 마실 것 같았다.
“형규씨, 술 좀 자제해요. 건강 상할까 봐 걱정돼.”
“알았어. 조심할게. 근데 당신이 많이 힘들어서... 미안해.”
그의 다정한 포옹에 은경은 불편한 마음을 지우고 다정하게 그를 안았다.
출산일을 일주일 앞두고 시누이는 여러 가지 출산용품들을 사왔다.
어릴 때부터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시누이는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은경은 이왕 줄 출산 축하금을 미리 주었다.
인색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넉넉하게 넣었다. 시누이는 고맙다고 말은 했으나 그리 흡족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은경은 순간 걱정스러움이 느껴지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오늘 반찬이 좀 짜요. 준성인 고기반찬 없으면 밥 안 먹는데...”
식탁에 늘 오르던 불고기나 장조림이 빠지고 오늘은 소고기 무국과 고등어 조림을 나물 반찬과 함께 저녁 밥상에 올렸다.
시댁의 밥상은 늘 고기반찬이 빠지지 않았다.
은경은 가끔 생선구이나 생선조림, 매운탕이 먹고 싶었다. 어머니가 말린 생선, 젓갈 등을 보내주시지만 시댁 식구들에게는 뒷전이었다.
아버님이 고혈압과 당뇨 합병증으로 돌아가셔서인지 모든 반찬이 은경의 입맛에는 싱거웠다. 명절 외에는 고기를 거의 먹지 않고 자란 은경은 어머니가 보내준 생선이나 젓갈이 여간 고맙지 않았다.
식구들은 은경이 신경 쓰며 올리는 쌈 채소나 나물 반찬보다는 고기반찬을 더 좋아하였다.
은경은 시누이가 온 후로는 매끼 빠지지 않고 고기반찬을 준비해야 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번갈아 사다가 냉장고에 준비해 놓았다.
퇴근해서 오는 길에 장을 봐오는데 업무에 시달린 날은 파김치가 되는 듯 지치고 힘들었다. 그런 날은 남편의 다정한 목소리가 많이 그리웠다.
어제가 그랬다. 업무에 방해될까 싶어 기다렸다 잠들기 전 밤에 전화를 걸었지만 숙소에 없는지 남편은 받지 않았다.
형규는 승진에 그리 관심이 없고 동료들과 친하게 어울렸다. 따라서 그의 곁에는 늘 함께 술 마시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은 자주 어울리며 조직 생활의 고단함을 나누었다. 자유롭게 살던 형규가 결혼하여 일 년 넘게 회사일 보다는 함께 사는 은경에게 충실했지만 점차 그의 느긋한 성격대로 예전의 생활습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사는 은경의 고단함을 나누기보다는 자신의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번잡함을 피해 이래저래 지방 근무를 가게 된 것이다.
시누이가 출산한 날 은경은 퇴근을 서둘러 병원으로 찾아갔다.
시어머니와 큰 시누이, 시골에 갔다던 시누이의 남편, 모두 모여 있었다.
은경의 인사를 어색하게 받은 시누이 남편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복도로 나갔다.
“올케가 고생이 많네, 많이 힘들지?”
큰 시누이가 은경의 손을 잡고 미안한 듯 웃었다.
“아니에요. 고생은 무슨...”
은경을 생각해주는 큰 시누이가 고마웠다.
유리창에 붙어 시누이 남편이 들여다보고 있는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발그레한 아기는 건강했다. 사실 막 낳은 아기는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게 비슷비슷하였다.
간호사는 아기를 안아 창 앞으로 와 보여준다. 눈도 뜨지 못한 강아지처럼 아기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우리 애는 언제 생기려나?’ 은경은 자신도 모르게 부러움을 느꼈다.
시누이가 퇴원해 집에 온 후 모든 관심은 신생아에게 쏠렸다.
“우리 형규는 언제 요런 강아지를 낳을 고!”
아기를 안고 무심코 내밷는 어머니의 사랑 가득한 목소리에 은경은 곁으로는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의기소침해지면서 왠지 이 집에서 그녀만 이방인인 듯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남편의 부재가 절실하게 느껴졌다.
낮에는 어머니께서 딸의 산후조리를 하셨지만 은경이 퇴근 후에는 저녁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피곤하신지 방으로 들어가셨다.
설거지를 끝낸 은경이 목욕물을 준비해 시누이와 함께 신생아를 씻기고 큰 조카도 씻겨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이런저런 시중을 더 들다 방으로 들어오니 자신은 씻기도 귀찮을 만큼 피곤함이 몰려왔다.
남편이 보고 싶었다. 엊그제 시누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전화하니 형규는 말했다.
“아, 그래? 무사하고? 잘됐네. 아유, 근데 당신 힘들어서 어떡하나! 나도 없고... 미안해, 이번 주말에 올라갈게.”
남편이 있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되겠냐마는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고마웠다.
문제는 언제까지 그들의 수발을 들며 살아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의 하는 모습을 봐서는 그리 쉽게 친정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직장을 다니지 않고 살림만 한다면 함께 사는 일이 무어 그리 힘들겠냐마는 퇴근 후 전에보다 더 많아진 가사노동이 문제였다. 그건 시누이의 경우 없음이 한 몫 더 하였다. 은경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이 편한 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녀를 보면서 일어나는 은경의 사리 분별이 사실은 힘들었다.
시누이는 가정이 위기에 처해 친정에 와있다는 것을 잊은 듯 씀씀이를 줄이지 못하고 제집인 양 어머니께 요구사항이 많았다.
가끔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가셨다. 차라리 은경이 직장을 다녀 시누이를 보는 시간이 적어 다행이었다.
은경이 계획했던 10년 계획은 차질이 불가피하였다.
결혼이란 자신의 진로 확장보다는 희생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형규를 만나 사랑의 아름다운 감정을 알게 되었고 한 가정을 꾸려 따스한 인간의 정을 나누며 살게 되었다. 그 소중한 경험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다.
이 년간의 자취생활에서 느끼던 외로움에 비례하여 그의 사랑은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경은 앞으로 좀 더 나아가고 싶었다. 그녀가 경험했던 성취감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7급 공무원에 만족하여 매달 어김없이 나오는 월급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직장, 가정 두 가지 현상 유지도 벅차게 느껴졌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다시 승진 공부를 하고 싶었다.
시어머니는 이미 손주가 셋이나 되었으니 충분하지 않을까 은경은 생각했다.
남편은 조카들을 예뻐하기는 했지만 자식을 간절히 바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행히 한 번도 은경에게 임신이 되지 않는 것을 서운해한 적이 없었다.
주말 집에 와 함께 잠자리에 누운 형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내가 리비아 해외 근무를 일 년 다녀올까 생각하는데...”
“네? 꼭 가야 해요?”
은경은 좀 놀라서 물었다. 그동안 떨어져 지내며 주말 부부하는 것도 싫은데...
“아니, 그렇지는 않는데, 월급을 두 배 이상 받을 수 있고, 승진도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어. 그동안 당신에게 생활비를 따로 주지도 못 했잖아..”
형규는 어머니께 반 이상의 월급을 드리고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관리하였다.
은경은 장 봐오는 식비만 부담하고 기타 다른 비용은 어머니께서 알아서 살림을 꾸려가셨다.
형규의 월급은 은경의 두 배도 넘었다. 그러나 형규가 알아서 주지 않는 생활비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형규가 치루는 가족의 잦은 외식비, 때마다 하는 선물 등, 그가 버는 돈은 형규가 알아서 쓰도록 관여하지 않았다.
“거긴 덥고 힘들 텐데, 괜찮겠어요?”
“좀 힘들긴 하겠지만 현장 노동자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 일 년 정도는 금방 지나갈 거야. 동생이 와 있어서 당신이 힘들 텐데, 그게 마음에 걸려...”
“난 괜찮아요. 당신이 잘 생각해서 더 나은 쪽으로 결정해요.”
형규가 해외 근무를 떠나고 일 년은 느린 듯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를 향한 그리움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시누이는 아예 주객이 바뀌어 어머니의 안방을 차지하였다. 짐도 많고 애 둘을 키우기에는 건넛방이 작다고 투덜대니 어머니가 큰손주를 데리고 자다가 아예 방을 바꾸어주었다.
시어머니께서 손주 둘을 돌보는 일이 점점 힘에 부치자 모녀간에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누이는 뒷정리를 잘 안 하는 성격이라 집안은 늘 어지럽혀져 물건이 쌓이고 정신이 사나웠다. 어머니는 잔소리하다가 지쳐서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간이 좀 지나자 시누이 남편도 들어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마치 그들이 이 집의 주인인 듯 여겨졌다. 은경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과 주방 청소를 대강 해주고 이층으로 올라가는데도 그때뿐이었다.
6. 시어머니
아들이 중동근무를 떠난 날부터 시어머니는 매일 새벽기도를 가셨다.
아들의 무사 귀환을 빌기 위한 정성이다. 한겨울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러운 날도 어김없이 어두컴컴한 새벽길을 나가셨다.
은경은 시어머니가 걱정되었지만 말릴 수 없었다. 은경이 아침 밥상을 차려놓으면 들어오셨다. 그렇게라도 해야 맘이 놓이신다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눈길에 엉덩방아를 찌며 넘어져서 병원에 실려 가셨다.
고관절을 심하게 다쳐서 인공관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시누이 내외가 곁에 있어서 입원부터 퇴원 후까지 도움이 되었다.
연로한 나이에 수술을 하였으니 한동안은 요양을 잘해야 했다.
은경은 아침마다 일거리 많은 집에서 벗어나 직장에 가서야 비로소 한숨 돌리는 편안함을 느꼈다.
결혼하고 꼼짝없이 매주 교회 가야 하는 일, 식사 때마다 기도하고 수저를 들어야 하는 일 등이 번거로웠지만 그것도 효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따랐다.
학교에서 다윈의 진화설, 생물학, 세계사 등을 배운 은경에게 성경 말씀은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가 많았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믿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면 착하고 부지런했던 우리 아버지는 지옥에 계신다는 말인가! 우리 조상들 모두...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고 죄짓지 말고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행을 떠나서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은경은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육체는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정신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냥 끝인 걸까?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사라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생명,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흔히들 말하는 전생과 내세는 정말 있는 걸까? 잠잘 때 꾸는 꿈은 무엇일까? 어느 하나 선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은경은 그냥 미루어놓았다.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오기 전까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해외 근무를 시작하고 형규가 꼬박꼬박 부쳐온 월급에서 은경은 남편이 전에 드리던 금액만 어머니께 드리고 모두 적금에 넣었다. 그 더운 나라에 가서 고생하는 남편을 생각하니 그가 보내온 돈은 단 한 푼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년 후에는 분가하자고 하니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물가도 오르고 식구가 늘어 식비는 예전보다 두 배로 나갔다. 어머니 병원비로는 조금 후에 만기인 적금의 일부를 대출받아 사용했다.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서 생활비를 받으며 시어머니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딸 내외가 와서 며느리를 번거롭게 하는 것이 미안하고 속상했다. 남편이 없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부지런히 안팎으로 성심을 다하는 며느리가 내심 고마우면서 딸하고 비교되어 속이 상하곤 했다.
참으로 귀하게 키운 딸이었는데, 친정에 얹혀사는 꼴이 되다니,..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던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미 말 안 듣고 제멋대로 연애하다 아이를 가져 서둘러 결혼하더니 결국은 이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내가 심성이 착하면 무엇하나, 처자식을 벌어먹일 수 있어야지. 야무지지 못한 딸이나 사위 모두 철이 없어 보였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한다고 할 때부터 내심 걱정이 되었었다.
몸이 아파 누우면서는 아예 며느리가 주는 생활비를 딸에게 넘겨주었지만 딸은 그 돈으로는 모자랐다. 그러나 며느리에게 더 달라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아껴 쓰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막내딸은 언니에게 손을 벌려 용돈을 더 얻어 쓰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철철이 사 입던 옷이나 신발을 딸이 온 후로는 사지 않았다. 옷장에는 죽을 때까지 입어도 다 못 입을 만큼 옷이 많았고 가방, 신발도 용도에 맞게 골고루 많았다. 시어머니가 보기에도 검소하기 이를 데 없는 며느리에게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퇴근해 돌아오면 장바구니 놓기 바쁘게 먼저 시어머니 방에 들어와 오늘은 어떠신지 살피는 한결같은 며느리의 정성으로 기동하게 되면서는 매주 선심 쓰듯 넉넉히 내던 교회 헌금도 반으로 줄였다.
한 번은 교회에서 설교 시간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며느리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자신의 두 딸은 모두 결혼과 함께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주부로만 살았는데 며느리는 아기도 낳지 못하고 힘들게 일만 하는 게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아가, 올해는 휴가 내서 친정에 다녀오너라.”
교회에서 돌아오면서 시어머니가 말했다.
당신 딸들은 수시로 친정을 들락거리는데, 며느리는 몇 년째 친정을 가지 못하고 사는구나 생각이 들자 시어머니는 진작 며느리 맘을 헤아리지 못한 게 미안하여 먼저 말을 꺼냈다.
은경은 결혼 후 형규와 함께 한 번밖에 친정에 다녀오지 못했다. 그 푸른 바다가 아버지를 삼킨 것을 생각하면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형규가 지방 근무에 이어 해외 근무를 하면서는 아예 가지 못했다.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갈 수 없었다.
혼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지만 전화로 안부만 물었을 뿐 갈 시간을 내지 못했다. 이제는 시댁에 속한 사람이다 생각하며 묵묵히 지내던 중 생각지 않았던 시어머니의 선심이 여간 감사하지 않았다.
은경이 도착한다고 한 날 그 시간부터 어머니는 마음이 설레었다.
남편이 떠나간 후 의지처로 삼았던 의연하고 성실한 딸이 졸업 후 서울로 훌쩍 떠나버려 얼마나 서운하고 야속했는지 모른다.
삼 년이나 전화만 몇 번 했을 뿐 한 번도 오지 않았던 딸을 생각하며 눈물을 많이 흘렸었다. 결혼 후에도 역시 제 사는 일에 바빠 명절이나 생일에 전화만 하고 송금할 뿐 다녀가지는 못했다.
남편의 성품을 많이 닮은 딸은 부지런하고 속이 깊었다.
어려서도 어리광을 부리거나 떼를 써본 적 없이 제 할 일을 스스로 잘하던 총명한 딸이었다. 제 앞날을 알아서 잘 헤쳐 나간 것만도 고맙고 장한 딸을 빨리 보고 싶어 올 시간이 아닌데도 멀리 밖으로 시선을 던지곤 했다.
맛난 매운탕 거리를 준비하고 신선한 회도 몇 가지 준비하였다.
예전에 은경이 좋아하던 음식을 잔뜩 준비해놓고 기다렸다.
두 손에 선물을 든 은경이 빠르게 집을 향해 걸었다.
“엄마!”
내다보던 어머니는 달려 나가 은경의 짐을 받아놓고 와락 끌어안았다.
은경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편안하고 따뜻한 어머니의 품, 그동안 쌓였던 그리움이 복받쳐 걷잡을 수 없었다.
“얼마 만이냐! 우리 딸, 아이구, 왜 이렇게 야위었어?”
어머니는 은경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오랜만에 본 자식은 늘 야위어 보인다.
은경은 얼른 눈물을 닦고 어머니와 방으로 들어갔다.
변함없이 조촐한 어머니의 방, 벽에 걸린 아버지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함께 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애틋함을 몰고 왔다. 근처에 사는 이모, 이모부도 오셔서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 나누며 저녁 식사를 하였다.
어머니와 손을 꼭 잡고 누운 은경에게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궁금한 여러 가지를 물으셨다. 은경은 어머니를 염려하게 하고 싶지 않아 시누이 내외가 함께 사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형규가 해외 근무하는 이야기만 하였다.
“박서방이 고생이 많겠구나. 아이는 언제 낳으려구...”
어머니는 말꼬리를 흐리며 은경을 향해 몸을 돌려 눕는다.
“엄마, 세상일이 다 뜻대로 되지는 않잖아. 요즘은 시험관 아기로도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세상이니까 좀 더 기다려서 안 생기면 시험관 아기로 낳으면 되어요. 형규씨가 원하면 그렇게 할 거예요,”
“박 서방 나이도 적지 않은데, 언제까지 기다려. 시어머니도 기다리실 텐데...”
“시어머니는 손주가 셋이나 되어요. 얼마 전 막내 시누이가 딸을 낳았어요.”
“그래? 부러웠겠구나. 직장 일 하면서 살림하랴 힘들지?”
“아뇨. 마트에서 일할 때보다는 몸이 훨 편해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엄마 건강이나 잘 돌보세요.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은경은 아직 곱고 이제는 좀 건강해 보이는 어머니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나이 들면 다 그렇지. 뭐. 아직 이렇다하게 아픈 데는 없어, 요즘 들어 가끔 무릎이 시큰거리기는 하는데 그러다 말아.”
“되도록이면 쪼그려 앉아서 일하지 마세요. 연골이 상해서 퇴행성관절염이 빨리 온대요. 아직 쓸 날이 많이 남았는데 아껴야지.”
이모네가 이웃에 사셔서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은경이 결혼해 살아보니 너무 일찍 혼자 된 어머니가 참으로 안스러웠다.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어머니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캄캄했을까 이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남편과 떨어져 살면서 느끼는 외로움과 그리움, 편지도 받고 곧 돌아올 것을 아는데도 마음이 적적한데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은경은 어머니의 손을 꼬옥 쥐었다. 동생은 부대 배치에 따라 옮겨갔다며 건강하게 잘 지낸다고 하였다. 은경이 동생을 못 본 지도 두 해가 지났다. 올해는 꼭 얼굴을 한번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아예 입을 닫고 살던 과묵한 동생의 슬픈 마음이 기억나고 어떻게 지내는지 많이 궁금했다. 단 한 번도 은경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적 없는 속 깊은 동생이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점심시간 전에 나가는 배를 타기 위해 은경이 집을 나서는데 그녀를 오래도록 좋아했던 선배의 여동생이 떡을 가지고 왔다.
은경은 어느새 과년한 처녀가 되어 깍듯이 인사하며 웃고 섰는 그녀를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어머니가 그녀를 그의 여동생이라고 말하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선착장까지 은경을 배웅했다.
은경은 그녀의 오빠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체격이 건장하고 우직했던 오빠와 달리 그녀는 중간 정도의 체격으로 밝고 싹싹해 보였다. 그녀는 어머니와 친해 보였다. 그녀를 자주 보는 듯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7. 명절
형규는 나간 길에 일 년 더 연장 근무하겠다고 했다.
돌아와서는 따로 살림을 나서 살자고 하였다. 은경은 알겠다며 그가 없는 쓸쓸한 시간을 부지런히 일하면서 그리움을 참았다. 매일 녹초가 되는 나날은 그리움을 느낄 새도 사실 없었다.
형규는 가끔 편지를 보냈다. 다정한 그답게 아내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은경은 그가 몹시 보고 싶을 때는 그 편지 중 하나를 꺼내 읽고 꿈에서라도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잠들곤 했다.
어느 주말 퇴근 후 은경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지갑을 여는데 돈이 하나도 없었다. 버스 토큰은 동전 주머니에서 꺼내서 모르고 있었다.
분명히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장 볼 돈을 확인하고 넣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은행에서 돈을 찾을 수도 없는 시간이라 은경은 집으로 갔다.
얼마 전에도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가 두 장 없어져서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뭘 사고 기억을 못 하나 찬찬히 가계부를 살폈었던 기억이 났다.
오늘은 분명히 아침에 확인하였으니 직장에서 벌어진 일인가 생각했다.
누가 서랍 속에 넣어 둔 핸드백에 손을 댔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절 준비를 해야 해서 다른 때보다 돈을 많이 넣었는데...
집에 와 가계부에 넣어둔 한 달 식비 중 다시 돈을 꺼내 나가는데 시어머니께서 묻는다.
“아가, 왜 퇴근하면서 장 봐오지 않고, 다시 나가니?”
“네, 지금 시장에 가요. 다녀와서 말씀드릴게요.”
은경은 시간이 지체되어 서둘러 나갔다.
외출했다 돌아와 점심은 먹었다며 새로 산 브라우스를 입고 거울을 보는 딸을 물끄러미 보던 시어머니가 큰손주를 데리고 마루로 나갔다. 과자와 퍼즐을 꺼내주며 놀고 있으라고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딸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네가 지금 옷 살 때냐? 너 혹시 올케 지갑에 손댄 거야?”
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었다.
“엄마는 내가 친정살이한다고 날 도둑으로 모는 거야? 내가 미쳤어요?”
“알았어, 아니면 됐어.”
시어머니는 딸의 말대로 아니길 바랬다. 그러나 어미만큼 자식을 잘 아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늦둥이 막내딸은 자랄 때부터 가끔씩 거짓말도 잘하고 엄마 몰래 지갑에서 돈을 꺼내 제가 사고 싶은 것을 산 적도 있었다.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큰 금액은 아니어서 좋게 타이르곤 했었다.
얼마 전 성경책에 끼워 둔 새 지폐 중 만 원짜리 한두 장이 없어지곤 했다. 내가 지난번에 안 넣었나 의아해하면서 다시 채워 넣었던 게 생각났다.
시어머니는 가족 수대로 새 지폐로 헌금을 준비했다가 교회 가기 전 나누어 주는 일을 오랜 세월 변함없이 하였다.
오늘 딸은 아들을 데리고 나가 쇼핑하고 점심까지 먹고 들어왔다.
돈이 생기면 나중을 위해 비축하지 않고 우선 쓰고 보는 딸의 성격을 아는지라 사위가 돈을 주었나 생각했다. 사위가 요즈음은 일을 시작했는지 아침 일찍 식사도 안 하고 나가곤 했다. 막내딸은 친언니에게도 더는 용돈을 달라고 손 벌리지 못하자 오늘 아침 현관에 놓인 올케 가방에 손을 댔다. 은경이 출근하면서 방에 두고 온 것을 가지러 잠깐 이층에 올라간 사이 어머니는 화장실에서 큰손주를 씻기고 있었다.
은경은 시어머니가 다시 묻지 않자 장 봐온 것을 다듬고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여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시누이가 아기를 안고 나와 도와줄 것이 있냐고 물었다.
“아가씬 준성이 잘 봐주세요.”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조카를 보며 은경이 부탁했다.
시어머니는 잠자코 앉아 은경이 주는 재료들을 섞어 잡채를 만들고 계셨다. 명절 때마다 빠지지 않고 장만하는 송편이나 만두, 갈비찜, 잡채, 녹두전, 생선전, 완자, 식혜, 물김치, 나물 등...
은경은 남편이 없는 명절에 음식을 많이 만들면서 지나치게 소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도 잘 먹고 사는데 굳이 이렇게 많은 음식을 만들어 과식해야 할까?
제사 대신 예배를 보지만 제사음식 못지않게 상을 가득 차린다.
남편은 그곳에서 음식이 입에 맞을까, 명절인데 집 생각이 얼마나 날까 생각하니 고생하는 사람은 남편인데...
은경은 입맛이 떨어져 조금 먹다 나 앉았다. 기름내에, 맛보기에 이미 배가 부른 느낌이다. 싱크대로 가서 과일을 닦아 담아놓고 제 방으로 올라갔다. 피곤하여 잠시 누웠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땀이 흥건한 남편이 뒤로 와서 그녀의 허리를 살며시 안았다. 음식을 만들던 은경이 반가운 나머지 돌아서며 와락 그의 품에 안기는데 문이 활짝 열리며 어린 조카가 소리쳤다.
“외숙모, 과일 드시래요.”
은경은 알았다며 남편의 손길이 못내 아쉬운 듯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이대로 그냥 다시 꿈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설거지해야지 생각하며 일어나 내려갔다.
웬일로 시누이가 설거지를 다 해놓았다. 아기를 핑계 대며 부엌일은 손도 안 대던 시누이였다. 은경은 고마운 마음에 잠시 앉아 과일을 먹으며 TV를 함께 보았다.
온 가족이 드라마에 몰입하여 제각각 한마디씩 했지만 은경은 도무지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왜 저 난리를 치며 사는 걸까? 생각되었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은경이 생각하기에는 가족끼리 이치에 맞지 않는 과장된 이야기였다.
은경은 그날 이후로 가방을 잘 챙기며 조심하였다. 쓸데없이 주위 사람들을 의심하는 일 자체가 싫었다. 틈을 주어 훔쳐 가게 만든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형규가 곁에 없는 나날이 은경의 쉴 틈 없는 바쁜 일과로 빠르게 지나갔다. 잠자리에 들 때면 그가 보내준 편지를 또다시 읽어보며 그리움을 달래었다.
함께 있을 때는 몰랐던 애틋한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면서 새삼스럽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그가 자리 잡은 것을 느꼈다.
마음속에 사랑하는 그가 있기에 직장 일도 집안일도 불평 없이 잘 해낼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모범공무원 표창도 받았다.
그녀의 부지런하고 솔선수범하는 태도는 상사는 물론 동료들에게도 칭찬받았다. 그 모든 능력이 그녀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남편에게 사랑받고 있는 만족감이 그녀를 더욱 반짝거리게 하였다.
남편이 돌아오면 시험관 아기를 시술해서 꼭 그의 자식을 낳고 싶었다.
승진과 양육을 병행하는 일이 힘들겠지만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 아예 자식을 안 낳을 거면 몰라도 낳을 거라면 더는 미루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은경은 사랑의 결실인 두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시누이의 인형처럼 예쁜 아기를 보면서 부쩍 그 마음이 강해졌다. 남편과 그녀를 닮은 아기를 하나 낳아서 잘 키워보고 싶었다. 평범한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흔적을 남기고 떠나는 가장 값진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임신이 되지 않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아들이 해외에 나갔으니 더 이상 말할 수 없었지만 하나뿐인 외아들의 자식이 태어나길 간절히 바라고 계셨다. 딸들은 출가외인이라고, 아들이 대를 이어가야 한다고 배우셨고 믿으셨기 때문이다.
“오빠는 더운 사막에 가서 고생하고 올케도 매일 나가서 일하는데 너희는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씀씀이라도 좀 줄이던지, 언제까지 이러고 살래? 고생하는 쟤네는 자식도 없고,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정말 속이 상해.”
시어머니가 드디어 딸에게 싫은 소릴 하셨다.
“엄마, 난 뭐 이렇게 살고 싶겠어. 좀만 더 기다려요. 둘째가 조금만 더 크면 나도 나가서 돈 벌게. 삼 년은 엄마가 애를 키워야 한다잖아요.”
딸이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며 대꾸한다.
사위는 매일 아침 외출은 하지만 이렇다 할 취직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형규가 돌아왔다. 살이 좀 빠지고 그을린 모습이긴 했지만 건강해 보였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보자마자 붙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아들과 생전 처음 이년이나 못 보고 살았다. 군대도 안 가고 면제받았던 귀한 아들이었다. 딸 내외가 들어와 사는 바람에 정신없이 세월이 흘러갔지만 늘 보고 싶어서 잠들기 전 사진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며느리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보낸 시간의 고삐가 풀리면서 어머니는 연신 눈물을 훔치셨다. 은경은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자신보다 어머니가 아들을 더 많이 보고 싶어 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란 저렇게 한없이 자식을 그리워하는 존재구나 생각하니 불현듯 그녀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남편도 자식도 다 떠나간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버지를 잃고 몸부림치던 어머니의 자태가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년 동안 형규가 매일 밤 떠올려 보았던 그들의 방.
아내의 고운 모습 모두 그대로였다.
그녀를 비롯하여 모든 물건이 그가 있던 그대로 제자리에 있었다.
형규는 은경의 부드럽고 따스한 가슴에 오랫동안 얼굴을 묻고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알맞은 크기의 새하얀 젖가슴, 비누 냄새와 로션 냄새가 살짝 섞인 듯 향긋한 달콤함이 마치 첫날밤 같은 흥분과 설레임을 불러일으켰다.
함부로 빨리 끝내버리고 싶지 않은, 오래오래 이 밤이 다 가도록 조금씩 꺼내 보고 싶은, 마술 상자를 안은 아이처럼 형규는 그녀의 속살 깊숙이 스며들었다.
오래오래 참았던 애정이 마치 폭포처럼 터져 나오는 듯 은경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과 함께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 사랑...”
은경이 아주 작지만 분명하게 속삭였다.
형규가 전에 자주 아내에게 속삭여 주었던 말을 은경이 처음으로 남편에게 보내었다.
형규는 다시 은경을 부서져라 껴안았다. 그들은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정신과 육체가 함께 하나가 된 시간은 영원 그 자체였다.
오랜 가뭄의 단비처럼 그들을 적시며 반짝거렸다. 이 밤이 아예 끝나도 좋을 만큼 충만한 희열이 솟구쳤다.
은경은 잠들기 전 내일 하룻밤은 어머니 방에서 자라고 말하였다.
“어머니께서 당신을 나보다 더 많이 보고 싶어 하셨어요. 내일은 어머니 방에서 이야기도 나누고 다리도 주물러 드리세요. 고관절 수술하시고 한 해 한 해가 다르다고 말씀하세요.”
은경은 주말에 연가를 내고 남편과 함께 친정을 다니러 갔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물결,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바다를 가르며 일어나는 새하얀 포말.
따스한 봄바람이 바다 내음을 훅 실어 왔다.
은경은 그곳에서 나서 20여 년을 함께 한 바다를 마치 오늘 처음 바라보는 듯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 헤엄치는 것을 배우며 콩돌해변을 놀이터로 뛰놀았던 어린 시절.
그 행복했던 시절의 푸른 바다가 그토록 무서운 바다가 될 줄 몰랐었다.
이제는 아버지 대신 남편의 손을 잡고 평온한 마음으로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다. 절망하며 막막했던 시간이 이렇게 변하기도 하는 것이 삶이구나 생각했다.
다시 소중한 남편의 얼굴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형규가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반가운 모녀의 포옹이 끝나고 남편과 이모네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차린 푸짐한 점심을 먹고 바쁘다며 돌아가는 이모를 배웅하는데, 이모가 은경을 잠깐 보자 했다.
“네 엄마와 함께 살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는데, 엄마가 한사코 마다하는구나. 자꾸 나이 드는데 서로 의지하고 살면 좋을 텐데... 엄마가 네 아버지랑 금슬이 좋긴 했지, 그래도 벌써 10년이나 지났잖아. 네가 좀 잘 말씀드려 봐.”
이모부와 초등학교 동창이라는데 상처한 지 삼 년 넘었고 작년에 막내아들을 결혼시켰다고 한다. 성실하고 믿을만한 사람이라며 이모는 동생이 다시 가정을 이루었으면 하였다.
은경이 오늘은 어머니와 자겠다며 형규를 건너방에 잠자리를 봐주었다.
어머니와 단둘이 한 이불을 덮고 누웠을 때 물었다.
“엄마, 아직도 아버지 생각 많이 나세요?”
“생각나지,.. 어떻게 네 아버지를 잊을 수 있겠니.”
“그래도 엄마 나이 드시는데 의지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 제가 모실 형편도 못 되고, 은수는 늘 옮겨 다니고... 그보다 엄마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으시잖아요.” 은경이 어머니의 희끗해지는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이모한테 이야기 들었구나. 괜찮은 사람이라지만, 난 다른 남자와 살고 싶지 않아. 이제는 혼자도 괜찮아. 혼자도 아니지. 곁에 언니도 있고 너희들도 있고... ”
어머니가 은경의 손을 쥐며 말했다.
“그래도 엄마, 나이 들수록 곁에 의지할 사람이 있어야 해요. 다시 생각해보세요. 난 엄마가, 좋은 분이라면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은경은 어머니의 손을 마주 꼭 잡았다.
은경은 어머니가 얼마나 아버지를 의지했는지 잘 안다.
성품이 순한 어머니가 그간 느꼈을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지 헤아리지 못한 것이 죄송했다. 이모네가 곁에 없었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모부는 처제인 어머니를 상시로 들여다보며 신경을 써 주었다. 늘상 함께 배를 타던 이모부가 죽음을 면했던 것은 그때 동서인 은경 아버지와 한배를 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전날 술병이 나서 배앓이가 심하여 승선하지 못했다. 술을 많이 마시는 이모부 때문에 자주 속이 상하는 이모는 술을 마시지 않는 동생의 남편을 늘 부러워했었는데, 그때는 인생이 새옹지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8. 임신
형규는 시험관 아기를 해서라도 아기를 낳겠다고 하는 은경에게 말했다.
“아기가 생기면 낳는 것이고 안 생기면 안 낳고 살 수도 있는 일이야. 또 입양을 할 수도 있고. 당신이 고생스러울 텐데, 꼭 하고 싶어? 나를 위해서라면 안 그래도 돼. 나는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아. 이미 조카들이 여럿 있으니 상관없어.”
“아니에요. 세상에 나서 자식으로 살아보았으니 이제 부모도 돼 보아야 정말 어른이 될 거 같아요. 안 그러면 세상 떠날 때 후회할 거 같아. 당신과 내가 만나서 사랑하였으니, 우리 아이를 낳고 싶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자식인 우리가 남아서 그분을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살아계시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렇게 삶이 이어져간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였어요.”
은경은 그의 품에서 고르게 숨 쉬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매일 저녁 시누이의 아기가 커가며 가족들에게 즐거운 웃음을 주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아기는 정말 신기하고 어여뻤다. 개구쟁이 큰조카는 벌써 미운 짓을 하며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였지만 토실토실 귀여운 아기가 배밀이를 하고 걸음마를 하는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철없고 이기적인 시누이의 아이였지만 얼마나 예쁜지 그 얼굴을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은경은 시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시험관 아기 시술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반드시 된다는 보장도 없는 일이었다. 당분간은 집안일도 예전처럼 할 수 없었지만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그동안 쌓아놓은 성실함으로 은경은 큰 어려움 없이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대신 딸에게 주방일을 하라고 명하였다. 그게 싫으면 이 집에서 살지 말고 나가라고 엄포를 놓았다. 딸은 화가 났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저녁밥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올케가 직장을 다니면서도 계속해 주었으니 할 말도 없었다.
형규가 서른일곱 살, 은경이 서른 살이 된 해였다.
어머니 세대는 자식을 서른 전에 다 나았다고 한다. 결혼을 일찍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산모도 아기도 건강하다고 모두들 이야기했다.
은경의 어머니도 그녀를 스물세 살에 낳았다. 아버지는 그때 서른세 살이었다. 두 분은 십칠 년을 살고 이별했으니 어머니의 나이 고작 마흔 살밖에 되지 않았었다.
은경은 짐작하지 못한 어머니의 십여 년 가슴 저렸을 세월을 남편과 헤어져 지내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머지않아 곧 돌아올 남편인데도 그리움이 가득하곤 했었다.
다시는 남편을 볼 수 없는 어머니의 가슴은, 당해본 사람 아니고서 어찌 짐작할 수 있겠는가! 은경은 매일 눈물을 멈추지 못하던 어머니를 보면서 진저리치며 달아나고 싶었다. 절망한 어머니를 떠났던 삼 년은 불효막심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슬프고 두려운 자식들을 위로해주지 못하고 몇 날 며칠 누워서 몸을 추스르지 못하던, 자신의 아픔을 그대로 드러내던 어머니가 싫었다. 그러나 이제는 충분히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검사를 마치고 며칠마다 병원에 가서 채혈했다. 배에 맞는 호르몬 주사도 주 일회 한 달간 맞았다.
진료실 앞 대기실에는 은경처럼 불임 여자들이 혼자, 또는 친정어머니와 함께 와 앉아 있었다. 며칠간 얼굴을 마주하자 몇몇 여자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통하고 있었다. 젊은 여자들의 화사한 모습과 달리 좀 나이 들어 보이는 한 여자는 우울한 표정으로 순서를 기다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만 하는 절박함이 불안하게 드러나 보였다. 벌써 다섯 번째 시도라는 그녀는 땅이 커지게 한숨을 쉬었다.
“실망하지 마세요. 제가 아는 사람은 열 번째 성공해서 아들을 낳았어요. 잘 되실 거예요.”
발랄한 옷차림의 젊은 여인이 그녀를 위로했다. 그녀가 진료실로 들어가자 은경에게 작은 소리로 말해주었다.
“저분, 아이 못 낳으면 이혼당할 거래요. 벌써 남편이 세컨드를 보았다고 하네요.”
은경은 좀 놀랐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차림과 달리 그녀의 삶은 불안정하여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형규가 정자 체취실로 들어가자 은경은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억지로 정자를 채취하기 위해 그가 곤혹스럽지나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은경이 부분마취를 한 후 난자 채취하고 나오자 병실 밖에서 기다렸던 형규가 얼른 와 은경의 손을 쥐고 수고했다며 다독거렸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당신까지 고생해서...”
은경이 기운없이 말했다.
“아냐. 누구 탓도. 살면서 겪는 일 중에 하나지. 당신이 많이 힘들지. 기운 내.“
형규는 유명 음식점으로 그녀를 데려가 맛있는 점심을 사주었다.
은경은 아랫도리가 뻐근하고 아파서 빨리 집에 가 눕고 싶었지만 남편을 생각해 참았다. 아이를 못 낳으면 이혼당할 거라던 여자가 생각나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그녀에 비하면 나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새삼 남편이 고맙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왜? 어디 아파?”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은경을 보고 형규가 묻는다.
“아니, 당신이 고마워서... 이렇게 다시 함께 다니니 정말 좋아요.”
은경은 눈물이 그렁한 채 웃는다.
형규는 자기가 없는 동안 아내가 동생네 식구까지 거두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없이 잘 견디어준 아내가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분가해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날 밤 은경의 생각을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요. 어머니께서 어떻게 생각할지... 좀 힘들긴 하지만, 우리가 나가 살겠다고 하면 어머니가 서운해하실 거 같아요. 또 아기를 낳게 되면 어머니 도움도 필요해요. 아기 볼 사람을 두어야겠지만 제가 낮에 없으니...”
“힘든데 당신이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없어?”
“아기를 생각하면 그만두고 내가 키우면 좋겠지만, 당신만 벌어서 두 집 살림을 어떻게 하겠어요. 어머니께 계속 생활비를 드려야 하는데, 당신 동생도 그렇고. 우리 노후까지 생각하면 그만둘 수가 없어요. 그래도 다른 직장보다는 안정된 직장이잖아요.”
은경의 현실적인 대답에 형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퇴가 빠른 자신의 직장보다 나은 점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일단 시험관 아기가 되는 일이 중요하니까 그 일만 신경 쓸게요, 요즘은 아가씨가 도와주어서 좀 나아요.”
은경은 이 년간 형규가 벌어온 돈을 모두 저축하였다. 대출을 좀 받으면 작은 평수의 빌라 정도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살림을 나겠다고 하면 분명히 어머니께서는 서운해하실 거다. 어머니가 당신 딸보다 그들 내외를 더 좋아하시는 걸 안다.
손주들이 예쁘고 딸을 대책 없이 내보낼 수 없어 함께 살지만 가끔씩 딸을 걱정하며 한숨을 내쉬곤 하셨다. 그러던 차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사위가 사업을 다시 시작한다고 지방에 내려가곤 했었는데, 그곳에 여자가 있었다.
하루는 시누이가 이상한 눈치를 채고 미행해보았던 모양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사업도 망한 주제에 여자까지, 이혼할 거야. 내가 정말 못 살아! 저런 인간인 줄 정말 몰랐다니까.”
어린 아들이 듣는 줄도 모르고 소리치며 이성을 잃는 딸에게 놀란 시어머니는 사위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제 사업을 도와 자금을 대준 동업자라 같이 있었던 건데 애들 엄마가 오해를 한 거예요. 장모님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사위의 말을 믿고 싶었다. 어린아이가 둘인데, 직장도 없는 딸을 떠맡게 되면 어떡하나 덜컥 겁도 났다. 그보다 손주들을 아비 없는 자식들이 되게 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시어머니는 우는 딸을 진정시키며 밤늦은 시간에 퇴근해 온 아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였다. 형규는 동생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은경에게 와서 상의했다.
“많이 힘든 매형이 아는 여자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시작한 것 같아.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동생이 괜한 말을 하는 건 아닐 거야. 더군다나 혼자 사는 여자라는데...” “이혼하자 안 하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하면 아가씬 못 이기는 척 덮어주고 우선은 사업을 할 수 있게 해야지요. 얼마나 도움이 절실하면 그랬겠어요. 지금 아가씨가 이혼한다고 나아지는 게 없잖아요. 스스로 먹고살 대책을 세운 후에 이혼하던지 해야지... 아이들 생각해서 좀 참고 기다려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은경은 차분하게 말했다.
형규는 마음 같아서는 제가 벌어 온 돈이라도 다 주면서 제부가 그 여자와의 관계를 정리하게 하고 싶었지만 은경에게 말하지 못하였다. 분가할까 제안했었기 때문이었다.
은경은 철없는 시누이가 처가살이하는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것 같았다. 돈을 쓸 줄만 알았지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시누이에게 벌어진 불행한 일이었다.
“절대 안정을 취하고 쉬셔야 합니다. 수정란이 잘 착상되어야 하거든요.”
의사는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은경은 결혼할 때 일주일 연가를 받은 후로 일 년에 하루 정도의 연가를 주말에 이어 사용했을 뿐 공무원법에 명시된 연가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근무했다. 한 사람이 쉬면 동료들의 일손이 그만큼 바빠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연가는 물론 병가까지 내야 할 것 같았다. 비용이 많이 든 만큼 실패하지 않고 임신을 꼭 하고 싶었다.
“그동안 꼭 자식을 보게 해 달라고 하루도 쉬지 않고 기도했단다. 아가, 집안일은 하지 말고 편히 몸조리하거라.”
어머니가 시누이 앞에서 들으라는 듯 말씀하셨다.
“아가씨, 미안해요. 부탁할게요.”
은경은 시누이에게 그녀가 장 보던 식비에 수고비까지 얹어 주었다.
일주일 병가를 내고 식사 시간 외에는 이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형규가 출근하면 간단히 청소하고 건넛방 서재에 가득 꽂힌 책들에서 한 권을 꺼내 몇 시간이고 읽었다. 좀 피곤하면 남편이 사다 들려주던 음반을 꺼내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고 쉬었다.
태교 음악이라는 명상 음악과 잔잔한 클래식 선율이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형규는 클래식부터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음악을 즐겼다. 은경은 그의 덕에 여러 장르의 음악을 접하며 아름다운 선율에 마음을 빼앗겼다.
오페라 곡, 샹송, 재즈, 팝송, 음유시인이자 가수인 조동진의 노래도 좋았다. 김수철, 양희은, 송창식과 윤형주의 튄 폴리오 음반도 들었다. 뛰놀던 어린 시절 이후 처음 맛보는 달콤하고 편안한 휴식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를 경험하면서 생각지 않았던 여유로운 행복감이 밀려왔다. 일을 안 하고 쉰다는 게 어색하고 좀 불안하기까지 했던 느낌도 잠시, 고단했던 몸을 쉬며 느긋하게 오전을 즐기는 시간, 세상이 진정 평화롭게 느껴졌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주부들은 이렇게 여유롭게 살겠구나. 아이들을 여럿 키우는 주부는 그렇지도 않겠지만...
은경의 어머니만 해도 자식 키우고 살림하며 식당 일까지 분주하고 고단한 한평생을 사셨다. 도시의 부유한 주부들이 누리는 한가함을 은경은 잠시 누려보며 행복했다.
검사를 하러 병원에 가기 며칠 전부터 젖가슴이 부푸는 듯하고 미열이 났다.
은경은 임신이 된 것처럼 미세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제발 한 번에 성공하기를 하느님께 빌었다. 신앙심도 없이 어머니를 거역하지 않으려고 삼 년이나 매주 교회에 갔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임신이 되게 해주세요 기도했다. 사실은 남편이 해외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탈 없이 돌아온 것만도 정말 감사하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으니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 인간이다.
시어머니께 하나님을 안 믿어서 벌을 받는다는 소리를 안 들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순종하며 성실하게 산 덕에 시어머니의 후원을 받으며 이 시술을 할 수 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 또 이 시술을 하게 될까 봐 애가 탔다.
의사가 ‘임신 됐습니다. 이제부터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말하자 은경은 긴장이 풀리며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 감사합니다.’ 두 손을 꼭 쥐고 말했다.
세상에, 두 남녀의 몸에서 채취한 난자와 정자를 시험관에서 수정시켜 그 수정란을 자궁에 착상시켜 임신을 할 수 있게 하다니, 얼마나 놀라운 의술의 발전인가!
창조주 하나님만 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을 의사들이 해낸 거다. 그 의료혜택을 은경이 누린 사실이 꿈만 같았다.
하나님이 해 주셨든 의사들이 하였든 임신했다는 사실에 은경은 벅찬 감동과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이, 남편과 하나가 되는 찬란한 기쁨 후 늘 허망한 마음으로 그 흔적을 씻어내었던 수많은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살다 보면 이렇게 기쁜 순간이 오는구나!
은경은 진정하기 어려운 마음을 심호흡하며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들어서기 무섭게 소리쳤다.
“어머니, 저 임신 됐어요.”
은경은 어머니 방문을 열고 다시 한번 크게 말했다.
어머니는 누워계시다가 벌떡 일어나 나오며 은경의 손을 잡았다.
“아이구, 장하다. 우리 아가. 네가 착해서 복 받았구나.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
어머니는 아들이 퇴근해 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직장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했다. 퇴근해 온 형규의 손에는 한 아름 장미꽃다발이 들려있었다. 분홍빛 장미꽃다발을 받은 은경이 꽃향기를 맡으며 미소 지었다.
시누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임신했던 때를 떠올렸다.
결혼하기 전 임신부터 해서 부모님들을 염려하게 하고 서둘러 결혼 날짜를 잡아 결혼했었다. 당연히 누구나 하는 임신이었으며 출산이었다. 아들을 낳았지만 바쁜 그녀의 남편은 ‘고생했어’ 한 마디가 다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친정에서 산후조리도 못하고 장례를 치루었던 생각이 났다.
삼 년이나 아기를 기다리던 올케의 임신은 그야말로 집안의 경사였다.
시누이는 아들의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제 방으로 들어갔다. 함께 기뻐해주고 싶었지만 지금 그녀의 처지가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은경은 화병을 꺼내 장미꽃을 한 송이만 빼놓고는 모두 담아서 시누이의 방으로 가져갔다.
“아가씨, 아가씨가 도와주어서 임신했어요. 고마워요,”
은경이 화병을 화장대 위에 놓으며 큰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누이는 쓸쓸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답을 했다.
9. 출산
차비를 제외한 은경의 월급을 모두 시누이에게 주면서 은경은 아래층 집안일에서 벗어났다. 시어머니는 설거지도 못하게 어서 이층으로 올라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입덧이 시작되고 시도 때도 없이 음식 냄새에 헛구역질이 나서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연가도 일주일 이상 사용하기 싫어서 다시 출근하였다. 직장에서는 동료들이 돌아가며 은경의 편의를 봐주었다. 전염병이나 불치병이 아닌 이상 휴직을 할 수 없는 규정이었다.
은경은 폐를 끼치는 게 싫지만 어렵게 한 임신을 실패할까 봐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 잘 먹을 수 없어서 지치고 힘이 들었다. 가져갔던 도시락조차 먹지 못하고 도로 가져와 집에서 먹기도 하였다.
한겨울인데도 차가운 얼음이 먹고 싶었다.
매일 먹은 것을 토하는 통에 기운이 없어 어지럽기까지 하였다. 간신히 근무 시간을 버티고 집에 와서는 축 늘어졌다. 이상이 생겼나 걱정이 되었지만 의사는 입덧이 심한 것이라며 안정을 취하고 쉬어야 한다고 했다.
영양제 주사를 맞고 돌아오면서 생명을 잉태하는 일이 이렇게나 어렵고 힘든 일인 줄 예전에는 알지 못했었다.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도 이렇게 입덧이 심하셨을까? 오늘은 어머니께 전화를 해보아야겠다. 은경은 겪어보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을 임신의 고통을 겪으면서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였다.
“엄마, 저 가졌을 때 입덧 많이 하셨어요?”
은경이 집에 돌아와 전화했다.
“아이구, 너 입덧이 심하구나. 어쩌냐. 나 닮았으면 고생하겠네. 네 아빠 아니었으면 못 견딜 만큼 너무 심해서 한동안은 아예 누워 지내다시피 했는데... 큰일이구나.”
은경이 지난달 시험관 아기가 착상되자마자 어머니께 전화했었다. 그때 정말 기뻐하시며 몸조심할 것을 당부하셨다. 딸이 지례 겁먹을까 봐 입덧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었다.
“괜찮아요. 오늘 병원에서 영양제 맞고 왔어요. 집안일은 안 하고 쉬니 걱정하지 마세요. 또 전화드릴게요.”
은경은 어머니 목소리를 듣자 많이 보고 싶었다.
자식을 낳아 키우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그 일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경은 직장을 제대로 다니지 못할 것 같아 고민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형규가 버는 월급만으로도 살 수 있지만, 자식이 태어나고 은퇴 시기가 빠른 일반 회사를 다니는 형규가 퇴직하는 시기가 오면 살림이 어려워질 것 같아 섣불리 사표를 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어머니를 모시고 시누이까지 함께 살려면 은경이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버티는 데까지 버티어볼 수밖에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이 와중에 살림을 분가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시누이는 안 살겠다고 큰소리 쳤지만 감정을 가라앉히고 생각하니 아비 없이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이 두려웠는지 잠잠히 지내고 있었다. 그녀는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 둘을 돌보는 바쁜 하루하루가 오히려 골치 아픈 일들을 잊게 해주는 것 같았다. 또한 제가 일해서 올케에게 받은 돈으로 남편이 돈을 안 갖다줘도 살 수 있는 게 다행스러웠다.
십여 년을 온종일 바쁘게 일하며 살아온 은경은 직장에서 돌아와 식사하고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고 저녁 시간을 보내니 마치 해야 할 일을 안 한 것처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편안해서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구토만 하지 않으면 별로 힘든 줄 모르겠는데, 한 번씩 몽땅 토하고 나면 축 늘어지는 게 기력을 차릴 수 없었다.
형규는 은경이 걱정되어 잠자리를 삼간 지 몇 달이 지났다. 일어나는 성욕을 참기 힘들다며 아예 방을 옮겨 은경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은경은 미안한 마음에 잠들기 전 그에게 가서 다정한 포옹과 입맞춤을 하고 얼른 빠져나왔다. 때로는 은경 역시 애욕을 누르기 쉽지 않았다. 남자만 자위를 하는 게 아니라 여자들도 자위를 할 수 있겠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형규는 가끔은 참지 못하고 자위하며 혼자 잠드는 시간을 견디었다. 그러나 혼자 맛보는 사정의 쾌감은 순간적 희열일 뿐 정신적 만족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은경의 입덧이 점차 줄어들고 안정되어 가면서 식욕이 왕성해져서 시도 때도 없이 간식이 먹고 싶었다. 동료들 앞에서 혼자 먹을 수도 없어서 정 허기가 지면 잠깐 나가서 요기해야 할 정도였다. 체중이 늘어나고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어느 날 업무를 보다 깜짝 놀라 순간 숨을 멈추었다.
배 속에서 태아가 발길질을 시작하였다. 이 갑작스러운 신기한 경험에 두 손을 배에 얹고 집중하여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나 생명의 태동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듯 잠잠하였다.
은경은 집에 오자마자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손을 얹어 생명의 움직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내시경으로 보던 희미한 태아의 모습은 아이라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였지 그리 실감나지 않았었다. 근데 은경의 배를 툭툭 차내는 그 태동이라니! 은경은 절로 웃음이 나오면서 그간 한 고생을 까맣게 잊었다.
세상일이란 어느 하나 고생 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는지 운 좋게도 은경은 쌍둥이를 가졌다. 그러니 식욕이 더 왕성할 수밖에 없었다.
시어머니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은경은 졸지에 본의 아니게 상전이 된 느낌마저 들었다. 힘들게 동료들 눈치 보며 조퇴와 병가, 연가까지 내면서 가까스로 버티어 온 직장생활이라 은경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출산의 고통을 한 번 치루고 두 아이를 얻게 되다니 그동안 맘 졸였던 마음고생이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과연 내가 두 아이를 무사히 출산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행여 아이들에게 장애라도 있지는 않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태교에 좋다는 음악을 자주 듣고 좋은 생각만 하고 영양가를 고려하여 좋은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려고 책을 찾아보며 신경을 썼다.
출산일을 한 달여 남겨 둔 은경은 너무 몸이 무거워 도저히 더는 직장에 나가기 힘들었다. 웬만하면 잘 참는 그녀였지만 가슴이 치받혀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시누이가 물려준 임신복이 헐렁하니 넉넉했지만 갑갑해서 브레지어도 할 수 없었다.
태아가 둘이나 자라고 있으니 얼마나 비좁겠는가!
은경이 남산만 한 배가 부끄러워 싫다고 해도 형규는 사흘이 멀다 배 안에서 자라고 있는 두 생명의 태동을 느끼기 위해 가만히 귀를 대보았다. 어떤 날은 은경이 업무가 많아 무리라도 하면 마치 이 녀석들이 이상이라도 생긴 듯 배가 단단하게 뭉쳐 그녀를 놀라게 했다.
밤에 돌아온 형규가 걱정하는 은경을 다독거리며 배에 콜드크림을 바르고 마사지를 해주었다.
“아가, 오늘 힘들었구나. 엄마는 더 힘들었단다. 이제 괜찮아. 사랑한다.”
형규가 속삭였다. 동생이 마사지를 자주 해야 뱃살이 트지 않는다고 오빠에게 말해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경은 형규의 애정 가득한 손길에 힘들었던 하루의 노고를 잊고 편안히 잠들었다.
결국 한 달밖에 안 되는 산가를 일주일 미리 내고 쉬기로 했다.
시어머니는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애쓰는 며느리가 안쓰럽고 미안하여 뭐라도 하나 더 먹이려고 주방에 나오시곤 했다. 그 덕에 은경은 매일 좋아하는 생선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시누이는 생선 비린내가 싫다며 코를 막고 환풍기는 물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출산일보다 사흘 뒤늦게 미세하게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은경은 얼른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한 후 마음의 준비를 하며 병원에 갈 채비를 하였다.
“언니, 이제 고생 시작이야. 그래도 배 안에 있을 때가 나아.”
시누이가 웃으며 말한다.
시누이가 택시를 부르러 나가고 은경은 시어머니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섰다.
마당에는 연보라색 라일락꽃 향기가 그윽하게 퍼지는 봄날이었다.
시누이가 아이를 낳은, 은경이 시험관 아기 시술을 받은 산부인과 병원에 도착하였을 때는 그녀의 진통이 조금씩 잦아졌다. 진통은 고통스럽게 일어났다가 잠깐 잠잠해졌다를 반복했다. 몸이 산산조각 나는 극심한 통증으로 신음하다 깜박 졸기도 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의사는 자연분만의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며 제왕절개 수술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 아이의 위치가 좀 불안정하여 순산하기 어렵겠다고 한다.
퇴근 시간 보다 서둘러 병원에 온 형규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였다. 은경의 손을 잡고 무사히 출산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은경은 진통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길어지자 땀을 흘리며 지쳐갔다. 이러다 내가 죽는 건 아닐까 왈칵 두려움이 밀려올 만큼 통증이 격렬했다. 은경의 두려움을 눈치챈 형규는 의사에게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의사가 다시 한번 은경의 상태를 확인하였다. 은경이 힘없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선생님, 자연분만 못하나요?”
“안 되겠어요. 태아는 물론 산모까지 위험할 거 같아요.”
의사는 마취를 준비시켰다.
은경이 수술실에 들어가고 30여 분 기다리는 동안 형규는 입이 바짝 마르며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간혹 산모나 태아가 죽기도 한다는데 사랑하는 아내가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복도를 서성대며 안절부절못했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이 쉬울 리 있겠냐마는 아내 혼자 저리 애쓰는 것을 보자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여자라는 존재의 숭고함이 느껴졌다.
아이를 갖는 일도 그리 힘들었는데, 낳는 일은 그에 비길 데가 아닌 만큼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나의 어머니도 저리 힘들게 나를 낳고 키우셨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식을 낳고 키워보아야 부모의 은혜를 안다는 말이구나 생각하며 이제는 늙은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눈을 감고 기도하고 계셨다.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
은경이 정신을 차리자 시어머니와 남편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보, 정신 들어? 아유, 고생했어. 녀석들 다 건강해.”
형규는 은경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은경의 눈이 젖으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이들이 탈 없이 건강하다는 말에 정말 기뻤다.
“아가. 정말 애썼다. 진즉에 처음부터 수술했더라면 그 고생을 안 했을걸.”
시어머니가 혀를 차신다.
형규는 어젯밤 병실 쪽 침대에서 눈을 붙이고 늦었지만 출근하려고 은경의 손에 입을 맞추고 병실을 나갔다.
친정어머니가 소식을 듣고 오셨다.
은경은 아직 걸을 수 없어서 아이를 보러 가지 못했다. 사돈어른 두 분이 신생아실로 아이를 보러 갔다. 간호사 둘이 아이를 각각 안고 보여주었다. 정상체중의 두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아직은 누굴 닮았는지 알 수 없는 갓난아이 둘을 무사히 출산한 딸이 대견하여 친정어머니는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이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아들보다 큰 딸인 은경을 더욱 속 깊이 사랑했던 남편이었다. 딸은 그런 아빠를 잃고 얼마나 상실감이 컸을까 어머니는 이제야 제 슬픔에 빠져서 딸을 제대로 보듬지 못했던 것 같아 얼굴을 돌리며 눈물을 닦았다.
이제는 당신처럼 두 아이의 어미가 된 딸이 자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은경아, 애썼어, 많이 힘들었지?”
눈물이 그렁한 채 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엄마, 엄마도 이렇게 힘들게 절 낳아 키우셨다는 걸 이제 알겠어요. 감사해요.”
친정어머니께서 웃으며 시어머니께 말씀하셨다.
“사돈, 오늘은 제가 여기 있을 테니 집에 들어가 좀 쉬셔요.”
“그럼 함께 뭐라도 좀 먹고 들어갈게요.”
시어머니가 사돈의 손을 잡고 병실을 나갔다. 병원 앞 식당에서 말없이 식사하는 사돈에게 시어머니가 말했다.
“따님을 잘 키우셨어요. 속이 깊고 부지런해서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사돈께 감사해요. 쌍둥이 아들까지 낳았으니 그런 복덩이가 더 없네요. 그동안 많이 보고 싶으셨지요?”
“네, 보고 싶기야 했지요. 그래도 시댁 식구와 잘 살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어요.”
“직장을 안 다녀도 되는데, 고생해서 고맙고 미안해요.”
시어머니가 진심으로 말했다.
“우리 애가 힘들게 얻은 직장이니까요. 근데 이젠 아이 둘을 키우려면 계속 다닐 수 있을까요?”
“이젠 그만두어야지요. 우리 아들이 버는 것으로도 사는데 충분해요.”
시어머니는 사돈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었다. 지금 며느리가 딸에게 월급을 거의 모두 주다시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돈을 집에 가자고 하지 못하는 것도 딸이 와 함께 살고있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딸이 독립하지 못하면 아들이 버는 돈만으로는 모든 식구가 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사돈에게 사실대로 말하기 싫었다.
시집간 딸이 그렇게 궁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며느리가 착하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집안이 편안하지 못할 큰일이었다.
10. 가족
형규는 두 아들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자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하니 귀하기 이를 데 없을 뿐만 아니라 꼬물거리고 움직이는 생명의 신비함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아기가 형규의 손가락을 꼭 쥐면 짜릿한 전율이 느껴질 만큼 사랑스러웠다.
아내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모습은 한 폭의 성화처럼 아름다웠다.
둘이 함께 울어댈 때는 형규가 붙어 앉아 아내의 양쪽 가슴을 모두 내주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아내는 미리 한 아이씩 안고 먹였다.
젖이 부른 은경의 풍만한 가슴은 더욱 매혹적이었다. 아빠로서 느끼는 감동이 형규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조카들을 보며 느꼈던 사랑스러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저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았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아야 어른이 된다고 하던 어른들 말씀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형규는 사진을 붙이며 육아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은경은 그런 자상한 남편을 보면서 말할 수 없이 기쁘고 든든했다. 이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달게 할 것이었다.
집안에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활기가 가득하였다. 어른들의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마당에는 새하얀 기저귀가 바람에 너풀거리며 라일락 향기를 실어 나르는 봄이 한창이었다.
잠잠했던 시누이 내외가 크게 부딪히면서 싸운 날 시누이 남편이 집을 나갔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이층까지 들리고 은경은 내려가 보아야 하나 망설여졌다. 그들 부부싸움에 관여하고 싶지 않지만 놀라고 당황하실 시어머니가 신경 쓰여 잠자는 아기를 살펴보고 내려가 시어머니 방문을 노크하였다. 시어머니는 큰손주와 아기를 어르며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어머니.”
은경이 곁에 앉으며 가만히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떡하면 좋으냐? 이 노릇을... 얘 좀 데리고 올라가 있거라”
큰손주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가라고 하신다.
은경은 조카를 데리고 방을 나가는데 큰소리가 밖으로 들린다
“그래, 나도 너 같은 인간하고는 더 살기 싫어. 그년한테나 가! 당신 아니면 못 살 줄 알아?”
“그러니까 이혼하자구!”
은경이 계단을 다 올라가기도 전에 문을 박차고 나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은경의 마음이 철렁해진다. 아이들을 어떡하려고 저러나... 큰 조카가 울면서 은경의 손을 꼭 잡는다. 은경은 조카를 안고 말했다.
“괜찮아.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싸울 때가 있는 거야. 괜찮으니까 울지 마. 착하지?”
“아빠랑 엄마 헤어져요?”
조카가 울음을 멈추며 물었다.
“아냐, 잠깐 나갔다 다시 오실 거야.”
은경이 조카의 등을 쓰다듬었다.
형규가 퇴근해 와 훌쩍이며 하소연하는 동생의 이야기를 듣는다.
두 사람의 화합은 불가능해 보였다. 동생은 남편을 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륜이 의심되는 여자에게 내몰고 있었다.
“정말 남편과 이혼하고 싶은 거야? 아님 헤어지긴 싫은데 화가 나서 그러는 거야?” 형규가 차분하게 물었다.
“오빠, 우리 같이 안 잔 게 일 년도 넘었어. 그 여자한테 빠져서 그래. 나한테 욕까지 했어.”
“그 사람 위자료 줄 돈도 없잖아, 어떻게 애들 키우려고 그래.”
형규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키울 수 있어, 그 인간 얼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시누이가 결심한 듯 말했다.
남편의 말을 들은 은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격양된 감정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한들 그녀에게 위로가 되겠는가. 불같이 열정적으로 연애를 하고 3개월 만에 결혼했다는 그들이었다. 그리고 6년이 좀 지났는데 서로를 미워하며 헤어지겠다고 한다.
시누이 딴에는 남편이 정리하길 바라며 일 년을 기다리고 참은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사업상 자본을 대고 있는 동업자를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랑했던 남편에게 배신당한 시누이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겠는가!
은경이라면 사랑했던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애들을 키우며 기다릴 것도 같은데 그녀는 할 수 없나 보다. 사랑을 주고받아야 하는 젊은 나이이기 때문이다.
애들을 돌보려면 직장을 구할 수도 없는데 그녀는 오빠 내외를 믿고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은경은 지금 당장은 사는데 문제 없으니 미리 걱정을 하지는 말자 생각했다.
아이 둘을 돌보는 일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만큼 분주했다.
밤중에도 깨어 한두 번씩 수유해야 했다. 한 아이가 깨면 반드시 또 한 아이가 깨었다. 형규는 한 아이가 젖을 먹는 동안 한 아이를 안고 어르면서 함께 잠을 설쳤다.
은경은 아기들이 잠자는 틈틈이 청소와 세탁을 하였다.
남편이 늦는 날은 아기들을 혼자 번갈아 가며 씻겼다. 벨벳 천처럼 부드러운 아기의 피부를 만지며 사랑스러움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기들이 은경의 젖꼭지를 빨 때 느끼는 그 짜릿하고 달콤한 느낌은 남편과 사랑을 나눌 때 느끼는 희열과는 많이 다른 숭고한 기쁨이었다.
열 달을 그녀의 몸속에 살아있다가 죽을 것만 같은 고통으로 낳은 생명.
그들과 나누는 뜨거운 교감은 그들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줄 수 있는 희생과 헌신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은경은 어여쁜 아기들로 인해 세상을 다시 사는 것 같았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조금도 힘든 줄 모르는 즐거운 일이었다.
형규는 은경의 배 가운데 길게 난 수술 자국에 입 맞추며 말했다.
“녀석들, 이렇게 엄마 몸에 깊은 자국을 남겼구나. 효도 안 했다가는 혼날 줄 알어.”
“뭘,.. 이렇게 예쁜 애들을 얻었는데, 효도는 벌써 다 했어요.”
은경이 아기들 볼에 번갈아 뽀뽀하며 웃는다.
그녀는 세상의 어떤 여자도 부럽지 않을 만큼, 정말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은경의 몸이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형규는 수시로 일어나는 성욕을 참을 수 없어 힘들었다. 전보다 아내가 더욱 사랑스럽고 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 전부를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다시없을 어여쁜 아내였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를 돌보며 육아일기를 쓰는 지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엾은 동생일랑 형규의 행복에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당장은 그들의 월급으로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한 달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아이를 낳은 지 26일이 지났을 뿐이었다. 남편이 어렵게 휴가를 내고 며칠 보살펴주었을 뿐, 시누이가 미역국을 끓이고 식사를 해주는 일 외에는 아이 돌보는 일을 모두 은경이 혼자서 하였다.
이제 출근해야 한다고 하니 시어머니께서 걱정하신다.
“한 달도 못 쉬고 일을 나가는구나. 괜찮겠니?”
“네 어머니. 근데 아가씨가 애 셋이나 보려면 힘들 텐데... 아무래도 사람을 좀 써야 할 것 같아요.”
은경은 시누이를 보며 말했다.
“내가 해보고 정 힘들면 그럴게요. 우선은 어머니도 계시고 하니까 그냥 해 보고...”
시누이는 싫어라 않고 순하게 말했다.
자신이 힘든 게 문제가 아니었다. 올케가 주는 생활비가 다른 사람에게 가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은경은 새벽에 일어나 우유병을 모두 소독하고 끓인 물을 보온병에 담아 놓았다.
한 아이를 뒤로 업고 또 한 아이는 앞으로 안은 채 내려가 시어머니를 웃게 하였다. 도무지 꾀를 부릴 줄 모르는 며느리가 여간 미덥지 않았다.
출근하기 전 아이들에게 수유하고 좀 더 짠 모유를 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며칠 전부터 모유와 분유를 섞어서 먹이며 아이들이 적응하게 하였다.
아이들은 별 탈 없이 섞은 우유를 먹고 트림하였다. 변 상태도 좋았다.
은경은 수유 후 아기를 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우리 예쁜 아가, 내 생명을 나눠 가진 아가. 무럭무럭 잘 커야 돼.”
노래를 부르듯 주문을 외듯 두 아이에게 똑같이 말해주었다.
두 아이는 한배에서 같은 시간에 나왔는데 좀 다른 것 같았다.
얼굴이나 체격은 비슷하게 생겼는데 성질은 달라 보였다.
먼저 꺼냈다는 정민은 아주 순하여 잠을 잘 자고 젖도 더 많이 먹었다. 뒤이어 나온 정기는 예민한 듯 더러 보채며 먹는 양도 정민이만 못했다.
모두 머리숱도 많고 피부도 깨끗했다. 이목구비가 조금 더 드러나자 두 사람을 적당히 섞은 모습을 보였다. 오똑하니 잘생긴 코는 영낙 없이 아빠를 닮았다. 눈은 아빠보다 새까만 눈망울이 커다란 엄마를 닮았다.
부부는 어디 한 군데 장애가 없이 태어난 사실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마냥 감사했다. 그 어린 생명들의 움직임을 보는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직장동료들의 인사를 받으며 쉬었던 업무를 시작하고 외근을 나갈 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 왔는데 그만 힘이 없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약간 어지럽기까지 하였다.
집에서는 몰랐는데 몸이 아직 회복이 덜 된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며 물을 천천히 마셨다. 아가들은 울지 않고 잘 지내고 있을까? 시누이가 자기 아이 둘만도 돌보기 힘들 텐데...
누워있는 아기들이지만 그래도 손이 많이 가는데 시누이가 잘 돌보는지 염려가 되었다. 시어머니가 함께 계시니 그래도 좀 마음이 놓인다. 얼마나 귀애하며 기뻐하시는지 딸 때문에 속상한 마음을 아기들에게서 위안받으셨다.
은경은 전화를 걸어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업무에 몰두하였다.
시누이는 결국 남편과 이혼하였다.
상대방 여자가 선심을 썼는지 약간의 위자료를 받고 그들은 남남이 되었다.
이미 두 사람의 마음이 돌아선 일을 가족들이 돌려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은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식과 헤어질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철없는 시누이가 아이들을 남편에게 보내지 않고 키우겠다고 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시어머니도 남편도 은경도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고 받아들였다.
시어머니는 딸이 이혼한 사실이 남부끄러워서 구역예배를 보러 온 신도들에게 사위가 해외 출장을 가서 잠깐 와있다며 거짓말을 하였다.
은경이 출근한 첫날 시누이는 제 아이를 업고 집안일을 하였다. 잠깐만 방심해도 큰 녀석이 돌아다니며 크고 작은 사고를 연달아 일으켰다. 시어머니가 지키느라 지키는데도 어찌나 부산스러운지 내빼기 일쑤였다.
오늘도 상에 올려놓은 쌍둥이들의 모유병을 엎질러 다시 타야 했다. 은경이 준비해놓고 간 모유가 없어져 분유만 타면서 좀 걱정이 되었다.
정기는 빨리 달라고 울음을 터트렸다. 한 아이가 울면 연쇄반응처럼 두 아이가 따라 운다. 아기들의 울음이 합창처럼 집안을 가득 채웠다. 시누이가 비명을 지르며 얼른 우유를 타서 정기 입에 물리고 시어머니는 정민을 안고 우유를 먹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웃으신다.
“아휴, 내가 저 녀석 땜에 못 살아.”
시누이가 아들을 보면서 눈을 흘긴다.
남편 때문일까? 아들이 말썽을 부릴 때마다 점점 더 큰소리를 지르며 아들을 미워했다. 아들은 제 잘못을 알고 벽에 바짝 붙어 서서 엄마 눈치를 본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는데 엄마가 화를 낸다.
“뭘 보고 있어. 빨리 화장실에 가서 걸레 가져와!”
시누이가 소리를 지른다.
아들이 우유가 쏟아진 자리를 걸레로 닦는다. 시누이는 순간 아들의 조그만 손이 걸레질하는 것을 보자 가여운 마음이 들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인간 때문이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그녀는 정기를 내려놓고 우유병들을 닦으면서 지난번 만났던 변호사가 생각났다.
그녀는 상간녀 소송과 위자료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만난 변호사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다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는 학창 시절 한 반 친구였던 동창의 오빠였다.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이야기해주던 그에게서 큰 위로를 받았었다. 그 덕분에 일 처리는 잘 되었고 약간의 위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오늘 저녁은 답례로 그와 저녁 식사 약속을 하였다. 그녀는 나갈 준비를 다하고 올케가 어서 오길 기다렸다.
정기가 온몸에 발긋발긋 두드러기가 심하고 약간 설사를 했다.
정민은 심하지 않았지만 정기가 울면 입을 삐죽거리다 함께 울었다.
퇴근해 온 은경은 놀라며 병원 문을 닫은 시간이라 응급실로 달려갔다.
땀띠가 난 거란다.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너무 덥게 해서 열이 많은 정기 몸에 땀띠가 확 솟은 거였다. 뜨거운 방에 시어머니가 덮으시는 겨울 솜이불을 종일 덮어준 탓이었다.
“애가 좀 더웠나 봐요. 땀띠라고 하네요.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래요.”
은경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시어머니는 ‘예전엔 다 그렇게 키웠는데...’ 생각하면서도 며느리에게 미안했다.
은경은 아까 놀랐던 게 생각나 두 아이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은경이 나가자마자 며칠 안 되어 아이들에게 탈이 난 게 속상했다. 말도 못하고 얼마나 괴로웠을까...
은경은 제때 수유하지 못하자 젖가슴이 아팠다.
아침에 남김없이 짜냈지만 오후가 되면 불은 젖가슴이 몸살을 했다.
조금만 참자 스스로를 달래며 은경은 집에 오자마자 손을 씻기 무섭게 바로 아이들에게 차례로 젖을 먹였다.
아! 살 것 같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런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가득한 게 어미라는 존재구나 생각하며 아이들을 눕히고 주방으로 나갔다.
“아가씨는요?”
시누이의 아기를 업고 식사를 차리는 시어머니를 보고 은경이 물었다.
아까는 들어오면서 너무 가슴이 아파 경황이 없어서 그녀가 없는지도 몰랐다.
“볼일이 있다고 너 들어오기 바로 전에 나갔어.”
시어머니는 국을 떠주면서 말했다.
은경은 시어머니가 업고 있는 조카를 받아 안고 이유식을 떠먹였다.
시어머니는 서둘러 식사하고는 손녀를 다시 받아 안고 은경이 편하게 식사하도록 해주었다. 이제 아장아장 걷는 손녀의 재롱이 여간 귀엽지 않지만 부산한 큰손주까지 돌보느라 힘에 부치는 것을 느껴야 했다.
형규가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은경은 함께 두 이이를 목욕시켰다.
단독주택인 이층 양옥집은 해가 떨어지면 아이들에게 좀 추운 것 같아 전기난로를 켜고 아기 욕조에 더운물을 채워놓고 한 명씩 씻겨주었다.
형규는 아이들 목욕 시키는 걸 아주 즐거워했다. 인형처럼 작고 포동포동한 귀여운 몸을 씻기다 보면 웃음꽃이 절로 피어나며 행복했다.
삶의 행복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그들과 나누는 교감으로 가슴이 따뜻해질 때,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형규는 동생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아팠지만 그가 지닌 행복이 감사하기만 했다.
아이들을 낳은 이후 직장생활을 더 활기차게 했다. 해외 근무 후 승진해서가 아니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든든히 지켜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에게 힘을 실어주며 어려운 일도 기꺼이 신바람 나서 일할 수 있게 하였다.
11. 빈자리
형규가 해외 근무를 하면서부터 그의 월급이 은경의 통장으로 모두 들어왔다. 그는 돌아와서도 은경에게 일정량의 용돈을 받아 쓸 뿐 모든 경제권을 은경에게 넘겼다. 검소하고 알뜰한 아내가 자신보다 훨씬 관리를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내였다. 무엇보다 여동생과 함께 살면서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는 아내가 감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월급을 거의 모두 동생에게 준다는 것을 어머니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형규는 착한 아내가 너무도 고마웠다.
은경은 결혼하기 전부터 들었던 주택 청약부금을 팔년째 넣어왔다.
어머니의 고관절 수술, 시험관 아기 시술과 제왕절개 수술 등으로 예상치 않았던 비용이 많이 나갔지만 남편 월급의 반 이상을 꾸준히 적금에 붓고 있었다. 그래서 돈을 빌리지 않고도 그 비용들을 모두 감당할 수 있었다.
지금 살고있는 집은 어머니와 시누이가 살 수 있도록 자신들이 분가해 나가기 위해서는 아파트 분양이라도 받아야 해서 직장을 그만둘 수 없었다. 다행히 시누이가 애들을 봐주고 있으니 서로 좋은 일이다 생각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기들을 손수 키우면 당장은 좋겠지만 애들이 좀 자라고 남편이 조기퇴직이라도 하면 어떻게 노후대책을 세울 수 있겠는가. 벌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전문성이 없는 시누이가 당장 나가서 벌 수 있는 일이 자신보다 나을 게 없다고 생각되었다. 인물이 고운 시누이가 자칫 잘못해 유흥업에라도 뛰어들면 안 되었다. 시어머니에게 귀한 딸이고 남편에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니 은경에게도 소중한 동생이라고 생각하였다. 남편과 헤어져 우울해할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시누이는 잘 지내는 듯 보였다.
은경이 퇴근해 오기도 전에 외출하는 일이 잦아져서 시어머니가 저녁을 차리곤 했다.
은경은 아기들을 수유하느라 물어볼 새도 없이 손을 씻고 와서는 정기부터 안아 젖을 물리고서야 한숨 돌리며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사진액자들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사진, 남편은 인상이 선한 시아버지 모습을 많이 닮았다.
아들 내외와 함께 찍은 사진, 큰손주를 안고 딸과 찍은 사진, 쌍둥이 손주들의 사진이 세 개의 액자에 담겨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남편은 세 단으로 보기 좋게 진열해 놓았다. 은경은 남편의 줄을 잘 맞춘 단정한 솜씨에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아가씬 어디 나갔어요?”
은경이 큰 조카를 식탁 앞에 앉히며 지나가듯 물었다.
“낸 들 아니? 어딜 그렇게 나가는지, 물어봐도 그럴 일이 있다고만 하네.”
은경은 어머니가 업고 있던 조카를 받아 안고 밥을 먹이며 큰 조카에게도 수저에 반찬을 올려준다. 그 사이 어머니는 부지런히 밥을 먹고 손녀딸을 받아 안는다.
은경은 밥 먹다 말고 딴짓하는 조카를 챙기느라 제대로 식사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조카를 어르고 달래서 밥을 다 챙겨 먹였다. 그래서 조카는 야단만 치는 엄마보다 다정한 외숙모를 좋아하며 더 따랐다.
환절기 기온이 떨어지면서 시어머니께서 교회에 다녀오신 날 밤 열이 나고 기침하셨다. 아침에 은경이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가자 시누이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야겠다고 말한다. 형규는 아침 식사도 거르고 출근하고 난 뒤였다.
은경이 가사도우미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언제고 비상시에는 사람을 부르려고 미리 알아놓았던 터였다.
아이들을 출산한 이후, 아니 임신 9개월로 들어서면서부터 은경은 교회 가는 일에서 벗어났다. 힘든 며느리를 배려한 어머니의 선심이었다.
일요일이면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은데다 형규도 빠지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들은 자연스레 아기를 돌보느라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교회에서 형규에게 집사직을 맡으라는 바람에 그러잖아도 거절할 구실이 필요했었다. 시어머니는 40여 년 교회를 성실히 다니셔서 권사님이 된 지도 십여 년이 지났다. 남편을 여의고는 더욱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슬픔을 견디셨다.
기독교인들은 사후 천국에 간다고 믿는데 왜 죽음을 슬퍼할까? 차라리 죽음을 축복해야 하는 일 아닐까 은경은 생각했다.
그녀는 형규의 책장에서 불교에 관한 서적을 몇 권 보았다.
그는 어머니를 거역하는 게 싫어서, 오랫동안 교회에 다닌 습관으로 다니는 것일 뿐 기독교 신앙을 맹신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집에서 어머니와 밥을 먹을 때는 식사 기도를 하지만 밖에서 외식할 때는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은경도 그를 따라 집에서 어머니와 식사할 때는 잠깐 감사기도를 하고 수저를 들었다. 음식을 먹기까지 수고한 많은 이들에게 감사하는 건 신을 생각하기 이전에 필요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독감을 심하게 앓았다.
며칠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온 식구가 전염되어 사방에서 기침하고 약을 먹어야 했다. 아기들을 격리시켰지만 피하지 못하고 모두 한 차례씩 병원을 다녀와야 했다. 근 한 달여 동안 번갈아 가며 감기 증상을 보이고 곤욕을 치루었다.
은경은 그때부터 가사도우미를 계속 쓰기로 하였다. 시누이도 그동안 힘들었는지 그러자고 동의하였다.
올케가 주던 생활비는 줄어들겠지만 그보다는 자유시간이 좀 생긴 게 맘에 들었다. 남편과 헤어진 상실감을 채워주고도 남을, 생각지 않았던 만남을 하게 되면서 다시 생기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변호사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아이가 둘이나 있는 것을 알고는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환하게 웃는 고운 얼굴을 대하면 마음이 가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렸다.
그를 만나고 들어온 날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단꿈을 꾸며 잠들 수 있었다.
그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37세 노총각이었다. 시누이는 처음부터 그를 맘에 들어 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신중하고 친절하게 그녀의 이혼 문제를 해결해주는 과정에서 신뢰감이 생겼다.
전 남편처럼 인물이 출중하지는 않지만 그의 선한 눈매와 부드러운 목소리는 진실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누구라도 의지하지 않고는 그녀의 뻥 뚫린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남편이 자신을 배신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를 잊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마음을 쏟을 대상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녀는 먼저 나서서 그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만날 구실을 만들었다. 그는 아이 둘의 엄마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자태가 고운 그녀를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젊은 나이에 이혼한 그녀에게 이는 측은지심을 감출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시름시름 자리에 눕는 일이 많아지고 허리가 아프다며 손주들이 울어도 업어주지 못하셨다. 노쇠해지는 것이 눈에 띠게 보였다.
은경은 어머니를 모시고 한의원에 가 보약을 지어왔다.
노화로 인한 콜레스톨 수치가 높고 골다공증에 당뇨 수치도 높다고 하였다.
은경 역시 아이를 낳기 전보다는 피곤함을 느끼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이를 낳는 일은 알맹이를 빼주고 껍질이 남는 거라고 말하던 동료 선배 말이 맞나 싶었다. 어머니가 된다는 건 많은 희생을 치루는 값지고 아름다운 일이니 그 말이 과언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아이들이 주는 기쁨에 비교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사랑 그 자체였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을 것 같았다. 그 귀여운 얼굴이 미소 지을 때 은경은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형규 역시 이 아이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들 삶의 이유가 된 생명들이었다. 마치 자식을 얻고서야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세상은 이렇게 후손을 남기면서 내가 죽어도 실은 죽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구나 실감했다. 일이 끝나면 빨리 집에 가서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결혼하고 빨리 아내를 보고 싶어 했던 것은 성욕이 상당히 차지했던 것이었음을 알았다. 아이들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일어났다. 자식을 버리고 다른 여인을 취하는 제부를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동생이 시련을 잘 견디는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었다. 가엾은 조카들을 좀 더 신경 써서 돌보아주어야겠다 생각하였다.
그는 일요일이면 예전에 하던 취미활동을 모두 멈추고 가족들과 하루를 보냈다.
어머니를 모시고 교회를 다녀온 후에 어머니를 눕혀 드리고 동생과 함께 큰조카를 데리고 고궁이나 놀이터로 나갔다. 한창 뛰어놀 나이의 호기심 많은 큰 조카의 손을 잡고 이것저것 설명해주고 놀이도 함께 했다. 그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사주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뿌듯한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를 만나지 못하고 시무룩했던 조카는 기가 살아 뛰어다녔다.
은경은 어머니 점심 식사 때문에 다음에 가겠다며 쌍둥이와 집에 남았다.
오빠가 동생에게 물었다.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애들 아빠는 연락 있어?”
“아니, 이젠 생각 안 해. 앞으로 애들하고 어떻게 살까만 생각해.”
동생이 담담히 말했다.
형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벤취에서 일어나 큰조카에게로 갔다.
시어머니께서 자리에 누우신 지 한 달이 지났는데 기력을 차리지 못하셨다.
기억력도 깜박깜박하셔서 방금 한 이야기를 되풀이 물으셨다.
은경은 아예 상주하는 도우미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도움을 청했다.
중국 연변에 살던 중년의 조선족 아주머니와 연이 닿아 모셔 오고서야 마음 놓고 직장에 출근할 수 있었다.
시누이는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지 한참 되었다. 부쩍 모양을 내고 외출을 자주 했다. 은경은 아무 소리 않고 그녀의 하는 양을 듣고만 있었다.
아줌마가 오늘 애들 보느라 너무 많이 힘들었다고 은경에게 알려주었다.
시누이는 자신의 아이 둘은 알아서 챙겨야 하건만 분주한 아줌마에게 맡겨놓고 나가서는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큰조카는 은경의 말 외에는 들은 척도 않고 애를 먹였다.
은경이 퇴근해 와서야 집안이 조용해졌다.
은경이 아줌마에게 제 아이들을 맡기고 조카들을 챙겨 밥을 먹이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조카들에게 엄마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외숙모, 아빠는 어디 갔어? 언제 와요?”
벌써 몇 번째 묻는 말이다.
그 애는 아빠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곧 올 거라는 말을 듣고 싶어 자꾸 묻는 건지도 모른다.
“아빠는 일하러 멀리 외국에 가셨어, 준성이가 많이 크면 오실 거야.”
은경은 마음이 짠하였다.
언제까지 이 아이에게 사실을 숨길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어제는 아이가 아줌마 지갑에서 몰래 돈을 꺼내 장난감을 샀단다.
그래서 엄마에게 매를 맞고 혼이 났다고 한다.
“준성아, 어제 산 장난감이 뭐야?”
은경이 묻자 조카는 혼날까 봐 경계하는 얼굴로 눈치를 보았다.
“트럭 자동차”
금새 시무룩해지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외숙모 보여줄래. 그 자동차 그렇게 갖고 싶었어?”
은경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방 한구석에 안 보이게 놓아두었던 장난감 자동차를 가져와 보여준다.
“나두 아빠가 사주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아이들끼리 놀면서 다른 애들이 아빠가 사주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자랑하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한 어린애의 금방 들통 날 행동이었다.
“엄마한테 사달라고 하지 그랬어.”
은경은 야단맞은 아이의 마음이 또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말했다.
“엄마는 맨 날 돈 없대요. 이젠 장난감 하나도 안 사 줘.”
조카는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은경은 아이를 안아 무릎에 앉히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랬구나. 다음에 꼭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외숙모한테 말해. 허락 없이 아줌마 지갑에서 돈 꺼내는 건 잘못한 거야. 알았지?. 착한 준성인 그러면 안 되는 거다. 외숙모랑 약속하자.”
은경은 준성의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며 꼭 안아주었다.
잠옷을 입혀 자리에 눕히고 동화책을 읽어주다 잠드는 것을 보고 일어나 나왔다. 어린 조카가 느낄 아빠의 빈자리가 은경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따라서 시누이가 직면한 이 상황이 큰일이구나 생각되었다.
12. 유언
한여름 늦장마가 지나가자 조용하게 계절이 바뀌며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낮에는 아줌마가 아이들과 시어머니의 시중을 드느라 집안일을 하지 못했다. 은경이 퇴근해 오면 아이들을 맡기고서야 저녁밥을 지었다.
무던한 성격의 아줌마이지만 시누이가 없을 때 아이 넷을 돌보는 일은 힘에 부쳤다. 큰조카는 연일 자잘한 사고를 치며 집안을 돌아다니고 아장아장 걷는 둘째 조카 진희는 유모차에 자주 태워졌다.
아줌마는 정기를 많이 업었다. 누워놓은 정민이는 배밀이를 하며 돌아다니려고 한다. 시누이의 잦은 외출은 아줌마를 곤욕스럽게 하였다. 그런 날은 피곤한 아줌마의 기색이 좋지 않았다.
은경은 큰조카의 손을 잡고 함께 장난감을 치우며 청소했다.
퇴근하고 돌아와 쉬어야 할 집은 많은 일거리가 쌓여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하루 이틀 해본 일인가, 은경은 망설임 없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며 아이들을 돌보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오늘은 퇴근 시간이 되기 전에 아줌마가 성난 목소리로 은경에게 전화했다.
“이제 더는 못하겠어요. 손이 열 개라도 모자른데 애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죽겠다고, 세상에!”
은경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죽어요? 누가요?”
“준성 엄마요. 약을 먹었대요. 지금 병원에 실어 보내고 전화하는 거라요.”
은경은 동료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서둘러 병원으로 뛰어갔다.
아. 제발 무사하길 빌고 빌었다.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위를 세척했다고 한다.
은경은 놀람을 가라앉히고 시누이의 손을 잡았다.
맥없이 지쳐 누워있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가여워 눈물이 핑 돌았다.
잘 지내는 듯 보였지만 아니었다. 그녀의 자초지종을 알 수 없었으나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을 그녀에게 일어나는 동정심은 두 아이의 엄마이기 이전에 세상에서 버림받은 한 여자의 절망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말도 못하는 그녀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은경 또한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부축해 집에 돌아와 자리를 펴주고 누인 후 다시 한번 손을 잡아주고 이불을 덮어주었을 뿐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누워 계신 어머니를 들여다보고 아줌마의 기색을 살피며 방문을 닫았다. 아까는 화가 나서 한 말인지 더는 말 안 하고 둘째 조카의 기저귀를 갈고 있었다. 준성인 아직 무슨 일인지 잘 모르는 듯했다.
은경에게 엄마가 어디가 아픈지 물었다.
“엄마가 위가 많이 아프셔서 병원에 갔다 오셨어. 곧 나으실 거야.”
“위가 어딘데요?”
은경은 한 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말했다.
“준성이가 밥 먹으면 위가 소화시켜서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거야.”
밤에 돌아와 사정 이야기를 들은 형규는 동생 방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은경은 형규가 말할 때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동생의 고통에 억장이 무너졌을 그의 마음에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는가.
시간이 흐르면 모두 차차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시누이에게 좀 더 신경을 써야겠구나 생각했다.
딸의 자살 시도 이후 더욱 기력을 차리지 못하시던 시어머니는 며칠이 지나자 은경을 불러 말씀하셨다.
“어미야, 내가 아무래도 못 일어날 것 같구나. 그래서 네게 부탁을 좀 하고 싶다.”
은경은 놀라서 시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아니에요. 어머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니다. 죽기 전에 네게 꼭 할 말이 있어. 내 손주들 준성이, 진희를 좀 돌보아다오. 애들 어미를 믿지 못하겠구나. 정말 예쁜 딸이었는데, 어쩌다 저렇게 되었는지...”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말했다.
“어머니, 걱정마셔요. 저희가 잘 돌볼게요. 아가씨도 염려하지 마세요. 곧 괜찮아질 거예요. 어머니, 기운 차리세요.”
은경은 눈물이 글썽해서 말했다.
“그래. 고맙다. 너만 믿는다. 그동안도 정말 고마웠다. 아가, 네가 고생 많은 거 잘 안다. 내가 죽어서도 너를 꼭 도와주마. 아가, 고맙다.”
은경은 시어머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드리며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시는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과 함께 뜨거운 감정이 솟구쳤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되어 시어머니는 겨울 환절기 때 급성 폐렴으로 입원하시더니 며칠 안 가 의식을 잃고 산소호흡기를 달았다. 형규와 큰 시누이는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편안히 운명하시도록 결정하였다.
시어머니는 딸의 불행이 못내 상처가 되어 심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은경은 그동안 나눈 정을 생각하며 슬피 울었다. 정말 천국이 있다면 어머니가 믿으시는 그 천국에 꼭 가시길 기원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두 번째 겪는 가족의 죽음이었다.
이렇게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지는 목숨.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이 삶의 허무함을 느끼게 하였다.
은경에게 좋은 시어머니였다. 친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성심껏 대했던 어머니였다.
시누이는 가장 서럽게 어머니를 붙들고 오래 울었다. 자신의 불행을 속죄라도 하듯이...
은경은 늘 함께 계시던 어머니가 안 계신 쓸쓸함을 그들 형제와 함께 공감했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당연한 일이지만 막상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생소하고 낯설었다. 시누이의 통곡은 제 설움에 합쳐져 길고 길었다. 어린 준성이 역시 어미의 슬픔에 감염된 듯 부산함을 멈추고 한쪽 구석에서 의기소침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며칠을 울고 있는 엄마 곁에 가지 않고 은경이 퇴근해 올 때만 기다렸다.
은경은 아줌마를 통해 그녀의 일상을 전해 들었다.
요즘은 전에처럼 외출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데 영 기운을 못 차리고 말도 없고 저녁 식사 시간 외에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는다고 했다. 어미의 슬픔이 전이되어서인지 어린 딸은 자주 탈이 나고 병원을 드나들었다.
은경은 형규와 그녀의 일을 의논하였다.
“아가씨가 많이 우울해 보여요.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지난번 일에 겹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많이 힘들겠지. 그러나 자기가 털고 일어나야지, 어떡하겠어. 애들을 봐야 하니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고...”
“내가 뭐라고 말을 걸기도 어렵네요. 지난번 일도 잘 모르고, 아가씨를 도와주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애들한테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 걱정이에요.”
“지난번 그 소동은 만나던 사람과 헤어져서 그런 거야. 남자가 연애는 해도 결혼은 못 하겠다는 거지.”
말하자면 연애가 깊어지는 과정에서 실연당한 거였다.
그렇다고 자식 있는 어미가 죽겠다고 약을 먹다니 은경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뭔가 낙이 있어야 애들과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은경은 자식들에게서 희망을 보지 못하는 시누이가 딱했지만 그녀는 자신과는 다르니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을 잘 키우지 못하면 그건 남편을 잃은 고통과는 비교도 안 될 텐데 어떻게 시누이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막막하였다. 그저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올해 준성이를 유치원에 입학시키기 위해 사설유치원이 아닌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을 알아보라고 이야기해주었는데 시누이가 신청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신청은 했는데 모르겠어요. 통지해 준다고 했는데...”
심드렁하게 말하면서 달력을 본다.
소득이 없는 시누이를 위해서 돈이 적게 들고 믿을 수 있는 공립유치원 모집 정보를 알려주었다. 시누이는 별반 관심이 없는 듯해서 은경이 직접 학교에 문의해서 알아보았다. 준성이라도 유치원에 가면 아줌마 일이 좀 덜어질 것을 기대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은경은 아이들 돌잔치를 생략하고 사진관에 가서 가족사진만 찍었다. 귀하게 얻은 아이들이었지만 그녀답게 최소한의 비용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그 비용을 아껴서 조카들과 나누었다. 준성이가 입던 옷, 장난감, 유모차, 어느 하나 버리지 않고 잘 포장해서 차곡차곡 창고에 쌓아놓았었다. 심지어 여자아이 진희의 물품도 모아두었다. 아이들은 쑥쑥 자라서 매년 옷이고 신발이고 사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준성에게 유치원 입학 기념으로 새 옷과 새 신발 등을 사주었다.
다행히 후보자로 대기 중이던 조카는 병설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
아이는 기대에 들떠서 은경에게 조잘조잘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은경은 준성과 진희의 성장을 보는 일이 즐거웠다. 준성인 자기 동생 진희에게는 자주 장난을 치고 울리기도 했지만 사촌 동생들은 귀여워하며 조심스럽게 대했다. 제 딴에는 좋아하는 숙모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은경에게 네 명의 아이들은 삶에 기쁨이자 희망이었다.
마치 그녀가 그들 모두의 어미인 것처럼 정성껏 세심하게 돌보았다.
은경의 아버지는 이북에 동생들이 다섯이나 있다고 말했었다.
잠깐 내려왔다가 삼팔선이 쳐지는 바람에 발이 묶여 이산가족이 되었다며 언제고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갈 거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진 부모님과 동생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이제 자식들을 키워보면서 혈육을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는 그렇게 두 동강이 난지 오십여 년이 지났다.
도무지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극이었다. 이념이 다르다고 한 민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적이 되다니...
지도자들의 이념 다툼은 강대국에게 명분을 제공하고 가엾은 국민들은 피멍이 들었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그 기쁨도 잠깐 전쟁에 휩쓸려 가족을 잃은 수많은 이산 가족들은 다시금 고통 속에 놓여 살아갔다.
정민, 정기가 걷기 시작하면서 온 가족이 네 아이를 데리고 가까운 고궁에 소풍 갔다. 봄 햇살이 따스한 잔디밭을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 뛰어다니는 준성이, 곱게 차려입은 시누이, 아줌마까지 얼굴이 환해졌다.
은경은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 형규를 보면서 즐거웠다. 사는 게 별거인가. 이렇게 모두 웃는 얼굴로 오늘 하루를 보내면 만족한 삶인 것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모두는 교회 가는 일에서 해방되었다.
교회에 나오라며 몇 번이나 심방을 오던 교인들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온 가족이 휴일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준성인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였다. 진희도 깡충깡충 토끼처럼 뛰었다.
은경은 일어나자마자 아기들 우유를 먹이고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아줌마는 세탁기를 돌리고 서둘러 청소했다.
형규와 시누이는 늦잠을 자고 아이들은 모두 거실에 나와서 은경을 에워쌌다.
은경은 상에 앉은 그들에게 아침밥을 나누어주면서 말했다.
“너희들, 아침밥 깨끗이 잘 먹으면 소풍 갈 거다. 밥을 남기는 사람은 집 보는 거야.”
평소에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지 않고 돌아다니던 준성이부터 얌전히 앉아 밥을 먹었다. 진희도 환한 얼굴로 오빠 곁에 앉아 숟갈을 들었다.
은경과 아줌마가 정기, 정민을 안고 밥을 떠먹일 때 형규가 일어나 내려왔다.
“오늘은 우리 어디 갈까?”
형규가 수저를 들며 묻는다.
“어린이 대공원!”
준성이 소리쳤다.
은경은 잠깐 일어나 시누이 방문을 노크하고 잠시 후 문을 열었다.
“애들 데리고 나갈 건데 고모는 안 갈래요?”
은경이 묻자 시누이가 일어나며 대답한다.
“알았어요.”
은경은 다시 와 식사하고 아이들 옷을 입힌다.
밥은 안 먹어도 화장은 해야 하는 시누이가 곱게 단장하고 따라나섰다.
운전하는 형규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섰을 때마다 하품한다.
은경은 가방에서 미리 준비했던 피로회복제를 한 병 꺼내 뚜껑을 따준다.
형규가 웃으며 받아 마신다. 은경이 뒤에 앉은 시누이에게 묻는다.
“고모, 운전 배워 보지 않을래요?”
“운전이요? 왜요?”
시누이는 별생각 없이 되물었다.
“그냥, 배워두면 여러모로 좋지 않겠어요. 애들 데리고 어디든 갈 수 있고. 나도 배우고 싶은데 시간 내기가 어려워서, 고모부터 배워 보세요”
“그래. 한 번 배워 봐. 나랑 교대로 운전하면 좋잖아.”
형규가 거들었다. 은경은 뭐라도 시누이에게 동기부여를 해서 우울한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글쎄...”
역시 시쿤둥하게 대답한다.
은경은 얼마 전에 문을 연 문화원에서 하는 에어로빅 강좌에 나가보라고 권했는데, 삼 개월을 끊었지만 나간 날보다 빠진 날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녀가 신바람 나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주고 싶은 은경이 두 번째로 권유하였다.
13. 양육
정기는 엄마 젖을 뗀 이후 엄지손가락을 많이 빨았다. 정민이는 쓴 약초 액을 두어 번 바르자 멈추었는데 정기는 소용이 없었다. 붕대를 감아 놓아도 계속 빨아서 엄지손가락과 검지가 연결되는 부분이 헐 정도였다. 은경이 돌볼 때만 관심을 다른 장난감으로 옮겨 빠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엄마, 아빠, 맘마를 말하게 되자 형규와 은경은 신기하여 마치 아이들이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이런저런 말을 걸며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둘째 조카 진희는 제법 말을 잘하고 재롱도 부려 귀여움을 받았다.
여자애여서인지 개구지고 말 안 듣는 오빠와는 다르게 얌전하고 순하였다.
아줌마는 준성이가 진희를 귀찮게 하면 얼른 업고 건들지 못하게 하였다.
준성이는 유치원에서 배운 것을 은경에게 보여주며 자랑하였다.
은경은 칭찬해주며 상으로 과자나 초코렛을 주었다. 곁에 있는 진희에게도 좀 주면 심술궂게 낚아챘다. 은경은 동생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지만 준성이의 안 좋은 행동이 자주 불거져 좀 걱정이 되었다.
하루는 진희가 뛰어가는데 한쪽 발을 살짝 저는 것 같았다.
은경이 지나치다가 다시 보면서 진희를 불렀다.
앙증맞은 조그만 발을 살펴보니 왼쪽 발목이 통통 부어있었다.
“진희야, 왜 발목이 부었지? 아프니?”
진희는 금새 입을 삐죽이며 울상이 되어 말했다.
“어저께 넘어졌어요. 계단에서 오빠가 밀어서.”
은경이 준성일 불러 물었다.
“내가 언제?”
준성이 성을 내며 반박했다. 은경은 아줌마에게 다시 물었다.
아줌마는 진희 발목을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말했다.
“엊그제 진희가 계단 아래서 울긴 했는데, 그때 그랬나 보네요.”
준성이 얼른 다시 말했다.
“일부러 민 게 아니구, 내가 빨리 내려가려고 하다 부딪혀서 넘어졌어요.”
시누이가 외출하고 없는 사이 벌어진 사고였다.
엄마도 모르는지 이틀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은경은 내일 꼭 병원에 가보라고 시누이에게 말해주었다.
의사는 관절염이라며 당분간 기브스 하고 매일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요새 시누이는 운전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일차 필기시험은 붙었다며 실기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시 화장을 곱게 하고 외출하면서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진희는 첫날 많이 불편해하며 한 자리에만 오래 앉아 있었지만 며칠 안 가 곧 한쪽 발을 잘뚝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주사를 많고 약을 먹어서인지 아프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엄마와 가족들 모두의 관심을 받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준성이 미안했는지 동생을 괴롭히지 않고 오히려 곁에서 그림책을 읽어주며 놀아주었다.
은경은 진희의 사고 이후 아줌마에게 집안일을 안 해도 괜찮으니 아이들만 잘 돌봐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한창 아장아장 돌아다니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라 잠시도 주의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은경은 새벽부터 아이들 먹을거리를 모두 만들어 놓고 출근했다.
주는 대로 잘 먹는 정민이와 달리 편식하는 정기를 골고루 먹이기 위해서는 매일 아이디어를 내서 맛나고 눈길을 끄는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저녁에 모든 찬거리를 준비해 놓았다가 새벽에 준성이, 진희 것까지 넉넉하게 준비하였다. 퇴근해 올 때면 내일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줄까 생각하곤 하였다.
시어머니를 신경 쓰며 장을 보던 일과가 쌍둥이와 조카들로 바뀌었을 뿐 일하는 아줌마를 두었어도 여전히 은경은 분주하고 고단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힘들다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자상하게 보살폈다. 그들이 조금씩 성장해가는 것을 보는 재미가 고됨을 모두 보상하듯 그녀를 즐겁게 하였다.
형규 역시 쌍둥이들의 성장을 보는 것이 마음 뿌듯하고 흥미로웠다.
똑같은 배에서 한날한시에 나왔는데 두 아이의 다른 점이 한 가지 두 가지 드러나면서 신기하기만 했디.
뭐든지 똑같이 두 개를 사지 않으면 정기는 정민의 것을 욕심냈다. 뺏겨도 정민이는 울거나 하지 않고 순순히 내놓는데 비해 정기는 제 것을 정민이가 못 만지게 했다. 큰조카 준성이 역시 제 장난감은 동생들이 못 만지게 했다. 정기와 준성이 좀 더 이기적이고 샘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진희는 뭐든지 동생들에게 양보하고 함께 잘 놀았다. 그 작은 다리에 기브스를 하고 절뚝절뚝 다니는 모습이 안스러워 모두들 진희에게 더 신경 썼다.
진희, 정민이는 배변을 잘 가리는데 정기는 아직 잘 때 꼭 기저귀를 채워야 했다.
정민이는 차지 않는 기저귀를 정기만 채우면 슬며시 벗어던지고 자다가는 이불에 쉬를 하였다. 아줌마가 은경에게 말했다.
“정기는 오줌 누러 일어나는 게 귀찮아서 이불에 누는가 봐요.”
“애들이 실수도 하고 그러지요. 설마 그러겠어요?”
은경은 웃으며 대꾸했지만 정기가 정민이보다 분별이 좀 늦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정민이 주는 대로 대체로 잘 먹는데 비해 정기는 제가 좋아하는 음식 아니면 안 먹으려고 해서 아줌마가 손이 더 간다고 말했다. 싫은데 억지로 먹거나 하면 배가 아프다고 한참씩 떼를 쓴다는 것이다.
아줌마는 준성이, 정기를 돌보는 게 더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오전에는 준성이가 유치원 가고 진희는 얌전하여 훨씬 예전보다는 일이 수월해졌다.
똑같은 옷을 입은 두 아이는 정민이가 좀 더 통통한 편이라 쉽게 구분이 되었다.
얼굴은 정기가 좀 더 귀여워 보였다. 말도 정기가 더 빨리 배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라면서 몇 번이나 모습이 바뀌니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이목구비 반듯하고 귀염성 있는 얼굴에 약간 반곱슬머리는 숱이 적당하였다.
은경의 눈에 그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새끼들이었다.
서툴게나마 말을 하면서는 이것저것 물으며 은경을 웃게 했다.
은경이 집에 돌아오면 정기, 정민은 잠시도 그녀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강아지처럼 따라다니며 종알종알 말을 했다.
“엄마, 아빠는 왜 빨리 안 와?”
정기가 물었다.
“아빠는 일을 많이 해서 그래. 아빠가 돈 벌어서 너희들 맛있는 거 사주시잖아.”
“엄마 회사 가지 마. 집에 있으면 더 좋아.”
다시 정기가 말했다.
“엄마 대신 이모가 계시잖아. 엄마는 중요한 일들을 하니까 회사 꼭 나가야 해.”
“중요한 일이 뭐야?”
정기는 묻고 정민이는 곁에서 듣는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해주는 거지.”
“엄마, 양파, 시금치, 당근도 먹기 싫어.”
정기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말한다.
“그런 거 잘 먹어야 키도 크고 머리도 좋아지는 거야. 가려 먹으면 건강하게 못 자라.”
“가리는 게 뭐에요?”
정민이 묻는다.
“어떤 건 먹고, 어떤 건 안 먹고 하는 거지요.”
은경이 웃으며 알려준다.
“건강한 건 뭐에요?”
정기가 따라서 존댓말 하며 묻는다.
“아프지 않고 쑥쑥 잘 크는 거지. 우리 키 재볼까?”
은경은 벽에 붙여놓은 자 눈금에 아이들을 세워보았다. 평균 키보다는 좀 큰 키였다. 준성, 진희도 달려와 키를 잰다.
“엄마, 내가 더 커?”
정기는 정민이보다 제가 좀 더 크길 기대하는 눈치이다. 그러나 정민이 약간 더 큰 것 같았다.
“똑같아. 네가 더 크려면 정민이보다 야채를 더 많이 먹어야 해.”
은경은 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기는 늘 정민이를 의식하며 뭐든지 더 이기려고 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은경은 아이들의 모든 질문에 적절히 대답하며 성심을 다하여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을 보충하려고 노력했다. 함께 있는 시간의 양보다는 교육의 질이 더 좋아야 한다고 스스로 위안하였다.
그들의 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면서 부부의 성생활은 자연스럽게 중단되다시피 하였다. 두 사람이 아이 하나씩 맡아 그림책을 보여주며 잠을 재우고 은경이 정기를 재웠을 때는 기다리던 형규가 잠들었다. 마찬가지로 형규가 기다릴 때는 은경이 이미 잠들곤 했다.
시누이는 쉽게 운전면허를 땄다. 합격하고 와서는 좋아하며 얼굴이 환해졌다.
주말에 오빠차를 타고 시운전을 해보겠다고 벼르며 자랑했다. 은경은 시누이의 밝은 얼굴을 보며 한숨 놓았다. 그러나 한숨 놓을 일이 아닌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알게 되었다.
시누이는 운전교습소 사장이 그녀에게 접근하자 처음에는 절대 응하지 않을 것처럼 새침하게 대했지만 손수 도로 주행을 시켜주며 친절하게 식사를 대접하자 그의 은근한 유혹이 싫지 않았다. 그러나 유부남일 게 뻔해서 슬쩍 물어보았다.
“사모님이 아시면 싫어하실 텐데...”
손을 잡는 그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
“아, 집사람은 애들하고 미국에 간지 몇년 되었어요. 기러기 아빠예요.”
그리고 그는 물었다.
“남편분은 뭐 하세요?”
그 역시 그녀의 사정을 알고 싶었다.
시누이는 이혼한 사실을 이야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서로가 외로운 처지인 것 같아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전에 겪은 실연이 생각나서 갈등이 일어났다. 믿을 수 없는 남자들이었다.
그는 시누이가 강경하게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것을 느끼자 운전을 핑계로 야외로 나가 술자리를 마련했다. 분위기를 흥겹게 하며 그녀의 본심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바에서 술을 마시면서 시누이의 외로움은 그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은 함께 호텔에 들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그들의 참았던 성욕은 활활 타올랐다.
모든 이성이 마비되는 찰나, 쾌락에 휩싸이며 그들은 외로운 현실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쾌락의 대가는 반드시 있는 법이다.
그들의 만남이 이어져 가는 동안 시누이의 몸속에는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있었다. 그녀는 술에 취했던 첫 번째 동침 후로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민망하지만 그에게 콘돔 사용을 부탁하였다 그러잖아도 그 역시 콘돔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소용없이 그 첫 번째 무분별했던 시간에 딱 걸렸다.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리도 쉽게 되는 임신이 간절히 원하는 이들에게는 요원한 일이 되기도 하는 것이 세상일이었다.
그녀는 은경 앞에서 음식 냄새에 울컥 토악질이 나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녀는 점심에 뭘 잘못 먹었나 생각했다. 아침도 굶고 점심에 빵 한 조각과 과일을 조금 먹었을 뿐 잘못 먹은 음식이 없었다.
갑자기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월경일을 살펴보았다. 이달에 달거리가 없이 지나갔다. 두 손으로 머리를 싸안으며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임신 테스트 자가 진단을 해보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병원에서 중절 수술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자신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에게 이 사실을 말하기도 싫었다. 아줌마가 바꾸어주는 그의 전화를 받고 오늘은 만나고 싶지 않다며 끊었다.
그는 사정을 말하지도 않고 만나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답답한 마음에 애가 탔다. 그러나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가 아주 헤어질 게 아니라면 연락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탁에서 구토가 일어 화장실로 달려가는 것을 본 은경은 직감적으로 시누이가 임신한 것을 눈치챘다. 요즘 그녀의 얼굴이 환해지며 휴일이면 잔뜩 모양을 내고 외출했었다. 아줌마 역시 그녀의 외출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챌 만큼 그녀는 생기가 돌았다.
은경은 언제나처럼 그녀가 말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두고 나간 아이들을 돌보아 줄 뿐이었다. 진희는 온순하여 다리가 불편해도 칭얼거리지 않고 잘 놀았다. 특히 쌍둥이 사촌들 곁에서 같이 놀았다.
준성이는 엄마를 따라가고 싶어서 한참을 맴돌았지만 엄마는 안중에 없는 듯 은경에게만 저녁을 먹고 오겠다고 말하고 나갔다.
“외숙모, 엄마 어디 가요?”
준성이 저녁을 준비하는 은경의 곁에 와 묻는다.
“글쎄, 무슨 볼일이 있으시겠지. 나도 모르겠는데...”
은경은 준성의 서운한 목소리를 감지하고 맛있는 과자를 하나 꺼내주며 머릴 쓰다듬었다.
며칠 전 유치원에서 싸우고 엄마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준성이는 은경에게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었다.
싸움을 한 이유가 아빠가 없다고 놀려서였단다. 외국에 돈 벌러 가셨다고 말했는데 믿지 않고 이것저것 캐물어서 때려 주었다고 한다.
준성이는 어른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화가 나고 속상했다. 은경은 마음 아팠을 준성이를 달래기 위해서 무릎에 앉히고 말했다.
“그래, 많이 속상했구나. 그 애가 네가 싫어하는 말을 자꾸 한 건 잘못이지만, 그건 너를 속상하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야. 그냥 궁금했을 뿐이지. 그런데 네가 화를 내고 때린 건 잘못한 거야. 절대로 친구를, 아니 누구든 때리면 안 되는 거야.”
“우리 엄마는 나를 때리는데요?”
어린 준성이 항의했다.
“그래서 엄마가 때릴 때 좋아? 많이 싫지?. 외숙모가 다시는 때리지 말라고 말할게. 너도 엄마 말을 잘 들어야 엄마가 화를 안 내지. 준성이는 착하잖아? 그렇지?”
준성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경은 조카들이 성장하는 내내 아빠의 부재가 상처로 남을 게 마음 아팠다. 은경은 준성이를 꼭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담에 또 그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외숙모에게 데려와. 내가 잘 말해줄게.”
아이들의 상처를 살피기보다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는데 더 몰두하는 시누이는 또 누굴 만나느라 휴일에 나가는 걸까 생각했다. 그 난리를 친지 얼마나 됐다고...
은경은 남편이 만들고 있는 육아일기를 보면서 준성과 진희의 성장기록도 지금부터하도 해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얼마나 고운 아이들인지 훗날 그들이 성장한 후에 보면 많이 흐믓할 것이다. 그녀는 당장 컴퓨터를 켜고 조카들의 출생과 사진을 올렸다. 조금씩 매주 기록을 소급해서 만들 생각이었다.
은경은 시어머니께서 부탁했던 말이 생각났다.
시누이의 변화를 형규에게 말하기 전에 직접 대화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가니 시누이는 누워있다 일어나 앉았다.
“고모, 식사 안 해도 괜찮겠어요? 어디 불편한 거예요?”
은경이 물었다. 시누이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은경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물이 글썽해서 말했다.
“언니, 난 왜 이 모양일까요?”
시누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은경은 얼른 그녀의 손을 잡고 어깨를 다독거렸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알아야 도와주지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실수로 임신을 했어요,”
짐작했던 일이라 은경은 침착하게 상대가 누구인지, 결혼한 사람인지 아닌지 물었다. 그리고 시누이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고 싶은지도 물었다.
“낳을 수 없어요. 수술할 거예요. 아직 그 사람에게는 말하지도 않았어요.”
은경은 잠시 생각했다. 둘이 함께 즐기다 일어난 일인데 시누이 혼자서 일방적으로 처리해도 괜찮을지 알 수 없었다.
은경이라면 아예 이런 일은 벌이지도 않았겠지만 그래도 역지사지한다면 어떻게 할까, 조용히 중절 수술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일은 시누이의 문제이니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야 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술에 취했다고 하지 않는가!
“고모, 수술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해야 돼요. 내가 같이 갈게요. 배고프면 이따 라면이라도 끓여 먹고 자요.”
고개를 끄덕이는 시누이를 보고 은경은 나와서 아이들을 재울 준비를 하였다.
동화책을 읽어주다 정기가 물어보는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비용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어느 집이나 걱정거리 없는 집은 없다고 하던 어른들의 말이 맞구나. 시누이는 언제나 철이 들까 생각하다가 남편과 헤어진 그녀의 박복함이 측은했다. 남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누이가 원하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피곤하게 생활하는 그를 속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흘 후 시누이는 내일 병원에 함께 갈 수 있는지 물었다.
은경은 알았다며 오후에 조퇴했다. 은행에서 돈을 넉넉히 찾아 병원으로 갔다.
다행히 십 주가 아직 안 되었으므로 마취 없이 MR키트 시술로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겁에 질려 진찰대에 누은 시누이는 은경의 손을 꼭 잡았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축 늘어지는 시누이는 얼마나 아팠는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은경도 시누이에게 잡혔던 손이 너무 아파 순간 ‘아!’ 신음하며 손을 펴보니 손톱자국이 여러 개 패여 있었다. 시누이의 고운 메니큐어 칠한 손톱이 고통스럽게 은경의 손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순식간에 긁어낸 커다란 주사기에 뭉글뭉글한 핏덩이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은경은 살짝 욕지기를 느꼈다.
생명을 죽이면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카톨릭 신앙과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야 한다고 맞서는 여성 인권단체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일은 아예 벌어지지 말아야 하는 잘못된 일이었다. 결국 인간의 모든 갈등은 자신들의 부주의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시누이는 은경이 계산하려고 하자 얼른 막으며 자신이 계산하였다. 최소한의 염치는 있는 시누이였다.
집에 온 은경은 시누이를 누이고 미역을 물에 담갔다.
아이들을 돌아가며 세수시키고 모두의 볼에 다정하게 뽀뽀했다.
“아유, 우리 늠름한 준성이!”
준성이 흐믓하게 웃는다. 유치원에 다닌 후로 조금 으젓해졌다.
“우리 예쁜 진희! 오늘 잘 놀았어?”
진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은경의 볼에 뽀뽀한다.
“아유, 우리 강아지들! 오늘 잘 놀았어?”
정기, 정민이가 엄마 양쪽 볼에 뽀뽀한다,
은경은 이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매일 반복해도 그 즐거움이 줄지 않았다. 모두 모아놓고 블록 쌓기를 하며 하나 하나에게 질문도 하고 대답도 하면서 세심히 살펴보았다. 그동안 아줌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세탁기도 돌렸다.
“누구 생일이에요?”
준성이 미역국을 보면서 묻는다.
“외숙모가 먹고 싶어서 끓였어. 미역에는 뼈를 튼튼히 하는 칼슘이 많거든. 그러니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준성이는 대답 대신 국에 있는 고기부터 건져 먹는다.
아이들 밥을 먹이고, 오랜만에 진희와 인형놀이를 했다.
“진희야, 외숙모가 오셨으니 우리 맛있는 거 해 드리자.”
진희는 마치 엄마인 양 인형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 부르며 소꿉놀이하였다.
은경은 가짜 음식을 맛있게 먹는 흉내를 내며 웃었다. 옆에서 준성이와는 블록쌓기를 하였다. 알록달록한 커다란 집이 지어졌다.
“외숙모, 나는 어른이 되면 이렇게 큰 집을 짓고 아빠랑 함께 살 거야.”
준성이 아빠를 그리워하고 있는 마음이 이렇게 불쑥 튀어나올 때면 은경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짠했다.
‘그래, 네가 크면 아빠를 찾아가거라. 아빠 없이도 이렇게 잘 자랐어요. 보여주어야지.’ 속으로 말하였다. 아이를 보러 오지 않는 무정한 아빠 보란 듯이 잘 자라기를 바랬다.
은경은 형규가 퇴근해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과 놀다 그와 함께 이층으로 올라갔다.
“회사에서 자동차를 하나 대여해준다는데 타던 자동차 동생 줄까?”
형규가 묻는다.
“고모에게 물어보고 주세요.”
은경은 흔쾌히 말했지만 직장도 안 다니는 시누이에게 경제적 부담이 될 것 같았다. 면허증을 땄으니 주면 좋겠지만...
은경도 애들이 크면 운전을 배우고 싶다.
퇴근해 시장을 봐 올 때마다 무겁고 힘이 들었다. 같은 과에 있는 동료들은 여럿이 자가 운전으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놀아주기 바쁜 남편에게 시장까지 같이 가자고 하기는 미안하여 거의 매일 퇴근해 오면서 그날그날 장을 봐온다.
“언제 집을 좀 리모델링 해야겠어요. 주방 싱크대도 손보고 보일러도 갈아야 할 것 같아요. 지난번 애들 목욕시킬 때 온수가 안 나와서 물을 데워 썼어요. 겨울 오기 전에 교체해야겠어요.”
“그래? 고쳐야 하면 빨리 고쳐야지, 오래되긴 했어.”
은경이 결혼해 올 때 이층은 깨끗이 수리했지만, 아래층은 그대로여서 모두 리모델링 해야 했다. 짐이 많아 쉽지 않겠지만 계속 미룰 수 없었다.
은경은 살림을 분가할 생각을 접고 시누이가 생활하는 일 층을 말끔하게 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잡동사니 짐을 가득 넣어 두었던 구석방을 준성이 방으로 꾸미고 책상을 사주어야겠다. 올겨울이 지나고 나면 학교에 입학할 테니 축하해주고 싶었다. 아빠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게 잘 돌보아주어야 아래 동생들도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누이 내외가 헤어진 이후 준성 아빠는 아이들을 보러 오지 않았다.
자연히 아이들도 이제는 아빠를 찾지 않게 되었다. 다정한 외삼촌과 외숙모의 사랑이 부모 못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부는 제 자식들보다도 더 조카들을 신경 쓰며 살았다. 아이들은 아빠 대신 삼촌을 따르며 아빠의 부재를 아쉬워하지 않게 되었다.
두 번 째 전화를 받고 시누이는 교습소 사장을 만나 임신과 수술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서둘러 중절 수술비 이상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며 사과했다. 그래도 시누이는 마음이 상했다. 당분간이라도 그를 만나지 않고 싶었다.
14. 쌍둥이들
은경은 시험관 아기로 얻은 아이들이라 조금만 아파도 가슴이 철렁하며 불안한 마음이 들곤 하였다. 그래서 균형 있는 영양식과 예방으로 온 정성을 다하지만 아이들은 성장통을 하는지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앓고 지나가면서 부부의 애를 태웠다.
특히 예민한 정기를 다루는 일이 힘들었다.
편식해서 애를 먹이고 떼를 쓸 때는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먹기 싫은 음식을 먹으라면 영낙없이 배가 아프다며 울었다.
아줌마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은경은 방법을 찾기 위해 아동교육에 관한 책을 찾아보며 고심하지만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따라서 쌍둥이가 같이 감기를 앓아도 정기는 증세가 더 심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은경의 노심초사는 쉴 틈이 없었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준성은 군것질을 자주 하면서 식사를 소홀히 할 정도이더니 기어코 이가 아파 치과에 가서 충치 치료를 여러 개 받았다. 아이들은 형의 입 속을 들여다보며 신기해했다.
“단 과자를 좋아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들이 입 속에 많아져서 이를 썩게 하는 거야. 그러니 사탕은 안 먹는 게 좋아. 그리고 과자를 먹고 나서는 얼른 양치질을 해야 이가 안 썩어. 준성이 오늘 병원에서 무서웠지?”
은경이 아이들을 밥 먹이며 말했다.
준성은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진희는 3개월 후에 기부스를 풀었다.
진희의 새하얀 다리 하나가 살짝 가늘어져 있었다.
“진희야, 이제 다 나았으니까 이 다리에 힘을 주고 걸어.”
은경이 왼쪽 다리를 마사지해주며 말했다.
시누이는 자신이 멋 내는 것에는 열심이었지만 아이들을 치장해주지는 않았다.
형편상 검소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헤어진 남편 탓일까? 은경은 의아했다.
준성은 받아쓰기나 시험지 백 점을 맞는 날은 의기양양해서 은경에게 먼저 자랑하였다. 은경은 꼭 안아주며 칭찬해주었다.
좀 나대긴 해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알림장에는 별 주의사항이 적혀있지 않았다. 시누이는 아들의 준비물은 잊지 않고 챙겨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가끔 외출하였지만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은경은 말없이 그녀를 살피곤 했다. 시누이가 운전해서 모두 한 번 야외로 나갔다 온 후 형규는 자동차를 팔았다. 비용 때문인지 시누이가 마다했기 때문이다.
은경은 시누이가 가정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기 바랬지만 그 일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녀의 사생활인 만큼 은경이 참견할 문제는 아니었다.
짐을 옮겨가며 일주일이나 걸려 집수리하고 준성이 방을 꾸며주었을 때 시누이는 가볍게 고맙다고 말했다. 준성이는 새로 산 책상이 좋은지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 서랍을 여닫으며 자기 물건들을 정리했다.
은경은 그 모습을 보면서 흐믓했다. 아빠 잃은 상실감을 느끼지 않고 심신이 건강하게 성장해주길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분주한 가운데 은경은 형규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아 맘먹고 오늘은 그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그의 생일이어서 새벽에 일어나 정성 들인 밥상을 차렸지만 그는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출근했다.
여느 때보다 다정하게 입 맞추며 ‘생일 축하해요.’ 속삭였더니 ‘어? 내 생일이었어?’ 했다. 그는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자신의 생일도 잊고 있었다.
새해가 되어 달력을 가져오면 부모님의 기일과 가족들의 생일을 모두 적어 넣고 하나도 빠짐없이 꼭 챙기면서 정작 자신의 생일은 챙기지 않는 남편. 은경은 그런 남편을 더 잘해주고 싶었다.
은경 또한 남편보다 먼저 부모님 기일과 친정어머니 생신, 남편과 시누이 생일, 그리고 아줌마 생일까지 꼭 챙겼다. 일 년에 생일상 차리는 일만도 열 번이 넘었지만 은경에게 그 모두는 사는 즐거움이었다.
오늘 밤은 아이들을 일찍 재우고 그의 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목욕하고 그가 지난번 생일에 선물한 새 잠옷을 꺼내 입었다.
배에 길게 수술 자국이 난 이후로 은경은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는 일을 삼가고 꼭 잠옷을 챙겨 입었다. 그가 결혼선물로 사주었던 샤넬 5 향수는 특별한 날만 한 번씩 사용하여 아직도 반 이상 남아있었다.
비싸고 좋은 거라더니 몇 년이 지났는데도 향기로웠다. 한 방울 귓불에 묻히고 그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그의 손길을 느끼고 눈을 뜨니 그가 곁에 누워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마주 누우며 그와 깊은 입맞춤을 다시 하였다.
오랜만의 살 섞음이었다. 아이들이 행여 깰까 봐 소리를 죽이며 그들은 황홀한 순간을 즐겼다.
준성이가 타던 장난감 자동차를 탈 때마다 정기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민이는 기다리다 못해 그냥 목마를 타며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진희는 인형을 앞에 앉히고 소꿉놀이에 몰두했다.
준성이는 학교가 끝나면 태권도 학원에 갔다 와서는 자전거를 타고 집 앞 공터에서 노느라 아줌마가 부르러 나갈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동생들 앞에서 태권도 동작을 보여주며 우쭐거렸다. 쌍둥이들은 형을 흉내 내다 넘어지며 깔깔거린다. 은경도 그들을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진희는 그림책을 보다가 오빠에게 글자를 물어본다.
준성이는 자랑스럽게 동생에게 큰 소리로 읽어준다.
심성이 조용한 진희는 애착 인형을 꼭 갖고 다녔다. 어쩌다 인형이 안 보이면 금새 울상이 되어 안절부절못하며 찾는다. 그 모양이 재미있는 준성이 가끔 인형을 제 방에 숨겨놓고 동생을 울리곤 했다.
하루는 은경이 퇴근해 들어오는데 시누이의 큰 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말라구 몇 번이나 말했어! 동생이 우는 게 좋아? 이 나쁜 놈! 빨리 안 가져와!”
준성이 화가 난 듯 꿈쩍 않고 버티고 있었다.
은경은 아이들을 안기 전 이층으로 올라가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미가 자식을 혼낼 때는 끼어들지 않는 게 나았다. 내려와서는 아줌마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꼭 껴안아 주면서 아줌마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준성이가 진희 인형을 감추어서 그래요. 동생을 울리는 장난을 잘 치거든요.”
밖이 조용해진 것 같아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니 시누이는 진희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고 준성이 구석에 앉아 눈물을 닦고 있었다.
정민이 얼른 가서 위로하듯 형의 손을 잡았다. 준성이 그 손을 뿌리쳤다.
은경이 다가가 말없이 준성이를 안아주었다. 준성인 은경에게 안겨 훌쩍거렸다.
장난으로 그런 것인데 엄마가 지나치게 야단을 쳤다고 생각했다. ‘나쁜 놈’이라는 말에 화가 나서 고집을 부렸다.
준성이는 점점 엄마가 싫었다. 먼저 화부터 내는 엄마는 늘 진희 편이었다.
잘한 것은 칭찬해주지 않고 늘 못한 것만 야단쳤다.
외숙모는 준성이를 착하다고 하는데 엄마는 ‘나쁜 놈’이라고 야단친 게 서러워서 울었다.
“준성아, 오빠가 동생을 울리니까 엄마가 화나서 그런 거야. 이제 그러지 말자. 진희는 너 괴롭히지 않잖아. 오빠가 동생을 잘 돌봐주어야 해, 그래야 좋은 오빠지.”
은경은 눈물을 닦아주며 달랬다. 준성이 제 방에 들어가더니 진희의 인형을 가지고 나왔다.
“네가 동생한테 갖다주고 미안하다고 해. 엄마한테는 다시 안 그러겠다고 하구. 그래야 착하고 멋진 오빠지?”
은경이 웃으며 엄지를 쳐들었다. 준성이는 잠시 그대로 앉아서 은경이 더 이상 채근하지 않고 동생들을 씻기는 것을 보고는 인형을 들고 엄마 방으로 들어갔다.
은경은 시누이가 준성이에게 좀 더 애정을 지니고 대해야 할 텐데 생각했다.
좀 개구장이지만 잘 타이르면 말귀를 알아듣는 똑똑한 아이였다.
은경은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이 바뀌는 계절과 함께 더욱 빨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복되는 일상을 자잘한 사건들로 채우며 웃음을 주는 아이들. 그리고 우울한 시누이의 조용한 나날도 흘러갔다.
은경은 형규의 서재로 쓰던 방을 아이들 방으로 바꾸었다.
휴일 하루 날 잡아 형규와 함께 책장 가득했던 많은 책을 정리하고 아이들 책상을 나란히 놓아주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입학하면서 부부와 함께 자던 잠자리를 바꾼 것이다. 준성이가 혼자 방을 쓰는 것을 본 아이들은 순순히 자기들 방으로 옮겨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가끔 정기가 베개를 들고 엄마 방으로 올 때도 있지만 잘 적응하였다.
이층침대가 아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놀이터였다.
정기가 이층을 사용하였다. 이제는 안 그러나 보다 하면 잊어버린 것을 상기시키듯이 요에 오줌을 누었다.
아줌마가 투덜거리는 것을 알지만 은경은 정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기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말이 없다가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물으면 얼굴이 환해져서 대답하였다.
정민에게 창피한 것을 엄마가 다시 말하지 않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정기도 자기가 왜 그렇게 실수하는지 몰랐다.
정민이는 정기보다 말수가 적고 순한데다 정기에게 늘 양보하다 보니 둘은 거의 다투지 않았다. 은경은 그런 정민이가 더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생김새만 비슷했지 성격은 많이 달랐다. 유전자의 배합이 다른 것이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정민이가 인정이 많고 정기보다는 더 바람직하게 행동하였다.
집에만 있던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면서 나름 사회생활을 하게 되자 그들의 차이는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은경이 아이들이 먹을 간식을 늘 준비해두는데 정기는 가게에서 불량식품을 포함해 주전부리 사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아줌마의 이야기를 듣고 은경이 물었다.
“정기야, 엄마가 집에 준비해놓은 간식 안 먹고 왜 가게에서 사 먹는 거야?”
“다른 애들이 사 먹으니까 나도 사 먹고 싶어서...”
정기가 엄마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엄마가 집에 사놓은 것이 몸에 더 좋은 음식이야. 네가 사 먹는 건 별로 좋은 음식이 아냐.”
정기는 돈으로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자 직접 사 먹는 것을 좋아했다.
정민이는 엄마 말을 잘 듣는데 비해 정기는 제 맘 대로였다.
은경이 작은 돼지저금통을 네 개 가져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누가 가장 많이 모으는지 내기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 돈은 연말에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사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열 가지 나열해 써서 방문에 붙여놓았다.
정기는 정민에게 지기는 싫었지만 처음뿐이었다.
준성이는 은경이가 주 일회 주는 용돈을 사용하고 남은 돈을 저금통에 넣었다.
진희는 착한 일을 더 찾아서 하며 얻은 별을 돈으로 바꾸어 저금통에 넣고 좋아했다.
그들이 자신들이 놀던 장난감 정리를 스스로 할 때마다 금박지별을 주었다. 심부름하거나 아줌마를 도와드려도 별을 주었다. 그 별이 열 개 되면 지폐로 바꾸어주었다.
은경은 아이들에게 좋은 습관을 키워주고 즐거움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진희가 입학하던 날은 은경이 사준 예쁜 원피스 봄옷을 입고 새 책가방에 빨간 에나멜 구두를 신었지만 꽃샘 추위가 심해서 원피스 아래 바지를 더 입고 겨울 코트까지 입은 후 나서야 했다.
진희는 매일 달력을 보며 학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진희가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 제과점에서 일하는 시누이는 시간을 낼 수 없다며 준성이에게 잘 데리고 가라고 했다. 준성이 등교 시간과 진희 입학식 시간이 한 시간 이상이나 차이 나는데...
은경은 입학식 첫날이니 아줌마에게 죄송하지만 진희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은경이 미리 알았더라면 시간을 냈을 텐데 당연히 시누이가 데려갈 줄 알았다.
운 좋게도 미리 신청하고 은경이 힘쓴 덕에 진희에 이어 쌍둥이들도 모두 학교 병설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다. 스쿨버스는 없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믿을 수 있는 공교육이었다.
진희는 엄마 대신 아줌마가 가는 것을 싫어하지도 않고 아장아장 걷는 쌍둥이 조카들 손을 잡고 학교로 걸어갔다. 이미 일 년이나 드나들었던 학교였기 때문이다.
유치원 입학하였을 때도 처음 일주일만 엄마가 데려가고 데려왔다.
그 후에는 끝나면 혼자서 집을 잘 찾아왔다.
준성이 등교 시간에 맞추어 진희는 오빠를 따라 학교에 갔다.
교실 문이 열릴 때까지 복도에서 기다리거나 날씨가 따뜻하면 운동장 놀이터에서 놀다 들어갔다.
부모의 손길이 충분하지 못한 대신 그들을 사랑해 주는 외삼촌과 외숙모는 아이들에게 엄마보다 다정하고 든든한 부모였다.
준성이도 진희도 아빠 대신 외삼촌을 아빠처럼 생각하고 아이들에게도 말했다.
가족관계를 발표하는 공부 시간이나 친구들에게 외삼촌은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었다. 담임 선생님조차 준성이 아빠가 없다는 것을 몰랐다.
아줌마도 심성이 착하여 아이들을 부지런히 돌보았다.
그녀는 연변에서 남편이 병으로 죽자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한국에 왔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식당에서 일하다가 사장의 추근거림이 지나치자 사장 부인의 눈총을 받아 불편하던 중 지인의 소개로 은경의 집에 오게 되었다.
그녀는 두 자녀가 있었는데, 큰아들은 장성하여 막노동으로 밥벌이하고 연년생 딸은 이른 나이에 시집을 보냈다.
지지리 고생하며 남편 병구완까지 하다 보니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도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월급을 받는 대로 쓰지 않고 모두 모았다. 아들이 작은 가게라도 하나 차려서 결혼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식당 일보다 손이 많이 가고 마음 조릴 때가 많았지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사랑스런 아이들을 보는 즐거움이 좋아서 힘든 줄 몰랐다.
무엇보다 아이들 아빠는 예의 바르고 은경이 한 식구처럼 대해주어 고맙고 마음이 편안했다. 은경은 아이들이 돌아가며 아파도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오히려 미안해하였다. 무엇보다 단 하루도 늦는 날 없이 통장에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아줌마는 더욱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돌보아주었다.
은경은 아줌마가 말하기 전에 매년 월급을 조금이라도 올려주었다. 그리고 매년 자동이체를 하여 아줌마 월급을 잊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시누이가 일하러 나가면서 장 봐오던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은경은 매달 주던 식비와 용돈을 시누이와 직접 의논하였다.
“아가씨, 이제 일 나가셔서 내가 장을 봐와야겠네요. 다음 달부터는 대신 준성이와 진희 교육보험을 들어줄게요.”
은경의 말뜻을 알아들은 시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녀도 염치라는 게 있으니 일을 나가는 한 더는 올케에게 생활비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은 시장을 봐오고 살림을 돕는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도 생활비를 벌러 나가니 더는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은경은 자신의 아이들과 조카 둘의 교육보험을 대학 교육까지 받을 수 있도록 들었다. 젊어서 일할 수 있을 때 미리 대비하여 나이 들어 곤란에 처하지 않도록 조치하였다.
지금은 남편의 월급이 많지만 일반 회사는 정년이 보장되어 있지 않으므로 언제 퇴직할지 알 수 없었다. 은경은 아무리 힘들 때도 직장을 그만둘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정년퇴임까지 성실히 일할 생각이다. 남녀 불문하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직업을 갖고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떳떳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일해서 사랑하는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건 흐믓한 일이었다.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기대지 않아야 부부간에 대등한 관계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신이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 힘들어도 맘에 들었다.
15. 교육
정기 정민의 입학식 날에는 은경이 연가를 내고 학교에 데려갔다.
총명한 아이들은 준성과 진희와 함께 살면서 어깨너머로 한글을 거의 다 깨쳤다.
학교 가는 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없었으며 사촌 형과 누이를 통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무엇보다 병설 유치원을 다니면서 익숙해진 학교는 건물만 바뀌었지 낯설지 않음으로 안정감을 주었다.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을 키순서대로 줄을 세웠다.
정기와 나란히 서 있던 정민이가 두 아이 뒤로 밀려났다. 그들의 발육상태가 조금씩 차이 나기 시작했다. 문제 풀이하는 학습 능력에서는 정기가 좀 더 빠른 듯 했지만 끈기는 정민이만 못하였다. 옷을 똑같이 입히지 않았으면 금방 쌍둥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은경은 취학통지서를 받고 입학식 하기 전 쌍둥이를 한 반에 넣어주기를 부탁드렸다. 그래야 아이들 관리하기가 좀 수월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보면서 은경은 마음이 벅차올랐다.
준성이, 진희가 입학하는 것을 볼 때와는 확실히 더 설레었다. 내 새끼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저런 수많은 염려와 돌봄이 한 단계 꽃을 피우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이들이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그간의 수고가 보상받는 듯 잔잔한 기쁨이 가슴을 채웠다. 그런데 진희는 연례행사처럼 한 번씩 호되게 앓곤 했다. 그러면 며칠씩 잘 먹지도 못하고 누워있었다. 은경이 걱정이 되어 낮에도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어 경과를 물었다. 정작 엄마는 전화 한 통 없었다.
아줌마는 늘어져 잠만 자는 진희가 가엾어 뭐라도 좀 먹이려고 애를 썼다.
은경은 퇴근해 와서는 쌍둥이들을 안기도 전에 진희부터 안고는 열이 있나 없나 살피고 약을 제대로 먹였는지 아줌마에게 물어보았다.
“진희야, 아직도 어디가 아프니? 뭐 먹고 싶어?”
진희에게 또 물었다.
핏기 없는 조그만 하얀 얼굴, 물기 어린 새까만 눈망울이 은경을 쳐다보며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은경은 가여워서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진종일 암 것도 안 먹어서... 약을 먹이려고 죽을 쑤어서 억지로 몇 숟갈 먹였어요.”
아줌마가 말했다.
은경은 혹시나 해서 사온 배를 가져와 숟갈로 긁어 시원한 국물을 떠먹였다. 그리고 제과점에서 사온 아몬드 케잌 한 조각을 잘라 조금 입에 넣어주었다.
두어 번 받아먹더니 이내 싫다고 입을 다물었다. 은경은 진희를 내려놓고 말했다.
“진희야, 약을 먹으려면 밥을 먹어야 해. 외숙모 밥 먹을 때 진희도 죽 먹자. 그래야 빨리 일어나서 학교에 가지.”
진희가 그냥 몸이 허약해서인지 무슨 이유가 있는 건지 은경은 생각했다.
엊그제 아이들이 학교에서 운동회를 했었다.
아줌마가 김밥을 싸서 학교에 갔었다. 그날 은경이 힘들었던 걸까? 진희는 그날 밤부터 열이 나고 아팠다.
“진희야, 아직 아픈 데가 어디야? 숙모한테 말해 봐.”
은경은 간신히 달걀말이와 죽을 좀 먹이고 진희를 살피며 물었다.
진희는 말없이 왼쪽 발목을 가리켰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렇지 않은데 다친 발목이 아프단다. 완치된 것이 아니었나? 진희의 발목을 만져보며 생각했다.
“어제는 많이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진희는 좀 기운이 나는지 대답했다.
은경은 다음날 의사 선생님에게 전화했다.
“결핵성 관절염의 경우는 염증을 치료했어도 무리하면 통증이 생길 수 있어요. 늘 건강을 신경 쓰고 잘 먹여야 해요. 많이 아플 때는 약을 먹고 쉬게 하세요.”
완치가 없는 질환이었다.
진희가 평소에 입이 짧고 잘 먹지 않는 건 사실이다.
무엇을 요구하고 떼를 쓰는 일이 없는 순한 아이다 보니 다른 아이들을 돌보느라 바쁜 어른들이 소홀하기 쉬웠다.
은경은 약국에 들려 어린이 종합영양제를 사가지고 집에 왔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진희를 좀 더 신경 써야겠구나 생각했다.
아직도 진희의 두 다리는 약간 차이가 나서 볼 때마다 마음이 안 좋았다.
다리를 절지는 않지만 어서 두 다리가 가지런해지기를 바랬다.
편식하는 아이들을 개선해보려고 은경은 예쁜 식판을 사와서 반찬을 골고루 담아주며 다 먹으면 동물 모양 스티커를 하나씩 주었다. 이 스티거는 금박지 종이별과 달리 열 개가 모이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로 약속했다.
함께 밥 먹는 저녁 식사 시간인데 준성이 보이지 않았다.
은경은 아이들 식판에 밥과 반찬을 골고루 담았다. 5대 영양소가 빠지지 않도록 신경을 쓴 식단이었다. 은경이 물었다.
“형아는 어디 갔어?”
정기, 정민이는 서로 바라보며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진희도 오늘은 오빠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아줌마도 준성이가 학교 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준성인 그동안 큰 탈 없이 학교생활을 잘하였다. 태권도 학원도 꾸준히 다녀서 제 또래 아이들보다 월등 잘하였다. 공부는 상위권을 유지하며 작년에는 수학 경시 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하였다.
은경이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학원 끝나고 집에 갔다고 한다.
은경은 준성이 공부 습관을 들여 주려고 학교 갔다 오면 숙제부터 하고 나가 놀도록 늘 주의시켰다. 퇴근해 와서 숙제가 안 되어 있으면 다른 일을 제치고 함께 숙제를 한 후에야 저녁을 먹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자란 진희는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숙제를 잘하였다. 모르는 것은 오빠에게 묻거나 은경에게 가져와 해결하고 내일 시간표도 스스로 잘 챙겼다.
은경은 시누이에게도 전화했지만 모른다고 하였다.
말없이 어딜 갔을까? 친구 집에 가거나 할 때는 꼭 말을 하고 가도록 규칙을 정해놓아 잘 지켰는데 무슨 일일까 은경은 걱정이 되었다.
준성의 방에 들어가 책꽂이와 서랍을 살펴보았다. 서랍에 준성이 일기장이 있었다.
일학년 때 은경이 준성이 데리고 그림일기를 쓰던 생각이 났다.
준성이는 그림도 잘 그리고 문장력도 좋았다. 일학년 말에는 그림일기 상도 받았었다. 은경이 잘 관리해주어 준성인 5년간 쓴 일기장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었다.
은경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자식을 낳고 함께 보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동안 찍은 준성이와 진희 사진도 앨범 하나는 되었다. 아빠가 없는 결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은경과 형규는 늘 관심을 가지고 제 자식 챙기듯 돌보았다.
일기장에는 이렇다 할 내용이 적혀있지 않았다.
서랍 밑바닥을 들추자 감추어둔 비닐 케이스에는 외국 잡지에서 오린 듯한 나체에 가까운 여자 사진이 몇 장 있었다.
은경은 깜짝 놀랐다. 남동생이 있는 은경은 남자애들의 습성을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준성인 아직 너무 어리지 않은가!
티 나지 않게 그대로 잘 놓고 심란한 마음으로 아이들 손을 잡고 어두워진 집 앞 거리를 왔다 갔다 걸으며 행여 준성의 모습이 보일까 주위를 기웃거렸다.
정기와 진희가 은경의 손을 잡으면 정민인 늘 양보하고 옆으로 빠진다. 그것조차 신경이 쓰여서 은경은 너희들끼리 놀라며 손을 놓고 다시 어두운 거리를 내다보았다.
그만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 낼 학교 갈 준비를 시키고는 잠자리에 들게 하였다. 그녀는 또다시 문밖에 나와 서성이며 준성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 준성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준성아!”
은경은 반가움에 달려가 준성일 껴안았다.
준성인 머쓱한 얼굴로 은경을 바라보았다. 웬 과한 동작이냐는 듯이...
은경은 차차 물어보기로 하고 책가방을 들어주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준성은 은경이 묻지 않자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인사말도 하지 않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뒤이어 형규가 들어오고 시누이가 들어왔다.
시누이는 준성이 와 있는 것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은경은 그들을 염려하게 하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후로 준성이는 말없이 늦는 일이 잦아졌다. 이제 준성인 은경이 정해놓은 규칙에서 벗어난 듯했다. 은경은 조용히 준성이를 주시할 뿐 캐묻지 않았다.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준성이가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도움을 청하기 전에 잔소리하는 건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다행히 시누이가 집에 들어오는 시간보다는 빨리 들어오니 그냥 믿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준성이 이미 중학생 이상으로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져서 좀 이르게 사춘기를 맞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릴 때처럼 나대지 않고 자기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정기의 학습 성적이 들쑥날쑥한 데 비해 정민이는 꾸준하였다.
한 학년이 끝나고 받아온 성적표는 은경이 짐작한 대로였다.
정기는 재능은 많으나 노력이 부족하고, 정민이는 매사에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고 기재되어있었다. 정기는 미술상을 받아오고 정민이는 학습우수상을 받아왔다.
받아쓰기나 셈하기에서는 침착한 정민이 더 나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준성인 우등상장을 받고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진희 또한 글짓기상을 받아왔다.
예전 은경이 자라던 때와는 달리 요즘은 상장을 세분화하여 여러 어린이들에게 상 받는 기회를 주는 것 같았다. 은경과 형규는 아이들을 칭찬해주고 함께 겨울 여행을 계획하며 휴가를 내었다.
형규는 승용차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렌트카를 예약하여 강원도로 가기로 하였다.
겨울 바다도 보여주고 등산도 하고 눈썰매도 태워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준성이 가지 않겠단다. 형규가 물었다.
“왜 안 가려고? 네 졸업 기념으로 계획한 여행인데...”
“친구하고 놀려구요.”
준성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여행 갔다 와서 놀면 되잖아?”
은경이 아이들 반찬을 챙겨주며 말했다.
준성은 더는 말없이 밥을 다 먹고 그릇을 싱크대에 갖다 놓고 일어났다.
그녀는 이제 준성이 동생들 틈에서 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밑반찬이나 좀 해놓고 가야겠구나 생각했다. 밤이면 시누이가 들어오니까 별일 없을 것이다.
준성이 빠지는 게 좀 서운하지만 싫다는 애를 억지로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이박삼일 여행 준비하며 시끌벅적 들떠서 이것저것 챙겼다.
은경도 주말이면 가까운 곳으로는 자주 나갔지만 지방으로 가는 여행은 친정 말고는 처음이라 마음이 좀 설레었다. 아줌마도 내일 입을 옷을 꺼내 거울 앞에서 대보며 즐거워했다.
시누이는 휴가를 내기 곤란하다며 준성이랑 있을 테니 잘 다녀오라고 한다.
진희는 엄마가 가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신이 나서 깡총깡총 거실을 뛰어다녔다.
은경은 챙겨야 할 물건이 빠진 것이 없나 메모한 것을 보다가 준성이 방문을 노크하였다.
“준성아, 함께 못 가 서운한데. 친구하고 맛있는 거 사 먹어.”
은경은 그의 손에 용돈을 쥐어주었다. 준성이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아침 일찍 아이들 아침을 간단히 챙기고 빠진 짐이 없나 확인한 후 은경은 앞좌석에 앉았다. 형규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주고 터져 나오는 하품을 손으로 가리며 시동을 걸었다. 은경은 얼른 비타민C 드링크 한 병을 꺼내 뚜껑을 열어 그에게 내밀었다.
16. 사춘기
짐을 나르며 배웅하고 들어온 준성은 조용해진 집안의 정적을 느끼며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이제 그는 동생들과 어울리는 일보다는 미연 누나를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지난번 집에 늦게 온 것도 누나와 PC방에서 게임하고 놀다가 늦었다. 그때 누나는 헤어지면서 골목길에서 준성이 얼굴을 두 손으로 싸안고 가볍게 살짝 입을 맞추었다. 준성은 어린 시절 엄마나 외숙모와 한 뽀뽀 이후로 생전 처음 해본 짧은 뽀뽀였지만 그 느낌은 놀랍고 강렬했다. 그 이후로 준성의 머리속은 온통 누나의 얼굴로 가득했다.
준성은 꿈속에서 처음으로 사정했다. 그 쾌감은 이상스러웠다.
축축해진 자리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약간 부끄러웠다. 그러나 친구가 준 잡지 화보를 보고 자위했을 때 이제 안 하고는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웃음치며 반짝거리는 새까만 눈동자, 콧망울이 살짝 동근 코, 붉고 예쁜 입술, 물결치는 긴 머리칼, 누나의 얼굴은 수시로 떠올라 준성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였다.
세 번째 만났을 때 누나는 집에 초대하겠다며 장난처럼 콘돔을 준비하면 졸업 기념으로 성관계를 하자고 했다.
어린 준성이 깜짝 놀랐다.
큰 죄라도 지은 듯 가슴이 쿵쾅거렸다.
미연은 체격이 큰 준성이 졸업했다고 하니까 중학교를 졸업한 동갑인 줄 알았다.
오피스텔에서 자취하는 미연은 이번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일학년이 되었다.
미성년자인 그는 어디 가서 콘돔을 살 수도 없어 궁리하다가 외삼촌 방에서 찾아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엄마도 출근하고 그들이 떠나자 이층으로 올라가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그러나 잘 정리된 화장대 서랍에 콘돔 따위는 없었다.
외삼촌은 피임도 하지 않나 생각하며 침대에 앉았다가 침대 아래 서랍이 조금 열린 듯 튀어나온 것을 보고 시트를 들쳐 보았다.
서랍을 당겨 차곡차곡 개어진 내의들을 더듬어보니 서랍 깊숙이 작은 상자곽이 잡혔다. 열어보니 콘돔이 딱 하나 남아있었다. 준성은 반가워 탄성을 지르며 얼른 주머니에 넣고 빠르게 제 방으로 뛰어 내려가 누나에게 인터넷 메일로 연락했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가서 샤워하며 사타구니를 깨끗이 씻었다. 새벽이면 팽팽하게 팽창되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준성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셔츠와 잠바를 골라 입고 방에서 기다릴 수 없어 PC방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누나가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벌써 누나가 그곳에 와 있을 리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번에 집을 알아둘 걸 하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준성은 어른들이 하는 성관계가 궁금했지만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누나가 부끄럼도 없이 대놓고 성관계를 하자고 하는 것이 놀라웠지만 워낙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을 한지라 혹시 농담한 건가 생각했었다.
문제아 학생 같지도 않은데,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누나는 마치 성인처럼 태연했다.
준성은 누나에게서 답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져서 게임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리도 재미있던 게임이 영 시들해져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준성의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나가서 점심 먹자.”
헐렁한 흰 셔츠를 입고 청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누나가 분식집으로 앞서서 들어갔다. 그들은 김밥과 라면을 시켜서 같이 먹고 준성이 얼른 계산했다.
그들의 뒷모습은 마치 성인의 키만큼 나란히 자랐다. 준성은 누나를 본 순간부터 가슴이 뛰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준성이 계산하고 나가자 누나는 흥얼흥얼 유행하는 팝송을 부르며 걸어갔다.
준성은 누나 뒤를 따라가며 아직은 허용되지 않는 이탈을 하는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미연은 들어오더니 화장실에 가서 양치질하고 손을 씻고 나왔다. 그에게도 양치질하라고 새 칫솔을 하나 내주었다.
브래지어에 팬티만 입은 날씬하고 예쁜 그녀를 보자 준성은 가슴이 쿵쾅거려서 얼른 화장실에 들어가 양치질하고 손을 깨끗이 닦았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흘낏 쳐다보았다. 진정하자. 진정해. 그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누워서 그를 보고 있는 미연에게 다가가 뜨거운 숨을 내쉬며 포옹했다.
준성은 미연에 목덜미에 입 맞추며 그녀의 속옷에 이어 자기의 속옷을 벗었다.
준성이 성기를 밀착시키는 순간 그녀는 안고 있던 팔을 밀며 말했다.
“콘돔은?”
준성은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 잠바 주머니에서 콘돔을 꺼내어 돌아앉아 성기에 씌웠다. 자기의 성기가 이렇게 큰 줄 처음 알았다.
심장의 박동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쿵쾅거렸다.
미연은 되었다는 듯이 웃으며 준성에게 짧은 입맞춤을 하였다.
준성은 참을 수 없는 격렬한 통증처럼 온몸을 떨며 정액을 내뿜었다. 그리고 따뜻한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아, 이런 것이었구나! 준성은 자위하며 느꼈던 쾌감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한 희열을 느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충만함이 밀려왔다. 이런 세계가 있었다니, 어른들이 즐기는 성생활이 이런 것이었구나 생각하며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발그레 상기된 그녀는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두 손으로 준성의 허리를 안았다. 그녀는 그리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여자는 오르가슴을 느낀다는데, 못 느낀 걸까? 준성은 궁금했지만 부끄러워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너가 너무 빨리 해서, 난 아프기만 했어. 그치만 괜찮아. 우린 처음이니까...”
누나도 처음이라고? 준성은 그녀에 대해서 몹시 궁금해졌다.
그녀는 미리 침대 위에 깔았던 타올에 붉은 선혈을 잠시 보았다. 준성도 그것을 보았다. 미연의 몸에서 나온 혈흔을 보면서 왠지 모를 책임감이 느껴졌다. ‘이제 누나는 내 여자야.’ 준성은 생각했다.
미연은 타올을 잘 접어서 침대 아래 서랍에 넣고는 알몸인 채로 일어서서 렌지를 돌려 커피 우유를 만들었다. 그녀가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동화 속 요정같이 어여뻤다. 인터넷이나 화보에서 보았던 여자들의 벗은 몸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양손에 잔을 들고 와서 편안히 발을 뻗고 앉았다. 준성은 건네받은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면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커피 우유는 달지 않았지만 연한 커피 향은 달콤했다.
방에는 책상과 함께 책이 가득 꽂힌 책꽂이가 있고 기타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일어나 흰 셔츠를 걸치더니 기타를 가져와 아름답고 애잔한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준성은 모든 것을 잊고 그녀의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외삼촌, 외숙모가 잘해주어도, 마치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하였다. 아빠가 외국으로 돈 벌러 나갔다는 말을 준성은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편지도 전화도 한 번 안 하는 아빠는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형규를 아빠처럼 따르고 좋아했지만 외삼촌은 내 아빠가 아니었다. 마냥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어린 정기와 정민이가 부러웠다.
준성은 마지막 본 아빠의 성난 얼굴을 또렷이 기억했다. 자신과 동생을 버린 아빠, 어떻게 아빠가 그럴 수 있을까, 준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아빠를 만나서 자신을 낳은 엄마도 싫었다. 자주 잔소리하는 엄마에게는 사사건건 반항심이 일었다.
준성이 미연을 만난 건 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었다.
탈선하고픈 내재적 욕구를 적중한 그녀의 화살은 그의 심장에 적중했다.
준성 앞에서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신화 속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야.”
그녀는 기타를 내려놓고 남은 우유를 마저 마셨다. 준성은 얼른 박수치며 말했다.
“기타 정말 잘 치네. 얼마나 오래 배웠어?”
“사오 년 됐지. 특히 이 곡이 좋아서 많이 연습했어”
미연이 씩 웃었다.
“남자친구 있어?”
준성은 머뭇거리다 물었다. 이제는 그 문제가 중요해졌다.
“응, 너.”
그녀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준성은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녀 앞에서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자신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헤어지기 전 다시 한번 안았지만, 그녀는 그가 삽입하기 전 단호하게 몸을 돌아누우며 거절했다.
“임신하면 안 돼.”
준성은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는 데 그쳤지만 아쉬움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처럼 그녀가 좋았다.
누나는 아직 어린 학생인데 어떻게 혼자 사는 걸까 궁금했다.
그녀는 정말 내가 마음에 드는 걸까? 이제 그들은 어린 연인이 된 걸까?
준성은 뒤에서 팔을 뻗어 돌아누운 그녀의 따뜻한 가슴을 만져보았다.
그의 손에 가득 들어오는 부드러운 유방에 콩알만 한 유두가 만져졌다.
준성이 다시금 호흡이 빨라지며 몸이 뜨거워졌다.
미연은 눈치챘는지 얼른 일어나 빠르게 속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의 옷을 주워 건네주었다. 이제는 그만 가라는 신호였다.
미연은 작년 가을 의정부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다.
엄마는 대학 진학을 위해서라며 친구가 근무하는 학교에 미연을 전학시키고 근처에 오피스텔까지 얻어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 살갑지 않은 엄마는 다정한 성격이 아닌데다 음악학원을 운영하며 늘 바빴다. 그 대신 다정다감한 아빠는 미영을 몹시 귀애하며 어린 시절 늘 무릎에 앉히고 노래도 가르쳐 주고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엄마는 그런 부녀 사이를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치 빠른 미연은 엄마가 있을 때는 아빠의 무릎에 앉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았다.
미영이 초등학교 졸업하고 집에 있는 동안 한 번은 아빠와 붙어 앉아 기타를 배우고 있는데 외출했던 엄마가 들어왔다.
마침 팔을 둘러 미영의 손가락을 잡고 코드를 가르쳐주고 있을 때였다.
“아니, 무슨 다 큰 애를 안고 그래요? 피아노도 아직 시원찮은데, 기타는 더 큰 담에 가르쳐요.”
엄마는 미연에게 눈을 흘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미연은 그 후로 더욱 조심하며 엄마 앞에서는 아빠와 거리를 더 두었다. 그러나 그들만 있을 때는 장난도 치고 깔깔거리며 포옹도 하였다.
미연은 눈치가 보여 맘껏 아빠와 소통할 수 없어서 불만스러웠다. 마치 엄마가 그들 사이를 질투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네 살 아래인 어린 남동생만 귀애하였다. 아빠는 동생도 예뻐했지만 미연에게 더 각별하게 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가 챙기지 않는 세심한 배려를 할 때마다 미연은 아빠가 좋았다.
비 오는 날 미연을 데리러 오는 것은 언제나 아빠였다.
“미연아!”
봉고차 창문을 내리고 환하게 웃는 아빠를 보면 미연은 기분이 좋아 달려가 차를 타고 아빠 볼에 입 맞추었다.
초등학교 오 년을 그렇게 지냈다. 물론 엄마 앞에서는 절대로 안 하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추운 겨울, 아빠가 빨개진 미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가볍게 뽀뽀하였다. 미연은 순간 놀라며 주춤했다. 갑자기 그 행위가 생경스럽게 느껴졌다.
미영은 그다음부터 아빠 볼에도 뽀뽀하지 않았다.
육학년이 되고 초여름 한밤중에 잠이 깨었다.
화장실을 가려고 거실에 나갔다가 아빠 엄마가 성관계하는 소리를 들었다.
조용한 밤중인데다 약간 더운 날이라 베란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미영은 충격과 함께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끼며 아빠가 엄마의 남자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부부는 당연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데, 웬지 아빠에게 실망감이 느껴지고 쓸쓸한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아빠와 친하면 엄마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미연은 생각했다.
미연이 아빠에게 전 같지 않게 데면데면 하자 아빠는 미연에게 더 다정했다.
“미연아,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뭐 해줄까? 갖고 싶은 것 있어?”
“......”
미연은 이렇다 할 갖고 싶은 게 없었다. 필요한 것은 다 있었다.
미연이 말없이 책꽂이만 바라보고 있자 아빠는 뒤에서 팔을 둘러 안으며 얼굴을 미영의 머리에 올려놓고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 공주님 왜 아빠한테 화났을까? 응? 아빠가 뭐 사줄까?”
미연은 자신도 모르게 순간 울컥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예전처럼 장난도 치고 친하게 볼을 비비던 때로 돌아갈 수 없는, 이제는 훌쩍 커버린 자신이 싫어졌다.
그날 밤 뭔가 축축해진 느낌 때문에 잠을 깨어보니 팬티에 두세 방울 선명하게 묻은 피를 보고 순간 놀랐다. 잠시 후에 생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우선 화장지를 둘둘 말아 팬티에 대고 다시 잠을 청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엄마 아빠의 격렬한 숨소리, 작은 신음소리가 자꾸 생각났다.
미연은 일찍 화장실에서 세수하는 엄마에게 피 묻은 팬티를 보여주었다.
“뭐야? 이게, 너! 생리를 벌써 하니? 요즘 애들은 빠르기도 하네.”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가 화장실 장 선반에서 패드를 꺼내주었다.
미연은 그러잖아도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데, 엄마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 서운했다. 내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엄마 얼굴도 아빠 얼굴도 마주보기 싫어서 아침밥도 안 먹고 학교에 갔다.
미연보다 먼저 생리를 시작한 친구가 없어서 도서실에 가서 여성의 몸에 관한 책을 찾아보고 제 용돈으로 생리대를 구입했다. 남자 약사에게 돈을 치루면서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미연은 그때부터 더욱 아빠에게 거리를 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였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아빠는 머쓱해서 딸의 눈치를 보았다.
미연의 성장 속도는 여느 애들보다 좀 빨랐다.
중학교 이학년이 되자 엄마 키와 비슷할 만큼 자란 데다 가슴도 봉긋하니 예쁘게 솟았다. 미연은 목욕할 때마다 자신의 몸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엄마는 자주 서울 좋은 학군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미연은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서도 얼마든지 공부를 잘하고 있는데, 왜 나를 내보내려고 할까 생각했다.
아빠는 별반 말이 없었다. 미연이 전학 가는 것을 찬성이라도 하는 듯이...
미연은 왠지 대학은 핑계인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혹시 친엄마가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다. 그렇지만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나가면 ‘붕어빵’이라는 소릴 들을 만큼 닮아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엄마가 동생을 끔찍이 예뻐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편애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생이 미연보다 어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연은 어려서 몇 년을 외할머니댁에서 자랐다.
가끔 오는 엄마는 별반 다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영은 외할머니가 엄마보다 좋았다. 유치원 들어갈 때 엄마와 살기 위해 할머니를 떠나면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나마 아빠가 다정하고 귀애해주어서 낯선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다.
아빠는 그때부터 함께 살았다. 그전에는 외할머니댁에 온 적이 없었다.
어려서 어른들이 아빠라고 하니까 아빠인 줄 알았다.
미영이 본 그들의 사진에는 동생만 있었지 미연은 없었다. 언젠가 그 이유를 아빠에게 물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 우리 다시 가족사진 찍으러 가자”
아빠는 얼른 화제를 바꾸고 맛있는 간식으로 딸의 관심을 돌렸다.
다음 날 저녁에 온 가족이 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에 갔다.
며칠 후 그들의 사진이 커다란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렸다.
미연은 만족한 듯 웃으며 그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미연이 전학 가기로 하였을 때 아빠는 말했다.
“미연아, 아빠가 사랑하는 거 알지? 공부 열심히 하고 자주 연락해. 주말에는 집에 오고...”
미연은 고개만 끄덕이고 엄마 차를 타고 서울 성북구 삼선동으로 갔다.
공부 때문이라면 강남구로 가야 하는 일인데 그것도 아니었다.
엄마 친구가 선생님으로 근무하는 학교로 전학가기 위해서였다.
엄마 말로는 강남학군 못지않게 실력 있는 학교라고 했다.
엄마 친구가 안내한 작은 오피스텔은 걸어서 학교까지 이십 분쯤 거리에 있었다.
새로 지은 주택인지 깨끗하고 웬만한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엄마는 미영이 고른 책상을 하나 배달시키고 친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는 떠났다. 문단속 잘하라는 말만 남기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미영은 웬지 엄마에게 버려진 듯한 소외감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동네를 살펴볼 겸 산책을 나갔다.
먼저 살던 동네보다는 조용하고 좋아 보였지만 낯설었다. 좀 걸어 나가니 큰 슈퍼마켙, 제과점, 음식점 등 필요한 건 다 있었다.
엄마를 원망하면 무엇하겠는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지, 언제는 엄마를 의지하고 살았나 생각했다. 자기편을 들며 반대하지 않은 아빠에 대해 반발심이 일어났다. 왜 아빠는 엄마에게 꼼짝 못 할까? 아빠는 심성 자체가 몹시 착한 게 못마땅했다. 엄마의 학원 운영을 도우면서 기타강습을 하고 아이들 실어 나르는 차 운전도 하였다. 학원장은 엄마였고 아빠는 고용된 사람 같았다. 집안일도 아빠가 부지런히 더 많이 하셨다. 엄마는 아빠에게 이것저것 잔소리할 때가 많았지만 언제나 군소리 없이 집안일을 잘하셨다.
파르스름하니 땅거미 지는 저녁 쌀쌀해지는 날씨에 미연은 옷깃을 여미며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실내 온도를 따뜻하게 올렸다. 몸까지 춥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자유롭고 아는 사람 하나 없으니 편하기도 하였다.
무엇을 하든 상관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경 쓸 일이 없는 좋은 점도 있었다.
나도 이제는 생리하는 한 여성이 되었으니 모든 것을 알아서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우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낯선 급우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공부를 잘하면 친하지 않아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미연은 내일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엄마가 사주고 간 문제집을 풀다 잠들었다.
며칠 후 미연이 PC방에 가서 컴퓨터를 하다가 막히자 곁에 앉았는 준성에게 모르는 것을 물었다. 그들은 그렇게 대화를 트고 PC방에서 몇 번 보았다.
미연은 학급 친구들과 친해지기 전에 준성과 먼저 친해졌다. 그리고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외로움이 있었던 그들은 성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며 몸과 마음을 나누었다.
미영은 성교육 시간에 배운 혼전순결에 대한 선생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어린 준성의 뜨거운 몸을 안았다. 육체는 아픔을 느꼈지만 쓸쓸했던 마음은 따뜻해졌다.
밀착되는 육체를 통해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끼며 가족과 뚝 떨어진 소외감을 위안받았다.
미연은 임신만 하지 않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준성과 자신이 겪을 심리적 변화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17. 다른 아이들
은경은 아이들이 삼학년이 되면서부터 제 운동화는 스스로 세탁하도록 가르쳐주었다.
어린 그들이 운동화 빠는 것을 본 준성이도 어느 날 제 손으로 운동화를 빨았다. 동생 진희도 따라 했다. 정민은 운동화를 세탁하고 뒷정리까지 잘하지만 정기는 제 운동화만 대충 빨아서 놓고 대야나 비누, 솔은 늘어놓은 채 치우지 않고 들어갔다. 그러면 마당을 지나가던 정민이 주워서 제자리에 정돈해 놓았다. 자연히 아줌마는 기특한 정민을 칭찬하고 대충 빨아 덜 깨끗한 정기 운동화는 한 번 더 헹구어 놓았다.
둘이 함께 쓰는 방 청소를 매주 번갈아 하도록 규칙을 정했지만 마치 청소는 정민이 혼자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제도 네가 청소하는 걸 봤는데, 또 네가 청소하니?”
청소기를 들고 가는 정민에게 아줌마가 물었다.
정민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말소리를 들었는지 정기가 방에서 나오며 말한다.
“형이 오늘만 해준다고 했어요. 게임에서 져서요.”
정민은 잠자코 청소기를 돌렸다.
정민이 게임에서 진 것은 어제였다. 지면 청소하기로 하지도 않았다.
정민이 사실대로 말해보았자 정기는 화를 내고 불편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게임을 하루에 한 시간 이상 하지 않기로 엄마와 약속했지만 정기는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 약속대로 한 시간만 하고 컴퓨터를 끄는 정민이에게 정기는 엄마한테 이르지 말라고 이르고는 계속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정기는 그날 마쳐야 할 일이 미루어지기 일쑤였다. 정민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민이 6학년이 되자 전교 회장 선거에 나간다며 발표문을 봐달라고 형규에게 내밀었다. 은경은 정민이 그동안 몇 번이나 반장을 했으니까 회장에 출마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정기야, 정민이 회장 나가면 될까?”
은경이 정기의 생각을 알아보려고 물었다.
“얘들이 정민이 좋아하니까 될 수 있을 거예요. 뭐든지 하자는 대로 잘해주니까.”
“넌, 너는 나가고 싶지 않아?”
“난 싫어. 맨날 얘들 심부름해주고 봉사해야 되잖아. 귀찮지 뭐.”
정민이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부지런하였다. 무슨 일이든 시키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하여 정기처럼 두 번 세 번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학년이 끝날 때마다 꼭 한 번은 선생님을 찾아가 감사함을 전하는 은경에게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정민을 칭찬하였다.
쌍둥이였지만 여러 가지로 달랐다.
정민이 넉넉하고 단단한 큰 그릇이라면 정기는 작고 깨지기 쉬운 정교한 그릇 같았다.
정민이 회장이 되어 학교생활은 더욱 바빠졌다.
은경은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교장, 교감, 동학년 선생님들을 모시고 식사대접을 하였다. 학부모 한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일러주었다. 반 아이들에게는 빵과 음료수, 공책도 돌렸다.
은경은 정기가 정민을 시샘할까 살폈다.
말을 좀 안 듣고 제 맘대로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일로 정민을 시샘하지는 않았다.
정민이 늘 정기에게 양보하고 도와주는 데다 아이들 심부름하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은경과 형규는 그런 정민이 더 사랑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정기에게 더 신경을 썼다. 둘 다 소중한 자식들이므로 모자라는 자식을 더 돌보는 것이 통상 부모 마음이었다.
정민이 일 년간 회장 일을 잘하고 졸업할 때 우등상장과 표창장을 받았다.
정기도 우등상장을 받았다며 내밀었다.
은경은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다.
어렵고 힘들게 낳은 두 아들이 큰 탈 없이 잘 자라는 것이 감격스럽기만 하였다.
네 명의 아이들을 건사하느라 늘 노심초사하며 고단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 보람은 이루다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 같아 기뻤다.
준성은 얼마 안 있어 초등학교 졸업한 것을 미연에게 들켰다.
중학교 일학년 표시가 있는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분식집에서 음식을 먹다가 들어오는 미연과 마주쳤다.
시험 기간이라 모두 일찍 학교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미연은 들어와 앉다가 중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과 함께 있는 준성을 보고 순간 놀랐지만 모른 체 하였다.
준성은 서둘러 식당을 나와서 집으로 갔다. 미연의 놀라는 표정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 쪽 팔려!’ 변명의 여지 없이 속인 게 되었으니 어찌해야 좋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처분만 기다릴 수 없어서 오피스텔로 뛰어갔다.
미연은 방금 들어왔는지 교복을 입은 채 문을 열어주었다.
냉수 한 잔을 꺼내 준성에게 주고 말없이 옷을 바꿔입었다.
“준성아, 이런저런 말 하지 마. 지금은 시험 기간이니까 시험을 잘 보는 게 중요해. 그리고 적어도 중학교는 졸업하고 성관계를 해야지. 너가 어린 걸 모른 내 잘못도 있으니까 우리 삼 년간은 만나지 말자.”
미연은 화를 내거나 불쾌한 얼굴을 하지도 않고 누나가 동생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준성은 어이가 없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았다.
“미안해. 일부러 속이려 한 건 아니야. 그래도 삼 년 동안 안 만날 수는 없어.”
준성이 풀이 죽어 말했다. 미연은 그런 준성이 귀여운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럼, 날 누나라고 부르고, 성관계는 안 하는 거야. 그리고 학기마다 네 성적표를 나에게 보여주기. 난 공부 못하는 애 싫거든.”
미연은 준성의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준성은 움츠렸던 심기가 확 풀리면서 얼른 미연의 얼굴을 감싸 안고 입을 맞추려고 하였다. 미연은 재빨리 준성을 밀어내며 말했다.
“이젠 진짜 누나처럼 생각해. 누가 누나하고 뽀뽀하니?”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한쪽 볼을 가리켰다.
준성은 할 수 없이 미연의 볼에 입을 맞추고 웃었다.
준성이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공부를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누나에게 보여야 한다면 더 열심히 해서 성적으로라도 인정받고 싶었다.
준성은 그날 밤 밤이 새도록 문제집을 풀다가 잠들었다.
그 후로 그들은 메일 교환을 하거나 주말이면 밖에서 만나기도 하였다.
날씨가 좋으면 자전거를 같이 타거나 베드민턴을 쳤다.
봄가을엔 북악산이나 도봉산으로 등산도 갔다.
미연은 준성이 자기보다 어리지만 체격이 크고 혼자 지내는 시간의 외로움을 덜어주어 좋았다. 방학 때도 집에 가면 곧 준성이 생각나고 보고 싶어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엄마는 미연이 잘 지내는 것을 보고 만족하였으며 걱정거리를 덜어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다.
아빠는 미연을 보자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했다.
이제는 완연히 처녀티가 나는 미연이 외지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염려되었다. 아내의 심한 질투와 공연한 걱정으로 인한 분리였지만 한편 일찍 독립하여 삶을 스스로 꾸려나가며 자립심을 키우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식생활이 부실한 듯 마른 편이어서 마음이 안 좋았다.
아빠는 엄마 모르게 그동안 모았던 비상금을 모두 털어주며 ‘끼니 거르지 말고 잘 먹어야 한다.’ 당부했다.
진희는 학교에서 하는 운동회만 끝나면 하루 이틀씩 앓았다.
달리기를 하기 때문이었다. 다리가 아프다고 달리기에서 빠지기 싫었다. 단 한 번도 일등을 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 대열에서 제외되기는 싫었다.
피구 시간에는 피하기만 하다 끝까지 남아서 팀을 이기게 하기도 하였다. 자연히 진희는 동화책을 좋아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무엇보다 외숙모와 외삼촌의 칭찬을 받는 것이 좋아서 사다 주는 책은 물론 오빠의 만화책과 소설책도 모두 읽고 도서관에서 책을 더 빌려다 보기도 했다.
거의 늘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재미있는 책이 너무 좋아서 어른이 되면 작가가 되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쓰고 싶었다.
엄마와 방을 같이 썼지만 아빠 이야기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진희도 엄마와 싸우고 나간 아빠의 얼굴을 기억했다.
아빠가 보고 싶었을 때 혼자 방에서 운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검사하는 일기에는 아빠 이야기는 아예 쓰지 않았다.
아빠와 살지 않는 것을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다음에 크면 꼭 아빠를 만나겠다고 생각했다.
진희 눈에는 엄마보다 예쁜 사람이 없었다. 진희가 유치원을 다닌 후로는 매일 직장에 나가는 엄마는 별로 웃는 일이 없었다. 진희는 아침에 엄마가 화장대에 앉아서 화장하는 것을 보는 게 좋았다. 엄마의 흰 얼굴이 더 뽀얗게 예뻐지고 검은 속눈썹은 더 진해지고 입술이 빨갛게 칠해지면 엄마는 영화배우처럼 아름다웠다.
어느 날 진희는 엄마가 바르는 빨간 루즈를 살짝 발라보았다. 놀랄 만큼 달라 보여서 깜짝 놀라 얼른 휴지를 꺼내 지웠다.
외숙모는 전혀 화장하지 않는 게 이상해서 물었다.
“외숙모는 왜 엄마처럼 화장 안 해요?”
“화장? 왜 화장 안 해서 미워?”
은경이 웃으면서 되물었다.
“아뇨. 우리 엄마처럼 화장하면 더 예쁘잖아요.”
진희는 은경의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외숙모는 바쁜데 화장하는 게 귀찮아서 안 해. 더 예쁘고 싶지도 않고...”
진희는 ‘나는 어른이 되면 엄마처럼 곱게 화장해야지.’ 생각했다.
은경은 웃으며 책을 들고 있는 진희를 보면서 말했다.
“진희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이 담에 선생님이 되려나 보네.”
“아뇨, 난 재미있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아, 그래! 글짓기상도 받으니 될 수 있지. 선생님 하면서 작가도 하면 더 좋지.”
은경은 하던 일을 멈추고 진희를 꼭 안아주었다.
가끔 아픈 것을 빼고는 성가신 일이라곤 하지 않는 진희가 사랑스러운 만큼 또 안쓰럽기도 했다. 어리광 부리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진희는 공책에 글씨를 얼마나 반듯하게 잘 쓰는지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다.
그에 비해 준성인 저학년 때는 잘 쓰더니 고학년 되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게 휘갈겨 썼다. 그런데 중학교에 가더니 열심히 공부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은경은 대견하고 안심이 되어 거의 잔소리하지 않고 칭찬을 많이 해주었다.
정기는 가끔, 정민이는 자주 친구들과 집에 오지만 준성은 친구를 데려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준성은 미연을 안 이후 거의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공부에 몰두하였다. 자기보다 키가 작은 초등학교적 친구들과 어울리며 어려 보이는 게 싫었다.
성적이 눈에 띄게 올랐다. 시누이는 ‘잘했어.’ 그 말 한마디와 용돈을 더 주었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칭찬뿐만 아니라 데리고 나가 준성이 좋아하는 음식을 사주며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미연은 준성의 성적표를 보고는 기뻐하며 놀이공원이나 산으로 놀러 갔다.
삼 년간 단 한 번도 다시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
미연은 아예 오피스텔 비밀번호를 바꾸어 버렸다. 어른들에게 반발하는 일탈로서의 호기심을 만족시킨 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 일에 어린 준성을 끌어들인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준성을 잘 돌봐주고 싶었다.
준성은 참을 수 없을 때마다 제 방에서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누나를 만나는 날은 너무 좋아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준성은 누나가 다른 남자친구가 생길까 늘 살펴보았지만 공부에 열중할 뿐 별다른 기미는 없었다.
준성은 남녀공학이 아닌 남학생만 다니는 중학교에 다녔다. 미연은 남녀공학에 다녔지만 목표로 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껄렁한 애들 곁에는 아예 가지 않았다. 만나자며 따라오는 남학생들을 무조건 거절했다. 나중에, 대학교에 가서 보자며 미루었다. 미연이 준성이가 없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몸이 성인처럼 성장했어도 아직 미성숙한 사고를 지닌, 충동이 강한 나이였기 때문이다.
혼전순결의 의미를 무시하는 일탈을 하면서 부모에게 지녔던 반항심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녀를 잘 따르는 착한 준성이 친동생처럼 맘에 들어 외로움과 적적함을 달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앞날을 위해 지금은 공부만 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미연은 남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또다시 하기 싫었다.
18. 새 출발
쉰 살밖에 안 되었으니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형규는 조기 퇴직하였다.
직장에 다니는 은경은 전혀 걱정하지 않고 형규를 안심시켰다.
“그동안 애썼어요. 휴가받았다 생각하고 당분간 좀 쉬어요. 여행을 다녀와도 좋구요.”
은경은 그동안 고생한 고마운 남편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형규 또한 이런 날을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더는 직장을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23년을 하루같이 한 회사를 다니며 온갖 스트레스를 다 참았다. 때로는 떡이 되도록 술자리를 지켜야 하는 일도 몹시 지겨웠다. 이렇게 일만 하다 죽으려고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내를 보며, 사랑스러운 자식들을 보며 참고 또 참으며 성실히 버티어 온 세월이었다. 다행히 부지런하고 지혜로운 아내를 맞아 큰 어려움 없이 잘 견디어냈다. 아내는 아이들 대학까지 교육보험을 다 들어놓아 큰 걱정은 없었다. 다만 아내는 직장을 다니는데, 그가 편히 집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동생, 조카들까지 거두느라 낡고 오래된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살았다.
성숙한 아내는 그에게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형규는 퇴직금으로 생활비를 하며 철학 공부를 하고 싶었다. 오십여 년을 육체를 위해 땀 흘렸으니 이제는 정신적인 생활을 위해 남은 생을 살고 싶었다. 취미생활을 하며 여유 있는 삶을 살날은 언제나 찾아올까 자주 생각했었다.
무조건 한 달은 쉬리라.
그리고 다시 남은 생을 계획하고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처럼 살면 퇴직금으로 10여 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거다 생각하고 아내에게 통장을 모두 맡겼다.
그는 일주일 동안 원 없이 잠을 자고 게으름을 즐겼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아래층에 아줌마 외에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에서 책보다 음악 듣다 누워서 공상하기를 번갈아 하며 빈둥거렸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편안함이 달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내 덕이었다. 아내가 직업이 없었다면 이렇게 단 하루도 쉴 수 없었을 것이다.
아줌마는 별안간 형규가 집에 있자 신경이 쓰였지만 그는 점심도 제가 차려 먹겠다며 아줌마를 부엌에서 밀어냈다. 잠시 후 오히려 식탁을 차려 아줌마를 불렀다.
노란 카레라이스를 먹음직스럽게 만들어서 아줌마 수저까지 놓았다.
아줌마는 깜짝 놀라며 황송해하였다.
“이모님, 제가 집에 있는 동안 점심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찾아 먹을게요.”
항상 예의 바르고 친절했던 형규인지라 어려웠는데, 고마워서 눈물이 다 핑 돌았다.
“우리 식구들 돌보느라 늘 수고가 많으셔서 오늘은 제가 대접하고 싶었어요. 어서 같이 드세요.”
아줌마는 밥을 먹으면서 은경과 함께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자 아줌마 아들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왔다.
아줌마는 휴가를 내고 연변으로 떠났다.
형규는 아줌마가 하던 집안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식구들이 먹고 나간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하였다. 이층으로 올라가 아들들의 방에서 세탁물을 가져와 세탁기를 돌리며 그들의 방을 청소했다. 아래층 청소까지 하고 빨래를 널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잠시 쉬었다.
집안일을 전적으로 해보니 직장 일과 집안일을 함께 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산 아내의 생활이 정말 많이 고단했겠구나 실감되었다.
아줌마가 도와주었어도 신경 쓸 일이 좀 많았겠는가.
그래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늘 불평 없이 해내는 아내.
제 아들 둘을 키우는 것도 힘든데 조카들까지 똑같이 사랑하는 아내가 존경스러웠다.
이제는 웃을 때 눈가의 잔주름이 곱게 퍼지는 아내가 날이 갈수록 더욱 살갑게 느껴졌다. 후덕한 아내가 아니었다면 동생 가족을 돌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생의 불행한 삶이 측은하게 느껴져 늘 마음이 쓰였다.
예쁘고 생기발랄했던 동생이 우울증까지 걸리다니...
천만다행으로 아내 덕에 조카들이 탈 없이 자라고 있어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아내가 고마웠다.
아줌마는 연변 간 지 한 달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형규가 집에 있어 맘 놓고 아들, 며느리와 휴가를 즐겼다.
그동안 못 해준 맛있는 음식을 매일 만들어 주며 모자의 정을 나누었다.
이제는 아들과 살아도 될 것 같았다. 며느리도 직장을 다니니 아이라도 낳으면 돌보아주어야 했다.
처음 몇 년은 신생아 아이들을 돌보느라 많이 신경 쓰였지만 좋은 부부를 만나서 한 가족처럼 맘 편히 살 수 있었다. 덕분에 아들은 결혼하고 작지만 집을 장만하였다. 이제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겠다고 한다. 그녀는 은경에게 전화해서 감사 인사를 하고 제 물건들을 챙겨 가겠다고 했다.
은경은 아줌마가 떠날 때 아들 결혼 축하금을 후하게 주었지만, 또 세 달분 급료를 퇴직금으로 주었다. 아줌마는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지만 헤어짐이 섭섭한 은경은 한사코 가방에 돈 봉투를 넣어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동안 이모님 덕분에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이제 아들하고 행복하게 사세요. 건강하시구요.”
아이들도 모두 정든 아줌마와 헤어지는 것을 섭섭해했다.
진희와 정민이가 작은 선물을 아줌마께 드렸다.
정민이 엄마에게 무슨 선물을 드리면 좋을까 물었었다.
정민이는 가죽 장갑을, 진희는 은경에게 묻지도 않고 스스로 알아서 모아놓은 용돈으로 색깔 고운 스카프를 사서 드렸다.
은경은 아줌마 없이도 형규가 살림을 잘 돌보아주어 예전보다 힘들지 않았다.
늘 하듯이 그녀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또한 형규의 살림 돌보는 솜씨에 놀라곤 했다. 은경이 오기 전에 밥솥에 쌀을 씻어 밥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밑반찬도 곧잘 만들어 놓았다. 그는 견과를 넣은 잔멸치 볶음과 연근조림을 아주 잘하였다. 정민이와 진희는 간식처럼 식탁에 놓인 그 반찬들을 한 숟갈씩 떠먹었다. 형규는 멸치볶음은 밥반찬이 아닌 간식으로 먹는 것이 더 건강에 좋다며 아이들에게 인과 칼슘의 상관관계까지 설명하였다.
문제는 정기가 여전히 편식을 심하게 하는 것이다.
은경이 집에 사다 놓은 제과점 곡물빵이나 쑥떡보다는 학교 앞 가게에서 파는 떡볶이나 도넛 등 군것질을 좋아하였다. 자연히 집에서 먹는 밥은 덜 먹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정민이 키가 더 크고 튼튼해졌다. 그는 준성일 따라 태권도 학원에 다니고 운동하길 좋아하는데 비해 정기는 초등학교까지 다니고는 그만두었다. 정기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마음이 좋지 않을 때면 몇 시간씩 앉아 그림을 그렸다. 그럴 때 정기의 얼굴은 안색이 안정되고 화색이 돌았다. 사실화보다는 상상화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은 그리는 사람의 내면을 표현한다. 정기는 날아다니며 세상 구경하는 그림을 멋지게 그리곤 했다. ‘먼나라 이웃나라’ 만화를 열심히 보았다. 방에는 정기의 그림이 벽마다 가득 붙어서 정기의 자유 분망한 내면을 화려하게 드러냈다.
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커가면서 바뀌었다.
정기의 어릴 적 꿈은 로봇 과학자였지만 지금은 화가였다.
정민은 회사 다니는 아빠처럼 건축일을 하겠다고 하더니 많이 고단해 하는 아빠를 보면서는 교수님으로 바뀌었다.
준성은 되고 싶은 게 없다더니 고등학교에서 장래 희망을 사업가로 적어냈다.
진희는 여전히 작가를 희망했다. 그들이 생활하면서 겪는 경험이 장래 희망을 바꾸어 갔다. 아이들이 꿈을 지니고 그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들의 미래를 펼쳐가는 씨앗이 되는 법이다.
형규가 퇴직하여 집에 있었지만 은경과 아이들의 생활은 변함없이 굴러가고 집에는 예전보다 더 따스함이 감돌았다.
시누이는 우울한 채 곱게 차리고 출근했고 일하면서 삶을 버틸 수 있었다. 준성과 진희도 여전히 학교에 잘 다니고 일상의 평화는 이어졌다.
미연은 삼 년간 열심히 공부한 덕에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고 준성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교복을 벗은 미연은 이제 성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졸업 기념으로 다시 한번 성관계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제 준성은 사복을 입으면 얼마든지 편의점에서 콘돔을 살 수 있을 만큼 성숙해 보였다. 준성은 졸업식 후에 치루기로 한 이 행사를 오랫동안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이제는 예전 어릴 적 미숙했던 소년이 아닌, 마치 청년이라도 된 듯 미연을 만족시켜주고 싶었다.
미연은 그때보다 좀 더 성숙해졌지만 이제 키는 준성이 더 컸다. 지금도 준성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설레었다. 삼 년이나 그녀를 보았는데, 마치 가지지 못한 보석처럼 그녀를 향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공부해야 한다고 주말에도 도서관으로 가는 미연을 따라갔지만 그녀는 준성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종일 공부만 했다. 준성은 그녀가 보이는 곳에 좀 떨어져 앉아서 그녀처럼 공부하다가 수시로 그녀를 바라보곤 했다.
점심시간에 함께 밥 먹고 잠시 걸은 후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였다.
미연은 건강관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혼자지만 꼭 밥이 아니어도 하루 세끼를 잘 챙겨 먹었다. 아프면 공부하는데 힘들고 우울해지니 자기만 손해란다. 다이어트는 해본 적이 없고 군살이라곤 없는 날씬한 몸이다. 준성과 달리 그녀는 군것질이나 음료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준성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자극을 받아 틈틈이 운동하면서 체력을 관리했다. 날이 갈수록 그녀를 신뢰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갔다. 그녀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성적표를 위해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같은 반 친구들이 만나고 다니는 자기 또래 여자애들에게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하는 소개팅 따위는 콧방귀를 뀌며 ‘너희들이나 해라’였다.
준성이 크리스마스, 연말, 생일 등을 빌미로 몇 번을 함께 자자고 졸랐지만 그러면 다시는 안 만나겠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던 미연이였다.
그들이 약속한 날은 쾌청한 하늘, 아직은 추위가 살짝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월 마지막 주말이었다. 준성은 하루하루를 지루하게 기다렸다. 그는 기대에 부풀어 그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들은 만나기 무섭게 기쁜 마음으로 한 몸이 되었다.
미연은 삼 년 전 첫날 밤의 아픔 대신 짜릿한 쾌락을 경험했다.
그들은 이제 어른들이 나누는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준성은 그녀가 절정에 이를 때까지 참으며 희열감을 만끽하였다.
온 세상이 그들만으로 가득한 시간을 경험하였다.
학교고 뭐고 다 그만두고 이대로 그녀와 살고 싶었다.
무슨 일이라도 해서 그녀를 먹여 살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날 밤 그들은 다시 한번 숨 막히는 절정을 경험하였다.
그대로 자고 싶어 하는 준성을 깨워 집으로 돌려보낸 시간은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미연도 그를 안고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미성년자인 준성에게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만 돌아가. 난 어른들 걱정하게 하는 거 싫어. 넌 아직 미성년자이고, 나는 우리가 누린 자유에 대해 책임지고 싶어. 또다시 만나려면 참을 줄 알아야 해. 어서 가. 나 이제 자고 싶어.”
미연은 그녀보다 어린 준성이 방종하지 않도록 지켜주었고 준성은 그녀의 말에 순종하며 따랐다.
준성이 한두 번 뒤에 앉아 건들거리는 급우들과 어울렸지만 미연의 경고로 휩쓸리지 않았다. 둘이 사귄다고 소문이 나면서 그들이 준성을 야유했을 때 미연은 말했다.
“네가 부러운 거야. 공부 못하는 그런 애들은 널 놀릴 자격도 없어. 그냥 무시해. 내가 널 좋아하는데 뭐가 문제야?”
준성은 그녀의 말이 지당하다고 생각했다.
준성은 두 번째 성 경험 이후 몇 번을 미연에게 원했지만 그때마다 미연은 말했다.
“너 고등학교 졸업하고... 네가 대학에 가면 동등한 성인으로 대해줄게. 그때까지 기다려.”
“사랑해. 매일 너무너무 생각나.”
준성은 애가 타서 말했다.
“우린 아직 사랑이 뭔지 몰라. 성욕에 눈을 뜬 것뿐이야. 그것을 경험해 알았지만 그게 곧 사랑은 아니야. 예전에 내가 널 유혹한 건 미안해. 사과할게. 잘못을 되풀이할 수는 없으니, 우리 떳떳하게, 너 대학 간 후에 제대로 사귀자. 공부 잘해서 우리 대학에 오고 싶지 않아?”
차분하게 말하는 그녀는 세 살 연상인데다 준성에게는 온 세상이나 다름없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계속 만나기 위해서라도 그녀처럼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늘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 또한 수시로 변할 수밖에 없다.
미연이 대학에서 같은 과의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매일 마주쳤다.
미연은 그가 그녀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아 편안했다. 자주 과제를 하기 위해 함께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보며 공부도 하고 구내식당에서 밥도 먹으니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 학기가 지나자 그가 주말에 무얼 하냐고 물으며 데이트하자고 했을 때 미연은 준성이 생각났다. 이제 준성이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예전에 미연이 공부에 몰두했던 것처럼 준성도 공부에 더 몰두해야 했다.
준성은 날로 더 환하게 피어나는 미연에게 조금씩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공부에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했듯이 그도 최선을 다하지 않고서는 그녀가 다니는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미연은 공부에 전념하라며 한 달에 한 번만 보자고 준성에게 말했다.
그녀로서는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여 준성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준성에게 정말 중요한 시기를 잘 넘기게 해주고 싶었다. 미연은 그가 자기처럼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 바랬다.
미연은 어린 그에게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의 감정이 일지 않았다. 친동생처럼 그가 편하고 좋았다. 그러나 그녀가 누린 일탈에 대한 책임을 느꼈다. 그도 대학 들어가 다른 여학생들과 어울리다 보면 그녀를 향한 맹목적인 마음이 식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때까지는 그를 쓸데없이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준성의 말 없음을 보는 은경은 왠지 그의 침묵이 가끔은 불안하게 느껴졌다. 남편 만큼이나 훌쩍 커버린 그의 육체처럼 그의 정신이 성숙한 것은 아니므로 자주 간식거리를 들고 공부하는 그의 방을 두드렸다.
“고마워요.”
간단한 인사말 외에는 다른 말이 없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은경은 말했다.
‘숙모가 뭐 도와줄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은경은 진희도 매일 보살폈다.
아줌마가 간 후로 그 방을 진희의 공부방으로 꾸며주었다.
시누이는 자신만 치장하고 나갈 뿐 딸의 생활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희는 마치 집에 없는 듯 조용히 자기 방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곤 했다.
은경이 시누이의 얼굴 보는 일도 드물었다. 그들 가족은 늘 조용히 서로 말이 없었다.
은경은 아이들 소리로 시끌벅적하던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러갔나 생각하며 정기, 정민, 진희를 바라보았다.
준성인 학원에서 공부하다 저녁도 간식으로 때우고 늦은 밤이 되어야 돌아왔다.
이제야 은경은 한숨 돌린 사람처럼 그들에게서 좀 떨어져 쉴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을 형규는 효율적으로 처리하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공부도 잘하고 있었다. 철학 공부하는 동아리 회원이 되어 주 일 회 정기적으로 참석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늦도록 자지 않고 책을 읽는 그의 얼굴은 안정된 중년 남자의 멋스러움이 풍겼다. 은경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친밀하게 느껴지는 남편의 존재가 감사하고 소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커다란 핸드폰이 나오더니 얼마 안 지나 대중화되면서 은경은 남편의 생일에 핸드폰을 선물했다. 요금이 좀 비싸긴 하지만 아주 효용성 있는 물건이었다.
남편은 직장 다니는 당신이 필요하지 내가 뭐가 필요하냐고 말했지만 내심 좋아했다. 밖에서도 아내와 아이들을 챙길 수 있어서 편리했다.
은경은 자신의 통장에서 요금이 자동 결재 되도록 해놓았다. 그리고 그가 아쉽지 않도록 아줌마 드리던 월급을 그의 통장에 매달 넣어주었다.
처음에는 그럴 필요 없다며 사양했지만 아내의 배려가 정말 고마웠다. 사실 남자에게 경제력이 없어진다는 건 자존심이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집안 살림을 돌보아주어서 내가 정말 편해요. 아줌마도 월급을 드렸는데 우리 집 가장인 당신에게 월급 주는 건 당연해요. 내가 보너스 받을 때는 당신도 보너스 줄게요.”
검소하기 이를 데 없는 아내였지만 자기만 빼고 식구 누구에게나 후덕한 아내였다. 형규는 아내가 주는 월급이면 아내와 자식들에게 아쉽지 않게 베풀 수 있었다.
동아리 활동하면서 드는 비용도 충분했다. 다른 친구들은 퇴직과 함께 천덕꾸러기 되기 십상이라는데 형규는 아니었다.
은경은 주택청약으로 아파트를 분양받았지만 잔금이 부족해서 전세를 놓았다.
그 전세금을 돌려줄 수 있을 만큼 저축이 되면 시누이에게 줄 생각이었다. 이 집을 남편과 은경이 물려받았으니 아파트는 그녀에게 주려고 생각했다. 은경은 그녀가 좀 더 안정된 인생을 아이들과 살아가기 바랬다.
시누이가 오랜만에 쉬는 휴일
준성이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용돈을 좀 더 달라고 요구하자 엄마는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했다.
준성은 밖에서 저녁을 사 먹는 날이 많아지면서 좀 부족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빠가 아닌 엄마에게 손 벌리는 일이 미안하기도 했다.
쓸쓸한 마음에 미연의 오피스텔 앞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집에 없었다. 준성은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밤에 다시 오자 생각했다.
그녀와 만나기로 한 날은 다음 주였다. 그러나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그녀를 꼭 보고 싶었다. 10시가 넘었는데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준성은 그녀가 몇 시에 오던지 보고 가야지 맘먹고 아예 마주 보이는 길가 가로등에 기대어 서서 영어단어를 암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이는 순간 반가움에 발을 떼다가 곁에 같이 걸어오고 있는 남자를 보고 준성은 심장이 멎는 듯 충격을 받았다.
몸을 숨겨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마주 서서 인사를 나누고 그가 돌아서 준성을 지나쳤다.
준성은 그를 붙잡고 누구인지 묻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오피스텔로 가 초인종을 눌렀다.
“웬일이야? 이 밤중에?”
미연이 활짝 웃으며 나왔다.
“누구야? 그 사람은?”
준성이 볼멘소리로 묻자 미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과 남학생, 너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니까 괜한 시비 걸지 마.”
“종일 같이 있어 놓고 아무 사이 아니라구?”
준성은 다그치듯 말했다.
“준성아, 이러면 곤란해. 나도 내 생활이 있어. 오늘 그와 함께 있었지만 학과 공부를 위한 만남이었어. 일일이 네게 다 말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네가 이런 식으로 날 구속하면 난 너를 만날 수 없어. 내가 약속할게. 네가 대학 들어갈 때까지 누구와도 연애하지 않을게. 그러니 신경쓰지 말고 너는 공부에만 전념해. 내가 그랬듯이...”
미연은 준성의 손을 잡으며 그를 달랬다.
준성은 그녀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게 억울할 만큼 질투심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동안 봐온 미연은 자신이 한 말을 잘 지키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준성은 그녀의 말을 믿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준성에게 그녀는 아직 누나나 다름 없었다. 준성의 간절한 눈빛이 미연의 마음을 흔들었다.
“내가 좀 피곤해. 쉬고 싶으니까 약속대로 담주 만나자. 잘 가.”
미연은 자신의 일탈을 공모하는 대상으로 만만한 준성을 선택했지만 그는 성장할수록 만만한 대상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사랑은 태양처럼 뜨겁고 강렬하게 그의 심장을 덮어갔다.
19. 장래 희망
정기와 정민이 나란히 중학교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날.
은경은 흐믓한 얼굴로 그들을 포옹했다. 잘 자란 그들을 보면서 마음이 든든했다. 남편에게서 느꼈던 행복과는 또 다른 벅찬 감동이었다.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제는 한숨 돌려도 될 것 같은 안도감이 조금 느껴졌다.
시험관 아기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조금만 아파도 늘 가슴이 쿵 내려앉곤 했었다. 정상적으로 아이를 가졌다면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 조바심과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그런 면에서는 준성이나 진희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
은경이 생각하기로는 준성은 사춘기를 열심히 공부하며 탈 없이 잘 넘겼다.
진희도 마치 사춘기가 없는 애처럼 어른들 말에 고분고분 따르며 잘 지냈다. 처음 생리가 시작되었을 때 엄마가 아닌 은경에게 살짝 귓속말로 알려주며 얼굴을 붉히는 진희를 은경은 축하한다며 꼭 안아주었다.
은경은 교복 치마를 입은 진희의 다리가 여전히 약간 차이 나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걸렸다. 이제는 진희도 알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경은 모르는 척했지만 민감할 나이의 진희가 신경 쓰였다.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될 때면 꼭 바지를 입는 것을 보면 본인도 그 사실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창 외모에 신경을 쓸 때인데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삼키는 진희가 안스러웠다.
정기의 사춘기는 노란 개나리처럼 활짝 피는 듯하더니 민망하게 사라졌다.
유치원 다닐 때는 여자애도 친구들과 함께 집에 왔었다. 얌전하고 예쁜 한 여자애가 맘에 드는지 맛있는 것을 제 몫까지 주면서 놀았다. 정민이는 특별히 좋아하는 애 없이 모두와 잘 어울렸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난 뒤 아줌마가 물었다.
“정기는 그 예쁜 애가 좋구나.”
“응, 예뻐서 좋아.”
정기가 거리낌 없이 말했다.
“정민인?”
아줌마가 어질러진 장난감을 정리하는 정민을 보고 물었다.
“난 친구들 다 좋아요.”
정기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저녁 식사 시간인데 정기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은경이 방에 올라갔다.
“뭐하니? 왜 식사하러 안 나와?”
“.....”
은경은 대답하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정기를 마주 보고 앉아 손을 잡았다.
“무슨 일인지 말해 봐.”
“그냥 먹기 싫어요.”
은경은 배고프면 먹겠지 생각하고 내려와 정민에게 물었다.
“정기 무슨 일 있니? 왜 밥을 안 먹는대.”
“정기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어요.”
정민이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은경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저녁상을 치운 뒤 다시 정민에게 물었다.
“무슨 일일까? 엄마가 알아야 도와줄 수 있을 텐데...”
“사실은 별일도 아니예요. 정기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정민이 웃으며 말했다.
은경은 벌써 아이들이 엄마인 자기에게 말하기 싫은 비밀들이 생기는 것을 알고 살짝 서운했지만 금새 잊어버리고 내일 먹을 식자재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주방을 정리하고 올라가려고 하는데 정기가 내려와 라면을 끓여 먹겠단다.
“밥을 먹지 그래. 네가 좋아하는 불고기 반찬 남겨 놓았는데...”
엄마 말을 들은 척 않고 계량컵으로 물양을 가늠하여 냄비에 물을 올렸다.
아이들은 라면을 매우 좋아한다.
손쉽게 끓여 먹을 수 있는 데다 인공감미료를 넣은 감칠맛 때문인지, 은경이 제어하지 않으면 아마도 매일 먹겠다고 할 것 같았다. 은경은 한 달에 2번 이상은 안 된다며 제한했다. 입맛이 라면 맛에 길들여지는 것을 막고 균형 잡힌 식사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찬장에 사놓은 라면은 한 사람당 한 달에 두 개다.
정기는 젤 먼저 먹어 치웠다. 편식하는 탓에 정기는 얼굴에 발긋발긋 여드름이 솟아 연고를 발라주곤 했다.
나중에 들으니 활발한 성격의 정기 짝이 평소 정기를 좋아하였는데, 아이들도 있는 어느 날 쉬는 시간에 이야길 하다가 느닷없이 기습 뽀뽀를 했단다.
정기는 교실 밖으로 뛰어나가 다음 수업 시간이 끝나도록 들어오지 않았단다. 아예 특활시간을 빼먹고 집으로 와버린 거다.
다음날 쉬는 시간에 정기는 선생님께 짝을 바꾸어달라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아이들은 여럿이 몰려가 서로 그 이야기를 하며 정기를 수치스럽게 했다.
정민은 그 애가 좀 주책이지만 공부도 잘하고 착한 애라고 말했다.
그 애의 장난이 지나쳤지만 남자애들은 정기를 부럽다며 놀렸단다.
정민은 ‘나라면 좋았을 것 같은데...’라며 웃었다.
은경은 정기나 짝꿍이나 둘 다 별나다고 생각하며 따라 웃었다.
정민은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쪽지 편지를 주는 애들도 있고 초코렛 선물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누굴 특별히 맘에 두거나 하지 않고 모두에게 친절했다.
그는 운동하랴, 공부하랴, 정기 도와주랴, 몸이 두 개여도 모자를 정도로 분주했다. 그러니 사춘기를 특별히 겪을 여유조차 없었다. 은경은 집안의 기둥이 될 바람직한 정민을 보면 마음이 흐믓하여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릴 때 조금 큰 운동화를 사주면 정기는 신발이 크다며 싫어라 했다.
“발이 자꾸 크는데 그래야 내년까지 신지.”
은경이 정민에게도 신겨보며 말했다.
“그럼 아주 아주 큰 거 사서 어른 될 때까지 신어요.”
손을 크게 벌리며 말하는 정기를 보며 은경도 신발가게 사장도 함께 웃었다.
준성이 작다고 안 신는 운동화를 보관했다 주면 정민은 군소리 없이 신었다.
다음에 나오는 준성이 운동화를 정기에게 주었지만 정기는 신지 않고 밀어놓았다.
결국 정민이가 또 신게 되었다.
은경은 정기가 새 운동화를 살 때 정민에게는 운동화값을 용돈으로 주었다.
그러자 정민은 더 좋아라 했다. 공부 잘하는 형이 신던 운동화라고 좋아했다.
둘은 은근히 매사에 경쟁하는 듯 했지만 정기가 정민이보다 잘하는 것은 미술뿐이었다. 정기의 장래 희망은 로봇 만드는 과학자였다. 정기가 그린 여러 가지 로봇 그림들이 한쪽 벽 가득했다.
정민은 아빠처럼 회사원이 되겠다고 하더니 중학교에 가서는 컴퓨터공학자가 되겠다고 했다.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란 커가면서 생각이 성장하듯 변하고 또 변한다.
준성이 미연과 함께 보낸 사춘기는 겉으로는 바람직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열병을 앓으며 언젠가는 폭발할 화산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의 장래 희망은 사업가였다.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버린 아빠에게 보란 듯이 과시하고 싶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미연에게 선택받고 싶었다. 예쁜 여자들은 부유한 남자를 선택한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깨진 가정은 준성에게 상처로 남았다.
자신은 절대로 자식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럴 바에는 안 낳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장래 희망이 작가인 진희는 가족의 결손을 묵묵히 이겨내면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책 속에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하면서 상상의 날개를 펴고 마음껏 날아다녔다. 언젠가는 하게 될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며 몽상에 빠져들었다.
은경과 형규가 부부로 산 지 20여 년이 되었다.
그들의 속 깊은 사랑은 더욱 결속력이 강해졌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고단한 일상에서 조금씩 벗어났지만 그들의 성생활은 뜸해졌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그리도 자주 한 몸이 되었는데 점차 성적 흥분에서 벗어나며 정신적 안정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찾아왔다.
이제는 서로에게 어떤 확인을 하지 않아도 한 몸처럼 서로를 신뢰하게 된 탓도 있었다. 세상일이란 무엇이든지 흔하면 천해지는 법이다. 그들이 육체적 욕망을 만족스럽게 채운 탓도 있었다.
은경은 아이들에게서 충분히 행복감을 느끼며 만족하였다. 하루하루 감사한 생각이 충만하였다.
잠자리에서 은경의 손을 꼬옥 잡아주는 형규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며 곤히 편안하게 잠들었다.
형규는 직장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어려움을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며 버티어냈었다. 생각보다 일찍 조기 퇴직하였지만 미련 따위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진정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 싶었다. 밥벌이는 그만 해도 살아갈 수 있었다. 착실하게 미래를 준비한 아내는 형규의 절대적 지지자가 되어주었다. 세상이 좋아져서 그녀는 퇴직하면 공무원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형규도 적은 금액이지만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보험회사에서 학비를 부담하니 그의 퇴직금과 아내의 월급으로 노후 생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네 아이의 많은 보험금을 꾸준히 납부하며 검소한 생활을 이어온 아내 덕이었다.
가족 중 누군가 중병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의료보험이 잘 되어 있어 큰 걱정을 안 해도 되는 나라였다.
수많은 불행을 겪으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므로 부부는 늘 감사하며 가족을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시누이는 그동안에도 계속 누군가 만나는 것 같았지만 재혼하지는 못했다.
이혼하고 처음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큼 사랑에 빠졌던 경험이 예방주사처럼 그녀를 강하게 하였는지 크게 일상이 흔들리지 않았다.
은경은 그녀가 말하지 않는 사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다. 그녀가 탈 없이 직장을 다니고 무사히 아이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감사했다. 그들과 함께 사는 것만도 안심이었다. 시어머니의 유언대로 그들이 준성과 진희를 돌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경은 내심 그녀가 좋은 사람을 만나 다시 가정을 꾸리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자신처럼 그녀도 행복하길 진정으로 바랬다.
그녀의 외모는 분명히 남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한 번 잘못 채운 단추처럼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그녀와 오래가지 못했다. 부양해야 할 아이 둘이 있다는 건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녀를 사랑하여 그녀와 아이들을 함께 포용할 기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외롭고 초조하여 쉽게 그녀의 몸과 마음을 모두 내주었다.
아이들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만 그들은 그녀를 사랑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상대를 기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러다 평생 혼자 살게 될까 봐 두려웠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지만 오빠에게 얹혀산다는 건 여전히 맘에 들지 않았다. 빨리 분가해서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싶었지만 세상일은 결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빠 내외 덕에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었지만 그녀는 감사하기보다는 그들의 후덕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한 번은 가족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제 방으로 들어가고 난 늦은 저녁 시간 낯선 여자가 찾아왔다. 시누이의 이름을 대며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은경과 형규는 그녀를 들이고 차를 대접하였다.
그녀는 다짜고짜 눈물을 흘리며 시누이가 자신의 남편과 내연의 관계라고 했다.
먼저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관계가 끝나지 않아 실례지만 도움을 청하러 왔다고 했다. 자신도 남편도 이혼할 생각은 없다며 남편을 용서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형규는 얼굴이 붉어지며 그녀에게 얼른 사과하며 약속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동생을 잘 설득해서 관계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동생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도록 제가 약속하겠습니다.”
형규는 머리를 조아리며 몇 번을 사과하였다.
은경은 형규의 가슴이 얼마나 아플까 생각되어 아무말도 더 못하고 조용히 그녀를 배웅하고 들어왔다.
형규는 냉수를 들이키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날 밤 형규는 집에 온 동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행여 그들의 이야기를 아이들이 들을까 염려했다.
한 시간도 더 지나서 그들이 집에 들어왔다. 형규는 더 이상 말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은경은 그의 손을 꼭 쥐며 그를 안았다. 남편의 말 없는 절규가 전해지는 듯 마음이 아팠다.
이틀 후 시누이는 직장을 그만두고 며칠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은경은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는 그녀가 염려되었지만 형규는 그냥 두라고 했다.
시누이는 자신을 돌아보며 자존심을 회복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은경은 다만 그녀를 지지한다는 의미로 그녀의 주머니에 돈을 조금 넣어주며 말했다.
“아가씨, 끼니 꼭 챙기고 자주 전화 줘요.”
고개 숙인 그녀의 가방을 문밖까지 들어다 주었다.
은경의 어머니는 재혼하지 않았다. 이모는 그녀를 설득하지 못했고 소개했던 사내는 시간이 한참 지나자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어머니는 이모네 곁에서 조용히 하루하루 살아갔다.
아들이 함께 살기를 원했지만 어머니는 바다를 떠나지 않았다. 그 바다에 잠긴 아버지의 넋과 함께 사는 듯했다.
동생 은수는 몇 년 후 백령도를 자원하여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섬 처녀와 결혼했다.
은경의 가족은 바다가 할퀴고 간 깊은 상처를 그렇게 극복하며 살아냈다.
은수의 결혼식장에서 은경은 고등학교 내내 그녀 주위를 맴돌던 남자와 마주쳤다.
체격이 큰 그가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와 그의 가족들을 소개했다.
그보다 많이 어려 보이고 얌전한 아내와 아들 두 명이 은경에게 인사했다.
은경도 반갑게 웃으며 그녀의 남편과 쌍둥이 아이들을 인사시켰다.
두 남자는 통성명하며 악수하였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첫 사랑 은경의 남편을 예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은경은 여전히 잊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여인이었지만 세월은 그들을 아주 멀리 다른 곳으로 실어 갔다. 은경의 올케가 된 처녀는 바로 그의 여동생이었다.
오빠는 여동생이 결혼하기 전 은수를 인사시키는 자리에서 깜짝 놀랐지만 곧 소리내어 호탕하게 웃었다. 은경이 자신과 배필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이런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은경도 그를 보자 반가움과 동시에 깜짝 놀랐다.
그가 은경을 몹시도 쫒아 다녔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살아났다. 결국 그녀를 포기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잊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끝내 곁을 주지 않던 은경과 달리 남동생 은수는 그의 여동생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같은 섬에서 자라며 보아온 그들은 서로 호감을 지니고 있었지만 내색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오빠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었지만 대신 여동생은 은수와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은수의 아내는 섬의 부유한 유지 딸답게 활달하고 용모도 귀여워서 인기가 좋았다. 그녀는 사춘기 들어 과묵하고 공부 잘했던 은수를 아이일 때의 동네 오빠 이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오빠가 은경 언니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나름대로 애를 태웠기에 은경 언니도 오빠도 섬을 떠나자 뛸 듯이 기뻐하며 은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렸다. 그들은 그때부터 사귀기 시작하였다.
은수는 그녀가 자신에게 과분한 여자라고 생각하여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받아들였다. 그녀는 늘 그의 애정에 목말랐다. 은수가 타지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주 볼 수도 없었다. 그녀는 급기야 결혼하자며 조르고 은수는 어머니가 계신 백령도로 전근신청을 하였다. 그는 생각지 못했던 행운으로 어머니와 아내를 모두 돌볼 수 있게 되어 내심 몹시 기뻤다.
그녀의 부모님은 딸이 좀 더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기를 바랬지만 그녀는 은수 아니면 평생 혼자 살겠다며 떼를 써 결혼을 성사시켰다.
은경은 돌아오는 차 속에서 잠시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겼다.
삼 년 내내 이어지던 그의 관심에 흔들리지 않았던 건 그를 끔찍이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훤칠한 외모는 아니었어도 남자답고 의협심이 강하여 그를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다만 은경은 간절히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를 앗아간 그 바다를 떠나고만 싶었다. 그의 아내가 되어 그 섬에 남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심성이 바른 그는 앙심을 품거나 해코지하지 않아서 오히려 충실한 보디가드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그가 사랑을 고백했을 때 은경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집으로 뛰어 달아났다. 그리고도 다시 이어지던 두 번의 구애에는 분명하게 말했다.
“난 선배 좋아하지 않아요. 날 내버려 두세요.”
“나는 곧 이 섬을 떠날 거예요. 그러니 제발 날 잊어버려요.”
그는 더 이상 구애하지 않고 원양어선을 타고 3년간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인천에서 공장을 운영하며 가정을 꾸렸다.
은경은 그가 잘 사는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며 형규의 옆얼굴을 보았다.
마치 아버지가 남편을 보내준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 섬에서 선배와 결혼하여 살았을지도 모른다.
은경은 손을 남편의 다리에 살며시 얹었다.
결혼할 인연은 따로 있다더니 얼마나 소중한 내 인생의 동반자인지 새삼스럽게 그가 다시 보였다. 형규는 은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이심전심이었다. 서로의 얼굴만 보고도, 그 눈빛만 보고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게 된 세월을 함께 살았다.
거의 늘 직장에 매여 살던 그가 이제는 집에서 은경을 반겨주며 집안 살림을 돌보아주었다. 돈 욕심이 없는 그녀는 남편이 자유롭게 그녀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생활비는 그녀가 벌어도 상관없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가족들 돌보느라 나서지 못하는 그에게 이제는 아이들이 컸으니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은 망설이지 말고 다녀오라고 말하였다.
그는 당신도 은퇴하면 함께 가자며 사양하였다.
직장을 다니지 않고 살 수 있는 자유만도 감지덕지라며 그녀에게 감사했다.
그들은 아이들 방학 때마다 캠핑장을 찾아 며칠씩 휴가를 보냈다. 아들 둘은 이제 아빠를 도울 만큼 자랐다. 그는 지도를 펴놓고 아이들과 휴가 계획을 세울 때 가장 행복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은경의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번졌다.
형규는 우선 내 나라 내 국토를 샅샅이 다녀보고 싶었다. 그 여행은 큰 비용이 들지 않았다. 텐트와 취사도구를 가져가 손수 해 먹었다. 아들들과 함께 요리하는 일은 또 색다른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들은 은경을 쉬게 하며 자신들이 만든 음식을 대접했다. 아침은 양식으로 간편하게 먹고 길을 떠나 돌아다니다 점심은 간식으로 해결하고 저녁은 제대로 밥을 해 먹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부모의 지혜를 공유하며 친밀함을 더하였다. 은경은 자연 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그들을 보는 일만도 즐겁고 행복했다. 돌아오기 전날 한 끼는 현지의 유명한 음식을 사 먹으며 즐거움을 나누었다.
아이들은 캠핑을 신나는 놀이로 받아들이며 다음 방학을 기다렸다.
일 년에 두 번 여행을 떠나기 위해 그들은 저축했다.
정민은 늘 정기보다 더 많이 돈을 내놓았다. 은경은 그들이 비용을 보태는 것에 의미를 두었으므로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칭찬을 듬뿍 해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좋은 일이라는 인식과 함께 흐믓함을 느꼈다.
준성은 함께 가지 않았지만 진희는 기꺼이 여행에 동참하였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진희에게 여행은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외삼촌과 동생들이 공주 대접을 해주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드넓은 바다나 강에서 수영하고 등산을 하는 일이 신났다.
밤에 잘 때는 왼쪽 발목이 좀 아팠지만 참을만했다. 은경은 수영복을 입은 진희의 왼쪽 종아리가 살짝 가는 것에 또 눈이 갔지만 얼른 진희 손을 잡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수영을 잘하는 은경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수영을 가르쳐 주었고 이제는 그들도 수영을 곧잘 하였다.
은경은 다시는 수영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지난날 다짐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이렇게 바다에서 자식들과 물살을 가르며 수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한여름 작렬하는 태양 빛은 수면 위에 한없이 부서져 쏟아지며 반짝거렸다.
20. 첫사랑
미연은 준성의 질투를 느낀 이후 명훈의 배웅을 거절했다. 또다시 행여 준성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명훈은 밤길에 데려다준다는 호의를 거절하는 미연이 의아했지만 캐묻지 않고 순순히 헤어져 갔다.
한 학기 이론 수업이 끝나자 이번 학기에는 연주 과제가 주어졌다. 미연은 명훈과 연습실에서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나 미연은 늘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더 가까워지지 않았다.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던 명훈은 오히려 그런 미연에게 호기심이 일어나 물었다.
“혹시 남자친구 있어? ”
그들은 모르는 새 자연스럽게 서로 말을 놓는 사이가 되었다.
“응.”
미연은 짧게 대답하였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명훈은 역시 그랬구나 생각하면서 부쩍 궁금해졌다. 그러나 미연은 화제를 돌리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미연은 준성일 남자친구라고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난처함을 느꼈다. 그녀는 준성과도 명훈과도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 성인이 되어 자유로운 시간이 되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흔쾌히 자유롭지 못했다. 준성이 맘에 걸리곤 했다.
그는 아주 가끔 늦은 밤에 오피스텔 앞으로 와 그녀와 짧은 몇 마디라도 나누고 얼굴을 보고 갔다. 그러지 않고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미연은 갑자기 찾아오는 그가 조금씩 부담스러워졌다. 그녀와 약속한 시간 외에 찾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공부에 집중하기 바랬다. 그러나 그를 자극하거나 심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싫은 내색 없이 잘 응대하고 돌려보내곤 했다.
미연을 보고 싶어 달려오는 준성과 달리 미연은 그가 그립지 않았다. 미연은 대학 생활의 모든 활동을 잘 해내고 싶어 준성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여대생들이 흔히 하는 소개팅이나 남학생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엄마가 원하는 대학에는 갔으나 미연의 맘대로 실용음악과를 선택했다. 미연의 적성을 살린 선택이었지만 엄마는 반대하였다. 좀 더 사회에서 대접받는 전문적인 직업을 갖을 수 있는, 그야말로 실용적인 음악교육과를 원하였다. 그렇지만 엄마의 돌봄 속에서 살지 않은 시간이 더 많은 미연의 선택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제 미연은 엄마의 손을 벗어난 딸이었다. 처음 엄마가 되어 겪은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삶을 위해 늘 옆으로 비켜놓곤 했던 딸이었다.
미연이 시간제 보컬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어 신원보증을 위한 서류가 필요했다.
처음으로 동사무소에 가서 해보는 일이라 주민등록 등본과 주민등록 초본의 차이점을 모르는 그녀는 두 가지를 다 신청했다. 그리고 깜짝 놀라 보고 또다시 보았다.
엄마가 이혼하고 지금 아빠와 재혼을 한 것을 여지껏 모르고 살았다니!
세 살 때부터 할머니 댁에서 살은 미연은 아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새 아빠를 친아빠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는 미연이 커가면서 아빠와 친한 것을 그렇게 신경썼구나 깨달았다.
아빠와 딸을 질투하다니, 도대체 왜 저러나 의아할 때가 여러 번 있었는데...
새아빠는 친딸이 아닌데도 그렇게 자상하게 돌보아준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할머니도 새아빠도 미연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하신 거다. 행여 마음의 상처라도 입을까 봐...
그런 줄 알았으면 착한 아빠에게 좀 더 잘할 것을 후회가 밀려왔다.
친아빠라고만 생각하고 사춘기 들어서는 가끔 아빠를 서운하게 했었다.
미연은 오히려 냉정한 엄마가 계모가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만큼 아빠는 미연에게 다정했고 친아들인 동생보다 더 세심히 돌봐주었다.
그날 미연은 수많은 의문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친아빠는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단 한 번도 딸을 찾지 않는 걸까?
엄마는 왜 이혼했을까? 새 아빠는 딸이 있는 것을 알고도 엄마와 결혼할 만큼 사랑한 걸까? 엄마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엄마는 헤어진 아빠처럼 나를 싫어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내보낸 것일까?
미연은 엄마를 학원 밖으로 불러내어 주민등록 초본을 내밀었다.
엄마는 잠자코 보더니 올 것이 왔다는 듯 차분하게 말했다.
“네가 성인이 되면 알려주려고 했어.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까... 아빠는 결혼한 지 삼 년 만에 다른 여자가 생겼어. 나는 널 생각해서 해결해보려고 시간을 주었지만 아빠는 정리하지 못했어. 결국은 내가 널 키우기로 하고 이혼한 거야. 그리고 학원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널 외할머니께 맡길 수밖에 없었어. 그러던 중 새아빠를 만나 재혼하게 되고 동생을 낳았어... 아빠와 네가 잘 지내는 것이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어서 어린 널 타지로 보냈어. 미안해... 그렇지만 아빠와 이혼한 뒤 나는 어떤 남자도 믿지 않아. 세상엔 별 별일이 다 많거든. 나는 네가 혼자서도 잘 지내기만 빌었어. 그리고 넌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고 잘 해내서 고마워. 앞으로도 너는 부모와 상관없이 잘 살 거야. 난 널 믿거든.”
미연이 처음 듣는 엄마의 사과와 진심 어린 위안이었다.
은경은 이제 와서 다 지나간 일을 물어서 무엇하나 회의했다. 그리고 외로울 때마다 수없이 생각났던 아빠의 다정한 손길과 집의 따뜻함이 다시금 떠오르며 울컥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으며 은경은 친아빠에 대해서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가족을 버린 아빠라면 아예 잊어버리는 것이 나았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아빠에게 아무 말 하지 마요. 내가 알았다는 거 아빠가 알면 서먹해질 거 같아. 난 지금 아빠가 친아빠나 다름없어요.”
엄마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달라진 건 없는데...
미연은 오피스텔로 돌아오면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서러움을 참느라 몇 번 눈시울을 훔쳤다. 엄마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싫어서 헤어진 아빠의 딸인 내가 좋았을 리 없었을 거다. 그래도 드러내놓고 미연을 미워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딸이 상처 입을까 봐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엄마가 심성 착한 아빠를 만난 건 하늘이 도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아빠에게 감사한 마음과 그리움이 함께 일어났다. 언젠가는 새아빠에게 꼭 은혜를 갚아야지 다짐했다. 보고 싶은 아빠를 보지 않고 그냥 온 건 아무 일도 없는 척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훌훌 털고 잊어버리자. 그리고 행여 죽기 전에 친아빠를 만나게 된다면 당신이 없어도 이렇게 잘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자. 그가 미안하여 고개를 들 수 없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
준성이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 별 감흥 없이 위안했던 생각이 났다.
이제는 어려서 아빠를 잃은 그의 상실감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로웠던 준성이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친누나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형규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중·고교 동창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은 아직 모두 직장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형규의 조기퇴직을 염려스럽게 생각했다. 한 친구가 말했다.
“직장 없으면 개털 되는 거야. 마누라 구박이 시작된다구. 참, 은경씨는 안 그럴 수도 있겠네. 넌 정말 복 받은 놈이야. 요즘 어떤 여자가 동생 식구까지 그렇게 거두어 주냐?”
그들은 은경이 얼마나 무던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지방 근무할 때도 해외 근무할 때도 불평 한마디 없던 은경을 형규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나도 네 마누라 같은 여자하고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 우리 마누라는 돈도 안 벌면서 상전 노릇하는 데 당할 재간이 없어. 넌 제수씨 업고 다녀라.”
기가 센 아내와 사는 온순한 친구의 부러운 탄식이었다.
“네가 자꾸 한눈파니까 더 그러지. 네가 얌전히 집에만 가 봐라. 제수씨가 그러겠냐?”
“사는 게 재미가 없잖니. 죽어라 돈만 벌면 뭐 하니. 대접을 못 받는데, 술집에라도 가야 숨통이 트이지.”
사업을 하는 친구의 한탄이다.
형규는 철학 공부를 시작하고 살림을 돌보면서 하루하루 사는 맛이 났다. 지겨운 술자리도 사라졌고, 눈치 보아야 하는 상사도 가르쳐야 하는 부하직원도 없다. 온갖 잡다한 일로 찌들어가던 직장에서 탈출한 그는 이제야 자유를 얻은 느낌이었다. 사실은 너무 피곤해서 견디기 힘들 때가 많았다. 극도의 피곤함이 몰려오곤 할 때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을 때도 많았다.
처자식이 아니라면 참아내지 못했을 순간들을 참 많이도 버티고 이 자리까지 왔다. 애당초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구 따위는 없었다. 세상일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고 공짜란 물 한잔도 없는 세상이었다. 월급을 많이 받을수록 그 대가를 매일 쥐어짜듯 있는 힘을 다해 살아야 했다.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자립할 수 있을 만큼 공부시켜주면 부모로서 할 일은 다하는 것이고 이제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는 새벽같이 일어나던 습관대로 그 시간이면 눈이 떠졌다.
일어나기 바쁘게 총알같이 출근하던 때는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여유가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는 잠자리에서 나와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은경 역시 그 시간이면 일어났다.
형규가 아침 준비를 할 테니 더 자라고 해도 은경은 늘 하듯이 제 손으로 아침을 차렸다. 아이들과 함께 식사하고 그들이 나가고 나면 은경과 커피 한 잔을 마신다. 형규가 설거지해주면서 은경은 아침 시간의 분주함이 덜어졌다.
형규는 자기 대신 직장 나가는 아내가 고마워 다정한 입맞춤으로 배웅했다.
아침부터 사랑하는 남편에게 입맞춤을 받으며 출근하니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새벽마다 정신없이 뛰쳐나가던 남편이었는데...
형규는 세탁기를 돌리며 청소가 끝나면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 운동장까지 가볍게 달려간다. 숨이 턱에 닿는 것을 참고 왕복 30분 정도 달리기한다.
첫날은 빠르게 걷기부터 하였다. 조금씩 강도를 높이며 내년에는 아이들과 마라톤 대회에도 한번 나가보아야겠다고 목표를 정했다. 직장 다니며 업무상 필요해서 했던 골프는 이제 하지 않는다. 우선 비용을 줄이고 싶었고 그는 골프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작은 나라에 골프장이 늘어나는 것도 싫고 남과 내기하고 경쟁하는 행위 자체를 싫어했다. 골프장에서 벌어지곤 하던 업무적 이해관계도 싫었다.
집에 와서는 아침에 먹다 남은 밥과 반찬들을 꺼내 간단하게 점심을 차려 먹었다.
이층으로 올라가 잠시 음악을 들으며 명상에 잠긴다.
잠이 솔솔 오지만 벌떡 일어나 도서관으로 간다. 저녁 차릴 시간이 될 때까지 학창 시절 읽지 못했던 철학 서적이나 신간을 찾아서 읽다 돌아온다.
요즘 그는 임마누엘 칸트와 오쇼 라즈니쉬, 니체 등 사상가들의 글을 읽으며 인상적인 글귀나 느낌을 간단히 노트에 메모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이제야 진정한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사는 듯 느껴졌다.
한 곳에서 오래 산지라 더러 아는 분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실업자가 된 모양이라고 이야기들 하겠지만 형규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과는 상관없는 그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아이들 줄 밑반찬을 한두 가지 만들어 놓으면 은경이 돌아온다.
그가 집에 있으면서는 은경이 거의 매일 조금씩 장을 봐오던 일을 휴일에 그와 함께 일주일 분량을 한 번에 사 올 수 있게 되었다. 은경은 그것만도 편해져서 남편에게 고마웠다.
은경과 함께 저녁을 차려 아이들과 식사하면서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어느새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어 자주 돌아서서 아빠와 키를 재보곤 했다.
형규는 그들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뿌듯하고 보람을 느꼈다. 다만 정기의 떨어지는 성적이 좀 마음에 걸리지만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반드시 학교 공부를 잘해야만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정기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늘 뒷정리가 안 되어 남의 손이 가는 것을 아내가 여러 번 타일렀지만 정기는 고쳐지지 않았다. 은경이 신경을 많이 썼지만 편식은 여전하고 정리 정돈은 되지 않았다. 정민은 방을 따로 쓰고 싶었지만 꾹 참고 수시로 치워주다 그만두고 말았다.
정기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도시락 가방, 신발주머니 등등 잃어버려서 다시 사야 했다.
형규가 조석으로 그들을 대하는 시간이 늘어나자 그들의 장단점이 더욱 훤히 보였다.
준성은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면서 한밤중이 되어야 집에 돌아왔다. 공부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서 형규는 마음이 놓였다. 먹는 것이 부실하지 않도록 형규는 가끔씩 용돈을 주며 격려해주었다.
진희는 온순하고 책임감이 강하다는 선생님의 칭찬이 적힌 성적표를 보여주곤 했다. 성적은 늘 상위권에 있었지만 몸이 약해서 환절기면 감기에 걸리는 일이 잦았다. 늘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진희를 보면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손주들이 걱정되어 편히 눈을 감지 못하시던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다행인지 감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형규는 여기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생각하며 만족했다.
세상에는 불행한 일을 겪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전쟁과 난민, 독재자의 수탈, 연쇄 살인범의 잔혹한 범죄, 억울한 누명과 고문, 희귀병, 교통사고 등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세상 곳곳에서 난무한다.
다만 남편 없는 동생이 측은했다. 세상 풍파를 겪기 전에는 명랑했던 그녀가 시무룩하게 변한 게 마음 아팠다. 그녀 앞에 놓인 아직도 많은 세월을 배우자 없이 살아가면서 자신을 지키지도 못하는 동생이 안타까웠다. 오빠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사랑하는 남편에 비길 수 있겠는가. 오죽하면 극단적인 행동에 우울증까지 겪으며 금지된 불륜에도 빠졌던 동생을 생각하면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배우자를 잘 만나는 일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을 동생을 보면서 절감했다. 남편이 성실하게 처자식을 챙기며 가정을 잘 꾸려갔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 은경이 활짝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나이 든 태가 나며 몸이 좀 불었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선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는 변함없이 그녀를 아름답게 했다.
형규는 아내의 단정하고 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환하게 보여주는 진실함을 사랑했다. 그녀의 변함없는 자연스러움이 집안을 견고하게 이끌어 나간다고 믿었다.
형규도 몇 번의 유혹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을 철석같이 믿고 헌신하는 아내는 어두운 길을 밝히는 등불처럼 길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주었다.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 언제나 따스한 품을 내주며 그를 믿고 그의 편이 되어주었던 아내. 그녀가 아니라면 지금 어떻게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자부심 그 자체였다. 또다시 태어난다 해도 형규는 그녀를 아내로 맞을 것이다. 은경은 그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아내였다.
21. 짝사랑
진희는 단짝 친구가 생겼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쯤 지난 체육 시간이었다.
그녀 짝인 경주가 뜀틀을 향해 달려오다 주춤하면서 뛰어오르더니 엉덩이를 세게 부딪쳤다. 많이 아픈지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진희가 달려가 손을 붙잡아 일으켜주고 함께 양호실에 갔다.
“난 여자인 게 정말 귀찮아. 생리 중이라 그랬어. 아예 넘지 말았어야 했는데...”
진희도 생리 중일 때 얼마나 불편한지 잘 알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넌 생리 며칠 하니?”
경주가 함께 와준 진희가 고마운 듯 진희에게 물었다.
“사오일 정도...”
진희는 침대에 누운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난 불규칙해서 안 할 때도 있고 일주일 한 적도 있었어. 그땐 정말 지겨웠어.”
진희는 체육 시간 끝나고 다시 오겠다며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그새 뜀틀은 한 단이 더 올라가 있었다. 진희는 자신이 없어서 달려가 점프해서 그냥 뜀틀에 올라앉았다.
선생님은 다음 주 뜀틀 시험을 본다며 안 되는 사람은 방과 후 연습하라고 하였다.
진희는 경주가 생리 끝나면 함께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주는 다행히 약을 바르고 좀 누워있다가 괜찮은지 교실로 돌아왔다.
시험 보기 전날 방과 후 자신 없는 아이들이 모여서 뜀틀 넘기 연습하러 체육관으로 갔다. 경주는 거뜬히 젤 높은 단까지 넘었다.
진희는 몇 번을 뛰었지만 젤 높은 단은 넘지 못했다. 진희는 포기하고 그만 가자고 하였다. 진희보다 키가 좀 더 큰 경주는 다정하게 어깨동무하면서 말했다.
“그래. 무리하지 마. 다른 거 잘하면 되지.”
경주는 진희에게 친절했을 뿐 아니라 뭐든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엄마 아빠 싸운 이야기, 말 안 듣는 오빠들 이야기 등등 남 얘기하듯 술술 이야기하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내성적인 진희는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주로 책 이야기를 하였다. 진희가 들려주는 소설 내용을 경주는 재미있어하였다.
“넌 그런 책들을 모두 읽은 거야? 대단한데, 난 책 읽으면 금새 졸리던데...”
“어렸을 때 심심할 때마다 동화책을 읽었어. 그럼 내가 책 속에 주인공이 된 것 같아. 좀 커서는 어른들 책도 읽었는데, 책을 통해 모르는 세상을 알아가는 게 재미있어.”
그들은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경주가 학원 가지 않을 때는 진희의 집에 자주 와 함께 공부했다. 경주는 진희가 아빠가 없고 외삼촌네서 함께 사는 것도 알게 되었다.
“넌 맨날 싸우는 엄마 아빠 안 봐서 좋겠다. 그렇게 싸우면서 왜 함께 사는지 모르겠어. 난 결혼 같은 건 절대 안 할 거야.”
부모의 불화가 경주의 마음에 상처가 되고 있었다.
“그래도 아빠와 함께 사는 게 좋은 거야. 그리고 난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외삼촌처럼 좋은 사람과...”
진희는 먼 훗날 그녀를 사랑해 줄 왕자님을 꿈꾸었다.
왕자님을 만나려면 그녀가 공주여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소녀였다.
진희는 경주와 친해지면서 학교 가는 일이 전보다 더 즐거웠다.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그녀가 늘 곁에 있다는 건 든든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경주는 사내애들의 장난질도 막아주고 진희를 친형제처럼 위해주었다. 진희가 그녀보다 성적이 더 좋을 때도 시샘하지 않았다.
“나보다 더 열심히 했나 보네. 잘했어!”
경주는 진희가 몹시 예뻤다.
자주 창밖을 바라보며 말없이 생각에 빠져있는 진희는 멜로드라마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양 갈래로 곱게 땋아 내린 머리, 왠지 보호해주고 싶은 창백한 낯 색의 맑은 눈,항상 깨끗하게 다림질한 교복, 언제 보아도 깨끗한 운동화, 진희에게서 친구 이상의 감정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조용하고 예의 바른 행동, 지적인 생각 등이 경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좀 덜렁거리고 활발한 성격의 경주는 연약해 보이는 진희가 마냥 좋았다.
남학생이 진희에게 쪽지를 주었을 때는 질투심이 일어났다, 진희가 쪽지를 보며 웃는 얼굴을 보자 기분이 언짢기까지 했다. 나는 왜 남학생을 좋아하지 않고 진희만 좋아할까 의아했다.
경주는 머리부터 사내애처럼 짧았다. 어릴 때도 여자애들이 입는 예쁜 원피스 종류가 아닌 오빠들 옷을 물려 입고 자랐다. 오빠들 놀이에 끼여 과격한 장난을 하다 다쳐서 울곤 했다. 인형 놀이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오빠들이 가지고 놀다 싫증 난 장난감들이 그녀 몫이었다.
장사하느라 바쁜 부모는 삼 형제를 알뜰하게 챙길 여유가 없었다.
아이들은 서로서로 알아서 생존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하루 내내 함께 붙어 장사하는 부모는 수시로 투닥거렸다. 다툼이 학습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다툼은 습관이 되고 말았다. 아이들도 점차 적응하여 또 싸우는구나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모는 함께 일하고 있었다.
경주는 진희를 좋아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진희와 짝을 하고 친해지면서 필요 이상으로 그녀가 좋아졌다. 걸을 때 그녀와 손을 잡고 싶었다.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어깨동무하면 진희는 싫어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나가서 놀지 않고 다소곳이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진희의 모습은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졌다.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애잔하였다.
경주는 문득 내가 진희를 사랑하는 걸까? 생각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진희에게 다가가 무슨 책을 읽는지 물었다.
진희는 늘 소설책을 무거운 책가방에 넣고 다녔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프랑스 작가 ‘발자크’의 소설 <골짜기의 백합>이었다.
진희가 가끔 책 이야기를 들려줄 때 그녀의 눈은 반짝거리며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경주는 진희의 얼굴에 입 맞추고 싶을 만큼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그러면 오히려 마음을 들킬까 수줍어져서 마주 보던 눈길을 떨구고 딴청을 부렸다.
경주는 진희 생일에 예쁜 카드와 진희가 읽고 싶다고 한 책을 포장해 선물했다. 그리고 둘은 제과점에 가서 맛있는 빵과 빙수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진희는 우정을 꽃피웠지만 경주는 우정 이상의 감정을 지녀갔다. 진희와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그녀가 좋았다. 주말에 헤어질 때는 못 만나는 일요일 하루가 아쉬웠다.
경주는 진희와 일요일도 만나고 싶어서 진희를 불러내 점심을 사주었다.
진희는 거절하지 않고 한 달에 두어 번 일요일에도 경주를 만나러 나갔다.
그들은 고궁으로, 박물관으로, 도서관으로 견학을 다니며 더욱 친밀감을 쌓았다.
둘은 무엇이든지 함께 이야기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새로 온 영어 선생님과 한 달간 수업하고 진희는 경주에게 설레는 마음을 속삭였다.
“저 선생님 멋지지? 목소리도 너무 좋구 영어 발음도 그만이야. 또 친절하기까지 하잖아.”
진희는 완전 반한 듯이 말했다. 선생님은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활기차고 인물이 좋으셨다.
“그러네.”
경주는 마지못해 대답했지만 진희의 마음이 선생님에게 쏠리는 것 같아 맘에 들지 않았다. 진희가 선생님 들어오시기 전 작은 손거울 꺼내 제 얼굴을 확인하는 것을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진희는 더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다.
쉬는 시간이면 영어단어를 외우느라 경주와 이야기도 잘 나누지 않았다.
진희의 일기장에는 매일 선생님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사춘기 들어 진희가 처음 느끼는 이성을 향한 감정이었다.
경주는 진희의 관심 일 순위에서 밀려나 그녀의 사랑이 싹트는 모습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경주는 깨달았다. 자신이 진희를 친구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주는 선생님에게 특별한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좋은 선생님들 중 한 분일 뿐이었다.
진희는 스승의 날 드릴 선생님 선물을 사기 위해서 그동안 저금했던 저금통을 들고 외숙모에게 가서 물었다.
“제 저금통에 든 돈 사용해도 될까요?”
“그럼, 네가 모은 건데 써도 되지. 뭐 하려고?”
“스승의 날 선물 사려구요.”
“담임 선생님?”
“아뇨. 영어선생님이요.”
“아, 그 선생님이 좋구나. 그래서 뭐 살려구?”
“아직 생각 못했어요. 무슨 선물이 좋을지 잘 모르겠어요.”
“뭐든 네 정성이 담긴 거면 기뻐하실 거야.”
은경이 쉬는 일요일.
진희와 함께 백화점에 가는 동안 진희가 가지고 있는 금액에 맞는 선물이 뭐가 좋을까 생각했다. 진희 역시 같은 생각을 하며 마음이 설레었다.
넥타이도 살펴보고 접는 우산 파는 곳도 보고 얇은 실크 스카프도 보았다.
진희는 무늬가 산뜻하고 색이 진한 곤색 계통의 스카프가 맘에 들었다. 그런데 진희가 가진 돈으로는 좀 모자랐다.
은경은 진희가 맘에 들어하는 것을 보고는 모자르는 돈을 보태줄 테니 사라고 하였다.
“외숙모, 그럼 빌려주세요. 제가 용돈 모아서 갚을게요.”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네 맘대로 하렴.”
진희는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샀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들여다보고 또 만져보았다. 천이 여간 부드럽지 않았다. 영화에서 본 멋진 배우가 남방 속에 멋진 스카프를 둘렀던 모습이 떠올랐다.
예쁜 카드와 함께 정성껏 포장한 선물을 스승의 날 아침 일찍 등교하면서 교무실 선생님 책상 위에 가져다 놓았다. 아이들이 보면 놀릴까 봐 얼른 놓고 나왔다.
다음날 선생님이 진희가 선물한 스카프를 넥타이 대신 목에 두르고 와이셔츠를 입으신 것을 보고 진희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선생님도 맘에 드신 것 같았다.
진희는 활짝 웃으며 교과서를 폈다. 짝궁 경주는 의아해서 물었다.
“왜? 뭐 좋은 일 있어?”
“별거 아냐. 이따 얘기할게.”
경주는 궁금증을 누르고 쉬는 시간까지 참았다.
진희는 수업 내내 즐거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쉬는 시간이 되고 선생님이 나가시자 진희는 작게 귓속말을 하였다.
“선생님이 어제 내가 선물한 스카프를 하셨어. 그래서...”
진희는 지금도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웃는 얼굴이었다.
경주는 표정 관리가 안 되어 어색하게 웃었다.
작년에 경주도 진희에게 생일 선물을 받고 많이 기뼜었다.
근데 진희가 선생님께 선물을 드리고 그토록 기뻐하는 것을 보자 야릇한 감정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우정이라면 이건 아닌데, 내가 왜 이러나 생각하며 마음이 씁쓸해졌다. 질투심이 일어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선생님을 바라보는 진희를 보면 눈웃음치며 반짝이는 눈에서 나오는 밝은 기운이 얼굴을 환하게 하였다. 진희의 온 마음이 선생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희는 경주가 의기소침해진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곁에 아이들이 남자애들 이야기로 까르르 웃음을 터뜨릴 때도 경주는 감흥이 없었다. 오로지 진희에게만 향하는 마음을 드러낼 수도 없어서 속앓이하였다.
진희는 한 학기가 끝나자 아예 선생님을 생각하며 편지 형식의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날 있었던 일과 느낌을 선생님께 낱낱이 이야기하면서 연모의 정을 쌓아갔다. 경주가 자기 때문에 심란해하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오히려 함께 좋아하는 마음을 이야기 나누고 싶어 했다.
경주가 별로 관심 없어 하자 슬며시 선생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진희는 체육 시간에 달리기하고 그날 밤 영락없이 다리가 아파서 밤에 앓았다.
전 같으면 학교를 하루 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희는 영어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밥이 먹히지 않아서 외숙모의 걱정을 들으며 주스 한 잔만 마시고 학교에 갔다.
첫째 시간을 엎드려 있다시피 한 진희는 2교시가 되자 옷매무새를 살피며 거울을 보았다. 안색이 창백하고 기운이 없어서 힘들었다.
아침밥을 못 먹고 왔다는 말을 들은 경주가 쉬는 시간에 매점에 가서 도넛을 사다 주었지만 진희는 받아만 놓고 먹지 않았다. 왜 그러냐는 경주의 물음에 그냥 입맛이 없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그날 선생님이 질문과 함께 무작위로 부른 번호는 진희였다.
진희는 천천히 일어나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답하였다.
“좋아. 근데 왜 이리 기운이 없어? 어디 아프니?”
선생님이 진희에게 다가와 살피셨다.
“아뇨. 괜찮아요.”
진희는 앉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좋아하는 선생님이 보여준 관심이 아픈 몸을 서럽게 하였다. 경주는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 진희를 양호실에 데려갔다.
점심시간이 되자 그때까지도 자고있는 진희를 깨워 급식실에 데리고 가 점심 먹는 것을 도와주었다. 밥을 먹으며 경주가 물었다.
“진희야, 많이 아프면 조퇴할래?”
“아냐, 이제 좀 괜찮아.”
진희는 다 먹지 못하고 남긴 음식을 들고 일어났다.
경주는 얼른 진희의 식판을 제 식판 위에 올려놓고 치우려 가져갔다.
경주는 진희의 힘없는 손을 잡고 교실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진희가 약해 보일수록 경주의 보호본능은 강해졌다. 진희는 경주가 고마워서 그녀의 손을 꼬옥 쥐었다.
진희는 여름방학 때 경주와 국립박물관을 견학했다.
역사 선생님이 낸 과제를 하기 위해서였다. 몇 시간이나 여러 나라의 유물을 관람하고 인상 깊은 유물의 내용과 관람 느낌을 적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몰랐던 세계 인류의 흔적들을 구경하며 감동하여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늦은 점심시간 연못 앞 벤취에 앉아 진희가 준비해온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 못 본 전시실을 마저 돌아보고 휴게실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앉았는데, 음료수를 사서 마주 앉은 여인에게 건네는 사람은 바로 영어 선생님이었다.
진희는 깜짝 놀라 숨이 멎는 듯했다.
못 본 척 얼른 시선을 돌리는데 경주가 순간 발견하고는 진희에게 말한다.
“어, 영어 선생님이네. 애인하고 오셨나 봐. 우리 인사할까?”
진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경주 손을 잡고 일어나 빠르게 달아났다.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선생님께 애인이 있다는 사실은 진희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충격이었다. 총각 선생님의 환상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슬픔에 휩싸였다.
멀리서 진희는 선생님과 여인을 바라보았다. 정말 애인일까? 확인하고 싶은 듯이...
“진희야, 선생님이잖아. 애인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갑자기 경주는 기분 좋은 듯 말했다.
경주는 진희의 놀라고 실망한 모습에 그동안 심란했던 마음이 한 방에 날아가는 통쾌함을 느꼈다.
눈가가 촉촉해진 진희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망연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날 밤 진희는 일기 쓰면서 울었다.
선생님께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면 자기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젠 이성으로서가 아닌 선생님으로서만 좋아하겠다고 고백했다. 그래도 서운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몇 주 동안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
진희의 짧은 첫사랑이 고통스럽게 그녀의 내면을 한 층 쌓으며 사라져갔다.
쓸쓸했던 경주의 마음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도 진희는 영어 시간을 기다렸고 열심히 단어를 외우며 영어성적을 올리려고 힘썼다. 그러나 경주에게 선생님 이야기를 다시는 하지 않았다.
22. 이별
준성은 미연이 다니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다.
경영학과가 커트라인이 높기도 했지만 운도 없었다. 시험이란 실력은 기본이고 운도 좀 따라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준성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형규는 준성을 격려하며 2차로 낸 대학에 다닐 것을 권하였다.
미연은 풀이 죽은 준성에게 말했다.
“내가 다니는 대학 아니면 어때. 어디서든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지. 그동안 애썼어. 기운 내. 우리 졸업 이벤트 하자.”
웃으며 위안하는 미연을 보자 더 속이 상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단지 미연이 다니는 대학에 가겠다는 열망으로 버티고 버티었는데 이게 뭐람 준성은 쉽게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최고 대학에 합격해서 당당하게 미연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일 년밖에 안 남은 학교생활이지만 함께 다니고 싶었다.
미연은 이미 여기저기 연주 일정이 많아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준성이 그녀의 학교에 다녀도 함께 시간을 보낼 일은 거의 없었다.
준성의 과도한 관심은 미연을 부담스럽게 할 뿐이었다. 미연에게 남자는 필요충분조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실용음악이 남자보다 좋고 여러 동아리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일이 남자와 데이트하는 것보다 신나고 즐거웠다.
함께 하는 남학생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사랑하여 성관계하고 싶은 남자는 없었다.
이제 준성이 성인이 되었고 그녀에게 참았던 구애를 드러내겠지만 미연은 그리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게 준성은 함께 일탈에 동참한 동생에 불과했다. 그와 나눈 두 번의 성관계는 사랑이 아닌 호기심이었고 어린 준성에게 이는 연민이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반짝 벌어진 이벤트처럼...
준성은 달랐다. 미연은 그의 첫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이었다.
하기 싫은 공부를 그녀를 위해서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엄마와 외삼촌, 외숙모, 담임선생님들을 안심하게 했고 주위에서 인정받음으로 자존감이 높아졌다.
‘그래, 어차피 일 년 밖에 함께 못 다니는데, 지금까지 만나 온 것처럼 만나면 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나도 대학생이 된 거다. 성인이 되었으니 자유롭게 그녀와 교제를 할 수 있다.’
준성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며 그녀와 갖는 세 번째 성관계를 기대하였다.
미연은 이 세 번째 성관계를 마지막으로 준성과 육체관계를 그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준성과 연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데다 준성의 순정이 그녀를 자주 부담스럽게 했다.
준성은 콘돔 3개를 준비해 그녀의 오피스텔로 갔다. 그리고 오늘 밤은 그녀의 집에서 잠들고 싶었다. 환한 햇살이 비추는 아침 그의 곁에 누운 미연을 마치 아내인 양 오롯이 보고 싶었다. 준성이 그녀를 생각하며 자위했던 수많은 밤마다 쌓이던 그리움이 하늘에 닿을 듯했다.
미연을 끌어안은 준성의 팔 힘이 어찌나 센지 미연은 몸이 부서질 듯 짧은 신음을 내밷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그의 뜨거운 애무는 세포 하나하나를 튀어 오르는 물보라처럼 전율케 하였다.
준성은 숨을 고르며 잠시 멈추었다.
이 불꽃놀이처럼 화려한 축제를 망치지 않으려면 참고 또 참아야 했다.
미연은 참을 수 없는 감각에 휩싸이며 그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활짝 열린 그녀의 몸에 들어가는 순간 준성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하였다.
미연이 짧은 비명과 함께 준성을 힘껏 가두는 순간 참았던 그의 정욕은 모두 분출되었다. 그들은 동시에 한 몸이 되는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준성이 다시 속삭였다.
“사랑해. 영원히...”
미연은 잠자코 그를 포옹했다.
어두운 창밖으로 은은한 달무리가 번져갔다.
미연은 처음에는 안 된다고 거절했지만 준성의 다시 이어지는 부탁에 하룻밤 자고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제는 성인이 된 그의 의사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오늘 하루만은 모든 것을 잊고 가엾은 두 인간을 쾌락 속에 내던지고 싶었다. 그 대신 오늘 딱 하루만이라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녀는 순수한 그와의 관계를 육체적 쾌락으로 몰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를 인생의 반려자로서 원하지 않는 한 그들이 지속하는 쾌락은 결국 서로를 상처입힐까 봐 두려웠다. 미연은 아직 누구에게도 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보다 어린 준성에게는 더더욱 아니었다.
준성은 내쫒기지 않으려면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늦은 야식으로 배를 채우고 그들은 다시 한 몸이 되었다.
격랑이 휩쓸고 간 후 만족한 그들은 서로를 보듬고 곤히 잠들었다.
새벽에 잠이 깬 준성은 다시 미연을 안았다.
준성이 준비한 마지막 콘돔까지 제 역할을 다하였다.
그들이 함께 한 세 번의 의식은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미연은 이어지는 쾌락에 진저리를 치며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옷을 입고 식사하러 나가자며 준성을 앞세웠다.
미연은 이제 그와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순수한 사랑은 미연에게 부자유스러운 끔찍한 친밀함을 쌓아갔다.
그녀는 온 천지가 꽃을 피우며 축제를 여는 봄
그에게 마지막으로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오피스텔을 옮기고 휴대폰 번호를 바꾸었다.
준성은 그녀의 메일을 받고 날벼락을 맞은 듯 잠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곧 그녀를 찾아 달려갔다. 이사 간다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수소문해서 학교 교정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에게 말했다.
“충분히 이야기했잖아. 난 네 애인이 될 수 없어.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렸어. 내가 한 행위에 책임지기 위해서야.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해야하는 거구. 난 널 좋아하지만 그게 사랑은 아니야. 어쩌면 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할지도 몰라.”
“안 돼. 이러지 마. 난 견딜 수 없어. 널 안 보고는 살 수 없어.”
준성은 처음으로 미연을 너라고 동등하게 말했다.
“나 지금 빨리 가야 해. 나중에, 나중에 연락할게.”
악기를 맨 미연은 웃는 얼굴로 한 손을 흔들며 함께 왔던 무리에게로 뛰어갔다.
준성은 어이가 없어서 교정 벤취에 덩그러니 앉아 쓰라린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배신이라도 당한 듯 마음이 아팠다.
미연은 단 한 번도 준성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준성을 배신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일방적인 준성의 사랑이었다.
준성과 미연이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준성은 미연을 결코 놓을 수 없었다. 절대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것을 무조건 사랑했다.
쓸쓸한 삶 속에 놓인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준 누구보다도 의지했던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연의 따스한 성품 이면에는 강하고 냉철한 이성을 잘 알고 있는 준성은 사정하고 매달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서로 다른 제 갈 길을 가야 한다는 미연의 의중을 알지만 왜 이리도 가슴이 아프고 견딜 수 없는 걸까?
그동안 친누나처럼 그를 돌봐주었던 미연을 미워하고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육체관계를 했다고 그녀를 소유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떻게 이 상실감을 이길 수 있을까?
준성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우리에 갇힌 산짐승처럼 괴성을 질렸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놀라서 웬 미친놈이냐는 듯 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은경은 아이들이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4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동안 분주하고 고단한 삶에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녀의 삶을 한 단계 올릴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형규를 대신해서라도 그들의 노후를 좀 더 윤택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도전정신을 다시금 끄집어내었다.
형규가 육체적인 삶에서 정신적인 삶으로 한 단계 올라갔듯이 그녀도 자신의 능력을 좀 더 발휘해보고 싶었다. 은퇴하고 노년을 맞았을 때 뒤돌아본 삶이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으로 채워지기 바랬다.
조직 생활의 부조리와 불만족을 오랫동안 잘 참아왔다.
몰상식한 상사의 부당함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인내심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구태의연한 제도나 형식들에 과감히 맞서지 못하고 한통속이 되어 움직여야 하는 괴로움도 많았지만 적어도 자신만은 가능한 한 제대로 해보려고 노력했다.
무엇인가 개선해나가기 위해서는 조직에서 지금보다 힘 있는 지위가 필요했다.
은경은 반드시 승진 시험에 합격할 생각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형규는 그런 그녀가 집안일에 신경쓰지 않도록 더 세심하게 살림을 돌보았다.
밤늦도록 식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이제는 내가 아닌 그녀가 가장이구나 생각했다. 아니 자신은 늘 돈을 벌었을 뿐 집안을 이끌어간 건 처음부터 그가 아닌 그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들을 최대한 보듬으면서도 가정의 질서를 지켜나가도록 설득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아내였다. 큰 소리 한 번 치는 법이 없었지만 아이들은 은경의 말을 잘 따르고 순종했다.
정기가 몇 번씩 손이 더 가지만 은경은 한 번도 야단치거나 짜증 내지 않고 될 때까지 지도하였다. 아무리 해도 안 될 때는 그냥 두었다.
우유를 마신 컵이라든지 과일 접시 등을 방에서 가지고 나오지 않고 책상이나 옷장의 정리가 되지 않아 뒤죽박죽 쌓여 찾을 수 없는 일 등이 고쳐지지 않았다.
정기는 엄마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대처했다. 대신 정민이 바람직한 태도로 고단한 엄마를 늘 도와주었다. 이제는 정민이도 지쳤는지 아니면 너무 바빠서인지 예전처럼 정기를 도와주지 못하고 내 버려두었다.
정민의 양말을 갖다 신거나 학용품을 가져가는 일은 비일비재하였다.
쓰고는 제자리에 갖다 놓지 않아 정민이는 번번이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형규는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 방을 점검하면서 정기의 뒷정리가 안 되는 습관이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형규가 계속 뒷정리를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반면 정민의 깔끔한 책상과 옷장은 늘 정기와 비교되었다.
부부는 속사랑을 할 뿐 드러내놓고 정민을 더 귀애하거나 정기를 나무라지 않았다. 정기는 정민이와 비교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어떤 사실의 결과를 생각하는 상식적인 것들을 잊어버리곤 했다.
두 아이가 나란히 성적표를 내놓았을 때 정민은 자신이 약속한 결과를 내어 얼굴이 싱글벙글 의기양양했지만 정기는 풀이 죽어 엄마 아빠의 눈치를 보았다.
“정민이 잘했구나. 애썼어. 정기는 역시 예능을 잘하는구나. 화가 될 거야?”
엄마의 칭찬에 정기는 얼굴이 활짝 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도 좋은 대학을 나오면 더 나은 화가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대학 가려면 국영수 과목을 좀 더 잘해야겠지. 학원이라도 다닐래?”
“싫어요. 내가 좀 더 열심히 할게요.”
은경은 말뿐이라는 것을 알지만 강요하지 않았다.
형규는 정기와 다음번 성적은 어떻게 얼마나 더 올릴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제집을 사서 자신이 직접 가르쳐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은경은 아이들이 타고난 성향대로 그들의 인생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은경이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일이니 부모로서 할 수 있는 돌봄 이상을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안타깝고 속상한 것을 묵묵히 참아야 했다.
정민은 목표를 정해놓고 꾸준히 노력하는 나무랄 데 없는 아들이었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어릴 때부터 자립심이 강하고 남을 배려하는 측은지심이 강한 아이였다. 따라서 자신이 일은 물론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이타심도 많아 어디서나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는 늘 매우 분주하고 바쁘게 생활하였다. 은경은 정민이 이 사회에 한 일꾼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기뻤다.
정기는 천성적으로 여러 면에서 자질이 부족하였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정기가 잘하는 것을 북돋아 줄 수밖에 없었다. 장애자를 키우는 부모들도 많은데 그만한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맘먹고 하면 잘 할 수 있는데 그걸 싫어하는 거다. 즉 게으르고 안일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정기의 그림은 창의적이고 가끔씩 그가 부는 리코더 소리는 정민이보다 아름다웠다.
은경은 미래에 큰 관심이 없는 정기가 늘 안타깝지만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노후를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으려면 아직 젊을 때 좀 더 분발해야 했다. 내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가보고 싶었다.
사회에 유익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살맛 나는 일이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한 동료처럼 미인계를 쓰며 주위를 끄는 것은 질색이었다.
동료는 진한 화장은 물론 눈에 띄는 화려한 복장으로 주위의 관심을 끌 뿐 아니라 특히 상사에게 지나치게 친절했다. 그녀가 풍기는 은은한 향수까지 동료 남성 직원들이 그녀 앞에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녀는 그것을 즐기며 그들과의 한담은 이어지곤 했다. 묵묵히 일하는 은경은 자주 그녀의 일까지 분담해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일은 은경이 다하고 생색은 그녀가 내는 식이었다.
하루는 점심시간이 좀 지나 청장실이 발칵 뒤집혔다.
청장 사모님이 쳐들어와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냐? 우리 남편에게 달라붙은 년이!”
드세어 보이는 중년 부인이 기세등등하게 몰아붙인다.
은경은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나며 말했다.
“진정하세요.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세요.”
“이 년이!”
다짜고짜 은경의 빰을 후려치는 부인을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은경은 어안이 벙벙한 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은경을 동료인 그녀인 줄 잘 못 안 거다.
은경은 둘러보았지만 그녀는 어디로 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모님, 전 아니에요. 사람을 잘못 보신 거 같아요.”
은경이 침착하게 말하였다.
“아니긴 뭐가 아냐! 공무원이란 년이 술집 년처럼 꼬리를 치고, 내가 보고만 있을 줄 알았어!”
은경은 불쾌했지만 자초지종을 모르니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고스란히 봉변을 당하는데 소식을 듣고 달려온 청장이 흥분한 아내를 데리고 자리를 뜨자 일단락이 되었다.
은경은 그녀가 기어코 이 사단을 벌인 것을 보고 가정이 있는 유부녀가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니려고 이런 일을 벌일까 의아했다.
주위의 동료들은 은경이 억울하게 봉변을 당한 것을 눈치채고 딱한 눈초리를 보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발 없는 말이 번져가는 동안 문제의 원인인 동료는 퇴근 시간이 지나도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퇴근하기 전 청장은 그녀를 불러 진심으로 사과하였다.
은경은 알았다며 나왔지만 상사에게 여간 실망하지 않았다. 사모님이 터무니없이 그럴 리 없었다.
지난번 회식이 끝나고 노래방에 갔을 때 은경이 봐도 두 사람의 친밀한 행동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 후로 그들은 또 3차를 가고 은경은 집으로 돌아왔다.
단합대회라는 명분으로 회식하고 술자리를 갖을 때마다 은경은 적당히 핑계를 대고 2차 이상은 가지 않았다. 요즘은 아예 2차도 참석하지 않고 빠져나오자 남자 동료들은 불만스러워했다.
은경이 처음 근무를 시작하고 일 년도 안 되었을 때 망년회 회식으로 2차, 3차까지 간 적이 있었다. 나이트클럽에서 남자 동료들과 춤을 추어야 했을 때 그 어색하고 낯선 접촉은 은경을 긴장시켰다. 심지어 싫다는 그녀를 억지로 끌어내어 바짝 몸을 밀착시키며 술 냄새를 풍기는 실장은 끔찍할 만큼 싫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뿌리치고 싶었지만 상사인지라 끝까지 고역스러운 시간을 감내했다.
매년 적응할 만도 한데 은경은 생리적으로 유흥을 즐기지 못했다. 빨리 집에 가서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남자들과 이야기 나누길 좋아하고 유흥을 즐기며 심지어 상사와 불미스러운 일까지 벌이는 동료는 원하는 부서에서 좀 더 편하게 직장생활을 할지 모르지만 은경은 그런 쪽으로는 소질이 없었다. 그것도 조직 생활의 연장으로서 능력이라면 불리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성실하게 근무하면서 인정받으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든지 자기만족과 보람이 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월급을 주는 게 아니고 국민의 세금으로 받는 월급인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그래서 빠르게 승진한 7급 공무원에서 5급으로 진급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나 은경에게는 자식들이 더 중요했고 결혼 전 서둘러 벌어놓은 시간 덕에 남들보다 승진이 뒤지지도 않았다.
그 동료는 결국 다른 지역으로 자리를 옮겼고 청장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근무했다. 사람들의 입방아 소리도 사라졌다.
은경은 이제 어느 정도 아이들이 자라고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아주니 승진 시험 공부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경력이 아닌 시험으로 결과를 낼 수 있는 승진이라면 해볼 자신이 있었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해내겠다고 소처럼 뚜벅뚜벅 걸어갔다. 말이 가는 길을 소라고 못 가겠는가!
23. 인연
형규의 철학 공부는 스토아철학에서 불교철학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책을 읽고 매주 동아리에서 발표하는 시간이 기다려질 만큼 즐거웠다. 그동안 일하면서 이렇게 마음이 편안했던 적은 없었다.
늘 일에 쫓기듯 지워졌던 책임감을 내려놓고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는 일상은 그의 고단하고 지겨웠던 삶을 해방시켰다.
사는데 딱히 이유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한 사색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진정으로 행복했다. 떠밀려가듯 정신없이 분주했던 나날에서 벗어난 자유였다. 스스로 사표를 낼 수 없었던 이유는 물론 가족을 위해서였지만 회사를 위해 일만 하다 죽을 수는 없다는 회의가 피곤한 몸을 더욱 지치게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정기적으로 받는 건강진단에서 간이 좋지 않다며 좀 쉬어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권고가 있던 차에 회사에서 조기퇴직 신청을 받았다. 아내와 의논한 그는 망설임 없이 사직서를 썼다. 아내의 이해와 경제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집안일을 하는 것이 서툴렀지만 아내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늘 칭찬과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이제는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탁탁 털어 너는 일에서 주방 구석구석 먼지를 닦는 일까지 꼼꼼하게 잘하였다.
모든 일은 직접 해보지 않으면 그 고충을 모르는 법이다.
살림 사는 일이란 수없이 많은 손길을 필요로 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힘든 줄 모르고 콧노래를 부르며 하였다.
정민이는 공부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아빠를 도와주어 기분 좋게 해주었다.
두 아들이 함께 방을 쓰는 것이 비좁았다.
어릴 때 쓰던 침대를 치우고 바닥에서 자게 되자 정민은 이불을 반듯하게 개어놓고 나가는데 정기는 몸만 쏙 빠져나갔다.
정민은 한 번 이르면 잘 지키지만 정기는 대답만 할 뿐 제멋대로였다.
서너 번씩 주의 주어도 지키지 않았다. 뭐든지 하던 것을 치우지 않고 다음 행동으로 넘어가 다른 사람의 손이 가야 했다.
아이들이 체격이 커지고 생활 습관이 서로 다른 형제가 함께 방을 쓰는 일이 불편할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민이 잔소리한다고 정기가 투덜댔다.
일 층에 사는 동생네와 분가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은경은 형규가 퇴직하자 바로 그에게 경제권을 넘기려 했지만 형규는 마다하였다.
은경이 잘 해왔기 때문이다. 아내보다 더 잘할 자신도 없었다. 그동안의 경제 상황을 물어보며 동생의 분가에 대해서 의논하였다. 그러잖아도 은경은 아파트 청약 신청을 해놓은 상태였다.
“아파트 당첨이 되면 당신이 동생과 의논해 보세요. 우리는 이곳에서 그냥 사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요.”
“당신이 그동안 애써서 모은 돈인데 새집에서 살고 싶지 않아?”
“상관없어요. 당신과 애들만 건강하면 이 집도 행복해요. 마당이 있어서 아파트보다 좋아요. 그동안 정들어서 떠나기도 싫구요.”
형규는 아내의 착한 마음에 감사하였다.
동생네를 내보내면 부부가 일 층에서 거주하고 아들들에게 이층 방을 따로 쓸 수 있게 해줄 수 있었다.
그들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로 짓는 아파트였다. 27평에 장기대출을 끼고 들어가는 집이었다. 준성이 대학을 졸업하면 엄마를 도울 수 있으니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동생이 따로 나가 정신적 자립을 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형규는 어린 조카들보다도 나이 든 동생이 더 걱정되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동생의 마음은 한없이 공허한 듯 언젠가부터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성 들이던 손톱 메니큐어도 하지 않았다. 늘 손이 유달리 곱던 동생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저녁 늦게 들어와 피곤해 보여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시간이 흘러갔다. 지금으로서는 동생이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잠자코 바라봐 주는 일 이상이 없었다. 직장이라도 다녀서 감사할 뿐이었다.
조카 진희는 엄마가 해야 할 일을 바지런히 하여 형규 손이 안 가게 하였다.
준성은 대학 생활에 작 적응하는지 궁금하지만 부쩍 말수가 적어져서 형규가 눈치를 볼 정도였다. 묻는 말에 예, 아니오 대답할 뿐이었다.
어렸을 때는 삼촌을 많이 따랐던 조카가 사춘기 이후부터 거리를 두더니 이제는 아예 남처럼 데면데면해져서 형규로서는 여간 서운하지 않았다. 다정하게 말을 붙여보아도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이 느껴졌다.
은경은 웃으며 ‘성인이 된 조카에 대한 애착을 거둘 때가 되었어요.’ 했다.
아내는 몸이 약한 편인 진희를 더 걱정하였다.
가끔씩 다리가 많이 아프다며 학교에 가지 못해 병원에 갔지만 수술해서 인공관절을 넣는 것보다는 무리하지 않는 게 낫다며 약 처방을 해주었다. 그 약을 먹고 나면 얼굴이 붓고 정신을 못 차릴 만큼 깊은 잠에 빠지곤 해서 아무래도 유명 대학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형규는 웬만하면 말하지 않고 잘 참는 진희가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진희는 잠을 잘 자고 나면 통증이 나아져 그동안 참았다고 하였다.
엄마는 제 할 일을 알아서 잘하는 딸에게 무관심하고 아무래도 외삼촌 내외에게 아프다는 말을 자주 하기는 싫었을 것이다.
유명 대학병원은 수술하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단다.
형규는 의사인 동창에게 수소문하여 대학병원에서 오래 근무했던 의사가 하는 다른 정형외과 병원에 진희를 데려갔다.
의사는 진희의 다리를 찍어보고는 관절 연골의 염증을 완전히 제거하면 통증이 없어진다면서 인공관절까지 하지 않아도 달리기 선수가 아닌 이상 보행에 지장이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동안 진희는 안 해도 될 생고생을 하며 고통스러웠던 거다.
형규는 의사에 따라 이렇듯 견해가 다르고 진단 결과가 다르다는 것을 처음 경험했다. 그때 처음 조카의 두 다리가 약간 차이 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어릴 적 했던 기브스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평소에 왼쪽 발목이 아파서 힘을 줄 수 없었던 결과였다.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쓸 사춘기 때인 조카가 속상했을 것 같아 진작에 돌보아주지 못한 것이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진희야, 그동안 다리가 많이 아팠겠구나.”
형규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낮에 활동할 때는 괜찮은데, 밤에 잘 때 좀 아팠어요.”
진희는 눈물이 그렁한 채 풀이 죽어 대답했다.
형규는 진희 손을 꼭 잡고 병원을 나와 차에 올랐다.
아빠가 없는 조카의 결핍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한 번도 말썽이라고는 일으키지 않고 늘 착실히 생활하는 조카라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이제 수술하면 안 아프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려.”
형규는 안전벨트를 매주며 말했다.
‘환상적 사실주의의 대가’라는 보르헤스의 불교 강의 책을 읽으며 형규는 불교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 위해 도서관에서 불교학 개론을 비롯하여 오쇼 라즈니쉬가 쓴 유려한 문체의 ‘금강경’ 등을 탐독했다.
2,500년 전 한 작은 왕국의 태자로 태어난 싯다르타가 인간의 생노병사를 직면하여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수년간의 수행으로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제자들에게 진리를 설법하였다. 그 깨달음이란 흔히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허다한 잘못을 깨닫는 일에서 좀 더 나아가 의식의 무지함을 깨달아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나는 화살을 쏜 자이며, 화살을 맞은 자이며 또한 화살이다.’라는 말은 자아에 갇힌 인간을 뜻하며, 석가는 그 화살을 제거하는 깨달음을 가르쳤다. 따라서 ‘진정한 삶의 목표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해탈에 이르는 길이어야 한다’는 말에서 형규는 순간 빛을 보았다.
종교를 믿는 것은 마음의 구원에 이르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지 않은가.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우주의 구성 방식이 과거, 현재, 미래의 원인과 결과가 결합되어 일어나며 자신의 정체성이 무아(無我)인 것을 깨달아야 하는 일이었다.
아직은 부처의 설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렴풋이나마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무지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왜 사는가? 이 문제에 답은 없었다.
다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적어도 이 문제만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 모두가 너와 내가 따로 없는 본질적인 인류애를 깨닫기만 한다면 이 세상에서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인간이 가족에게서 느끼는 사랑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할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평화롭고 안전해질까 생각했다. 마음의 구원을 얻기 위해 믿는 종교가 세력다툼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며 오늘에 이르렀는가!
지금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폭력을 일삼고 있음을 세계는 보여주고 있다.
니체의 초인사상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간 부처의 설법에서 환희심을 느낄 수 있었다. 형규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요히 명상에 잠겼다.
종교는 실천이어야 하고 가장 큰 본질은 자신의 무아를 깨닫는 일이었다.
둘째 시누이의 긴 방황이 끝나는 듯 불쑥 재혼하겠다고 했다.
은경과 형규는 내심 놀랐지만 한편 그녀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그러나 형규는 불안감이 앞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하는 이인지, 아이들도 다 함께 살 건지...
“내가 일하는 빵집 사장이야. 준성이는 이제 독립시켜도 되고 진희는 함께 살려구.
오빠, 언니 그동안 신세 많았어. 정말 고마워요.”
시누이의 진심 어린 치하에 은경은 얼굴 가득 웃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그동안 고모가 많이 힘들었지요. 축하해요.”
진희는 엄마의 결혼 소식을 듣자 은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숙모, 저는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되나요?”
은경은 순간 시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시누이는 약간 당황한 듯 은경을 보면서 난처한 표정을 보였다.
은경은 진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금방 결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엄마랑 더 이야기해 보자.”
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낯선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싫었다. 엄마보다는 숙모를 더 믿고 따르며 살아온 생활이 바뀌는 것이 두려웠다. 엄마는 진희가 없어도 상관없지만 아직 진희는 숙모와 삼촌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시누이는 제 딸 진희의 말에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 꾸밀 가정에 이미 남매가 있어 오히려 문제를 줄일 수 있겠다 생각하였다.
진희가 정 그렇다면, 그리고 올케가 괜찮다면 진희를 두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상대는 시누이보다 두 살이 아래인 남자였다.
그에게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연년생 자녀가 있었다.
한창 사춘기에 있을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큰 부담이었지만 상대가 간곡히 설득하는 바람에 승낙하였다. 그녀는 계속 남편이란 존재가 없이 혼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더 두려웠다. 그녀의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남자의 성욕만큼이나 컸다. 그러나 두 번이나 겪었던 사랑의 실패로 잔뜩 움크린 그녀는 오랜 시간 그를 몸달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일 년 넘게 두고 본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별다른 매력이 없는 수수한 사람이었지만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예의 바르고 진지했다.
삼 년 전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고 상심했던 그는 아이들을 위해서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시누이와 함께 일하면서 조용한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 수심 어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늘씬한 몸매는 성적 매력을 느끼게 하였다.
가까워지는데 일년이 걸렸다. 드디어 데이트하기에 이르렀을 때 그녀로서는 특별히 내세울 게 없는 그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래도 남은 생을 의지할 수는 있을 것 같은 신뢰감은 생겼다. 그녀의 오랜 독수공방은 점차 자신감을 잃으며 겸손함을 익히게 하였다.
덤덤했지만 예의를 지키는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식사하였다.
그의 배웅을 받고 돌아와서는 갈등이 일었다. 사실은 저 애들에게 좋은 새엄마가 되어줄 자신이 없었다. 가끔 매장에서 아빠를 만나러 오는 아이들의 인사를 받았었다. 무신경하게 보았던 사장의 아이들이었다.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안 것도 최근의 일이었다.
처음 자신의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준성은 그녀의 품에서 벗어난 지 오래되어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도 없었다. 동생 내외 덕에 큰 사고 없이 대학까지 들어간 아들에게 고마웠다. 몸이 허약한 진희도 별 탈 없이 잘 지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신과 살지 않고 외숙모와 살겠다는 딸에게 그리 서운함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자신에게만 몰두하여 자식들을 신경쓰지 못한 것을 처음 깨달았다. 내 자식에게도 무심했던 자신이 남의 자식들을 잘 보살필 수 있을까 회의가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놀라지도 않고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해요. 그런데 아이들은 지금껏 해왔듯이 내가 돌볼 테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요. 둘 다 착해서 큰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지내왔어요. 그리고 내가 물었더니 아빠 결혼하는 것에 모두 찬성한다고 했어요.”
그녀는 아이들을 정식으로 만나보기로 하였다.
고등학교 이학년인 아들은 아빠를 붕어빵처럼 닮아 믿음직스럽고 튼실했다.
중학교 삼학년인 딸은 엄마를 더 많이 닮았는지 얼굴이 귀엽고 약간 새침해 보였다. 고개 숙여 인사할 때 긴 속눈썹이 유난히 검고 예쁜 소녀였다.
아들보다는 딸이 그녀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친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그들에게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고생하는 아빠가 가엾게 느껴질 만큼 속이 깊은 아이들이었지만...
첫 대면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일찍 엄마를 잃은 그들이 가엾게 느껴졌다.
세상일이란 공짜가 없는 법이다. 그녀가 남편의 사랑을 얻는 대신 그녀가 낳지 않은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주어야 하는 삶이었다.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이 엄마를 잃고 그 슬픔을 덮은 채 살아가는 일은 힘들었다. 그러나 통곡하는 아빠의 무너지는 모습에 더 두려움을 느낀 채 다음날로 울음을 멈추었다. 몇 날 며칠 울고 있는 동생, 웃음이 사라진 집안, 금방이라도 이름을 부르며 나타날 것 같은 엄마의 모습이 사방에서 어른거렸다.
아빠는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길에 나섰다.
아내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이들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했다.
어린 아들은 말없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무언의 위로를 보내었다.
아빠는 뒤따라오는 딸을 기다려 손을 꼭 잡고 지난여름 가족이 함께 놀러 갔던 바닷가 모래사장을 한참 걸었다.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철 지난 바닷가는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쓸쓸함이 가슴을 후려치며 밀려들었다.
그는 날리는 머리칼을 두 손으로 넘기며 생각했다.
‘이건 아니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아이들을 책임져야 해. 그들의 미래가 내 손에 달려있어.’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엄마가 하늘에서 우릴 보고 계실 거야. 엄마가 속상하지 않게 우리 열심히 살자. 이담에 우리도 죽으면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이젠 예전보다 서로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 알았지? 아빠가 더 잘할게. 이제부터는 누구도 울지 말자.”
그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한 딸의 눈을 다정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아이들은 아빠가 보는 데서 절대 울지 않았다. 그 역시 언제 그런 일이 있냐는 듯 출근하고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가정을 꾸려나갔다. 아이들이 다 자랄 때까지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젊은 그가 마음의 외로움은 누를 수 있었지만 육체적으로 일어나는 성적 욕구를 참기는 어려웠다. 슬프면 슬플수록 그 욕망은 거세게 그를 괴롭혔다.
유명 제과 회사를 조기퇴직하고 그 연줄로 유명 빵집을 차려 분주한 일상을 보냈지만 차오르는 억울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 양재천을 따라 달리며 그는 스스로와 대화했다.
왜? 왜라는 건 없다는 인식을 하기까지 그는 매일 새벽 달리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이 연극무대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 불과하다. 성심을 다해 살다 보면 좋은 역할도 주어지리라.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차츰차츰 함께 일하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슬픈 듯 말이 없는 그녀는 아름다운 용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그녀에게 매장을 맡기고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매일 매장에 나가 그녀를 보면서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일 년을 마음으로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들이 혼인신고를 하기 전 가족들이 모여 상견례를 한 날.
아이들은 낯설고 서먹한 자리에서 말없이 식사하였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관점에서 조심스럽게 서로를 살펴보았다.
형규는 제부가 될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손을 내밀고 과하리만큼 아이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가 본 제부의 인상이 좋았고 아이들도 반듯해 보여 안심되었다. 은경은 속으로 나직이 시어머니께 ‘감사합니다.’ 속삭였다.
시어머니께서 보내주신 사람처럼 느껴졌다.
진희는 그대로 은경과 살기로 하였다.
자기와 동갑인 새침한 인상의 여학생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속으로 말했다.
‘우리 엄마 잘 봐줘. 난 괜찮아. 엄마보다 더 좋은 외숙모가 있기 때문이야. 엄마가 너랑 잘 지내기 바래.’
그 애는 미소 짓는 진희를 살짝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숙여 음식을 먹었다.
엄마는 진희에게 좀 미안해하며 곧 이사짐을 옮겼다. 진희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 자주 놀러 오고, 나도 엄마 보러 갈게.”
은경은 그녀의 화장대가 나간 자리에 먼지를 닦고 부부의 침대를 놓았다.
엄마와 헤어지는 서운함 같은 건 없는 듯 진희는 청소를 거들었다.
24. 갈등
준성은 미연을 만나지 못하고 지내는 동안 생각했다.
지금으로서는 미연의 마음을 모두 제 것으로 할 방법이라고는 없었다.
그녀를 책임질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기 전에는 어떤 설득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최선은 무엇일까 생각하고 빨리 군 복무를 마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준성이 다니는 대학 경영과에도 여학생이 여러 명 있었다. 다른 대학 여학생들과 미팅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준성은 그들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동기들은 그를 괴짜 취급하였지만 한 여학생은 유독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친절하게 접근하였다. 준성은 모른 척 퉁명스럽게 대할 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 학년이 끝나갈 무렵 준성은 책갈피 속에서 색 고운 봉투를 보았다.
연극을 함께 보자는 글과 초대권이었다.
그녀가 계속 자신에게 관심 보이는 것을 알고 있었던 준성은 그녀를 떠올리며 망설였다. 미연만 아니었으면 당장 응할 만큼 호감이 가는 여학생이었다.
경영학 공부보다는 예술 쪽이 더 잘 어울릴 유연한 상냥함이 남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준성에게 호감을 지닌 것은 아마도 그의 무관심이 오히려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미연에게 자신 없는 준성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인 것을 잘 알기에 거절하기 미안했다. 차라리 이번에 만나서 그녀의 마음을 거두라고 말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본 연극은 ‘오이디프스 왕’이였다.
연극이 끝나고 그녀는 준비한 꽃다발을 왕비 이오카스테 역을 한 배우에게 전달하며 준성을 과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녀의 친언니였다. 분장 짙은 언니와 인사를 하고 나온 그들은 식사하며 연극에 관한 감상을 이야기 나누었다.
그녀는 문학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준성은 충격적인 신탁의 운명으로 내몰리는 주인공에게 놀랐다. 연극을 보면서 느낀감동적인 장면을 생각하면서 말했다.
“운명이란 게 정말 있을까? 우리가 만난 것도 이미 다 정해진 일일까?”
“아마도, 우린 어떤 강력한 영적 이끌림에 의해서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운명은 성격이 만들어 가는 거라고 하던데, 타고난 우리 모습이 다 다르듯 그렇게 우리들 성격이 다르고, 따라서 우리의 운명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인지도.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
미소 짓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고았다.
준성은 잠시 잊었던 문제를 어떻게 전달할까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그래서 너와 친구 이상은 될 수 없어. 말해야 할 거 같아서...”
순간 그녀의 맑고 까만 눈동자가 커졌다. 그가 딱히 다른 여학생과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놀란 듯 보였다.
“누군지 물어봐도 괜찮아? 궁금해.”
준성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간단히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른 대학교 여학생이야. 안 지 육 년쯤 되었어.”
더 이상 말을 잃은 듯 그녀는 잠자코 준성을 바라보았다.
어색해진 준성은 그만 가자며 일어섰다.
“잠깐, 알았어. 그럼 친구나 하지 뭐. 네가 그렇다면...”
더는 그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가 따라 일어났다.
준성이 군에 가고 그녀의 편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뀔 때쯤이면 파랑새처럼 그에게 날아들어 사랑스러운 노래를 들려주었다.
가족들과 여름 피서를 가서 즐거웠던 일...
친구들과 단풍여행을 가서 보고 느낀 감상...
눈 내리는 날 과 친구들과 스케이트 경주한 일...
봄이 되어 벚꽃이 날릴 때 교정에서 그를 생각하며 쓴 시 몇 구절...
소설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 감상 등 재미있게 쓰여 있었다.
더운 여름 훈련에 지치는 그에게 시원한 바다의 숨결을 들려주며 그를 위안했다.
화려하게 물든 단풍을 보며 훈련에서 돌아오면 그녀의 편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문학적 재능이 준성의 부자유스러운 일상을 그나마 즐겁게 해주었다.
사랑받고 있는 안정감을 불어 넣어주고 있는 것을 준성은 알아채지 못했다.
미연과 헤어져 허탈하고 쓰라린 마음을 그녀가 조금씩 조금씩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심지어 곁에서 생활하는 친구까지 그의 편지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마치 제 편지이기라도 한 양 즐거워했다.
“야! 니 애인 정말 사랑스럽다. 사진 없어?”
“애인 아냐. 우리 과 친구야. 예쁜 애지.”
준성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럼 나 소개해 줘라. 나라면 이런 예쁜 애랑 무조건 결혼하겠다. 응?”
준성은 그녀에게 물어보마 약속했다.
그녀의 편지가 고맙지만 준성이 보고 싶은 사람은 미연이였다.
그녀의 따스하던 숨결과 어여쁜 몸 구석구석이 그리웠다.
가슴이 서늘할 만큼 이성적이기도 한 그녀가 너무도 보고 싶어 때로는 숨이 꽉 막힐 것만 같을 때 하늘을 향해 깊이 심호흡하며 가슴을 어루만졌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를 내 사람으로 만들겠다 다짐하였다.
연희는 준성이 군 친구 이야기를 하자 일언지하 거절했다. 그러나 기분 나쁘지 않게 호의는 고맙지만 준성 외에 누구에게도 관심 없노라 고백하였다.
그녀의 마음이 준성만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고백한 셈이었다. 준성은 좋아해야 할지 부담스러워야 할지 갈등이 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연희의 편지를 읽어보는 것이 낙이 되어 그녀의 편지가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미연은 졸업반이 되자 더욱 분주해져 준성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때로 생각날 때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였다.
허전하거나 외로움이 복받칠 때는 늘 함께하는 친구와 한 몸이 되면서 쓸쓸함을 견디었다. 정신적 고립감은 바쁜 일상과는 관계가 없는 듯 미연의 마음을 뒤흔들고 지나가곤 했다.
미연이 극도로 지칠 때는 아빠에게 연락했다.
만사 제치고 달려온 아빠와 맥주잔을 기울이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나면 가슴이 훈훈해졌다. 그리고는 잡고 있던 아빠 손을 놓으며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엄마가 우려하는 그런 일은 결단코 벌이지 않겠다고 생각하였다.
사랑하는 아빠가 곤란에 처할 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깟 육체적 쾌락을 나눌 남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미연은 다정한 아빠를 생각하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 깊이 잠들었다.
졸업반이지만 취직 걱정, 결혼 걱정 따위는 미연과 상관없었다.
지금도 생활비를 넉넉히 벌어 쓰는 데다 예술가의 자발적 빈곤을 자존심처럼 생각하였다. 화장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젊음! 무엇을 입어도 멋스러운 균형 잡힌 날씬한 몸!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즐길 수 있어서 미연은 살만했다.
졸업 논문 대신 올려야 하는 음악 프로그램을 구상하느라 일 년 내내 생각을 거듭하며 창작욕을 불태웠다. 이 공연이 그녀의 앞날을 시작하는 중요한 관문이 될 것이다. 미연은 멤버들과 쉬지 않고 연습했다.
지도교수의 무리한 요구도 반발하지 않고 받아들여 최선을 다했다.
조금만 참으면 이 제도적 구속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창작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밥벌이를 해야 하는 한 실력이 쌓일 때까지 교수들의 인정을 받아 좋은 학점으로 졸업해야 했다.
조용히 연락하지 않는 준성에게 고마웠다.
군대 갔다는 소식을 그의 친구에게서 들었다. 그도 알을 깨고 나오는 성장의 고통을 잘 이겨내고 홀로서기를 바랬다.
결혼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담담한 친구는 한결같이 미연의 곁에서 그녀를 보살펴주었다. 미연은 고맙다는 말 대신 가끔 그와 동침하며 즐거움을 나누었다.
그들은 한 번도 앞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그저 음악과 학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통하고 육체적 쾌락에서 통했다.
그들은 소리 내서 사랑한다고 말해 본 적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 자유로웠으며 무엇도 더 바라지 않았다. 따라서 지나친 끈끈함이 없었기에 허허로우면서 마음 편했다. 언제 헤어져도 괜찮을 것처럼 부담이 없었다.
미연에게 또 그에게 대단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한 그들은 지금처럼 일상을 함께 하며 살아갈 것 같았다.
쌍둥이로 태어난 운명은 분리할 수 없는 인연이지만 성인이 되면 얼마든지 그들의 선택으로 헤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밀접한 생활환경은 그들을 오랜 시간 함께 묶음으로 자연스럽게 결속시키고 그 끈을 푸는 일은 가족이나 당사자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음악, 미술, 체육을 제외한 전 과목에서 중간 이하의 성적을 받은 정기와 달리 정민은 우등상을 놓치지 않고 전 과목 학습에 뛰어난 성적을 받았다.
정기는 내색하기 싫은 열등감을 꽁꽁 감추고 사사건건 정민에게 반발하고 무시하였다.
정민의 물건을 말없이 집어다 사용하고 되돌려놓지 않는 것은 물론 그의 용돈을 슬쩍 하기도 했다. 정민은 수시로 화가 났지만 부모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묵묵히 참았다. 한 몸이나 다름없는 쌍둥이 정기를 보살피는 일을 어려서부터 해온 습관이 몸에 뱄지만 그도 사춘기의 광풍을 피해갈 수 없었다.
문제의 발단은 정기가 정민을 좋아하는 여학생을 거짓으로 꼬여내 성추행한 것이다. 그리고 한술 더 떠 정민에게 자랑까지 했다.
“민주가 너 말고 내가 좋다는데, 어제 나 그 애랑 키스했어. 넌 그 애랑 키스해 봤어?”
정민은 그 애가 자기을 좋아하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키스는커녕 제대로 데이트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럴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왠지 마음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정민은 용기를 내어 민주에게 물었다.
“너 어제 정기 만났니?”
민주는 얼굴이 빨개지며 돌아서 마구 뛰어갔다.
단정한 스커트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민주야, 왜 그래?”
정민이 달려가 민주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민주의 쌍거풀 진 새까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순간 정민은 뭔가 잘못되었구나 직감했다.
“너가 기다린다고 해서 따라갔어. 그런데...”
민주는 더 이야기하지 않고 돌아서 달아났다.
정민은 돌아오자마자 샤워하고 나오는 정기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정기는 휘청하며 쓰러질 뻔하다가 얼굴을 감싸며 눈을 부릅떴다.
“이 자식이! 뭐야? 왜 그래!”
정민은 다시 한 대 때렸다. 그동안 참았던 분노가 봇물처럼 터지면서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뒤엉키며 치고받느라 형규가 올라온 것도 몰랐다.
형규는 깜짝 놀라 둘을 갈라놓고 피가 나는 정기를 샤워실로 데려갔다.
은경이 올라왔다. 분이 오른 정민의 얼굴을 생전 처음 보았다. 단 한 번도 이렇게 격렬하게 싸워본 적이 없었다. 은경은 정민을 껴안았다. 정민은 은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울음을 터뜨렀다.
은경은 가만히 아들을 보듬고 등을 쓰다듬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동안 정민이 겪은 많은 어려움을 잘 알았다.
손을 잡고 아래층 안방으로 내려왔다. 그 사이 정민은 눈물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은 듯 말했다.
“죄송해요. 엄마.”
은경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토닥였다.
형규는 정기의 코피를 닦아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정기는 분명 맞을 짓을 했을 터 더는 참지 못한 정민의 분노가 터진 것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정민이 많이 참았을 것을 형규는 잘 알았다. 그래도 폭력은 안 된다는 것을 타일러야 하지만 지금은 둘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려야 했다.
형규는 정기를 방에 두고 내려와 엄마와 함께 침대에 앉아 있는 정민을 보았다.
“아빠 죄송해요.”
정민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그래, 알았다. 밥 먹고 자초지종을 들어보자. 여보, 식사합시다.”
정기는 이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조용히 식사하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진희 역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을 눈치채고 말없이 식사하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정민은 말하기 싫은지 그대로 제 방으로 올라갔다.
형규는 그들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은경과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은경은 그들 모두를 존중하며 내일 그들을 불러 물어보자 생각했다.
어느새 아이들이 훌쩍 컸다는 것을 실감했다.
은경은 정기에게 밥을 가져다줄까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무언가 큰 잘못을 해서 정민에게 얻어맞았을 정도면 한 끼쯤 굶는 것도 반성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저녁 식사를 끝내고 진희가 제 방에 들어간 후 부부는 두 아들을 불렀다.
정기부터 어제 일을 말해 보라고 했다.
“정민이가 좋아하는 애를 내가 좀 만났다고 그렇게 화를 냈어요.”
정민이는 정기를 쏘아보다 말했다.
“그게 아니예요. 내가 기다린다고 거짓말해서 불러내고 거기다 민주를 성폭력까지 했어요.”
“아니에요. 걔도 좋다고 해서 키스했어요.”
정기가 얼굴이 빨개지며 소리쳤다.
정민은 끝끝내 거짓말하는 정기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듣고 있던 은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기야, 정민이가 기다린다고 한 건 사실이야 아니야?”
정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경이 다시 말했다.
“사실이니, 거짓말이니? 어서 대답해.”
“거짓말이요.”
“그 애가 키스하는데 동의했어, 안 했어? 그 애한테 가서 물어볼까?”
정기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경은 정기에게 화가 많이 나는 것을 인식했다.
“이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야. 그 애가 얼마나 놀랐겠어? 그 애한테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으면 엄마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너는 아직 네 맘대로 해도 되는 성인이 아니잖아.”
정기는 지금처럼 엄하게 말하는 엄마를 처음 보았다.
웬만하면 용서하고 타이르는 다정한 엄마였는데 지금 엄마의 목소리에는 강한 단호함이 느껴졌다.
형규 역시 거들었다.
“다른 어떤 문제 보다도 성적인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돼. 아직 미성년자인데다, 설사 성인이 되어서도 상대방의 동의가 없이는 어떤 접촉도 하면 안 되는 거야. 네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애에게 사과해야만 해. 그러지 않고는 우리 아들이라고 할 수 없어. 부모를 욕보이는 행동이야. 정민이는 함께 가서 사과하는 거 보고 알려 줘.”
정기는 그게 이렇게까지 난리를 칠 일인가 의아했지만 승복하지 않으면 이 자리를 모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민주에게 사과해야 하는 건 쪽팔리는 일이지만 사실 그 애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다. 뭐든지 잘하는 정민이 얄미워서 한 행동일 뿐이었다.
“알았어요. 사과할게요.”
“정민이를 팔아 거짓말한 것도 사과해. 그래야 서로 화해할 수 있어.”
은경이 재차 말했다. 정기는 내키지 않았지만 엄마를 거역할 수 없었다.
“미안해.”
정민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다시, 정민이 눈을 보고 말해야지. 그리고 엄마랑 아빠한테 약속해. 다시는 그런 거짓말 하지 않겠다고.”
정기는 엄마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민을 보았다.
“미안해.”
그리고 부모님에게도 사과했다.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그들을 잠자코 보고 있던 형규가 말했다.
“형제간에 다툴 수는 있지만 주먹질하며 싸우는 건 절대 안 돼. 폭력은 범죄야. 정민이 너도 정기에게 사과해.”
정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기에게 말했다.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둘은 악수하며 마음을 풀었다.
그 후 그들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조심했다.
정기는 정민의 방을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서 정민은 전보다 신경이 덜 쓰여 편안해졌다. 그들이 사춘기를 무사히 넘기고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둘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더 멀어졌다.
정민은 그리 열심히 하더니 원하던 대학 영문학과에 합격했다.
정기도 원하는 미술대학에 들어갔다. 미술대회에 나가서 몇 번이나 상을 받은 이력이 도움이 되었다. 은경은 아들들이 크게 뒷바라지 한 것도 없이 무사히 대학에 들어가서 몹시 고맙고 기뻤다.
정민은 정기 덕에 가끔 마주치는 민주를 관심 가지고 보았다.
항상 단정한 옷차림에 잡티 하나 없이 얼굴색이 하얀 그녀는 정민과 마주치면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대학 시험이 끝나자 정민은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하였다.
민주는 사범대학에 들어갔다.
정기는 한 여자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이 애 저 애 만나다 금새 그만두곤 했다.
그가 몰두하며 가장 좋아하는 일은 그림을 그릴 때뿐이었다. 그는 대학 미술실에서 오래 머무르며 그림을 그렸다. 그 전공만은 교수에게 인정받고 A+를 놓치지 않았다.
말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은경은 밤새 기다리며 애태웠지만 나무라지 않고 다음엔 꼭 미리 전화해서 기다리지 않게 하라고만 말했다.
이제는 자식들이 스스로 알아서 살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부모가 간섭해서 되는 때가 아니었다. 자유를 누린 만큼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익혀가야 하는 그들이었다.
언제 그만큼 자랐는지 세월의 빠름을 느끼며 문득 거울 속에 나이 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흰머리가 나고 눈가에 주름이 진 중년의 여인이 있었다.
승진 공부하느라 살림을 남편에게 일임하고 자신의 용모 또한 가꿀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냈다.
순전히 남편의 공이었다. 그녀가 승진한 것도 자식들이 무사히 대학에 입학한 것도 그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이제는 중년이 되어 곤하게 잠든 그의 얼굴을 보면서 가슴 뭉클한 애정을 느꼈다.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머리를 조아려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싶었다.
25. 고백
진희는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읽으면서 여우에게 말하는 어린 왕자의 목소리에 자신을 돌아보았다. 경주의 친절함이 당연할 만큼 길들여졌다는 것을 의식했다.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거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거야.
내게 너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지. 네게 나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되는 거지...’
‘꽃이 한 송이 있었는데... 그 꽃이 나를 길들인 것 같아...’
경주는 정말 보디가드처럼 진희 곁에 늘 있었다.
진희가 외로움도 불편함도 느끼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다. 그냥 다정하게 손을 잡고 다닐 뿐 경주는 더 바라는 것이 없었다.
“쟤네들 연애하냐? 맨날 손잡고 다녀. 그러다 둘이 결혼도 하겠어.”
짓궂은 남학생들이 그들을 놀렸다.
경주는 진희 곁에 남학생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진희는 별로 개의치 않고 경주와의 우정에 만족했다. 그보다는 좀 더 성적을 올리고 싶어 애썼다. 밤늦도록 공부하다 지쳐서 잠들면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몹시 힘들었다. 암기하는 공부가 어렵게 느껴지고 좋아하는 책들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다.
사촌 오빠들처럼 원하는 대학에 무사히 합격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마운 외삼촌과 숙모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부하다 책상에 엎드려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이제는 어릴 때처럼 다리가 아프지 않았지만 공부 시간에 졸음이 밀려오곤 하여 쉬는 시간에는 화장실에 가서 세수하곤 했다.
경주는 진희가 피곤해하는 것을 보면 쵸코렛을 건네며 말했다.
“진희야, 밤에 잠을 충분히 안 자니까 피곤하지. 공부 적당히 해. 건강이 더 중요해.”
경주는 안쓰럽게 진희를 바라보았다.
한 번은 경주가 시험 칠 때 컨닝페이퍼를 진희에게 주니까 진희는 고개를 흔들며 받지 않았다. 경주는 그래서 진희가 더 좋았다. 경주는 가끔 컨닝하였지만 진희보다 성적이 좋지는 않았다.
어느 날 학원에서 진희에게 말을 걸어 온 일 년 선배 남학생이 있었다.
그는 지난달부터 진희에게 말을 걸기 위해 벼르고 있다가 마침 휴강이 된 강의실을 나가는 진희를 불러세웠다.
“진희야, 잠깐 나 좀 봐. 할 말 있어.”
진희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진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낼 일요일인데 우리 만나지 않을래?”
진희는 교복을 입은 그의 단정한 모습이 맘에 들었다.
“공부해야 돼요.”
진희는 살짝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럼 나랑 도서관에서 만나자. 함께 점심도 먹고.”
그는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진희는 망설이다가 재차 묻는 그의 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도 끝나고 하루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주는 좀 떨어져서 보다가 그가 뛰어가자 진희와 나란히 걸었다.
아무 말 하지 않는 경주가 좀 어색해진 진희는 경주에게 물었다.
“경주야, 화났어? 우리 낼 같이 나가자. 도서관 가서 책 볼 거니까...”
“아니, 너 만나고 싶어하는 건데 내가 같이 나가면 싫어할 거야.”
경주의 목소리가 의기소침해진 것을 느낀 진희는 경주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너 안 가면 나도 안 나갈 거야.”
경주의 얼굴이 밝아지며 진희를 쳐다보았다. 검은 테 안경을 쓴 경주의 활기 넘치는 얼굴이 반짝 웃었다.
경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진희에게 솔직하게 고백할 생각이었다.
진희가 마다하면 친구 이상 생각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진실은 알리고 싶었다.
진희 손을 잡고 진희의 갸름하고 고운 얼굴을 보면 가슴이 뛰고 설레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진희 얼굴에 입 맞추고 싶고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싶을 만큼 진희가 좋았다.
남학생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설레임. 경주의 사춘기 첫사랑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진희가 남학생을 만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진희가 온통 선생님께 관심이 가 있을 때 얼마나 서운하고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그건 질투심일까 생각했다.
진희 또한 경주의 지나친 관심과 친절을 느낄 때마다 약간 의아스럽긴 했지만 대학입시를 치룰 때까지는 어떤 갈등이나 부담을 느끼고 싶지 않아 저만치 미뤄두었다. 지금은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집안에 애절하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가득 흐르고 있었다. 진희는 멈춰 서서 이층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 기울였다. 심장을 찌르는 듯 애끓는 현악기 연주에 이어 금관악기가 서서히 소리를 줄이며 오케스트라는 묵직하고 조용하게 곡을 끝마쳤다. 이층 거실에는 오디오와 함께 수많은 음반과 CD가 있었다. 진희는 얼른 뛰어 올라가 삼촌에게 곡명을 물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B단조 ‘비창’ 중 마지막 악장이야.”
진희는 다음날로 도서관에 가서 차이콥프스키에 관한 책을 찾아보았다.
19세기 러시아 음악가 차이콥프스키는 결혼했지만 곧 불행하게 끝나고 그의 음악에 감동한 부유한 한 부인의 후원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후원할 뿐 만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동성애자였다. 그 당시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학 동창들의 압박이 있었으며 비창은 그가 음표로 쓴 유서나 마찬가지였다는 글을 읽었다.
진희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차이콥프스키에게 가슴 찡한 연민을 느끼며 잘생긴 그의 얼굴 사진을 한참 보았다.
동성애자는 타고나는 것일까?
그렇다면 사회적 냉대는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만약 내가 그렇게 태어났다면?
다수에게 핍박받는 소수의 인권은 무시당해도 되는 일일까?
문득 경주가 생각났다. 경주도 혹시 나를 우정을 넘어 성적으로 좋아하나? 의심이 갔지만 진희는 머리를 저었다.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차이콥프스키 동성애를 이해하기도 벅차.’
교향곡 비창은 진희가 학교에서 감상한 곡 말고 좋아한 최초의 클래식 음악이 되었다. 진희는 경주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로서 정말 좋았다.
담백하지만 때론 다정한 그녀가 익숙하고 편안해서 굳이 이성 친구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진희는 시립대학 국문과에 입학했고 경주는 점수가 좀 낮은, 같은 대학 체육과에 입학했다. 이제는 서로 다른 길을 가겠지만 교양과목 한두 과목은 함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가슴을 졸이며 함께 시험 치고 결과를 기다렸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병약한 편이었던 진희를 늘 돌보아주었던 경주의 우정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심정으로 진희는 이박삼일 겨울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계획을 짰다.
바다와 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강화도에 가기로 계획했다.
은경은 진희의 이야기를 듣고 몇 번 집에 온 적이 있는 경주를 본 적이 있어서 걱정하지 않았다. 경주는 진희보다 활달해 보이고 믿음이 갔다.
“둘만 가도 괜찮겠어? 내가 데려다 줄까?”
형규의 말에 진희는 웃으면서 그럴 필요 없다고 사양했다.
“그래. 그럼 도착하는 대로 삼촌한테 전화하고, 어려운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은경은 진희를 믿으며 허락했다.
진희는 인터넷에 들어가 찾아보며 꼼꼼하게 여행계획을 짜고 준비했다.
경주는 기뻐하며 이번 기회에 진희에게 진실을 털어놓겠다고 결심했다.
진희는 식구들과 함께 캠핑을 여러 번 갔었지만 고 3이 되어서는 일 년 내내 공부만 했다. 더구나 친구와 단둘이 가는 여행이 가슴 설레었다. 민박하기로 하고 먹을거리 등을 사서 배냥에 차곡차곡 넣었다.
형규는 졸업기념으로 핸드폰을 사주었다.
진희가 어디를 가든 연락할 수 있다면 이제 성인이 된 조카에게 자유를 존중해주고 싶었다. 진희는 한 번도 말썽을 부려 걱정을 끼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둘은 강화도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몸이 약한 진희에게 무거운 배냥은 무리였다. 경주는 미리 먹거리 등 모두 자기 배냥에다 넣고 진희의 배냥을 들어보고는 매어주었다.
둘은 나란히 앉아 손을 잡았다. 경주의 따뜻한 손이 진희의 찬 손을 녹여주었다.
버스를 타고 보는 낯선 경치는 새롭고 아직 겨울 날씨는 옷깃을 여미게 했다.
이제 숨 막히게 조여오던 입시에서 자유로워진 그들은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진희야, 그동안 고생 많이 했어. 너 많이 힘들었지?”
경주가 다정하게 위안했다.
그러잖아도 진희는 며칠 동안이나 자고 또 자면서 휴식을 즐겼다.
“너도 힘들었잖아. 나 챙겨주느라 더 힘들었지? 늘 고마웠어.”
진희는 진심으로 경주에게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경주는 진희 손을 놓더니 팔을 둘러 꼭 껴안았다.
서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하나가 되는 듯 따스해졌다.
민박에 짐을 풀고 진희가 준비해온 햇반과 된장국, 장조림 등으로 점심을 먹은 그들은 정수사 언덕길을 올라 조촐한 사찰을 둘러보았다.
인적이 드물고 겨울색 짙은 풍광이 아름다웠다.
그들은 말없이 걸어 마리산 참성단까지 올라갔다. 중간에 두 번 진희가 힘들어해 바위에 앉아 쉬었다. 그때마다 경주가 물었다.
“그만 돌아갈까?”
진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좀 쉬었다 가면 돼.”
경주는 작은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진희에게 건넸다.
진희는 빈 몸으로 걸었는데도 힘들었다.
참성단까지 올라가 심호흡하면서 진희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내가 해냈어!. 모두 다 해냈어. 야호!”
경주는 웃으며 진희를 바라보았다.
배냥에서 윤기나는 귤을 두 알 꺼내 진희에게 까주었다.
단군님께 제사를 지내던 터에서 내려다보는 산과 멀리 보이는 바다에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다.
“내려가자. 어두워지면 힘들어.”
경주는 진희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빨리 걸었다.
산은 금방 어두워진다는 것을 알기에 서둘렀다. 민박집까지 내려왔을 때는 땅거미 지는 저녁 파르스름하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진희는 언제나 이 시간이 좋았다. 빛이 물러나면서 드리우는 밤의 장막이 신비함을 몰고 오면서 왠지 쓸쓸해지는 그 느낌이 맘에 들었다.
저녁으로는 라면을 끓여 먹고 후식으로 사과 하나를 반 나누어 먹고 단 과자도 먹었다. 밖에 나와 먹는 식사는 고된 활동 뒤인지라 꿀맛이었다.
잠자리에 들어서 까지도 경주는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진희가 놀라서 그녀를 싫어하게 될까 봐 걱정되어 망설였다. 그러나 이 뜨겁게 올라오는 심정을 알리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했다. 오랫동안 눌러 온 진실을 알리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진희야,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오랫동안 참아왔어. 나 사실은 널 친구 이상으로 사랑해. 난 이성애자가 아니고 동성애자인 것 같아. 처음으로 너한테서 느끼는 감정이야.”
경주는 진희의 얼굴을 보지 않고 나란히 누워 천장을 보면서 말했다.
진희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 잠깐의 침묵이 경주의 온 신경을 무자비하게 난타하는 듯 아프게 느껴졌다.
“나도 알고 있었어. 얼마 전에 차이코프스키에 관해 읽으면서... 난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친구로서 널 사랑해. 너와 지금처럼 좋은 관계로 지내고 싶어.”
경주는 몸을 돌려 진희의 몸을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쓰치듯 살짝 입 맞추었다. 그녀의 두 손에도 입 맞추었다.
진희는 미소 지으며 순하게 받아들였다. 경주의 격해지는 숨소리를 들으며 진희는 생전 처음 그녀의 가슴을 내주었다. 진희도 약간 흥분되긴 했지만 그건 난생 처음 해보는 육체적 개방에서 오는 경이로움이었다.
경주를 위해서, 그들의 우정을 위해서 진희는 즐겁게 받아들였다.
집에 돌아가면 이 순간의 진실함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화사한 봄 꽃망울이 터지며 학생들이 교문으로 들어선다.
잔잔한 꽃무늬 브라우스에 네이비색 슈트를 입은 진희가 경쾌한 걸음으로 강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입학 기념으로 은경 내외가 진희를 데리고 백화점에 가 옷, 가방, 구두까지 골라 사주었다. 알맞은 키에 날씬한 진희는 이제 막 꽃잎을 여는 한 송이 꽃처럼 어여뻤다.
경주는 이제 편안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운동화를 신고 남학생들과 농구를 즐길 수 있었다. 단정한 교복과 억압받던 조신함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즐겼다.
진희와의 일은 그날 밤 진희의 이해와 따스한 배려로 한 단락을 지은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 진희가 우정을 바라면 친구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다시 만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경주는 진희를 향해 치솟던 열정, 짓눌렀던 억압에서 놓여나 속이 시원했다.
진희가 그녀와 같은 부류가 아니여서 아쉬움은 있었지만 언제든지 그녀를 볼 수 있어 기뻤다.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어 마음이 즐겁고 편안해졌다.
성 정체성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므로 진희가 정말 고마웠다.
그날 이후 그들은 변함없이 서로의 정신적 친구가 되었다. 서로에게 길들어진, 무슨 이야기든지 털어놓을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진희에게 생길 남자친구를 시샘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몸이 반응하고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 일, 억지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경주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26. 선택
준성의 군대 복무기간 중 마지막 휴가였다.
준성은 미연을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이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휴가 마지막 날에서야 그녀를 잠깐 만날 수 있었다.
미연은 뮤지컬공연을 올리는 마지막 점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준성이 극장 앞까지 달려가 한 시간을 기다려서야 간신히 그녀와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었다.
“아, 미안해! 너, 얼굴 좋아졌는데! 잘 지내지?”
야구모자를 눌러쓴 준성의 얼굴은 군대 가기 전보다 약간 살이 붙고 검게 그을러 더 건강해 보였다. 준성은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 언제 날 애태웠나 싶을 만큼 반가웠다. 미연의 미모는 여전했다. 아니 예전보다 살짝 여윈 그녀의 인상은 좀 더 성숙해 보였다. 준성은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인쇄하듯 눈에 담았다. 또 한동안 보지 못할 그리운 여인이었다.
긴 머리를 싹둑 잘라 목덜미까지 구불구불 퍼머한 얼굴은 전보다 더 세련되어 보였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은 활기로 반짝거렸다.
준성은 그녀의 묻는 말에 대충 답을 하면서 미연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차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그녀는 자기 볼일은 다 보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려구?”
준성은 당황하여 따라 일어섰다.
“응, 모두 함께 일하는 작업이라 나만 빠질 수가 없어. 너 휴가 언제까지야?”
미연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오늘까지.”
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순간 준성은 다가가 그녀를 포옹하며 재빠르게 입 맞추었다.
그녀는 숨 한 번 훅 쉬었을 뿐 곧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준성은 심한 낭패감을 느끼며 천천히 거리를 걸어 내려갔다.
그리고 생각난 듯 연희에게 전화했다.
휴가 나오면 만나자고 하던 연희를 여태 만나지 않고 있었다.
꿩 대신 닭으로 그녀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자신을 향한 연희의 마음이 너무 곱고 애틋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외로운 준성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준성은 연희가 아닌 미연을 간절히 안고 싶었다. 불같이 일어나는 본능을 끊어낼 수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연희는 나풀거리는 꽃무늬 원피스에 진곤색 쉐터를 등에 누르고 상큼한 얼굴로 나타났다. 약간은 상기된 낯으로 그의 곁에 앉았다.
향긋한 내음이 준성의 코를 자극했다. 아니 그녀의 환한 얼굴에서 넘치는 기쁨이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을 순간 일으켰다.
일상적인 안부를 나누던 준성이 불쑥 물었다.
“연희야, 넌 나 왜 좋아해?”
“왜? 좋아하는데 무슨 왜가 있어? 그냥 좋은 거지.”
준성은 저녁 내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술을 조금밖에 안 마신 연희는 서둘러 일어나 계산하고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
“고맙다. 나 혼자 가도 돼.”
“준성아, 오늘 밤 같이 있을까? 왠지 너가 좀 슬퍼 보이네. 무슨 일 있어?”
여자란 참 예민한 동물이군. 생각하며 준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널 잡아먹을 텐데!”
준성은 연희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연희는 풋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잡아먹긴, 서로 사랑하는 거지.”
“사랑?”
준성이 되물었다.
육체관계란 참 오묘한 것이다.
준성은 육체관계 후 온 마음을 다해 미연을 사랑했지만 미연은 사랑하지 않고도 관계를 할 수 있는 여자였다. 지금 연희는 나와 사랑하자고 하지만 난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은데, 육체관계를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준성이 미연이 되고 연희는 준성이 된다? 그는 껄껄 헛웃음을 터뜨렸다.
“연희야,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
“널 사랑하는데 후회는 무슨...”
그들은 그날 한 몸이 되었다.
준성은 자신감을 가지고 그녀를 뜨겁게 안았다.
그는 미연과 할 때와는 다른, 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준성은 곧 연희가 아닌 미연을 품고 격렬히 애무했다.
연희는 난생처음 겪는 살 섞음에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떨었다.
순간 준성은 ‘임신하면 안 돼!’ 속삭이는 미연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연희의 몸에서 빠져나오며 사정했다.
연희의 부드럽고 따뜻한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준성은 미안하고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절대로 아빠 같은 무책임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 자신의 행동이 무책임하다는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연희는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안고 살며시 입 맞추었다.
그가 행한 체외 사정을 자신을 배려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제 너는 내 남자다. 난 너를 언제까지나 사랑할 거야.’
그녀는 흐믓한 마음으로 그의 정액이 뒤덮은 혈흔을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었던 순결이었다.
연희는 그의 단단한 품에 안겨 평화롭게 잠들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던 그의 말 따위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날 밤 연희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를 포기할 것인가? 계속 사랑해서 내 사람을 만들 것인가?
후자를 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를 향한 마음을 거둘 수 없었다. 이유는 그뿐이었다.
다시 군부대로 돌아간 준성은 연희에 대해서 문득문득 생각하곤 했다.
미연을 향해 미칠 듯이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녀만을 가슴에 안으리라 맹세했던 자신이 다른 여자를 안을 수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내 마음이 변했구나 생각했다.
미연은 알고 있었다. 그가 다른 여자를 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 친구 생기면 알려달라고 한 거였다.
준성은 왠지 미연에게 말려든 것 같아 허탈해지며 씁쓸했다.
어려서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무책임한 인간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버지가 그리울수록 그를 증오하며 그가 돌보지 않아도 잘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연희와 잠자리한 것이 부담스럽고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준성이 사랑하는 여자는 미연뿐이야 했다.
연희의 다정다감했지만 일상적이었던 편지는 조금씩 달콤해져 갔다.
마치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무뚝뚝한 준성의 마음을 녹이며 불을 지폈다. 그 아름다운 불꽃을 보며 스스로 즐거워했다.
준성의 군대 친구는 그녀의 편지를 같이 보는 낙으로 살았다.
그는 읽고 또 읽었다. 아예 몇 구절은 줄줄 외어댔다.
마치 자기가 연애하고 사랑받는 것처럼 들떠 비명을 질러댔다.
연희는 자신도 모르는 새 실연의 아픔으로 괴로운 준성과 함께 모르는 그 친구까지도 따스하게 보듬고 있었다.
섬세하고 재미있게 일상의 생활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엮어서 보내는 연희는 준성에게 사랑스러운 여인이었고 의대생인 군대 친구에게는 아예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로 여겨졌다.
“준성아, 행여라도 너 연희씨와 결혼하지 않을 거면, 내게 꼭 내게 넘겨야 한다. 아, 나는 이 여자 보지도 않고 결혼할 거야. 넌 참 복도 많다.! ”
그는 너스레를 떨며 준성을 부러워했다.
그들이 제대하고 복학하였다.
계절이 바뀌며 교정에도 벚꽃, 라일락꽃이 피고 붉은 단풍이 물들며 눈이 내렸다.
준성이 졸업할 때까지 연희와의 교제는 계속되었다.
먼저 졸업한 그녀는 대기업에 취직하여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래도 준성을 만나기 위한 시간을 희생하는 법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다니는 회사의 상무였다. 그녀는 공채로 입사했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준성은 미연에게 연희를 인사시키지 않았다.
미연이 참여한 공연의 초대권을 두 장 보내오면 혼자 가서 관람했다. 그리고 번번히 그녀의 얼굴만 보고 뒤돌아서야 했다.
미연은 그에게서 떠난 것이 확실했다. 아니, 언제 미연이 그의 옆에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한때 누나처럼 어린 그를 돌보아준 것에 불과했다.
준성이 아무리 붙잡고 싶어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일하는 것을 좋아했고 결혼해서 안주하는 삶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준성의 눈에 그녀는 늘 자신감에 차 있었고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준성의 마음은 갈등과 그리움으로 뒤범벅되며 진이 빠지곤 했다.
어서 보란 듯이 취업하여 미연을 아내로 맞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준성의 막힌 숨을 틔우듯 연희는 그의 앞에 나타나서 희망적인 춤을 추곤 했다.
준성은 가끔 그녀와 함께 춤을 추며 즐거움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고 나면 곧 우울한 자신에게로 돌아와 앞날을 고민하며 두려움을 밀어내기 위해 애썼다.
연희는 준성의 마음을 모두 차지하고 싶어 애태웠지만 묻는 말 외에는 별말을 하지 않는 그의 과묵함에 조바심치곤 했다.
준성을 만나면 그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종달새처럼 지저귀었다.
잠자코 듣는 그는 씩 웃음으로 호응할 뿐이었다.
준성이 졸업하고 몇 군데 이력서를 넣고 면접시험을 보려고 다닐 때 연희는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 함께 다닐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준성은 그녀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이력서는 제출하겠다고 말하였다. 지금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외삼촌 집에서 하루빨리 독립해야 했다.
연희는 아버지에게 그를 잘 말해 두었다.
그를 사랑한다는 말은 안 했지만 아버지는 딸의 적극적인 마음을 알아챘다.
준성이 먼저 다른 대기업에 면접을 보고 났을 때 연희 아버지는 그를 단독으로 불러냈다. 준성은 연희와 함께 자리에 나갔다. 연희 아버지는 딸의 관심을 끌고 있는 녀석이 쓸 만한가 가늠해 보고 싶어 큰맘 먹고 시간을 마련하였다.
그는 회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어떤 포부를 가지고 일하고 싶은지, 자기 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준성은 알고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자신의 생각을 단순명료하게 답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준수한 용모와 함께 담백하고 과묵해 보이는 그가 맘에 들었다.
가족관계를 물었을 때 연희는 말했다.
“아빠, 그런 건 취업과 상관없잖아요?”
준성은 담담히 대답했다.
“아빠는 안 계시고 저는 삼촌댁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지금은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어요. 엄마는 몇 년 전 재혼하셨고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연희조차도 그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소상하게 물은 적이 없는 이야기를 아빠가 꼬치꼬치 묻자 당황한 그녀는 일어서며 아빠와의 면담을 서둘러 마쳤다.
준성은 원했던 대기업에 합격하지 못했다. 준성이 지닌 자격만으로는 부족했다.
연희가 다니는 회사에 다닐 수 있게 된 것만도 다행한 일이었다.
이제 더는 외삼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이제부터는 외삼촌과 숙모의 은혜를 갚기 시작해야 했다.
연희는 좋아라 박수치며 환호했지만 준성은 속으로 감사함보다는 실망감이 더했다.
연희가 그에게 과분한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그녀에게로만 향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작용이었다. 책임지지 못할 여자와 자꾸 가까워지는 것이 준성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에게는 이미 책임지겠다고 생각한 여자가 있지 않은가!
그녀에게 또다시 미연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연희가 떠날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을 일편단심 사랑해온 연희가 상처받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준성은 미연에 이어 연희까지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꼬리를 문 인연에 갈등이 멈추지 않고 일어났다. 어서 정리해야만 하는 문제임에 분명했지만 불쑥불쑥 생각나고 그리운 미연이였다.
27. 여행
누구에게나 세월은 쉴 새 없이 흘러갔다. 형규는 서양에서 유래한 결혼 25주년 은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은경에게 휴가를 내어 여행을 가자 제안했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튀르키에 작가의 소설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생각한 일이었다. 여름방학 성수기가 되기 전 유월은 여행하기 딱 좋은 계절이었다.
은경도 예전 같지 않게 일에 지치는 것을 느끼던 차라 선뜻 응하였다. 일 년간 쓸 수 있는 연가를 모두 몰아 그 중 일부를 어렵사리 휴가를 내었다.
형규는 다람쥐 체바퀴 돌 듯 계속되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아내와 자신을 쉬게 해주고 변화 없는 생활에도 활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이제 아이들도 모두 자라 대학에 다니고 한숨 돌린 안정감으로 변화를 원했다.
대학 등록금은 그동안 부은 교육보험으로 해결되니 이제는 용돈만 주면 되었다.
정기는 상 받은 경력이 많아 따로 실기 레슨을 받지 않고도 대학에 합격하였다.
형규는 살림을 규모 있게 살고 공부도 틈틈이 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 쓰며 부지런히 활동했다.
너와 내가 따로 없는 이치를 깨달으며 죽음에 이르는 삶의 허무함도 극복하였다.
자연의 이치로 생성되었다 사라지는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 생명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은경이 갱년기에 들면서 잠자리는 확 줄어들었다. 아니 그보다 더 전에, 그녀가 시험공부로 피곤해 쓰러져 잘 때마다 형규는 슬며시 물러났다.
육체적 욕정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인간일 수 있겠는가 생각하며 홀로 명상에 빠져들었다. 아침이면 운동장을 뛰면서 건강관리를 하였다.
사내는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여자를 안고 싶다는 말은 모든 사내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정신이 성숙해갈수록 육체적 욕망은 다스릴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들이 생전 처음 하는 해외여행이었다.
발걸음 닿는 곳마다 유적이라는 튀르키에를 꼭 가보고 싶었다. 형규는 배냥 여행이 좀 힘들겠지만 왕복 항공은 여행사를 통해 구입하고 자유롭게 제대로 볼 수 있게 준비를 꼼꼼하게 하며 정보를 입수하여 출발했다.
점점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많은 정보의 덕을 볼 수 있었다.
이스탐불에 도착하여 갈라타 다리에서 본 노을은 숨이 멎을 듯 찬란하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노을이 다 사라질 때까지 멈추어 서서 황홀함에 젖어 긴 입맞춤을 하였다. 그들의 검은 실루엣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있었다.
미나레가 아름다운 이스탐블의 밤.
흰 비둘기들이 야광체처럼 무리져 날아갔다.
그들은 계단에 나란히 붙어 앉아 신비로운 삶을 감사했다.
왠지 모를 감격에 눈시울이 젖었다. 더는 바랄 게 없을 만큼 행복했다.
다음날 그들은 토파즈 궁전과 돌마바흐체 궁전을 관람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아름다운 유물들을 보면서 감탄했다.
형규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다니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은경은 형규의 영어 회화 실력에 놀라며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어려운 노선들을 여행 안내소에서 물어가며 잘도 찾아다녔다. 버스도 타보고 지하철도 타보았다. 그도 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택시를 타기도 했다.
팬션이나 B&B 민박을 이용하며 여행경비를 아끼다가 일박이일 현지 투어로 카파토키아를 갔을 때는 새벽에 나가 에드벌룬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활활 타오르는 가스불로 덥혀질수록 현실은 멀어져 가고 꿈을 꾸는 듯 내려다보이는 기기묘묘한 형상의 돌들이 햇빛에 드러나며 신비롭기 그지 없었다.
붉은 양귀비과꽃 겔린자키는 유적들의 고풍스러움 틈틈이 피어나 아름다움을 더했다.
세상은 황홀하리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사람과 보는 세상은 더욱 더 찬란했다.
은경에게는 죽은 후 간다는 천국이 따로 없고 지금 그곳이 천국이었다.
황량해 보이는 그 속으로 들어가 보니 생각지 못한 작은 숲이 숨어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은신처였던 돌집에 들어가 개미굴처럼 형성되었던 터전도 구경하였다.
신앙심으로 박해받던 그들의 절실한 생존이 느껴져 가슴 뭉클하였다.
좋은 호텔에 짐을 풀은 날 그들은 아주 오랜만에 한 몸이 되어 쾌락을 만끽했다.
신혼 때의 황홀했던 밤이 생각났다.
들뜨던 설레임은 깊은 감미로움으로 되살아나며 그들의 영혼이 하나 되는 절정의 순간을 맞게 하였다.
자식들과 함께 살면서 늘 조심했던 집에서 벗어나 거릴 낄 게 없는 자유로움이었다. 형규는 짐승처럼 거친 신음을 토하며 원초적 욕망을 풀어 헤쳤다.
그의 가슴에 안겨드는 세상없이 따스한 아내의 살내음을 깊이 들이마시며 이대로 사라져도 여한 없을 무아의 시간으로 빠져들었다. 그 느낌은 은경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며 세포 구석구석의 감각을 여름철 빗줄기처럼 두드렸다. 그들은 세상에 단둘만이 있는 듯 마음껏 서로에게 빠져들며 무아의 환락을 누렸다.
카파도키아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파묵칼레로 갔다.
은경은 생전 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드넓은 순백의 석회층과 석회봉에 흐르는 노천 온천은 장관이었다.
자연보호를 하기 위해 온천은 금지되고 발만 담구며 둘러보았다.
저녁 식사를 노천 까페에서 하다가 그곳에서 팬션을 운영하는 한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그들의 집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꽃나무 많은 정원에 들어서자 아담한 단층집이 ㄱ자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짐을 풀고 청년이 보여주겠다는 랑데부 장소를 구경하기 위해 그들은 헐렁한 셔츠 속에 수영복을 입고 따라 나섰다.
밤하늘에 별이 쏟아지고 달빛에 비친 파묵칼레의 새하얀 넓은 바위들이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청년이 하수구 뚜껑 같은 것을 열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놀랍게도 계단처럼 구불구불 굴곡진 통로 안으로 움푹 들어간 벽에 촛불이 하나 흐릿하게 반짝였다. 어두운 동굴 속 따뜻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은경의 허벅지 정도까지 따뜻한 물이 흐르고 형규는 얼른 은경을 안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연인들이 와서 데이트하는 곳이에요. 두 분도 키스하세요.”
청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형규는 대답하듯 가볍게 은경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은경은 처녀 시절로 돌아가는 듯 황홀함을 느꼈다.
이 순간, 세상의 그 어느 왕후도 부럽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쌓였던 삶의 고단함은 순식간에 모두 사라졌다.
다음날, 페티에 해변으로 가는 다리 위 시장에서는 넉넉하다 못해 웃음이 터질 만큼 뚱뚱한 아주머니들이 사람 좋은 얼굴로 쭉 늘어앉아 음식을 만들어 팔았다. 점심으로 맛나게 식사한 그들은 해변으로 갔다.
수영복을 입은 은경의 군살 없는 몸은 아직 보기 좋았다.
젖가슴은 탄력 있었으며 물에 젖은 새하얀 피부는 햇빛에 반짝이며 광이 났다.
형규는 그녀를 향해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렸다. 부담스러운 은경은 물고기처럼 재빠르게 물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결혼하기 전이나 후에나 화장할 겨를 없이 바쁘게 살아온 얼굴은 연륜과 함께 자연스럽게 아름다웠다. 형규에게는 세상에서 그녀보다 아름다운 여자가 없었다. 항상 그 자리에 변함없이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가족을 챙겨주는 아내, 직장 일을 성실히 수행하며 그 고됨을 불평하지 않는 무던한 아내에게 의지하여 살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느낌은 어머니처럼 편안하고 동시에 연인처럼 사랑스러웠다.
이번 여행에서 찍은 사진 중 잘 나온 사진을 한 장 확대해서 서재에 걸 생각으로 수많은 컷을 눌렀다. 맘에 드는 흑백사진 작품이 하나 나올 것 같았다.
대형시장에 갔을 때 그는 여행 기념품으로 캐시미어 스카프를 가족 수대로 샀다.
은경의 목에는 아이보리색을, 자신의 목에는 검은색 스카프를 둘렀다.
형규는 직장이 없어서 자유롭고 행복했다.
그 행복이 가족과 함께한 것이라서 더욱 가치 있었다.
그들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들을 기다린 건 사랑하는 가족뿐만이 아니라 불쾌한 소식도 함께 있었다.
경찰서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 정기는 어이없고 수치스러워서 책상 위에 엎드려 머리를 싸안으며 후회했다. 오늘 부모님이 돌아오시는 날이다.
‘아! 술 때문이었어.’ 너무 마시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시간을 곰곰이 뒤돌아보았다. 그녀가 고소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정신이 나갈 때까지 술을 쳐먹은 것부터 잘못이었다. 미대 교수와 추문이 있는 그녀의 유혹을 몇 번 거절했다가 어제는 졸업전시회가 끝나기 전날 들떠서 1차, 2차, 어쩌자고 그녀와 3차까지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성관계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자기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고소장을 취하해 줄 것을 빌어야 하다니! 스스로에게 분노가 치솟았다.
그동안 정기는 한 여자를 지긋이 사귀지 못하고 여러 번 바꾸며 마음을 잡지 못했다. 정기의 이기적인 성격과 세심한 배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모가 아름다운 여학생일수록 자신을 추앙해주기 바라는데, 정기는 그 방면에 소질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여자를 선호했다. 그리고 차이기를 여러 번 한 거다.
지난번 누드 모델과 사귀다 차인 이야기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화가 난 모델이 다른 남학생에게 지껄였다.
모델료 이상을 지불하지 않고 동침하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기는 그녀를 순수하게 보았지만 모델인 그녀의 삶은 궁핍했다.
정기의 열정 어린 구애에 넘어갔지만 결국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기보다 한 살 어린 회화과 퀸인 그녀는 용모가 아름답고 끼가 많아서 많은 남학생이 한 번쯤 구애하는 학생이었다.
정기는 그녀와 몇 번 작업 때문에 대화를 나누긴 했으나 그녀의 소문도 듣고 해서 무관심했었다. 그녀는 그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면서 그를 유혹하는 듯 했지만 정기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정기가 모델뿐만 아니라 같은 과 여학생과도 사귀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는 그녀는 정기의 무관심에 화가 나 있었다. 정기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던 그녀가 그와 술을 마시며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작업하느라 자신을 억제해오던 정기는 해방감에 빠져 술을 과하게 마셨다. 술이 센 그녀가 계속 권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키스하는 정기에게 물었다.
“너 나 많이 좋아하지?”
그녀가 묻는 말에 정기는 풋 웃으며 말했다.
“너 같이 헤픈 애를? 그래. 지금은 좋다. 까짓거, 우리 같이 잘까?.”
그러나 그녀가 샤워실에서 나왔을 때 그는 벌써 잠이 들어버렸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하고 당황했다. 그가 그렇게 홀대해도 되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그를 혼내주고 싶었다.
그를 껴안고 놀라고 찡그린 표정으로 셀카를 찍었다.
반대편에서도 찍어 정기 모습이 드러나게 하였다.
만족스럽지 않아 다시 한번 시도했다. 그녀가 그를 이리저리 뒤척거려도 그는 세상모르고 잠에서 깨지 않았다.
정기는 술김에 서로 몸이 동해 한 성관계를 일반적인 성폭행이라고 몰아붙여 그를 곤욕스럽게 하는 건 그녀가 벼르고 계획한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망신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사악함이 느껴졌다.
경찰서에 가 조사받든지 그녀에게 연락해 제발 취하해줄 것을 싹싹 빌던지 둘 중 하나를 해야 할 판이었다.
일단 그녀에게 전화해 만나줄 것을 부탁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메시지를 남겼으나 답도 없었다.
정기는 친구들에게 그녀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수소문해 봤지만 아무도 정보가 없었다. 웬일인지만 추궁당해 더욱 짜증이 났다.
은경은 정기가 기분이 안 좋은 것을 금방 눈치채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정기는 시쳇말로 쪽팔려서 털어놓을 수 없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내일 졸업식 전시회에 가기로 해서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은경과 정기는 아들의 작품을 보면서 그의 탁월한 색감과 창의적인 표현에 감탄하며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정기야, 네 작품 정말 좋다. 엄마 눈에는 최고야.”
은경은 엄지를 들어 올리며 칭찬하였다.
형규도 고개를 끄덕이며 정기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같은 과 학생들이 그들에게 인사했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자 정기는 학생과로 가서 그녀의 주소를 물어 집을 찾아갔다.
아파트 앞에서 죽치고 앉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몇 시간을 기다려 밤이 되어서야 들어오는 그녀와 마주칠 수 있었다.
“미안하다. 술이 너무 취했었어. 내가 잘못했으니 고소 취하해줘.”
“그럴 맘 없어. 네가 얼마나 잘났는지 좀 봐야겠어.”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섰다.
정기는 급한 맘에 그녀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순간 철썩! 귀싸대기가 올라왔다. 정기는 이를 악물었다.
“잘못했다구! 잘못했으니까 그만 해. 제발!”
약이 올라 눈물이 다 나오는 것을 참으며 정기는 악을 썼다.
“소릴 질러? 너가 아직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구나! 어디 경찰서에 가서 그렇게 소리질려보시지.”
매섭게 쏘아붙인 그녀는 버튼을 누르고 에레베이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기가 뛰어들 틈도 없이 황당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문은 닫혔다.
정기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정민에게 털어놓았다. 정민은 그동안 정기가 여러 번 여자를 바꾸는 것을 보면서 염려스러웠다. 그는 잠자코 모두 듣고 나서 말했다.
“내가 한 번 만나 다시 이야기 나누어볼게. 그래도 안 되면 변호사를 대야 해결될 거야. 그러면 아빠한테 도움을 받아야지 우리가 해결하기 어려워.”
정민은 일부러 그녀의 집 앞으로 찾아가 기다렸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모르고 전화를 받았다가 정기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끊었다.
정민은 메시지를 보내 한 번 만나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아빠에게 이야기하자. 우리가 해결하기 어려워.”
정기는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아빠가 실망하실 게 너무 싫었다. 언제나 묵묵히 정기를 지원해주던 너그러운 아빠였기에 더욱 자책감이 심했다. 차라리 엄마에게 털어놓을까? 생각했지만 어차피 두 분은 함께 의논할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데 성추행이라니! 기가 막혔다.
기분 좋게 저녁 식사한 후 정민이는 설거지를 시작하는 아빠에게 다가가 말했다.
“의논드릴 게 있어요. 아빠, 설거지 저희가 할게요.”
그리고 정기를 돌아보며 눈짓으로 불렀다. 정기는 풀이 죽은 채 정민이 닦아 주는 그릇들을 헹구어 선반에 올려놓았다. 생전 안 하던 설거지를 하는 정기를 보면서 은경은 뭔 일이 있구나 짐작했지만 잠자코 화장실로 씻으러 들어갔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엄마에게 예전 같은 살가움을 표현하지 않는 사내 녀석들이었다. 은경은 가만히 그들을 주시하면서 잔소리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들이 먼저 말하기 전에 묻지 않고 지나쳤다. 부모는 인내심을 가지고 자식들을 기다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형규는 우선 정민에게 일의 전말을 들었다.
정기는 끼어들지 않고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기야,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안 그러면 돼. 아빠가 아는 변호사 있으니까 알아볼게. 합의할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형규는 정기의 어깨를 툭툭 치며 오히려 위로했다.
정기는 다시 한번 아빠께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걱정 끼쳐서 정말 죄송해요.”
은경은 형규에게 이야기를 듣고 합의금으로 잘 해결되기를 빌었다.
같은 학교 선후배인데다 둘 다 술을 많이 마셨다면 정기만의 잘못은 아니겠으나 어쨌든 상대방에게 모욕감이나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면 정기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은경이 말하지 않아도 정기는 충분히 괴로울 테니 침묵하는 편이 나았다.
정기는 야단치지 않는 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변호사를 통해 일은 수습되었다.
변호사비와 합의금 천만 원이 들어갔다. 그녀는 고소를 취하했고 그녀의 통장에는 천만 원이 입금되었다.
정기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억울하고 쪽팔려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야단치지 않고 일을 해결해준 부모님께 죄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부모님이 느낄 염려와 실망감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는 도망치듯 서둘러 군에 입대하였다.
개인전이고 유학이고 더는 생각지 않고 모두에게서 달아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 일로 정기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스스로에게 이는 자괴감이었다. 이성에게 잘 처신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하였다.
이성 간의 사랑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좌절되는 외로움이 뼈속 깊이 느껴졌다.
몇 번 이별할 때는 그리 괴롭지 않았다. 싫으면 할 수 없지. 가볍게 생각하고 말았는데, 이번 일로 여자라는 존재가 두렵게 느껴졌다.
그날 나는 그녀의 말대로 정말 그녀를 덮쳤을까?
그 사진대로라면 분명 내가 그녀를 올라타고 있었다. 그런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곁에 없었다.
그는 목이 말라 생수 한 병을 다 마신 후 비몽사몽 옷을 주워 입고 모텔을 나왔던 기억이 날 뿐이었다.
그 사진은 정기의 핸드폰에서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달되었다.
마치 그가 그녀를 협박한 것처럼...
그 일은 정기에게 심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28. 김정민
정민은 대학 일학년만 마치고 군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다 마친 후 복학했다.
그는 역사학 교수나 또는 학예사 자격증을 따서 언젠가는 박믈관장이 되는 꿈을 꾸었다. 그는 오래된 유물이나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 복학 후 졸업반인 민주와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경쟁이 심한 임용고시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정민을 좋아한 여학생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는 한눈팔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의 공부를 엄청 많이 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시간을 아끼며 여러 분야의 책을 읽었다.
정민은 이층 청소를 할 때마다 휴지통에 가득한 화장지 뭉치를 보면서 정기가 일찍부터 자위를 자주 하는 것을 알았다. 그 또한 살짝 욕구가 올라올 때도 있었지만 아예 그 욕망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피곤할 만큼 책을 읽고 운동 또한 열심히 하며 땀을 흘렸다.
민주와 사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정기의 공이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정민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는 정민을 많이 좋아해서 자주 연락하며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내비쳤다.
그들은 서서히 오랜 시간 동안 연락하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탐색했다.
대학 도서관에서 만나 함께 같은 책을 읽으며 의견을 나누고 방학 때는 박물관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정민을 보러 민주가 자주 왔다.
방학 때는 함께 2박 3일 캠핑을 간 적도 있었다.
정민은 민주의 손을 꼭 잡고 잤을 뿐 선을 넘지 않아 오히려 민주가 그의 입술에 뽀뽀하였다. 그의 따스한 가슴에 머리를 묻고 날 사랑하긴 하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정민은 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넌 내 옅에 있는 유일한 여자야. 엄마 빼고는. 내가 널 책임질 수 있을 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아직은 아니야..”
민주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이 사람은 결혼하기 전에는 육체관계는 하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그들이 사귄 지 일 년이 지나고 민주는 믿음직한 그를 미래의 신랑감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늘 그녀를 달뜨게 하는 그를 어서 자기 남자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부풀어갔다.
정민은 바쁜 시간을 보내느라 아직 그런 생각까지는 안 했지만 민주 외에 다른 여자는 만나지 않았다. 그는 부지런한 성격대로 학업에 몰두하며 집에서는 정기 몫까지 집안일을 하느라 늘 분주했다. 민주가 조르기 전에는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대학 졸업 후 일 년 만에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민주는 정민이 졸업하고 박물관에 취업하자 부모님께 인사를 시켰다.
부모님께서 허락하시면 상견례를 할 생각이었다. 민주는 어서 그와 결혼해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정민은 좀 더 공부하려면 결혼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민주는 결혼 먼저 하고 해도 늦지 않다며 그를 설득했다.
정민은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려면 아직 거쳐야 할 관문이 몇 개 더 남아있었다.
대학원도 마쳐야 하고 학예사 시험도 보고 싶었다.
아직은 한 가정을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었다.
민주는 그를 만날 때마다 목마르듯 그와 성적 접촉을 바라지만 반듯한 그는 입맞춤 이상은 하지 않았다. 민주는 자존심상 더 이상 요구할 수도 없었다.
민주는 본의 아니게 정민에게 숙이고 들 때마다 짜증이 나기도 하고 동 학년 교사의 유혹이 성가시기도 하였다.
처음엔 가볍게 응수했지만 매일 얼굴을 보면서 번번이 못 본 척 시침을 떼기도 민망했다. 정민이 아니면 사귀어도 괜찮을 매력 있는 동료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민주를 향한 마음이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에게 나는 애인이 있다고 말하는 일도 망설여졌다.
그는 실망하여 그녀와 어색해질 것이고 함께 세 학년 영어 과목을 가르치는 직장업무는 효율성이 떨어질 것이었다. 무엇보다 활동적이고 유능한 그의 관심이 싫지 않았다.
그는 아침마다 민주를 볼 때면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함께 출장을 갈 때는 그가 운전하는 차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은근하고 다정한 목소리는 민주에게 묘한 성적 감흥을 일으켰다.
민주는 종일 함께 근무하는 환경에서 그를 밀어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자신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아 갈등을 느끼며 정민을 재촉하였다. 빨리 결혼해버리면 그는 자동적으로 마음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민주 역시 그를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를 바라보는 그의 간절한 눈빛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는 민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애정 어린 관심을 보였다.
예의 바르고 과묵한 정민을 본 부모님은 흡족해하셨다. 상견례를 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러나 정민은 이런저런 구실로 상견례 날짜를 잡지 않았다.
결국 민주는 충격요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나와 결혼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 헤어져도 되니까.”
“무슨 그런 소릴 해. 대학원 공부 끝날 때까지만 기다렸다 하자.”
“결혼하고도 할 수 있잖아. 오히려 내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더 좋을 텐데...”
“근데 왜 그렇게 결혼을 서둘러? 요즘 여자들은 다 늦게 한다는데...”
민주는 사실대로 다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꿀꺽 삼켰다.
괜히 착한 그를 번잡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보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네 도움받는 건 싫어. 결혼할 준비가 아직 안 된 것뿐이야. 날 사랑한다면 좀 기다려 줄 수 있잖아.”
민주는 더 이상 그에게 강요하지 말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이 가는 대로 놓아두기로 했다. 서로에게 자유로운 생활이 존중되어야 마땅했다. 이제는 민주 자신도 정민에게 마음을 매어둘 자신이 없었다.
정민을 제치고 동료인 그가 자꾸 부딪히며 그녀를 자극했다.
“다른 사람이 날 채가도 괜찮아?”
민주는 슬쩍 그를 떠보았다.
그러자 정민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서 헤어져야 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더 좋은 사람 있으면 내가 물러서야지.”
참, 생각도 없이 쉽게 말하는 정민을 보면서 민주는 어이없었지만 웃고 말았다.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는 정민을 보면서 민주는 어찌 되는지 나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정민이 앞날을 위해 동분서주할 때 민주는 적극적인 동료의 유혹에 몸을 맡겼다.
정민에게 번번이 억압되었던 욕망이 분수처럼 분출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민주는 정민이 연락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이제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원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러다 마음이 변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민을 배신했다는 자책감은 쾌락을 이기지 못했다.
그들의 젊은 육체가 결속되어가는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마치 멈출 수 없는 욕망의 기차에 올라탄 듯 그들은 젊음을 즐겼다. 민주는 이제 정민에게 안타깝지 않았다.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정민은 그녀에게 아무 의혹도 품지 않았다. 그녀도 자기 같거니 생각하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였다.
민주는 마음도 몸도 편해졌다. 마음의 거리낌이 처음에는 심했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문제는 동료의 집착이 시작되었다.
민주의 태연한 태도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자기를 사랑하냐고 묻고 또 물었다.
“지금 당신과 내가 하나가 되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
“그래 그럼 사랑한다면 우리 결혼하자.”
“그건 싫어. 결혼으로 나를 묶고 싶지 않아.”
“그럼 나와 쾌락만 즐기는 거야?”
민주는 더 말하지 않고 일어났다.
마음은 정민에게 있지만 지금 민주 몸은 동료에게 속해 있었다.
그와 절정에 이를 때면 그와 결혼하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떠나면 민주는 정민을 생각했다. 그를 남편감으로 생각했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자극적인 동료보다 정민이 더 편안했다. 백 년 해로를 하기 위해서는 정민이 더 맘에 들었다. 이제는 이대로 만족한다.
동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에게 정민의 존재를 알려서 상처 입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 언제든 싫으면 그만둘 수 있는 여지를 주었기에 빚은 없다고 생각했다. 함께 나눈 시간 그 자체로 만족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는 며칠간 민주에게 냉정했지만 다시 민주를 품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는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민주야 널 정말 사랑해. 그만 좀 애태우고 우리 결혼하자.”
“미안해. 난 아직 결혼할 생각 없어. 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잖아. 정 결혼하고 싶으면 다른 여자 만나. 이대로 만족할 수 없다면 그만 만나고 싶어.”
민주의 냉정함에 그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후로 그는 더 이상 민주를 조르지 않았지만 관심을 다른 이에게로 옮겼다.
민주는 신경이 좀 쓰여 언짢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몹시 질투할 만큼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 쉽게 마음이 옮겨갈 그라면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정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그녀는 정민에게 예전보다 더 잘하였다.
그를 만나면 동료보다 정민이 훨씬 더 잘난 것을 인식하며 기분이 좋았다.
아마도 정민은 총각 딱지도 떼지 않았을 것 같았다. 여느 남자들과는 많이 다른 그가 예전보다 더욱 좋아졌다. 민주는 자신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그의 신실함을 사랑했다.
그는 몇 번이나 맘만 먹으면 소유할 수 있었던 민주의 순결을 마다하였다.
결혼식 날 순결한 신부를 가장 큰 환희로 안으리라 생각했다. 그깟 육체적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무슨 큰일을 해내겠는가! 미리 사고를 쳐서 결혼을 앞당기고 싶지 않았다.
민주는 이제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민주가 생각했던 육체적 욕망이란 채우고 나니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건 불같이 뜨겁고 꿀처럼 달콤했지만 그 욕망은 채우면 채울수록 식욕이 덜어지는 맛난 음식처럼 가볍고 천한 것이었다.
정민을 포기할 만큼은 결코 아니었다. 자위로도 해결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29. 일탈
진희는 졸업식을 앞두고 논문심사를 맡았던 박교수를 여러 번 만났다.
논문을 끝마치고 한숨 돌린 그녀는 박교수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색조 화장을 하였다. 마스카라로 짙어진 속눈썹, 옅은 볼 터치, 오묘한 색깔의 붉은 입술, 곱게 화장한 그녀의 얼굴은 나이보다 훨씬 성숙하고 요염해 보였다.
그는 그녀를 오피스텔로 불러 손수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사십 후반인 그는 아내와 자식 둘이 미국에 있는 기러기 아빠였다.
전혀 술을 먹지 못하는 진희는 포도주 한 잔에 얼굴이 붉어지며 약간 취기를 느꼈다.
싱그럽게 피어나는 한 송이 꽃처럼 어여쁜 그녀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는 그는 생각지 못한 행동을 충동적으로 하였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확신이 불러온 충동이었다.
진희는 평소 존경했던 그인지라 뿌리치지 못하고 난감해하는 순간 그는 진희의 포도주 묻은 촉촉한 입술을 범하고 가녀린 그녀의 몸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진희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이성과의 육체관계였다.
그녀의 짧은 비명이 그의 성마른 욕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진희도 그도 말을 잃고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과 함게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얼른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사과했다.
“네가 처음인 줄 몰랐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네가 너무 예뻐서... 날 용서해 줘.”
처음이어서 용서하라는 건가?
동의 없이 한 성관계를 용서하라는 건가?
제자를 범한 교수의 부도덕함을 용서하라는 건가?
진희는 당황하는 그에게 실망했지만 정말 그가 싫었다면 그에게서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얼떨결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크게 반항하지도 않았다.
그와 성관계를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그를 좋아한 건 사실이었다.
용서하고 말 게 없는 일이었다. 그가 진희를 사랑한다며 한 행위였다.
처녀성을 잃은 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그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건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사라져야 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걸맞은 사랑하는 사람과 첫 경험을 했다면 어땠을까?
해보지 않았으니 모르겠다.
서로 사랑한다면 혼외 성교 그 자체가 문제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진희는 순순히 그의 오피스텔을 나오며 아빠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를 볼 때마다 아빠가 그리웠던 것은 아닐까?
아빠는 어린 시절 그들을 떠난 이후 한 번도 그들을 찾지 않았다.
어린 그녀를 예뻐하며 볼을 부비던 아빠의 얼굴이 또렷이 기억난다.
그녀의 무의식 속에는 아빠를 향한 그리움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의 품에서 진희는 첫 경험의 아픔보다 아빠를 향한 진한 그리움을 떠올리며 스스로 당혹스러웠다. 아빠를 향한 그리움을 그에게 반영했던 것일까?
진희의 침묵에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묻고 또 물었다.
너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진희는 아무것도, 그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를 향해 품었던 순수한 연정은 입가에 번진 루즈처럼 지저분해져 버렸다.
그냥 욕망을 이기지 못한 그 어른이 가엾게 생각되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생활하는 외로운 그가 그녀를 범하고 자책하는 모습은 측은했다.
진희는 그가 싫지 않았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는 선생이기 이전에 그냥 한 사내였음을 그녀에게 내보이며 진실한 감정에 충실했는데, 왜 초라해져 버렸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임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가 오피스텔로 가자 했을 때는 그를 마다했다.
아내 대신 성욕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의 실수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계속 이어지는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동안 그의 메시지가 쌓였다.
그를 생각하는 마음은 육체적인 욕망이 아니었다.
아빠를 보듯 그를 바라보았는지 모른다. 그는 아마도 진희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진희는 아내가 있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의 가정을 흔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나눈 육체관계가 사랑인지도 알 수 없었다.
진희는 생각 끝에 수신 차단을 하였다.
진희는 생리를 한 달 거르자 혹시나 해서 임신 테스트를 하였다.
설마 했지만 임신이었다. 그때는 배란일도 아닌 것 같았는데...
진희는 일상을 멈추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벌어질 수 있는 일인 것을 그 순간 잊었을까?
예상치 못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 번의 관계에도 임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진희의 잘못이었다.
자신에게 실망할 외삼촌과 외숙모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울랐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벌어진 일을 어찌하겠는가.
취직해서 독립할 생각을 하였다.
이제부터는 한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갈 생각이다.
어려움은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겨내야만 하는 일이다.
어쩌면 한 생명을 잉태한 기쁨은 삶에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나는 글을 쓰며 살아갈 것이기에 이 경험도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내 힘으로 이 아이 하나는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 일이다.
자유를 누린 행위의 결과는 어떤 모양이든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희는 경주를 만나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반가워하던 경주의 얼굴이 변하며 화를 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왜? 도대체 왜 그랬어?”
“싫어하지도 않아, 남자들은 사랑하면 섹스해야 하나 봐. 내가 잘못한 거야.”
진희는 의기소침하여 말했다.
“함께 병원 가자.”
마주 앉은 경주가 진희의 손을 잡으며 가만히 말했다. 진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우지 않으려고.”
“애가, 어쩌려구? 그건 안 돼.”
경주는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게 온 생명이야. 죽이고 싶지 않아. 내가 책임질 거야. 그리고 난 작가로 살 사람이니까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경험을 소중히 하고 싶어.”
경주는 절대 안 된다며 네 장래를 생각하라고 진희를 설득했다.
그러나 진희는 요지부동이었다. 진희의 말짱한 얼굴을 보면서 경주는 어이가 없었다.
“알았어. 우선 내 거처로 와서 함께 지내자. 우선은 내가 돌보아줄게. 너도 나 도와주고...”
경주는 졸업하기 전부터 인터넷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인터넷 상점을 운영하며 외국책에서 문구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언니와 협업하는 사업이었다.
진희는 선 듯 거주지를 제공하는 경주에게 고마웠다.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이제 졸업하였으니 독립하겠다며 짐을 포장했다. 그들은 여간 서운해하지 않았다. 진희가 갑자기 예고 없이 서둘러 떠나는 것이 의아했지만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였다.
진희는 행여 입덧이라도 하여 그들을 미리부터 상심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학업을 마친 그녀가 독립하기를 원한다면 수용해야 한다고 이해했다.
은경은 진희의 건강을 염려하며 꼭 끼니를 잘 챙겨 먹으라고 당부했다. 그녀가 늘 챙겨주던 종합 비타민제를 짐 속에 모두 넣어 보냈다. 그녀는 출근하면서 둥지를 떠나는 아기새를 바라보는 어미처럼 진희를 오래 포옹했다.
외삼촌이 경주의 오피스텔로 짐을 옮겨 주었다.
진희는 몸이 약했지만 그리 입덧을 심하게 하지 않고 식사를 잘하였다.
경주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면 그녀를 챙겨주며 그녀의 배에 귀를 갖다 대곤 했다.
진희는 웃으며 아직은 아무 표도 나지 않는 배에 귀를 갖다 대는 경주를 간지럽히며 함께 깔깔거렸다.
진희의 탱탱해지는 젖가슴은 경주의 욕망을 부채질했지만 경주는 자제하였다.
진희는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스스로 타일렀다.
그녀와 함께 지내는 것만도 경주는 행복했다.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그녀가 여전히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경주는 진희가 오기 전에 연애를 시작했다. 주말이면 데이트하러 밖으로 나갔다.
진희는 경주에게 미안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다.
출산을 앞두고 일반직장에는 이력서를 낼 수 없었다.
그녀가 임신 7개월 되었을 때 외삼촌의 생일잔치 초대로 저녁 식사에 참석했다.
가족이 모두 모였다. 엄마는 새아빠와 함께 왔다. 그런대로 두 사람은 좋아 보였다. 준성 오빠도 약간 야윈 듯 보였지만 더 성숙해진 얼굴로 반갑게 웃었다.
정민, 정기 오빠도 더 멋있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식사하며 가족의 훈훈함을 나누었다.
돌아가는 시간 외숙모는 진희를 배웅하며 전철역까지 걸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숙모의 손이 따스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진희야, 지내기 괜찮아?”
진희는 늘 자신을 염려해주던 숙모인지라 얼른 네. 하고 대답했지만 아차 싶었다.
숙모는 뭔가 자신에게서 다른 것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몇 달 후면 알게 될 일이었다. 영원히 숨길 수는 없었다.
진희는 근처 커피솝으로 숙모와 들어갔다.
“숙모, 속이고 싶지 않아요. 말씀드리고 싶으니 저를 믿고 이해해주세요.”
은경은 전과 달리 유난히 식성이 좋은 진희를 보고 좀 다른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진희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은경은 놀란 기색을 감추고 말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존중해야지. 진작 내게 말하지 그랬어, 그럼 좀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네 인생을 네가 꾸려갈 권리가 있는 성인이니까.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해. 알았지? 많이 힘들었겠구나. 예정일은 언제니?”
진희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는 숙모가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미혼모의 불리함이나 수치스러움 따위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결정을 더 소중히 여겨주는 숙모가 진심으로 감사했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내 편이구나 생각했다.
은경은 진희를 보내고 돌아오면서 어리고 허약한 진희가 감당했을 마음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마음이 아팠다. 의외로 진희의 강단 있는 당당함에 놀랐다.
진희가 곱게 화장하고 나서면 마치 다른 애처럼 보이던 농염한 화사함이 왠지 모를 불안감을 실어 오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곤충을 유혹하는 화려한 꽃처럼 유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진희는 8개월째 되어 힘이 들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쓰던 글들을 다시 다듬으며 시간을 보냈다. 체격이 크지 않은 진희의 배속이 비좁은지 아기가 치받아 여간 힘들지 않았다. 브래지어도 할 수 없었다. 헐렁한 임신복을 사 입은 진희는 스스로 민망했다.
진희는 경주의 손이 가지 않게 늘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먹을 것을 준비했다.
고마운 친구를 위해 최소한의 밥값은 하려는 노력이었다.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어린 시절 아빠와의 이별을 다룬 단편소설을 출판사에 의뢰하고 출산하러 병원에 갔다. 아침부터 진통이 조금씩 시작되었다.
경주는 안절부절못하며 진희보다 더 심란해했다.
보다 못한 진희가 웃으며 말했다.
“누가 보면 니가 아기 낳는 줄 알겠다. 왜 그렇게 불안해?”
얼굴을 찡그리며 참던 진희가 잠깐씩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해 경주는 신기하기만 했다. 진희가 몹시 힘들어 신음할 때는 경주도 아이구! 소리를 내며 진희를 얼싸안았다. 그렇게 점심때가 지나고 진희가 분만실로 실려 가기 전 불안한 경주가 물었다.
“진희야, 숙모나, 아기 아빠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
“아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 이건 그냥 내일일 뿐이야. 니가 곁에 있어서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
진희는 다시 나오는 비명을 억누르며 분만실로 옮겨졌다.
한 시간쯤 지나는 동안 경주는 병원 복도를 수십 차례 오가며 믿지도 않는 신께 기도했다.
‘진희를 지켜주세요. 제발!’
그녀가 겪고 있을 고통에 눈물이 솟았다.
경주는 사랑하는 진희에게 행여 잘못된 일이 벌어질까 봐 가슴이 졸아드는 두려움에 시달리며 여자라는 인간에 대해서 다시금 회의했다. 한편으로는 적어도 나는 남자를 사랑하는 일은 없을 테니 이런 고통을 겪지는 않겠구나 안심도 되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 나며 허기가 느껴졌다.
진희는 무사히 건강한 딸을 낳았다.
경주는 진희와 그녀가 낳은 조그만 생명을 보면서 신기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희의 양쪽 볼에 또 손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마치 자기가 아빠라도 된 기분이었다.
진희를 산후조리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와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였다.
부모님은 자신이 동성애자인 것을 전혀 모르신다. 그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싶지 않은 경주는 진희 외에는 주위 사람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다.
모두 좀 남자 같이 활발한 여자로 볼 뿐이었다.
오늘 진희가 낳은, 여자만이 낳을 수 있는 아기를 보고 생명을 출산하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실감했다. 그 고통 속에서 잉태한 생명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 일과는 거리가 먼 것이 한편 좀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롭게 살고 있어서 너무 좋았다. 자유를 누리는 것이 무엇보다 더 소중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애는 그녀보다 다섯 살 어린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성인이 된 여자였다. 그들은 일하는 과정에서 만났는데 그녀가 경주에게 호감을 보이며 접근했다.
아주 예쁜 애였지만 어려서 철이 없고 충동적이었다. 그리고 육체적 쾌락을 좋아했다. 따라서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는 천방지축이었다.
진희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물이었지만 경주로서는 그녀를 마다할 수 없었다. 주위에 다른 아는 동성애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제물에 실증나서 물러갈 때까지 그 애와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산후조리원에 외삼촌과 숙모가 선물을 사들고 오셨다.
삼촌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진희의 손을 잡고 ‘애썼구나’ 위로해주셨다. 그리고 아기의 쪼그맣고 연약한 손이 그의 손가락을 움켜쥐자 입 맞추었다.
진희는 외삼촌에게 부끄러움과 함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축하받으며 더욱 죄송했다. 번듯한 배우자도 없이 출산한 사실이 죄송했다.
오빠 준성과 정민이도 함께 왔다. 준성은 진희와 아기를 번갈아보면서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금일봉을 넣은 봉투를 주었다.
정민이는 아기 옷을 선물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누나, 대단해. 꼭 좋은 엄마가 될 거야. 아가야, 건강하게 잘 자라라.”
진희의 소식을 알고 있을 엄마는 오지 않았다.
“엄마는 나중에 오실 거야. 좀 놀라신 거 같았어.”
숙모가 지나가는 말처럼 가만히 속삭였다.
진희는 엄마에게 기대하지 않아 서운하지도 않았다.
외삼촌과 숙모가 부모님이나 다름없었고 그들의 지지를 받아서 힘이 났다.
경주에게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책임져야 하는 한 생명이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과 저항을 느끼며 회의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실천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에게 없는 선택권을 자신이 내린 것에 대해서 후에 원망을 듣는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꼼지락대는 생명의 사랑스러움은 눈물이 솟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 생명을 보면서 자신이 내린 결정이 얼마나 옳았는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를 정도였다.
자신의 탐스러워진 젖을 물리고 아기가 주는 달콤한 감각을 즐기면서 진희는 엄마가 된 것을 실감했다.
자신을 범해준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의 욕정을 받아들이고 얻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생명을 종일 바라보면서 사랑이 넘쳐흘렀다.
문득 자신의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오빠와 나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었을까?
아빠가 떠난 후 우울해진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곱게 화장해 아름답던 엄마의 얼굴에 가득했던 어두움, 그녀에게는 남겨진 자식들이 아무 의미도 없었던 걸까?
남자가 자식들보다 그렇게도 더 중요했을까?
엄마가 손녀를 보러 오지 않는 것은 무엇을 그토록 실망해서일까?
진희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진희는 행복했다.
앞날에 대한 걱정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이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속해 있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를 믿고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자신과 아기 주위에 있다는 사실은 진희의 의식을 넓게 확장시키며 안정감과 함께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고마운 친구 경주에게 감사했다. 그녀는 저녁이면 꼭 한 번 들여다보고 갔다.
진희는 두 개의 아기 이름을 지어놓았었다.
딸일 경우는 자신의 성과 함께 ‘김하나’라고 출생신고를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아빠도 성이 김씨였다.
숙모는 진희에게 말했다.
“하나를 외삼촌 호적에 올려도 돼.”
진희는 고마웠지만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제부터는 그 아이를 떼어놓은 자신의 인생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기를 데리고 경주에게 가는 길에 출생신고를 했다.
김하나는 미혼모의 아이가 되었지만 진희는 상관하지 않았다.
삶에는 다양한 형태가 존재할 수 있으며 어떻게 받아들이며 사느냐가 중요한 일이었다. 그녀가 아기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한 아기는 별 탈 없이 잘 클 것이라고 믿었다.
아빠가 엄마 진희의 동의 없이 하나를 잉태시킨 것처럼 엄마 진희는 아빠의 동의 없이 하나를 출산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자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진희에게 온 생명을 삶의 축복이라고 받아들이고 취한 것은 진희의 자유의지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희생 없는 열매란 없다는 삶의 진리 말이다.
왜 모두들 책임지려 하지 않는가!
책임지지 않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방종일 뿐이다.
진희는 성인으로서 삶의 자유를 누렸으니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 누구도 힘들지 않은 인생은 없다. 힘든 만큼 그 결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를 안고 진희는 삶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한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30. 책임
은경의 나이 육심을 바라보지만 여성 호르몬이 부족하여 일어난다는 여러 가지 갱년기 증상은 모르고 살았다. 산부인과에서 처방해주는 호르몬 처방을 생리 끝나기 전부터 실행한 덕분에 여전히 바쁘고 활발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잦은 민원 처리로 인한 스트레스, 전산 시스템 고장으로 인한 시달림, 상관의 부당한 억압 등등 성난 파도를 헤쳐 나가듯 떠밀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도 운 좋게 원하는 만큼 승진도 하고 이만큼 사회에 기여하고 살았으면 되었다 만족하였다.
그러나 이제 고단함이 전보다 자주 느껴졌다. 내가 나이 들고 있구나 실감했다.
순전히 남편의 후원으로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공부하며 쉴새없이 살림을 돌보는 충실한 남편이자 가장이었다.
학업을 계속하는 큰아들에게 아직은 비용이 들어가지만 사는데 지장은 없었다.
준성이도 진희도 모두 독립해 나갔기 때문이다.
은경은 퇴직하면 무엇을 할지 생각하였다.
예전보다 평균수명이 많이 늘어났다. 여성의 평균수명이 80세가 넘었다.
공부하며 행복해하는 남편을 보면서 대학원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졸업장이 필요 없는 나이에 굳이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원에 진학할 것 없이 남편을 지도교사로 삼아 그가 한 공부를 그녀도 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를 지도해줄 교사는 또 있었다. 정민이 박사과정을 마치고 교수가 되면 그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작년에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경증 치매를 한 일 년 앓으시다 가셨지만 동생 내외가 잘 보살펴 편안하게 떠나셨다.
은경을 사모했던, 사돈이 된 고향 선배를 장례식에서 다시 보았다.
그는 돈을 많이 벌었다고 들었다.
동생 내외뿐만 아니라 은경에게도 해마다 구정 명절이면 값비싼 전복을 보내오곤 하였다. 그때마다 은경은 후덕한 그를 기억해내며 감사했다.
냉정하게 대했던 철없던 시절이 생각나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은경은 답례로 과일 한 상자라도 꼭 보내며 고마운 마음을 전하였다.
만약 저 세상이 있다면 어머니는 그리도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만났을 것이다. 그러면 살아생전 응어리졌던 한 많은 그리움은 사라졌을 것이다.
은경은 불확실한 내세나 전생을 믿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것이 있든 없든 현세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에 가치를 두었다. 있어서 가면 좋지만 못 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현재를 충실히 살아갈 뿐이었다.
은경에게는 그것이 곧 종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평안이고 구원이었다.
준성이 무사히 취업해서 몇 년 나가 살더니 결혼한다고 한다.
상견례를 하면서 은경은 그녀에게 손주들을 부탁하며 돌아가신 시어머니께 감사했다.
은경은 그때 준성이 제일 걱정되었었다.
아빠의 부재로 상처받았을 그에게 좋은 가족이 되어주려고 정말 노심초사했던 세월이었다. 이제 다 커서 제 가정을 꾸린다고 하니 얼마나 감개무량한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개받은 예쁘고 참한 신부도 은경의 맘에 들었다.
그 애가 얼마나 감사한지 은경은 고운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 ‘고맙다’ 말하였다.
웃는 모습이 아주 해맑고 언행이 단정해 보이는 처녀였다. 더군다나 집안도 좋은 듯 부모님 두 분의 인품이 넉넉해 보였다.
은경은 그동안 준성을 돌보아 준 보람을 느꼈다.
준성의 환경이 좀 기운 듯 느껴졌지만 기죽지 않고 침착한 그의 모습에 은경은 안심하였다. 준성에게 도움이 되는 처가라면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인어른이 준성이 다니는 회사 상사인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준성은 그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장인 될 사람이 그가 회사생활에 성실하다며 칭찬해서 알았다. 정작 준성의 엄마인 시누이는 좀 새침해 보이고 말이 없었다.
그녀가 이혼한 이후로 별로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재혼한 지금도 역시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자식 둘을 거두는 일이 여러 가지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좀 웃으면 좋으련만 은경은 생각했다.
은경은 제 아들 장가가는 것도 이보다 기뻐할 수는 없을 만큼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곧 결혼 날짜를 통보해 왔다.
신혼집도 신부의 집에서 마련하기로 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준성은 연희가 임신한 사실을 삼 개월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녀는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말했었는데 사실이 아니었다.
연희는 생리를 거르자 자가 테스트를 해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병원에 가서 확인하고도 준성의 동의 없이 벌인 일이라 염려가 되었다. 그러나 하루빨리 그의 마음을 붙잡고 싶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초조해졌다. 그가 정 싫다면 정말 그녀가 싫어서 임신한 사실을 반기지 않는다면 헤어질 각오를 하였다.
미연이 공연 프로젝트로 외국으로 떠난 지 수개월째였다.
그녀는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연락도 없었다.
준성은 갈등했지만 결국 연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항상 따뜻한 품을 내주는 그녀를 더는 실망시키고 상처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미연과 함께 갔던 추억어린 장소들을 하나하나 가보았다.
순정했던 자신의 사랑을 가슴에 묻으며 치솟는 슬픔을 느꼈다.
사랑은 반드시 소유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미연을 통해 깨달았다. 그녀가 그의 가슴에 남아있는 한 사랑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 중 하나로 그녀는 남을 것이었다. 마다하는 그녀를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진희는 졸업 후 유명 문예지 신인 작가에 이름을 올리며 등단하였다.
문예지에 작품평을 의뢰받은 김교수는 진희의 글을 읽고 필명이 다르지만 그녀임을 알아챘다. 그녀의 글들을 지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스러운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단편소설 속 미혼모 이야기에 충격을 받아 그녀에게 연락했다. 그녀의 바뀐 전화번호는 신호음이 오래 간 후 연결되었다.
진희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바로 알아보고 깍듯이 인사했다.
그는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한 번 만나기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진희는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다며 죄송하다는 인사말을 하고 끊었다.
그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는 고작 문예지에 호평을 실어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진희는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시간을 없었던 일로 지워버렸다. 그러나 그에게 그 일은 없었던 일이 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정신적 채무자로 전락하였다.
진희는 평일에 하나를 유아원에 맡기고 도서관에 갔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자료를 수집했다. 주말에는 아르바이트하며 용돈을 벌었다.
경주에게 얹혀살고 있지만 언제 보아도 그녀는 생기 넘치고 행복해 보였다.
딸 하나는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며 온갖 재롱을 부렸다.
진희는 하나를 낳아 키우며 여자는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열 번을 죽었다 깨도 아이를 낳아 키우지 못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들은 여자를 취함으로써만 완성되는 존재에 불과했다.
경주는 진희와 하나를 돌보아주기 위해서 아예 그녀의 애인에게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주고 어른들이 오시는 주말이면 그곳에서 작업을 하며 애인을 만났다..
은경은 조카손녀 하나를 만나는 기쁨으로 주말을 기다렸다.
외할머니가 된 시누이가 하나를 보러 한 번 왔었다.
시누이가 딸 진희에게 애 아빠가 누구냐고 물었다.
진희는 잠시 말없이 하나 옷을 다 입히고 자리를 뜨면서 대답했다.
“아빠가 되어줄 수 없는 사람이예요.”
그게 다였다. 시누이는 어이가 없어서 더 이상 묻지 않고 돌아갔다.
은경은 진희의 심정을 헤아리며 네 할 도리를 다하면 되는 일이다 생각했다.
이제 성인이 된 진희가 선택한 삶이고 책임지겠다는 신념이 확고하니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진희가 도움을 청할 때 은경이 해줄 수 있는 도움을 주면 되는 일이었다.
정민은 민주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정민이 어렵게 시간을 냈는데 몸이 피곤하다며 다음에 보자 하였다.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정민이 걱정되어 집에 병문안 갈까 물어보았다.
민주는 서둘러 그럴 거 없다며 다음 주 만나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생전 없었던 일이라 정민은 어디가 아픈가 궁금했다. 그녀가 예전 같지 않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요즘은 결혼하자는 말도 없고 정민이 연락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민주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처음으로 민주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뒤돌아보았다.
아내가 될 소중한 여인을 아끼고 아꼈다가 결혼하는 날 가장 황홀한 순간을 맞이하고 싶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소중한 가치는 변함없이 지켜지는 것이 옳다고 그는 생각했다.
은경은 모처럼 집에 있는 정민을 보며 요즘 민주는 잘 지내는지 물었다.
그러잖아도 민주 생각을 하던 차라 정민은 은경에게 민주 이야기를 하였다.
“민주는 결혼하고 계속 공부하라고 하는데, 난 학업 마치고 결혼하려구요. 요즘은 지쳤는지 조르지 않고 잘 지내요. 오늘 만나려고 했는데 그동안 많이 바빠서 좀 피곤하다며 쉬겠다고 하네요.”
은경은 오래도록 변함없이 만나는 두 사람을 걱정하지 않고 믿었다.
정민은 부모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는 신뢰할 수 있는 아들이니 잘 알아서 하리라 생각했다.
민주는 콘돔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동료 대신 피임약을 먹었다. 근데 부부가 아닌 이상 자주 하는 성관계도 아니라 바쁜 나머지 약 먹는 것을 사흘째 잊어버렸다.
학교에 여러 가지 행사가 겹치면서 두 사람 모두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연구수업 등을 무사히 마치고 직원회식이 끝나자 그들은 살며시 빠져나와 그의 오피스텔로 들어서기 무섭게 한 몸이 되었다. 이제는 그도 민주에게 육체관계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그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그의 아내가 되고 싶지 않다면 연연해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자신에게 매달리지 않는 그녀를 완전히 굴복시키고 싶은 충동에 빠져 성적 욕망이 불같이 일어나곤 했다.
쾌락이 지나가고 잠시 쉬면서 민주는 약 먹는 것을 며칠 잊어버린 게 생각났다.
민주는 그달 생리도 걸렀다. 매달 꼬박꼬박 어김없이 찾아오는 생리를 거르자 불안한 마음에 임신 테스트를 해보았다.
딱 걸렸다. 민주는 머리를 움켜잡으며 철저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정민이 연락한 날.
민주는 산부인과에서 낙태 수술을 하고 돌아와 쉬던 중이었다.
정민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스스로에게 이는 모멸감으로 괴로웠다.
만약 정민이 자신 모르게 다른 여자와 성관계한다면 나는 괜찮을까?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속이고 있다는 자책감이 그동안 누린 쾌락의 대가인 양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오래전부터 정민과 나누고 싶은 쾌락이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상황에서 관계의 책임을 질 생각이 없는 고지식한 그는 번번이 마다했다.
유혹에 넘어간 자신에게 이는 수치스러움과 자유롭게 즐길 수도 있는 성인으로의 권리가 마주치면서 갈등을 불러왔다.
정민은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건 맞을까?
육체적 욕망을 참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간절히 자신을 원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정민을 정말 사랑하는 게 맞을까? 정말 사랑한다면 참아야 하는 일이다. 사실 정민이 그보다 훨씬 인물도 좋고 성숙한 인간이다. 그런데 그는 정도만 걸어가는 성실함으로 성적 자극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에 매일 부딪히는 동료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다정한 말을 건네며 그녀의 마음을 자극했다. 결국은 그녀가 양다리를 걸치게 하고야 말았다.
그녀는 중절 수술을 받은 죄책감에 이 관계를 멈추던지 안 되면 다른 학교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더는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정민과 헤어지기 싫었다. 그와 사귄지 육 년이 지났다. 아직도 그의 공부가 끝나려면 일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동료와 친숙해진 이 관계를 내 힘으로 단절할 수 있을까? 이성과 감정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에 빠져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차라리 정민을 포기하고 동료와 결혼해버릴까? 그러나 그 결정은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민주는 정민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정민과 성관계를 했다면 그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었을까?
민주는 혼란스럽고 머리가 복잡해 처방받은 안정제를 먹고 잠들었다.
정기는 군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무조건적인 명령 체재를 처음 겪는 그로서는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 그림을 그릴 수도 없는, 정신없이 반복되는 훈련과 잔인한 선배의 괴롭힘은 그의 가슴을 옥조이는 호흡곤란의 공황 장애를 불러왔다. 꾀를 부린다고 얻어맞다 저항하여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급기야는 사지를 떨면서 쓰러져 정신을 잃고 의무실에 실려 가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의 군 생활은 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졸지에 부적응자로 낙인찍혀 점점 더 괴롭힘을 당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왜 내게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을 향한 두려움이 끔찍한 공포로 바뀌면서 그는 마침내 자살을 시도했다.
조금만 늦게 발견되었다면 세상을 떠났을 치사량을 삼켰다.
그의 식도는 망가지고 말을 할 수 없는 장애자가 되었다.
상관은 그를 불명예제대 시키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은경은 기가 막혀 정기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형규는 그의 불행을 막지 못한 자책감에 가슴을 치다가 곧 소송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나타난 공황 장애를 치료하지 않은 채 가해를 가한 이들을 수소문하며 친구 변호사에게 의뢰했다. 긴 투쟁이 될 것을 각오했다.
정기는 집에서 며칠간 미음으로 연명하며 죽은 듯이 누워만 있었다.
그가 살아온 날들이 영화의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림을 잘 그리는 일 말고 그가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회의 부적응자가 되어 누워있는 자신의 초라함이 가슴을 쳤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죄송했다.
바람직한 정민이와 비교될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부모님 말씀을 안 듣고 제멋대로 산 댓가로 벌을 받은 것 같았다.
형규는 그와 필기로 의사 교환을 하면서 아들의 슬픔을 나누고자 애썼다.
그에게 희망의 불씨를 살려내기 위해 다시 그림을 그릴 것을 권했다. 그러나 정기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죽었어야 했어요. 부모님께 폐만 끼치는 존재가 되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그런 말 하지 마. 넌 존재 그 자체로 우리에게 소중해.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겠니? 아빠가 모르고 있었다니 정말 미안하다. 아무 말 없어서 잘 지내는 줄만 알았어. 용서해다오.”
형규는 아들의 손을 잡고 침통함을 누르며 말했다.
그는 꾸준히 지치지 않고 아들과 대화하며 그를 돌보았다.
한 달쯤 지나자 형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을 서성이기 시작하면서 제 방에 쌓인 그림들을 꺼내 보았다. 걸레를 가져가 먼지를 닦았다. 그런 정기를 보는 형규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경은 망설임 없이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35년을 근무하였으니 지금 퇴직해도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정년퇴직까지 하려던 마음을 바꾸고 이제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남편도 좀 더 자유롭게 해주고 장애자가 된 정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제는 오롯이 가족들에게 시간을 내주며 힘이 돼주고 싶었다.
은경은 책임져야 했던 수많은 공적인 일에서 벗어나 한가로운 마음으로 형규와 두 아들을 위한 식사를 만들면서 만족했다. 그동안 애쓴 사회인으로서의 책임을 내려놓자 마음이 참으로 편안했다. 아들은 비록 장애자가 되었지만 목숨을 건진 것만도 감사했다.
형규는 일 년이 지나도록 고군분투한 결과 정부로부터 아들의 장애 보상으로 소정의 배상금을 받고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가해자와 책임 상관을 벌할 수 있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제2의 희생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형규의 안타까운 분노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정기가 다시 삶의 희망을 지닐 수 있다면 되는 일이었다.
그동안 그의 심신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건강진단 검사에서 드러났다.
간암 말기였다.
재작년 건강진단 검사를 정신없어 마루고 지나쳤다가 재판이 끝나고 나서야 몸이 심상치 않아 받았더니 나온 결과였다.
은경은 가슴이 철렁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사는 일이 역경을 이겨내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어떻게든지 당신을 낫게 하겠어요. 저를 믿고 희망을 가지세요.”
형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한 얼굴을 하였다.
놀란 아내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지친 삶을 그만 내려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옛날 같으면 호상이라고 할 환갑이 지난 나이까지 살았으니 여한은 없었다.
아직 자립하지 못하고 장애자가 되어버린 아들이 염려되긴 하지만 아내가 잘 돌보아줄 것이다. 형규는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오롯이 죽음을 받아들이자 생각하였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투병 아닌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으로 바꾸고 싶었다.
은경은 남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녀는 인명은 제천이라는 옛말을 믿었다.
그들은 경기도 산골 마을에 폐가를 하나 구입했다.
부부는 세 끼 식사해 먹는 시간 외에는 집을 조금씩 수리하며 하루를 보냈다. 쉬엄쉬엄 하루 한 가지씩만 일하며 맘 편히 생존하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다.
정기는 그들과 함께 시골로 내려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떠나기 전 진희에게 다시 집에 들어와 살기를 부탁했다.
진희는 기꺼이 응하여 바로 이사했다.
친구에게 의탁했던 처지인지라 숙모의 의견이 감사할 뿐이었다. 공부하는 정민과 함께 자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다.
정기 일로 심란했던 정민은 집에 돌아와 어린 하나의 재롱을 보면서 다시 즐거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린아이란 어른들의 피곤한 마음을 한방에 치유해주는 기쁜 존재임이 분명했다..
그는 민주를 믿었다. 오래도록 사랑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한들 그의 신실한 사랑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믿으며 학문에 몰두했다.
31. 헌신
준성의 신혼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는 듯 행복했다.
그들은 직장에서도 가끔 얼굴을 마주치곤 했지만 서로 다정한 미소를 보내고 지나쳤다. 부서가 다른 그들은 밤이 되어 집에 돌아와서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연희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나서 한 잔의 물을 마실 때면 영낙없이 들어차는 그리움. 돌아서서 창밖을 내다보며 물을 마시는 그의 뒷모습에서 연희는 왠지 모를 쓸쓸함과 함께 더는 다가설 수 없는 거리를 느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녀는 매번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왠지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조심스러움을 느끼며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미연이 준성에게 연락을 한 건 그들이 결혼한 지 이 년이 좀 지났을 때였다.
준성은 그녀의 연락을 받는 즉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준성은 미연의 웃는 얼굴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느꼈다.
“결혼했다고? 축하해.”
그녀는 일어나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는 멋쩍어하며 악수했다.
얼마나 그리웠던 여인인가!
준성의 가슴은 요동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으스러지게 껴안고 싶은 충동을 누르기 힘들었다.
그는 앉아서 한 잔의 물을 천천히 마시며 심호흡했다.
밤마다 물을 마시면서 쌓였던 그리움이었다.
잠시 말없이 차를 마시는 미연의 모습을 찬찬히 보았다. 예전의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생기발랄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한없이 가라앉고 있는 무거운 느낌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뭘?”
그녀의 태연한 목소리를 듣자 준성은 순간 울컥했다.
“말해 줘.”
그녀는 잠시 말없이 준성을 보며 미소 지었다.
준성에게 늘 보여주곤 하던 친근한 미소였다.
“아무 일 없어. 귀국하면서 너가 보고 싶어서 연락했어. 결혼 축하도 해주고 싶구...”
그녀는 그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반짝이는 붉은 포장지에 싸인 상자에 새빨간 리본이 눈길을 끌었다.
준성은 다시 한번 숨을 고르며 그녀가 처한 상황을 솔직히 말할 리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애가 타는 시간이었지만 달리 어찌할 수 없었다.
아부할 줄 모르는 그녀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번번이 벽에 부딪히며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래서 더는 못 버티고 타협하기에 이르렀지만 마음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성공을 향한 사다리는 높고 위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지치고 상심하였다. 갑자기 모든 것을 중단한 채 귀국하였다. 그리고 젤 먼저 준성을 찾았다. 그는 이제 성숙한 사내가 되어 그녀 앞에 있었다.
미연은 진심으로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생각난 사람이 준성, 바로 그였다.
그들이 간직한 수년간의 순수함이 가슴을 메우며 그녀에게도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일어나 뒤돌아섰다. 지체하다가는 그녀의 지치고 외로운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다.
준성은 여전히 예전처럼 그녀를 붙들지 못하고 뒷모습을 바라보다 집으로 향했다.
그는 돌아가면서 이제 그가 속한 세상에 존재하는 가족을 생각했다.
결혼 이전에 알던 연희가 아닌 그가 평생 책임지고 돌보아야 할 존재인 아내 연희였다. 아버지처럼 아내를 버리는 인간은 절대로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결혼했다. 그러나 미연을 보는 순간 요동치며 흔들리는 마음을 보았다.
차에 앉아 그녀가 준 선물을 풀어보지도 않은 채 뒷좌석에 놓았다. 그 결혼 선물은 의미가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미연은 여전히 존재했다. 밀어낼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인 양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녀가 그를 찾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의미 있을 뿐이었다.
형규의 증세는 항암치료를 받지 않음으로 다른 부위에 전이될 확률이 높았다.
의사는 삶을 보장할 수 없다며 형규에게 간이식을 권했다.
은경은 희망을 지니고 그를 설득했지만 그는 완강하게 마다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자식들과 조카들은 모두 자신의 간을 이식하겠노라 나섰다.
형규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들에게 감사했다. 그러나 위험할 수도 있는 대수술을 자식이나 조카에게 절대로 시키고 싶지 않았다.
은경은 그들이 검사받는 것을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용인하였다. 우선 자신이 먼저 검사하고 돌아왔다. 정기 건강 진단을 받으러 가서 먼저 간이식 여부를 검사받았다. 아쉽게도 은경은 해당되지 않았다. 두 아들의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정기는 엄마에게 글을 써서 보였다.
“제가 아빠께 처음으로 자식 노릇 할 수 있는 기회예요. 정민이 말고 제가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정민이는 결혼도 해야 하고, 취업도 해야잖아요. 제발, 제가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은경은 정기의 손을 잡고 말했다.
“고맙다. 알았으니 아빠와 이야기해 볼게.”
형규는 절대로 안 된다며 저녁도 거르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정기는 다시 한번 아빠에게도 글을 써서 은경에게 주었다.
‘아빠, 제게 인생을 다시 한번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쓸모없는 제가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행복한 일입니다. 끝끝내 거절하시면 아예 제가 먼저 세상을 떠나겠습니다.’
그는 절실하게 하소연하였다.
형규는 수술 여부를 떠나서 자식이 아비를 생각하며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에 감동하여 혼자 눈물을 흘렸다. 성공한 예가 많다지만 만에 하나 자식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살아난들 그 삶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자신이 없었다.
그는 이제 세상을 떠난다 해도 미련이 없었다. 자식들의 남은 생은 은경이 충분히 보살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부족한 대로 성실하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좋은 여자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만족했다.
은경이 남편에게 가서 무릎 꿇고 두 손을 맞잡았다.
“여보, 당신의 생명은 당신 것만이 아니예요. 우리 가족 모두의 생명이예요. 정기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아들이 아빠를 살리겠다고 제 목숨을 내어놓겠다는데, 더는 거절하지 말아요. 아들 소원을 들어주세요. 수술에 성공하여 모두 잘 살아갈 수 있잖아요. 나도 아직은 당신 없이 살고 싶지 않아요. 여보. 벌써 우릴 두고 떠나면 안 돼요.”
은경은 맞잡은 두 손에 머리를 묻고 흐느꼈다. 형규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래 나도 아직은 떠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정기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너무 두려워’ 그는 말없이 아내를 껴안고 다독였다.
은경은 분양받았던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아 병원비를 마련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던 날 아침부터 촉촉이 봄비가 내렸다.
준성 내외가 일찍부터 그들을 모시러 왔다.
은경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들과 함께 병원으로 갔다.
정민의 무거운 표정과 달리 정기는 비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자신이 아버지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에 고무된 듯 기분이 좋았다.
그는 이미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일이 더 무서웠다. 이 선택은 효심에 앞서 그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으려는 시도였다. 이미 죽음의 문턱에 한 번 다녀온 그로서는 죽음보다 못한 비루한 삶이 더 두려웠다.
은경은 병상 침대에 누워 들어가는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꼭 잡은 손에 입 맞추었다.
행여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위험에 처한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뒤돌아서 흐느꼈다.
정민이 엄마를 포옹하며 의자에 앉히고 위로했다. 은경은 정신을 차리며 둘러선 준성 내외와 진희에게 말했다.
“긴 시간 수술이 진행될 텐데, 모두 이곳에서 기다리며 애태울 필요 없어. 수술 끝나는 대로 곧 연락할 테니 그만 모두 돌아가.”
그래도 그녀 곁에 함께 있겠다는 진희조차 애 힘들다며 집에 가 기다리라고 내몰았다.
은경은 혼자 앉아 마음을 가다듬으며 심호흡하였다.
그녀는 만의 하나 잘못되더라도 순순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까지 해야 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인명은 제천이라 했으니 이제는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형규와 함께 했던 오랜 세월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며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늘 바쁘고 힘들었지만 서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여한 없이 보낸 시간이었다.
그는 좋은 남편이었고 자상한 아빠였다. 그만하면 잘 살아온 성공한 삶이었다.
수술 예상 시간은 열 시간 정도였다.
은경이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에 침을 묻히며 수술실 문을 뚫어지게 응시한 지 두어 시간이 지났다.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토록 긴 시간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움켜쥔 주먹에 땀이 나서 옷에 문질렀다. ‘일각이 여삼추’라더니...
시누이가 헐레벌떡 달려와 은경의 손을 잡았다.
눈물을 보이는 그녀를 은경이 껴안으며 말했다.
“잘 될 거예요. 꼭 잘 될 거예요.”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은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술실에서 나오는 의사의 지친 얼굴이 은경을 보자 미소 지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의미했다.
은경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은경은 깊이 머리 숙여 절했다. 돌아선 의사의 뒷모습에 또다시 절하며 감사했다.
긴장이 풀리며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잦아지는 듯 피로감이 몰려오며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을 수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누이가 조카랑 자식들에게 연락하였다. 모두들 안심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두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전신마취를 했다고 해도 무의식중에 그 고통은 깊이 각인될 것이다.
은경은 남편과 아들의 상태를 돌보며 보름이 넘도록 그들 곁을 꼬박 지켰다.
진희가 와서 교대하자고 해도 마다하고 손수 간호했다.
아들의 간을 반이나 잘라 남편의 몸에 이식했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 의술의 발달이었다.
그녀는 매일 새벽 생수 한 잔을 창가에 떠 놓고 빌었다.
옛날 그녀의 어머니가 천지신명에게 빌 듯이 온 마음을 다해 두 사람의 건강이 어서 회복되길 빌고 빌었다.
그들이 퇴원한 후 은경은 집에 돌아와 사흘 밤낮을 자리에 누워 자고 또 잤다.
꼼짝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는 안도감과 함께 숨죽이던 긴장감이 풀리면서 그녀는 죽은 듯이 잠들었다.
진희는 만사를 제치고 사랑하는 그들을 돌보았다.
딸 하나는 당분간 친정어머니가 데려갔다.
은경이 눈을 떴을 때는 동생 내외와 함께 사돈이 된 올케의 오빠까지 병문안을 왔다.
부유한 그는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는 치료비를 자신이 부담하겠다며 선뜻 후한 금액을 동생의 통장에 넣었다.
은경은 올케의 과한 선심에 놀라며 마다하고 되돌려보냈다.
그러자 올케는 사실을 고백하며 오빠의 선심을 기쁘게 받아주길 부탁하였다.
후덕함은 베푸는 자의 기쁨이기도 하였다. 그는 간절했던 첫사랑을 이렇게 풍요롭게 꽃 피우며 스스로 기뻐했다. 이제는 동생의 가족이 된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은경은 염치없음을 느꼈지만 또 다시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여 대출금을 갚았다. 그리고 남편에게 그 모두를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사돈이 된 그와 동생 부부에게 치하하였다.
형규는 웃으며 농을 하였다.
“그이에게 시집갔으면 호강하고 잘 살았을 텐데, 나 만나 고생해서 미안하네.”
은경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난 당신하고 결혼한 거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어쨌든 감사해요.”
아들 정기의 회복은 아빠보다 빨랐다.
그는 마치 딴사람이 된 듯 환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그러나 헬쓱하니 말라 얼마나 힘든 수술인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진희는 밤이면 그들의 훈훈한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가족이란 바로 이런 거구나 느꼈다. 은경이 기운을 차리자 하나를 다시 데려오고 어린아이의 재롱을 보면서 모두 함께 웃을 수 있었다.
형규는 정말 행복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행복이었다.
아들 덕분에 다시 살아난 생명이 놀랍기만 했다.
정기 역시 육체적 불편함과 상관없는 마음의 행복이 그들 부자를 더할 수 없이 만족스럽게 하였다. 은경은 다시 살아난 남편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들 정기에게 드는 고마움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들의 몸을 어서 회복시키기 위해 삼시 세끼를 건강식으로 차리며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들은 계속 약을 먹고 병원을 오가는 일을 성가셔하지 않고 감사했다.
마당에는 연보라빛 라일락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바람은 그들에게 그 은은한 향기가 실어 보냈다. 진희는 딸 하나를 안고 마당에 서서 환하게 웃으며 라일락 고운 꽃을 바라보며 생의 향연을 느꼈다.
32. 포용
민주는 새 학기가 되면서 다른 구에 있는 학교로 전근했다. 그렇게 동료와 결별하고 정민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침묵하며 기다렸다. 그가 연락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착한 정민을 위해서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리며 침묵했다.
그를 상처입힐 수 없었다. 모두 고백하고 그와 헤어지고 싶은 충동도 불쑥 일어났지만 인내했다. 그것조차 그를 위한 처신은 아니라는 자책이 그녀를 질타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마약처럼 취했던 쾌락의 시간을 싹둑 잘라내고 싶었다. 한없이 쓸쓸했다. 맘 가는 대로 살았는데 이 불만족스러운 느낌은 무엇일까?
그녀는 새벽마다 운동장에 나가서 테니스를 쳤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난 후 느끼는 후련함은 그녀에게 위안이 되었다. 동료들과 어울리며 웃음을 나누었다.
퇴근하고 나서는 오피스텔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독서에 열중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민을 만나러 지하철을 타고 국립도서관으로 갔다.
그해 정민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모교의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제서야 정민은 민주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목표를 이루었고 제대로 된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흔쾌히 그의 결혼 의사를 받아들이고 축하하였다.
그는 공공기관을 빌려 간소한 결혼예식을 하려고 마음먹고 민주와 의논하였다.
민주는 그의 계획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가책의 눈물이 솟았다.
지난날 자신의 부정을 충동적으로 고백했다.
“나, 정민씨를 배신했었어.”
정민은 그녀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지금도 진행 중이야? 아니라면 더 이상 말하지 마.”
민주는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꽉 맞잡은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민주야, 네가 다르게 느껴졌을 때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러나 난 너를 사랑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었기에 너를 믿고 기다린 거야. 네가 괴로워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대가를 치루었어. 중요한 건 네가 내게 돌아온 거야. 그 모든 일들이 나의 부족함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네 욕망을 채워주지 못한 내 불찰이 크지. 네 잘못만은 아니야. 이제는 잊어버려. 널 사랑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
마주 앉았던 그는 민주 옆으로 자리를 옮겨 그녀를 끌어안았다.
민주는 그의 품에 기대어 흐느껴 울었다. 그동안의 외로움과 자책, 억압이 눈 녹듯 사라지며 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무한히 샘솟았다. 역시 그녀가 잘 선택한 남자였다.
정민은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구나 직감적으로 알아챘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그녀를 만족시킬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애써 외면하고 침묵하였다. 그보다는 그에게 닥친 현실적 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면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나 떠나간다면 그 또한 그로서는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상견례 날짜를 잡고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민주는 하루도 그를 안 보면 못 살 것처럼 아침저녁으로 그에게 전화하였다.
헤어지고 돌아서면 일어나는 못 견디게 보고 싶은 그리움이었다.
정민은 민주의 불같은 사랑을 모두 받아들이며 그녀를 따뜻하게 포용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기에 그녀를 믿고 제 공부에만 집중했었다. 처자를 책임지는 가장이 되는 일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혹이 있을 때마다 민주를 생각하고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며 책임지지 못 할 일은 아예 벌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직장을 보증으로 대출받아 서로의 직장 중간 부근에 오피스텔을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리고 부모님께 보내는 생활비와 최소한의 제 용돈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소득을 민주에게 주었다. 함께 직장 생활하는 그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그렇게 전달하였다.
민주는 자신의 오피스텔을 처분한 돈으로 대출금을 갚고 부모님께 드리는 생활비와 그의 용돈을 더 할애하였다. 그리고도 생활비는 충분했고 저축도 할 수 있었다.
은경은 마당에 서서 수많은 봄 라일락꽃 향기를 집안 가득 채워주던 나무를 어루만져보았다. 처음 시집올 때보다 상당히 굵고 키가 자란 나무를 보면서 그동안의 많은 추억들이 생각났다.
한적한 아침 새들의 지저귐이 맑은 하늘아래 청량하게 퍼졌다.
그녀와 함께 이 집에서 일어난 수많은 일들을 함께 본 나무였다. 행여 잘리기라도 하면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니었다. 시골집으로 옮겨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 집이 재개발 지구에 들어가게 되어 나라에서 주는 보상금을 받게 되었다.
정기와 함께 경기도 지방에서 노년을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진희도 함께 와서 살기로 하였다.
정기는 요즘 들어 활발한 그림 작업을 하더니 작품공모전에서 대상 수상을 하여 상금도 받았다. 그의 건강은 예전과 다름없이 회복되었고 남편의 건강도 점점 나아져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없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부작용을 우려한 약을 복용하고 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했다. 은경은 그들이 힘든 수술로 인해 빠진 체중을 보충하기 위해 여전히 식생활에 신경을 많이 썼다. 부부가 함께 가꾸는 텃밭에서 나는 신선한 채소와 몇 마리 닭이 낳는 달걀 등, 균형 잡힌 식사와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 거실에는 커다란 시간표를 붙여놓았다.
아장아장 걷는 하나는 장난감 물뿌리개를 들고 다니며 채소밭에 물을 주고 온종일 흙에서 놀며 부부를 즐겁게 하였다..
해가 저물어 땅거미 지는 저녁이면 그들은 하나를 데리고 산책하면서 살아있음을 만끽했다. 일상생활 무엇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게 없었다.
진희와 정기도 바쁘지 않을 때면 함께 하나의 손을 잡고 숲길을 걸었다.
하나는 정기의 어깨에 올라앉아 걸을 때면 좋아서 손뼉을 짝짝 치며 엉덩이를 들썩이다 엄마의 주의를 듣곤 했다.
“삼촌 꼭 잡아야지, 떨어져!”
정기는 활짝 웃으며 하나의 두 다리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정기가 운전을 배워 면허증을 따자 은경도 도전하여 오래지 않아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남편이 타던 오래된 자동차는 좋은 교습용 차가 되어주었다.
정기는 수화도 배웠다. 그는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의욕이 넘치고 부모에게 공손했다. 이제 그에게 있어 말 못하는 건 그리 장애가 되지 않아 보였다.
모두가 그를 따라 간단한 수화를 배우며 깔깔 웃곤 했다. 하나까지 어설프게 그들을 흉내 내서 웃음을 자아냈다.
은경은 새벽에 일어나 정안수 떠 놓고 성심을 모아 간구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하루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늘 마당에 서서 밤하늘을 보며 감사했다.
기적처럼 두 아이를 낳게 된 일, 미혼모가 되었지만 잘 살아가는 진희,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준성이 취업하고 결혼해서 잘 사는 일, 정기가 죽지 않고 살아난 일, 게다가 남편을 살려낸 일, 정민이 교수가 되고 결혼을 한 일, 등등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축복 가득한 인생이었다.
이제는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처럼 가슴이 벅차는 감동과 함께 심호흡했다. 그녀가 매월 받는 공무원 연금 또한 그녀의 삶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공신 역할을 했다. 이제는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편안한 삶이었다.
민원에 시달리고 부당한 상사의 지시를 묵묵히 따라야만 했던 오랜 조직 생활의 지루하고 갑갑했던 억압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느낄 새도 없이 아들의 사고를 수습하고 남편을 잃을뻔한 위기를 넘기면서 은경은 이제야 숨을 돌리고 어느 날 거울을 보았다.
반백의 머리와 함께 얼굴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주름으로 남았다.
지친 눈매를 보면서 은경은 웃었다. 약간 굵은 눈가의 주름이 자연스럽게 따라 웃었다. 하나가 부르는 ‘할머니’ 호칭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처음 들었을 때의 생경함이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준성이도 아빠가 되었다. 은경은 할머니가 된 것이 감사하고 만족스러웠다.
형규는 얼굴이 많이 여위어서 은경보다 더 굵은 주름이 이마와 볼에 남았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기쁨으로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치고 표정은 안정되어 안색이 맑았다.
늘 미흡하여 은근 속앓이를 했던 아들 정기, 그 아들이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었다는 사실이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들의 삶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 무엇보다 감사했다.
정기 또한 아버지를 살려냈다는 자부심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는 회의하지 않고 작업에 몰두하며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결혼하지 않았지만 가족과 함께 사는 안락함을 즐기며 자신이 잘하는 일에 몰두하는 행복이었다.
가족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였다.
그의 그림에는 그 사람의 특징이 잘 포착되어 개성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였다.
그의 재료비는 정민이 매달 입금해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정민이 부모님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내자 은경은 정민에게 그 돈을 정기에게 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민은 흔쾌히 그러시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조금 더 보내드렸다. 민주가 자신의 급료 중 상당 부분을 시부모님께 선뜻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부모님 생각하는 극진한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민은 민주가 받았던 그간의 고통을 보상하듯 아내에게 성심을 다해 사랑하였다. 따라서 민주는 진심으로 남편과 그의 가족까지 사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부모님께서 받은 보상금을 그들에게 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하였다.
대학원까지 공부시킨 것만도 너무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장애자가 된 형제 정기, 미혼모 진희와 함께 사는 부모님의 노년을 빈곤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준성은 진희에게 매달 용돈을 입금해주었다. 진희가 마다해도 한사코 거절하지 말라며 동생을 측은하게 여기며 도와주었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가족 친지 행사 때나 얼굴을 볼 뿐이었다. 연희는 그를 대신하여 가끔 안부 전화도 하고 명절이면 용돈도 드렸다. 모두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며 삶의 터전을 가꾸어 갔다.
준성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다짐했던 미연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알고 싶었다. 왜 그녀가 갑자기 귀국했는지 알아야 했다. 마침 경찰 계통에 종사하는 친구가 있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의뢰하였다.
어느 날 준성의 차를 탄 연희가 뒷좌석에 놓인 물건을 보고 물었다.
“이거 뭐야?”
지난번 미연이 준 새빨간 리본이 나풀거리는 선물 상자를 보았다.
준성은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며 그 선물을 그대로 놓아두었었다.
“응.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결혼 선물이라며 주었어.”
연희는 풀어보아도 되냐고 묻고는 리본을 풀었다.
뚜껑을 열자 작은 발레리나가 춤을 추며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 영화에서나 보았던 뮤직 박스였다.
준성은 처음 본 미연의 요정 같았던 몸이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머! 예뻐라!”
연희는 거실 장에 놓고 가끔 한 번씩 열어보며 미소 지었다.
준성은 그때마다 미연을 보았다. 그녀가 준성에게 선물하였던 기쁨과 열정, 희망까지 알라딘의 요술상자처럼 떠올랐다.
미연은 자유 분망한 성격대로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마치 다른 나라 사람처럼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오곤 하였다.
그러나 단 한 남자, 그는 미연을 포기할 줄 모르고 집착했다.
외롭고 고단하여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었던 어느 날 결국 그를 피하지 못하고 미연은 그와 육체관계를 하였고 뜻밖에 임신까지 하자 당황하였다.
피임에 철저했던 그녀였지만 그를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미연에게 정관수술을 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미연은 그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한국에 돌아오기 전 마지막 프로젝트를 기획한 프로듀서였다.
그녀의 구토와 미열로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그녀에게 청혼하였다. 그러나 미연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거짓말로 자신을 묶은 그의 아내는 더더욱 되고 싶지 않았다. 미연은 그 누구의 아내도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뒷풀이 회식에도 나가지 않고 귀국해버렸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준성이 생각났다.
그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친구에게서 들었고 그것은 미연이 예상했던 일이기에 담담했다. 어리고 순수했던 그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오랜 시간 만났지만 그를 사랑한 것 같지는 않았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잉태한 생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벌써 삼 개월에 접어들었다. 중절 수술을 받을 거라면 하루가 시급한 일이었다.
만약 낳아서 키운다면 미연의 인생에 큰 부담이 될 것은 뻔하였다.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산부인과에 예약을 잡아놓고 아빠를 만나러 갔다.
아빠는 여전히 다람쥐 체바퀴 돌 듯 음악 학원을 오가며 생활했다.
오 년쯤 안 본 사이에 흰 머리가 생기고 몸집도 약간 불어난 듯 중후한 중년의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
엄마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 듯 더 젊어진 모습이었다. 매끈한 연갈색 단발머리에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은 활기차 보였다. 그녀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평범한 티셔츠에 잠바 차림을 한 아빠는 미연을 보자마자 껴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 딸, 얼마 만이야! 많이 여위었구나!”
미연도 오랜만에 본 아빠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순간 엄마의 완벽하게 문신한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다정했던 아빠. 몹시 보고 싶었다.
소년이었던 동생도 훌쩍 커서 청년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근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바로 가겠다고 하는 미연을 아빠는 하룻밤 자고 가라며 굳이 붙잡았다. 엄마가 붙잡았으면 뿌리쳤을 미연은 아빠와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해 하룻밤 자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엄마가 샤워하러 들어간 사이 함께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내리고 배꽃이 하얗게 핀 밤길을 산책하였다.
아직 흙길이 남아있는 고향. 익숙한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어릴 적 아빠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과수원길이었다.
미연은 아빠 손을 잡았다. 따스한 아빠 손이 미연의 손을 꼬옥 쥐었다.
“많이 힘들었지? 어디 아프지 않았어?”
“네. 전 잘 지냈어요. 아빠 건강은 괜찮아요?”
“그럼, 난 괜찮아. 요즘은 신경 써서 운동도 하고 그래”
미연은 주머니에서 반 접은 봉투를 꺼내 아빠 잠바 주머니에 넣었다.
“뭐야? 내가 널 줘야지. 아빠 돈 아쉽지 않아.”
아빠는 봉투를 꺼내 다시 미연의 손에 들려주려고 하자 미연이 막으며 말했다.
“아네요. 아빠, 제가 꼭 드리고 싶었어요. 얼마 안 돼요.”
아빠 얼굴이 활짝 웃으며 눈가의 주름살이 접혔다.
“고맙구나.”
미연은 아빠를 따라 웃으며 다시 팔짱을 끼었다.
미연이 누구보다도 보고 싶었던 아빠였다. 힘들 때면 기대고 싶었던, 단 한 사람의 다정한 어른. 아빠는 미연에게 그런 존재였다. 어릴 적 여자애들이 그러듯이 이담에 크면 결혼하고 싶었던 좋은 아빠였다.
미연이 중절 수술을 하고 입원실에서 회복을 기다리다 나온 시간은 어둠이 내리는 늦은 저녁이었다.
힘없이 호텔 문을 들어서는데 준성이 뛰어왔다.
미연은 깜짝 놀라 흠칫하며 멈춰 섰다. 준성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들어가요. 안색이 안 좋아.”
미연이 묵고 있는 호텔 방에 들어갈 때까지 엘리베이터에서도 복도를 지나면서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많은 말을 대신하였다.
준성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알 수 없으나 미연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준성은 그녀를 만난 것에 안도하며 속으로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녀가 침대에 눕자 물을 한 잔 떠 놓고 그녀가 벗은 옷을 옷걸이에 걸었다.
준성은 그녀가 잠들 때까지 말없이 앉아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늘 몹시도 그리웠던 그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손끝 하나 댈 수 없는 거리가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듯 다가갈 수 없었다.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으며 슬픔이 몰려왔다.
짧은 메모와 은행카드 한 장을 놓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준성은 연희에게 돌아가며 연을 끊은 아빠를 생각했다.
절대로 아빠처럼 무책임한 인간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싯 웃음이 나왔다. 어른들의 세계를 모를 때 했던 다짐이었다. 그러나 미연 때문에 연희를 배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미연을 욕되게 하는 것 같았다. 미연은 결코 그런 부정한 관계를 원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이제는 그가 죽을 때까지 지키고 보호해야 할 여자는 미연이 아니라 그의 아내 연희였다. 그리고 태어난 어린 아들이었다. 그렇지만 미연을 잊을 수는 없었다. 연희 이전에 그가 책임지겠다고 스스로 약속한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동생 진희를 돌보듯이 그녀의 삶을 돌봐주고 싶었다.
육체적 사랑을 넘어서는 인간적 사랑을 거둘 수 없는, 그건 그냥 되지 않는 일이었다. 준성의 심연 깊숙이 자리한 그녀를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다음날 미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었을 때 햇빛이 쨍쨍하게 쏟아지며 눈부셨다.
전날 자신을 지켜보며 앉아 있던 준성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이미 그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어 서로를 보듬고 있었다.
미연은 준성을 통해 또 다른 사랑을 경험하였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준성의 인내심은 큰 슬픔을 이겨내는 고귀한 희생이었다.
그는 미연이 원하기만 했으면 그녀와 결혼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연은 그를 사랑했지만 이성으로서의 떨림이나 열정이 없었다. 그를 남편으로 상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성인이 된 그를 멀리했다.
그가 남긴 메모와 카드를 들여다보던 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하고 외출했다.
배가 고팠다. 허기지는 몸뚱이가 혐오스럽기는커녕 오히려 감사했다.
잉태된 생명을 잔인하게 없애고 배고픈 육체.
처음으로 느끼는 속물스러운 무정한 혐오감.
자신의 존재에 대한 뼈아픈 각성이 한 숟갈 한 숟갈 밥을 떠 넣으며 밀려들었다.
자신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돌아간 준성과 그가 놓고 간 신용카드의 상관관계를 생각했다. 그녀가 원한대로 그가 자신이 선택한 삶에 충실한 것을 확인했다.
행여 그녀가 곤궁에 처했을까 배려한 그의 의리를 고마워하며 그것을 애정의 징표처럼 지갑에 넣었다.
다음 날 준성은 바쁜 회사 일을 처리하고 그녀가 머물렀던 호텔로 전화했지만 그녀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 후로 준성은 미연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녀는 날아오지 않는 카드 명세표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가 주고 간 뮤직 박스는 잊힐만하면 부부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었다.
준성은 아내 연희를 미연인 듯 성심을 다해 안고 사정했다.
한껏 고조된 연희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요. 내 사랑.”
준성은 연희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답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그에게 연희는 미연이였고 미연은 곧 연희였다. 그것은 준성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이었다.
33. 김진희
무럭무럭 잘 자란 하나가 유치원에 들어갔다.
아이들이 귀해지는 세상에서 그들의 소중함은 점점 더해져 갔다.
진희는 하나를 낳아 키우면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
자신이 택한 삶을 회의하지 않았다. 하나가 있어서 그녀는 외롭지도 않았다.
그녀는 남자들의 유혹을 받으면 서슴없이 미혼모인 것을 밝히고 그래도 좋다면 사귀자 하였다. 어떤 이는 주저했고 어떤 이는 가볍게 응수했지만 내키지 않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동반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생각했다.
하나가 있어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또한 감수하리라 생각했다.
수녀나 비구니로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도 있지 않은가!
세상은 사내 말고도 의미 있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녀가 마음껏 사랑해도 되는 존재는 딸 하나로 충분했고 함께 살면서 자신을 이해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외삼촌, 숙모가 있어서 무엇 하나 아쉽지 않았다.
주변에서 말하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결혼해야 한다는 건 그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관심 있는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
출판사 사장이었다. 그는 진희가 두 번째 책을 출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진희는 그를 감사하게 생각했지만 이성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럴 만한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고 당연히 기혼자라고 생각했다.
진희는 그가 몸가짐이 단정하고 매사에 철저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초창기 전교조 활동으로 사립학교 이사장에게 압박을 받자 스스로 사표를 내고 출판사를 차렸다. 그리고 몇 년 후 진희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그는 선배 작가의 소개로 그녀를 소개받아 책을 출판하면서 그녀를 자주 보게 되었다. 그가 본 진희는 진솔하고 밝은 여자였다. 화장하지 않은 깨끗한 얼굴은 자주 볼수록 더욱 귀엽고 예뻤다.
선배에게 그녀가 미혼모라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보기보다 그녀가 이성적이고 당차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녀에게 조금씩 호감이 생겼다. 진희의 책은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지만 제법 인기가 있어 적자를 내지 않았다.
유명 문학지를 통해 데뷔한 인정받은 작가의 수준을 지킬 수 있었다.
여성들의 인식이 깨어가면서 그녀의 책에 공감하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미혼모와 동성애를 옛날처럼 금기시하는 인식을 깨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인터뷰하는 방송과 잡지가 생기면서 진희의 인지도가 높아지자 책은 재판을 찍게 되었다.
김 교수는 두 번째 진희의 책을 읽었다.
진희는 그에게 아픈 가시처럼 존재했다. 아내 외에 취한 여자는 그녀가 유일했다.
비열한 그를 비추는 거울처럼 그녀가 두렵지만 몹시 그리웠다. 소유할 수 없는 어린 여자여서 더더욱 그리웠다. 또한 자신이 잉태시킨 한 생명을 돌처럼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했다. 그녀를 사랑해서 충동적으로 한 행위였지만 아비라고 나설 수 없는 비굴함을 안겨준 그녀의 당돌함이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책감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무겁게 가라앉으며 침잠했다.
딸을 보고 싶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보상하고 싶었지만 진희가 거절하는 한 방법이 없었다.
그가 이혼하지 않는 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아니 진희는 그조차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기에 막막한 무력감이 가슴을 짓누르곤 했다.
그녀는 꺾으면 안 되는 한 떨기 꽃처럼 그에게서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속물스러운 자신을 확인시킨 그녀를 가슴에 묻고 일상의 수레바퀴를 여전히 굴리며 존재했다. 사회적 강자가 약자를 짓밟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결과는 그가 약자처럼 괴로워하고 그녀는 강자가 되어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구나! 그가 그동안 쌓아온 명예나 자부심은 모래성처럼 부서져내리며 그의 양심을 괴롭혔다.
그는 진희의 책을 출판한 출판사에 자신의 논문집을 의뢰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그녀와 연결되는 실 날 같은 무엇이라도 필요했다. 그들에게서 잊혀지는 존재인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에게 향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거둘 수 없는 그는 자연스레 그곳을 향해 갔다.
진희가 공휴일이라 모처럼 하나의 손을 잡고 출판사를 간 날, 기훈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사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네가 하나구나! 엄마 닮아서 예쁘네. 오늘 아저씨가 맛있는 점심 사줄게 잠깐만 기다려.”
그들이 재판할 책 표지의 수정 보완할 내용을 상의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하나는 얌전히 앉아 주위를 살피며 엄마를 기다렸다.
박교수가 논문집을 들고 출판사를 찾아왔다.
그들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할 때였다.
기훈은 그와 악수하며 논문집을 건넸다.
“지금 점심 먹으러 나가려고 했는데 함께 가실래요?”
김교수는 진희를 보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상상했던 딸 하나를 본 그는 심장이 멎는 듯 충격을 받았다.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면 기적은 일어나는가!
얼마나 그리웠던 모녀인가! 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진희는 순간 너무 놀랬지만 정신을 차리고 박교수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딸에게도 인사를 시켰다.
“하나야. 인사해. 엄마 대학교 다닐 때 가르쳐주셨던 교수님이셔.”
하나는 얌전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웃었다.
박교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하나의 작은 손을 잡고 악수했다.
그들은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갔다.
진희는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으려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아, 이렇게 하나와 함께 그를 만날 줄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그녀의 삶에서 지워버린 사람이었지만 딸 하나에게는 아빠인 것이 분명했다.
진희는 그의 얼굴에서 일어나던 감정의 동요를 분명히 보았다.
김교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화장실에 가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쓸쓸한 얼굴을 보았다.
그의 가족에게서도, 진희와 딸에게서도 한없이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서글픔이 솟구쳤다. 눈물 젖은 그 얼굴은 허망한 세월의 흔적이 역력히 느껴졌다.
그들은 어떤 사이일까? 업무적인 것 이상의 친밀한 사이일까?
그들을 한 번 본 것으로는 알 수 없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딸 하나는 또 하나의 십자가를 그의 가슴에 꽂았다.
그의 도움 하나 없이도 밝고 건강하게 딸을 키운 진희가 놀랍기만 했다.
그는 카운터에 가서 식사비를 계산하고 태연한 척 자리에 와 앉았다.
김교수는 그들과 헤어지고 그들은 하나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김교수는 몇 걸음 가다 돌아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각각 하나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다정한 가족처럼 보였다. 그들이 가게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는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진희는 당황했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들을 하며 기훈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선생님 자녀는 몇이예요?”
“자녀요? 아직 결혼도 못했어요.”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진희의 생각과 달리 기훈은 혼자 사는, 진희보다 아홉 살 위인 미혼이었다.
진희가 보아온 그는 매사에 분명하고 깔끔하게 일 처리를 하는 잘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혼자 사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하다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쓸쓸하다거나 그런 감상적인 기분이 스며들면 대신 내놓아야 하는 자유로움을 생각했다.
늘 분주한 생활에 만족하며 어느새 삼십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그의 눈에 비친 어린 하나가 사랑스럽게 느껴진 것은 하나 자체의 귀여움도 있었지만 그가 진희에게 느끼는 호감 때문이었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그의 여동생이 낳은 조카 둘을 생각하며 피식 웃음이 났다. 그들과 만나면 온통 정신이 없을 만큼 성가셨기 때문이었다. 사내애들과 여자애의 차이인가 생각했다.
새까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기를 바라보던 하나는 웃을 때 양쪽 볼에 살짝 볼우물이 생기며 여간 귀엽지 않았다.
“아저씨는 뭐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거? 많지. 책도 좋아하고 엄마나 하나처럼 착한 사람도 좋아하구...”
“아저씬 어릴 때 무슨 놀이 했어요?”
“어릴 때? 연날리기도 좋아하고 스케이트 타는 것도 좋아했어.”
“아저씬 겨울을 좋아하나 봐요. 난 봄이 좋아요. 꽃이 많이 피어서요”
낯을 가리지 않고 해맑게 이것저것 물어오던 아이에게 일어나던 애정은 측은지심으로 마음을 짠하게 하였다. 그들을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곤히 잠든 하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희는 눈시울이 젖었다. ‘미안해. 하나야, 오늘 본 교수님이 네 아빠야.’
눈물 그렁한 눈으로 하나의 손을 꼭 쥐던 박교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마음에 일어났을 슬픔의 격랑이 전해졌다. ‘미안해요. 다시는 우리 만나지 말아요.’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진희씨, 일 아니고... 생일 축하해주려고요.”
기훈이 공적이 아닌 일로 전화를 건 건 처음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린 것도 처음이었다.
진희는 예상치 못했던 그의 데이트 신청에 마음이 설레면서 새삼스럽게 그에 대해서 기억을 되돌리며 생각했다. 그들은 불장난할 나이도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나가 우린 왜 아빠가 없냐고 물었을 때 아빠는 교통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거짓말하고는 처음으로 하나에게 아빠가 되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도 보호자 겸 친구가 되어줄 남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외삼촌과 숙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혼자 남을 일도 싫었다.
기훈과 일을 하면서 본 지는 일 년이 지났다.
가슴 뛰는 이성으로 그를 본 적은 없었지만 호감이 가는 좋은 사람이었다. 일 처리가 정확하고 잔소리가 없어서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 편견을 갖지 않고 딸 하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어서 감사했다.
그를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 보았다.
건강하고 지적인 그에게서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신뢰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문제였지만 그건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기대했다 실망하기보다는 아예 기대하지 않고 마음 편히 가볍게 만나보자 생각했다. 앞으로 천천히 저절로 알아가게 될 것이다.
김교수를 존경하며 가까이 했다가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믿을 사람이 없었다.
외삼촌을 제외하고는 남자를 믿을 수 없구나 생각했었다.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여리고 깨인 의식을 지닌 진희를 여러 차례 만나면서 간혹 안아주고 싶은 본능이 일어나곤 했었다. 귀여운 하나도 함께 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모녀의 보호자가 되어 함께 살아보고 싶었다. 자신부터 정의롭고 헌신적인 삶을 실천해보고 싶었다.
자신 외에 타인을 사랑하는 삶이 쉽지 않은 어렵고 힘든 일일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건 어떤 것으로든 내 것을 내놓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다 가는 이기적인 삶이라면 그만큼 의미도 빈약한 일이다.
삶은 서로 사랑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동안 다른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았던 감정이, 그들에게는 자신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서류에서 진희의 생년월일을 보았다. 그녀에게 생일 선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들은 야외로 나가 저녁 식사를 하고 산책로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훈의 부모님은 지방에서 수의사인 막내아들과 살면서 과수 농장을 운영했다. 늘 일손이 바빠 고생하신다며 언젠가 더 연로해지시면 자신이 모시고 살 거라고 말했다.
진희가 좋은 외삼촌 내외의 보호를 받으며 산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도 그들의 집에서 함께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놓였다.
커피솝에 들려 차를 주문하고 기훈은 선물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낼 생일이지요. 선물이예요. 맘에 드는지 열어봐요.”
진희는 그가 내민 선물을 열어보았다. 고급스러운 신형노트북이었다.
진희는 예상치 못한 그의 선물에 놀라고 기뻤지만 미안스러웠다.
오빠 준성이 주고 간 오래된 컴퓨터로도 글 쓰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속도가 더디고 휴대할 수 없어 노트북을 하나 장만하고 싶었던 차였다.
그는 그녀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하였다.
“고마워요. 선물이 너무 과분해요.”
“좋은 글 더 많이 쓰라구요.”
기훈은 환하게 웃는 진희의 귀여운 얼굴이 발그레 상기된 것을 보며 기뻤다.
“저, 진희씨만 좋다면 저와 결혼할래요?”
사실 그 말은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하려고 생각했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
진희는 다시 한번 깜짝 놀라 말문이 막힌 듯 웃음을 거두고 잠시 그를 응시했다.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놀랬어요? 천천히 생각해 봐요. 제 마음은 그래요. 하나에게도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그는 노트북 위에 놓여진 진희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며 진희의 가슴 가득 온기가 번져갔다.
진희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생각해 볼게요.”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요. 그럼 일하는데 힘들어요.”
진희가 그의 차를 타고 벨트를 매느라 고개를 돌리는 순간 기훈이 빠르게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입 맞추었다.
순간 생전 처음 맛보는 강렬한 전율이 진희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기훈도 생전 처음 해보는 자신의 대담한 행동에 놀랐지만 자신을 거절하지 않은 그녀에게 안도하며 입술에 남은 달콤함을 신기하게 느꼈다.
진희 역시 가볍게 몸을 떨며 이 강력한 끌림이 신기하기만 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 순간 설마 꿈은 아니겠지 생각했다.
기훈이 라디오 스위치를 누르자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흘러나오며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을 감싸주었다.
그와 인사하고 집에 들어오는 진희의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오랫동안 단단히 두르고 있던 어두운 장막을 확 열어젖히는 듯 찬란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하나의 방문을 열고 잠든 딸의 얼굴에 가만히 자신의 빰을 대었다.
울컥하며 눈물이 솟았다. 그동안 참았던 감정들이 터지듯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
아빠 없는 딸에게 느꼈던 죄스러움이 서럽게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다.
좋아해도 되는 이성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구나!
그녀는 이 황홀한 느낌을 좀 더 간직하고 싶어서, 아니 말하는 순간 사라져 버릴까 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하루, 이틀, 사흘을 침묵했다.
다만 하나를 여느 때보다 더 자주 꼭 껴안고 볼에 입 맞추었다.
혼자 헤쳐 나가야 했던 삶의 중압감이 갑자기 사라지며 행복감이 차올랐다.
진희는 경주에게 전화했다.
가장 친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친구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좋은 일이야. 네가 점점 내게서는 멀어지겠지만, 후후.”
반가운 목소리로 말하는 경주는 한편으로 쓸쓸해지는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녀가 남성에게 맘이 가지 않는 일처럼 불가항력이었으므로 진희의 행운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다.
“너와의 우정에는 변함없어. 걱정하지 마. 조만간 우리 함께 식사하자.”
그리고 진희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라던 그의 부탁대로 숙모에게 이야기했다. 은경은 너무 기뻐서 진희를 와락 껴안았다.
활짝 피어보지도 못하고 엄마가 되어 갇혀버린 진희를 늘 짠하게 바라보았던 그녀는 마치 자신이 지고 있던 멍에를 벗어던진 듯 가벼워진 마음으로 진희의 행복을 빌었다. 젊고 총명한 진희가 남자를 만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딸 하나까지 품어줄 사랑이 넉넉한 남자를 만나는 일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상견례 날짜를 잡았다.
진희는 번잡함이 싫어서 외숙모 내외와 준성, 경주만 초대했다.
준성은 마침 출장이어서 따로 날을 잡아 보자 하였다.
진희는 상견례가 끝나고 결혼 날짜를 잡은 후에야 엄마에게 알렸다.
이미 딸에게 실망한 엄마는 알았다고만 짧게 대답했다.
기훈의 부모는 혼기가 늦은 기훈이 아예 결혼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다가 들은 소식이라 무조건 기뻐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딸이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남의 낳은 딸을 키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란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말했다.
“아들을 믿으면 되는 일이야. 기훈이가 그런 결정을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생판 모르는 사람 애를 입양도 하는데... 얼마나 맘에 드는 여자면 그러겠어.”
그들은 상견례 전 집에 찾아간 진희와 하나를 만나보고는 만족해하였다.
진희는 진심으로 부보님께 말했다.
“제가 여러 가지로 부모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죄송해요. 성심껏 부모님과 기훈씨를 사랑하겠습니다.”
그들은 진희의 공손하고 진솔한 모습이 맘에 들었으며 밝고 예쁜 하나가 인사할 때 이미 아빠 없는 아이를 측은히 여기며 마음을 열었다.
기훈의 여동생과 그녀의 어린 두 아들도 그들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하나보다 두 살이 많고, 또 한 살 어린 손주들은 부산스럽던 여느 때와 달리 얌전히 하나와 어울렸다. 기훈의 가족 모두 한나절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즐거움을 나누었다.
아이들은 과수원을 뛰어다니며, 동물들을 구경하며 소리치며 즐거워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그들이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모두 돌아가고 나서 기훈의 부모님은 말했다.
“기훈이 녀석이 늦장 부리더니 마누라에 딸까지 얻었어.”
“그러게요. 처자가 모두 예쁘고 귀엽긴 하네요.”
자라면서 한 번도 부모님을 걱정하게 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아서 잘해온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따라서 무조건 아들을 믿고 지지해준 부모님이었다.
진희는 시부모님이 될 두 분의 인자한 언행으로 조심스럽게 긴장했던 마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편안해졌다.
가족관계란 얼마나 소중하고 또 상처받기 쉬운 것이던가.
이런 좋은 분들이라면 앞으로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들은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기훈이 거주하는 27평 오피스텔로 진희가 이사했다. 기훈이 서재로 쓰던 방을 하나에게 내주었다.
수많은 책보다 사랑스러운 생명 하나가 그에게 훨씬 가치 있었다.
미련 없이 오래된 책들을 모두 내놓았다.
진희는 그중에 꼭 읽고 싶은 책 몇 권을 골랐다.
진희 역시 하나와 자신의 물건 중에서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것만 챙겨와서 짐이 별반 없었지만 그래도 버리기 아까운 책들이 많이 있었다.
그녀는 기훈의 많은 책들을 은경에게 모두 주었다. 그 책은 화물차에 실려 은경이 살고있는 집으로 운반되었다.
은경은 기뻐하며 소리쳤다.
“와! 우리 집 서재 굉장하네. 완전 도서관이야. 진희야 고마워. 언제든 필요하면 와서 다시 가져가.”
은경은 진희의 간략한 설명을 들으며 책을 한 권 꺼내 손에 들었다.
‘헤르만 헤세의 인도여행’이었다.
그녀는 이 많은 책을 모두 읽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잔정한 지성인이 된 듯 기분이 좋았다. 원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형규 역시 기훈이 가져온 책들 중 먼저 읽고 싶은 철학책 몇 권을 빼놓으며 감사함을 전했다.
그들은 종류별로 책을 분리해 꽂으며 마음은 이미 부자가 되었다.
진희는 자료가 필요하면 언제든 와서 가져갈 수 있어서 마음이 흡족했다.
기훈은 늘 비어있던 집에 들어가던 일상에서 두 사람이 반겨주는 따뜻한 집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에 행복했다.
나 하나만을 관리하면 되던 삶에서 다른 두 사람을 사랑하며 책임져주어야 하는 부담을 기꺼이 받아들인 삶은 예전보다 좀 더 확장된 기쁨과 함께 만족스러웠다.
그는 사랑은 아무리 주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고귀하고 즐거운 것이라고 믿었다.
34. 김정기
정기가 다시 붓을 잡고 몇 년간 쉴 새 없이 그린 그림들을 전시하기 위해 가족들이 힘을 합쳤다.
정민이 앞장서서 기획하고 준성이 맘에 드는 그림을 세 점 우선 매매하여 금액을 치루었다. 작은 크기의 한 점은 집에 걸고, 큰 크기의 두 점은 회사 사무실에 걸 생각이었다. 이미 팔린 그림에는 자랑스럽게 빨간 표시를 달았다.
진희의 남편 기훈은 도록을 인쇄했다.
정민은 아버지의 목숨을 살린 정기에게 큰 빚을 진 듯 나서서 그를 돕기 위해 힘썼다. 정기는 유명 미대를 나온 데다 전국미술대회 상 받은 경력이 있는 만큼 인지도가 높았다. 정민이 찾아가 의뢰한 정기의 지도교수였던 대선배 화가의 호평이 유명 예술잡지에 실리면서 그의 미담까지 전해지자 개인전은 성황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소재로 한 그의 그림은 예전에 비해 한층 밝고 인상적이었다. 단순 명료하고 화려한 색감은 세련된 조화로움과 함께 강한 아름다움을 분출했다. 그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조차 신비감을 더하였다.
조용히 앉아 있거나 일어나 손님을 받는 그를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가 있었다.
개인전을 여는 내내 매일 오전에 그의 그림을 보러오는 이였다.
마지막 날 그녀가 명함과 함께 메모지를 내밀었다.
모던아트 예술잡지에 근무하는 큐레이터 서미경.
“그림을 한 점 사고 싶어요. 저 그림 속 인물은 누구인가요?.”
“제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그가 내민 답이 쓰인 글을 보고 전체적으로 해맑은 소녀 같은 인상을 풍기는 그림을 다시 보았다.
예쁘게 번져가는 꽃 무리 가운데 반쯤 드러난 단아한 여인. 의외로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제목은 ‘사랑’이었다.
대답은 의외였다. 그의 애인은 아니라니 다행이라는 듯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기는 그 그림을 어머니께 선물하려고 그렸다. 어머니의 사랑에 단 한 번도 보답하지 못한 자식의 모자람을 그림으로 대신하고 싶었다.
그를 무한히 사랑한 어머니를 생각하며 더 좋은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그 제목을 보고 당연히 그의 애인을 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그림은 팔지 않는다는 그의 쪽지를 읽고는 그의 자화상 시리즈 중 한 점을 골랐다. 한없이 메아리쳐 공명해가는 소리에 묻히는 그의 모습이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있었다. 반 구상화인 그림의 전체적인 색은 어둠에서 점차 싱그러운 푸르름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유명 화가 샤갈이 떠올랐다. 그의 자유분망한 상상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연락처와 함께 계좌번호를 물었다.
그녀는 예전에 그가 동창과의 불미스러운 일로 곤욕을 치루었던 일을 알고 있었다. 그를 고발했던 그녀의 선배를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일로 졸업생뿐만 아니라 후배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파다했었다.
그때 그녀는 신입생이라 정기를 알지 못했지만 졸업 작품전에는 갔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인상 깊게 보았었다. 나중에 들으니 정기가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리고 곧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은 잊혀졌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유명화가인 지도교수가 실은 호평을 보고 그의 첫 개인전을 호기심에 달려와 보았다.
그의 그림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가 전도유망한 화가가 되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그녀도 미대에 입학할 때는 화가를 꿈꾸었다. 그러나 특출난 예술성이 부족함을 자각하고 큐레이터로 방향을 바꾸고 미술 잡지에 취업했다.
그녀는 그를 이 달의 신인 작가로 선정해 작품을 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를 취재하면서 필담을 나누는 동안 미경은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의 예민하고 섬세한, 그러나 적당히 무심한 언행은 미경의 관심을 끌었다.
때론 소심한 듯 불안해 보이면서도 한편 매사에 태평한 듯 무관심을 보였다.
“이성에게는 관심 없나요?”
정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 생각하지 않고 살은지 오래되었다.
성추행 사건이 있은 후 그는 여자가 두려워졌다.
세상에 어머니 같은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인간들이 두려웠다. 그동안 좋은 사람들 속에서 철없이 살아온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몸서리쳐졌다.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부모님의 도움으로 견디어낸 시간은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아니 그건 어쩌면 그가 다시 죽고 싶은 마음을 담은 시도였다. 그러나 살아나 건강을 되찾았고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그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정기는 이제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지금 만족했다. 맘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 속에 있는 것이 감사했다. 출세하고 싶은 마음도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저 잘 존재하고 있는 지금 이 무탈함이 그를 점차 안정시켜갔다.
미영 또한 두 번 연애를 해보았지만, 이해타산이 앞서고 지속되지 않았다.
어머니 세대는 자식을 다 낳았을 나이 서른이 훌쩍 지나 중반에 이르렀다.
일하느라 바쁜 하루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가지만 무언지 모를 초조함과 허전한 쓸쓸함이 침대에 누울 때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자로 태어난 정체성을 무시하고 이렇게 살다 죽어도 좋은 일일까 회의가 들었다. 늙어서 후회하지는 않을까? 자식을 낳아 키우는 일은 숭고한 일임에 분명하다.
나의 분신을 사랑하며 사는 일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무조건의 헌신과 희생으로 이루어진다는 양육을 마다하고 사는 건 잘하는 일일까? 인류가 대대손손 이어온 일을 마다할 만큼 나 자신에게 보람 있는 삶을 살고 있을까? 그녀는 요즘 들어 생각해 보곤 했다.
서른 남짓 될 때까지 성화하던 어머니는 그녀가 독립한 이후로는 지쳤는지 ‘그래 네 인생 네가 알아서 살아라.’ 하시고는 참견하지 않았다.
미영은 정기에게 호기심으로 생겨난 관심이 그의 그림에 대한 감동으로 이어지면서 그에게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어찌해야 할까? 그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그가 말을 하지 못하는 건 상관없었다.
인간들은 쓸데없는 말들을 너무 많이 하여 사람을 지치게 한다. 차라리 말 없음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 그녀가 하는 말은 다 들을 수 있고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간략하게 적어 보이니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고 두 사람 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이다.
제 밥벌이는 각자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는 이번 전시회를 잘 마치고 그림을 대부분 다 팔았다. 그의 그림은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다. 그는 그림밖에는 모르는 사람이다.
그녀는 아이 하나 정도는 키울 자신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좋아라 딸의 육아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의 사진은 잘 나왔다. 파레트를 든 채 약간 비껴 앉은 그의 이목구비는 지성적으로 보였다. 적당히 헝크러진 머리와 흰 목면 셔츠는 자연스러워 보였다. 진회색 바지, 맨발에 신은 가죽 슬리퍼, 좀 어두운 그의 화실은 그를 돋보이게 하였다. 그의 등 뒤로 환한 색채의 자화상이 보였다.
미경은 그를 사진 촬영하러 간 이후에도 몇 번 더 찾아갔다.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는 말없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예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도 말없이 그를 한참 바라보다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점점 그에게 다가갔다.
누가 왔는지도 모른 채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은경이 점심 먹으러 오지 않는 아들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왔다가 그들을 보았다.
열린 문밖에 서서 망설이고 있을 때 미경이 그녀를 보고는 얼른 인사를 하였다.
은경은 저녁 식사하면서 그녀가 누군지 물었다.
정기는 잡지를 가져와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녀의 이름을 가리켰다.
은경은 아들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그녀가 그와 잘 되길 내심 기대했다.
왠지 그녀에게서 사무적인 일 이상의 따스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은경도 그녀가 정기적으로 보내는 모던아트 잡지를 남편과 함께 흥미롭게 보았다.
미경은 정기와 전화를 나누는 대신 인터넷 메일을 통해 소통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정기는 그녀의 메일을 읽으며 활짝 웃었다.
그녀가 솔직하게 던진 소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당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내가 대신 해주고 싶어요. 당신의 건강한 정자 하나 내게 줄 수 있나요?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데 함께 하지 않을래요?’
정기는 자기 하나 책임지고 살기도 자신이 없는데, 처자를 지닌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조카 하나와 함께 살면서 어린 생명의 소중함과 함께 많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미경의 프로포즈가 놀라우면서도 자신을 신뢰하는 그녀에게 고마웠다.
하지만 그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거절했다.
‘나 하나의 삶도 책임질 위인이 못 되어요. 그림 그리는 일 외에 능력이 없는 내가 어떻게 아빠가 될 수 있겠어요.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요.’
그러나 미경은 다시 말했다.
‘당신이 책임지라는 게 아니예요. 내가 책임질 거예요. 그러나 혼자서는 아이를 만들 수 없잖아요. 서류상 아빠가 되어주면 되는 일이예요. 당신은 계속 그림을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으면 그것도 좋아요. 그냥 나와 손잡고 함께 걸어가요. 당신을 힘들게 하지 않을게요. 아니 당신의 좋은 친구가 되어 도와줄게요.’
정기는 착한 그녀에게 또다시 거절하기 어려웠다.
아니 행운처럼 다가온 그녀에게 일어나는 기쁜 감정을 속이기 싫었다.
정기는 부모님께 그 사실을 간단하게 써서 알렸다.
은경은 반색하며 정기의 손을 잡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형규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기야, 인생에는 몇 번의 기회라는 게 찾아와. 지금이 바로 네가 잡아야 하는 기회인 것 같구나. 우리도 도와줄 테니 그 애 말대로 해.”
정기는 자신을 돌보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했다. 부모로서는 자식이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바라는 일일 것이다.
아이를 낳다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미경을 믿어 보고 싶었다. 어머니 말대로 다시는 오지 않을 행운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 외의 가족을 책임져야 마땅할 일을 벌이는 것은 두려웠다.
며칠째 답이 없는 정기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한 미경은 잠자코 기다렸다.
미경도 자신의 용기에 내심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기대 반, 체념 반 마음을 내려놓았다. 마음이 가는 사람이 생긴 것만도 다행한 일이었다.
그와 애인이 아닌 친구로 살아가도 좋은 일이었다.
그녀 역시 결혼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의 동생은 죽고 못 살 것처럼 열애하고 결혼했지만 몇 년 안 가 시들해져서 결혼하지 않은 그녀를 부러워하곤 했다.
사실 아이도 간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 생명은 크나큰 대가를 치루어야 얻을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가, 어머니가 그랬듯이 그녀도 엄마가 되어보고 싶었다.
힘들겠지만 도전해보고 싶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후회할지라도 시도는 해보고 싶었다. 안 가본 길은 그 어느 쪽이든 아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미경은 십여 년 착실히 직장에 다니며 모은 돈에 부모님이 도와주셔서 작은 아파트를 장만하였다. 학창 시절부터 부모님이 들어준 청약통장은 유용하게 쓰였다.
결혼하지 않는 딸에게 부모님은 유산을 미리 증여하였다.
그녀는 앞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정기가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해도 아이 하나는 키우며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남편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자유가 보장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경이 한 달을 기다리다 정기를 찾아온 날,
그들은 눈이 마주치자 벼락같이 정사를 치루었다.
정기는 망설이며 미루어놓았던, 그러나 그리웠던 미경에게 몸으로 응답하였다.
정기는 그동안 묻어두었던 정욕에 불을 붙인 미경에게 깊이 빠져들면서 심신의 완벽한 이완을 맛보았다.
그는 거의 매일 밤 그녀를 찾아갔다.
미경은 두 달째 생리를 거르자 임신 테스트를 해보았다. 임신이었다.
병원에 함께 가서 정확한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구청에 들려 혼인신고를 했다. 그들은 그날 밤 샴페인을 터뜨리며 기쁨을 나누었다.
이제야말로 온전한 성인으로서 그들의 삶이 시작되었다.
정기는 미경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엄마 은경처럼 부드럽고 강인했다.
세상의 관습에 맹종하거나 그릇된 편견 같은 건 그녀에게 없었다.
그들은 양쪽 부모님, 형제들을 모시고 야외 가든 음식점에서 결혼과 임신을 축하하는 피로연을 열었다.
검은 정장을 빼입은 정기의 모습은 배우 못지않게 한 인물하였다.
그의 얼굴에는 싱글벙글 웃음이 가득했다.
정갈한 흰 원피스를 입고 자잘한 꽃으로 장식한 머리, 옅은 화장을 한 미경은 화사하고 귀티가 났다. 선남선녀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울며 겨자 먹기로 딸의 행복을 축복할 수밖에 없었다.
은경과 형규는 사돈어른에게 깊이 머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은 변함없이 각자의 거처에서 계속되었다.
정기는 그녀에게 불쑥 찾아가기도 하였지만 임신한 미경을 피곤하게 하지 않으려고 주말마다 가기로 한 후 그리움을 참았다. 만날 때마다 애틋함이 그들을 뜨겁게 휘감았다.
그녀가 임신 구 개월에 이르면서 휴직계를 내고 친정에서 돌봄을 받았다.
정기는 아예 작업을 쉬다시피 하고 아내에게 오가며 정성을 다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말못하는 사위가 불만이었지만 그가 딸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서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다.
함께 살던 진희와 하나가 떠나자 휑하니 빈집처럼 쓸쓸했는데 오래지 않아 이어진 정기와 미경의 웃음소리는 은경이 예상치 못했던 기쁨이기에 더욱 감사했다.
늘 걱정이 되었던 마음 아픈 아들 정기, 혼인에 이어 임신까지 한 그들을 사랑스러움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은경은 이제 마음이 놓였다. 며느리는 부족한 아들을 사랑해 줄 수 있는 후덕하고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35. 정민의 아내
정민과 민주가 결혼한 지 삼 년이 지났지만 임신이 되지 않았다.
신혼의 단꿈을 즐기면서도 민주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건 아닌지 초조해졌다.
정민은 자주 서재에서 책을 보다 잠들었다. 그녀가 청해야만 곁에 와 누웠다. 그녀의 애무를 받고 그가 흥분하는 일은 점점 뜸해져 갔다. 그는 지치는 듯 쉽게 잠들곤 했다. 그에게 성생활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민주는 사랑하는 그의 아이를 빨리 낳고 싶었다. 학문에 몰두하는 남편 대신 그의 분신인 아이를 마음껏 사랑하고 싶었다.
그녀는 임신하려고 여러 가지 정보들을 찾아보며 노력하였다. 임신이 잘 되는 배란주기를 연구하며 그날은 꼭 동침하였다.
그리고 기다리던 임신이 되었을 때 그녀는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안겼다. 그도 웃으며 축하했다. 그는 아내의 간절한 바램을 지켜보며 그녀가 괜한 걱정을 지나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설사 자식이 없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세상을 잘 살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리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공부할수록 깨닫고 있었다. 모든 일을 순리대로 살다 사라지는 인간의 숙명을 또 자식을 낳아 굳이 넘기고 싶은 욕망이 일지 않았다. 그에게 자식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민주의 바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삼 개월 만에 자연유산이 되자 민주는 아이처럼 울었다.
정민은 민주를 달래기 위해 시간을 내어 호텔 레스토랑에 데려가 저녁을 사주며 위로했다.
“민주야, 세상일은 모두 우리 뜻대로 되는 게 아니야. 아직 당신은 또 임신할 수 있으니 슬퍼하지 마. 나는 당신만 있으면 돼. 정 안 되면 입양해도 되잖아.”
“싫어. 난 당신 아이를 낳고 싶어. 우리 둘이 사랑해서 낳은 아이여야 해.”
“아니여도 괜찮아. 입양은 자기애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야.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훌륭한 일이잖아. 우리처럼 많이 배운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야.”
그는 자신이 시험관 아기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민주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고모가 무심코 던진 말을 듣고 알았다.
“너희 둘은 한 시험관에서 태어났는데, 왜 그렇게 하는 짓이 다른지 모르겠네.”
정민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놓치지 않고 되물었다.
고모는 몰라도 된다고 말했지만 정민은 그날 저녁 엄마에게 가서 다시 물었다.
“엄마, 고모가, 우리가 시험관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은경은 시누이가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생각하며 사실대로 설명해주었다.
아직 성교육을 받지 않은 어린 정민이 체외수정의 의미를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엄마가 열 달을 품고 있다 죽을 만큼 힘들게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안심했다.
정민은 다음날로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시험관 아기에 대해서 자세히 찾아보았다.
그리고 예민한 정기에게는 지금까지도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정기는 그 사실을 지금도 모를 것이다. 정민은 엄마가 고생 많이 했구나 생각했다.
자신은 그렇게까지 자식을 낳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단 한 번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누구한테도 하지 않고 의연하게 살았지만 그는 힘들어도 참고 버티며 오늘에 이르렀다.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버려지는 수많은 생명들, 지금도 해외로 입양되는 아이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자식을 키워야 한다면 그들 중 하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었다.
부모는 자식을 내 것으로 소유하는 게 아니라 한 인간으로 제대로 뿌리 내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아주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자신과 정기를 사랑으로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늘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것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정기가 좋은 배우자를 만나 아기까지 낳았으니 그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정민이 또 다른 생명을 책임지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민주는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일을 정민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민주는 정기 부부가 낳은 아기를 보고 와서는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그녀는 내 자식이 아니라면 아기 키우는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민에게 시험관 아기를 해보자 하였다. 정민은 부드럽게 반박했다.
“좀 더 기다리면서 생기면 낳고, 만약 안 생기면 입양하자. 시험관 아기는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까지 해서 자식을 낳고 싶지 않아.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일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마.”
민주는 정민의 고집을 잘 알고 있어서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그 일로 그와 반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바쁘게 시간은 흘러갔다.
민주의 좌절은 행복한 생활에 균열을 초래했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정민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시댁에 갈 때마다 정기의 아내가 안고 있는 아기가 정말 부럽고 왠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말없이 침묵했다.
은경은 생활비를 꼬박꼬박 보내주는 고마운 며느리의 침묵이 불편하여 가장 먼저 그녀를 챙기면서 신경 썼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 은경이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민주가 기분이 좀 가라앉아 보이던데 무엇 때문일까? 아기 때문일까요?”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 정민인 괜찮아 보이던데...”
“세상일은 참 알 수 없어요. 정기가 미경이 같이 좋은 아내를 얻을 줄은 몰랐어요. 건강한 아기까지 낳고 얼마나 감사한지... 정말 기뻐요”
“아비를 살렸으니 복 받은 거지.”
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미경이도 시험관 아기를 해보면 좋을 텐데...”
“그들의 일은 그들이 알아서 하도록 놔둡시다. 우리보다 똑똑한 애들이니 알아서 하겠지. 괜히 우리까지 나서면 더 부담줄 수 있어.”
은경은 남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기가 낳은 손주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는 일이었다. 정민은 한 번도 부모를 심려케 한 적이 없는 바람직한 아들이었다. 늘 그가 믿음직스럽고 대견하여 자랑스러웠다. 그에게 아기가 생기면 둘 다 교육자이니 얼마나 잘 키울까 아쉽기는 했지만 정민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축복이었다. 그녀는 더 바라는 건 욕심처럼 느껴져 다 가질 수는 없는 일이구나 생각했다.
민주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방학을 맞아 시험관 아기를 시도하기 위해 산부인과에 갔다. 그 절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예약하고 와서는 다시 정민을 졸랐다. 정민 역시 그녀를 설득했다.
“자식은 당신의 욕망이나 소유욕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당신은 자식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리며 살면 되는 일을 왜 고생을 자처하면서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 남이 한다고 다 따라 해서 행복해진다면 세상에 행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야. 주어진 상황 속에서 좀 더 바람직한 삶을 꾸려나가는 지혜가 필요한 게 삶이지.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자식을 낳아도 행복할 수 없는 일이야. 그때는 또 다른 욕망을 품을 테니까. 난 당신하고만 살아도 괜찮은데, 당신은 나만으로는 부족한가 봐.”
“그렇지 않아. 난 당신을 사랑해. 그래서 당신의 아이를 꼭 낳고 싶은 거야. 제발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줘.”
그는 여자가 아니니,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꼭 낳고 싶다는 심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더 이상 그와 대화하지 않고 일을 추진하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산부인과를 다니면서 난자 채취를 하느라 고생했다.
피를 계속 뽑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나중에는 혈관이 다 숨어버려 간호원이 여기저기 주사바늘을 찌르다가 안 되어 의사가 직접 손등에서 혈액을 채취하였다. 팔 여기저기 커다랗게 시퍼런 보랏빛 멍이 들었다.
정민은 고집부리는 민주를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정자채취를 하러 들어간 병실에 놓여 있는 포르노 잡지를 바라보았다.
저런 사진들을 보고 성적 흥분을 느껴 사정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시도도 하지 않고 병실을 나왔다.
민주는 어이없어 그를 붙들고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민주는 좁은 병실 의자에 앉은 그의 바지 허리를 풀고 무릎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무릎 꿇고 앉아 그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하였다. 정민은 놀라서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민주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생전 처음 당하는 강렬한 자극에 곧 말려들어 그녀를 떼어내고 사정하였다. 민주는 재빨리 그의 정액을 채취하였다. 그리고 그를 포옹하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정민이 심호흡하며 바지를 제대로 입었다.
정민을 굴복시킨 그 강렬한 쾌감은 흥분한 육체처럼 유쾌하지는 않았다. 수치심까지 느껴졌다. 그녀가 아내임에도 그는 생전 처음 겪는 그 자극적인 행위가 진저리쳐졌다.
오후 내내 정민은 그녀의 생각지 않았던 행동이 떠오르면서 그녀를 새삼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전에 만났던 남자와 오럴섹스를 즐겼을 그녀가 상상되었다.
사랑의 의미를 육체적 행위보다 정신적 유대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그였는데, 민주의 과거를 떠올리는 자신이 싫었다.
정민은 그녀와 늘 정상 체위로 성행위를 하면서 만족했다. 한때 아내가 외도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녀를 사랑했다. 그런데 민주의 과감한 표현으로 잊었던 사실들이 그에게 밀려들었다. 불합리한 상상이지만 자꾸 생각나면서 민주가 낯선 타인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용서한 자신과는 모순되는 이 감정이 불편했다.
민주는 그에게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는 행위를 그는 민주에게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맞을까 회의가 일었다. 이런 갈등에 휘말린 그는 괴롭기까지 했다.
민주는 약간 부푸는 젖가슴과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젖꼭지를 만지면서 되었구나 생각해 내심 기뻐했다. 조심스럽게 보낸 한 달이었다. 이틀 후면 결과를 알 수 있었다.
개학하는 날이었다. 학교에 나가 근무하고 돌아온 저녁 팬티에 묻은 선명한 혈흔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망연자실하며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화장실에 주저앉았다.
그 간절한 희망이 좌절되는 낭패감과 함께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민주의 시험관 아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일을 시작하면서 각방을 쓰다시피 성생활을 멈추었는데 그 일 후로 정민은 그녀를 안지 않았다. 민주는 서운함을 감추고 겨울방학을 하면 2차 시도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당신 혼자 할 수는 없어. 이대로 살든지, 그게 정 싫으면 헤어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민주는 말문이 막힌 채 그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왜 그러는데? 도대체 왜 그래?”
“당신은 만족할 줄을 몰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감사하며 살지 않고 욕심이 과해.”
“사랑하는 부부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아주 평범한 일이야. 내가 무슨 욕심이 그렇게 과한 건데?”
“자연스럽게 살자. 억지로 쟁취하려고 하지 말고. 그 일 말고도 할 일은 많아.”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부모님을 생각했다.
언제나 정기로 힘들었던 시간이 떠올랐다.
부모님은 그들을 키우며 행복하셨는지 모르지만 정민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싫은 것도 참고 늘 정기를 도와주며 살았다. 부모님 맘 상하게 할까 봐 드러내 불평해본 적도 없었다. 형제라는 이유로 정기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장애자가 된 정기가 천만다행으로 이제 좋은 아내를 맞아 아빠가 되는 행운까지 누리게 되었다. 진정으로 그들에게 감사했다.
정민은 또 자식이라는 짐을 지고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내가 자식이 아닌 그녀 자체로 만족한 삶을 살기 바랬다.
정민은 감정에 치우치는 사랑보다는 이성을 중시하는 학문에 언제나 더 마음이 갔다.
그는 인간에게 필요 이상의 기대 같은 것을 품지 않는 합리적 이성주의자였다. 따라서 무조건 아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이 절대 될 수 없었다.
헤어지자는 말을 입에 담은 사실이 아내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아내에게 휘둘리는 삶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아내를 책임지고 살 수는 있지만 이제 그녀를 진정 사랑하는지는 자신이 없어졌다.
그는 돌아누워 훌쩍거리는 아내를 돌려 누이며 포옹했다.
“미안해. 잘못했어. 울지 마.”
한 마음일 수 없는 부부를 누가 ‘일심동체’라고 표현했을까?
민주는 그대로 살든지 헤어지든지 선택하라는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나를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하자 서러움이 몰려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어느새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닦았다. 코앞에 놓인 그의 몸과는 달리 그의 마음은 멀게만 느껴졌다.
36. 김준성
벨기에에서 거주하는 동창에게 노래를 함께 편곡하자는 청을 받고 벨기에로 간 미연은 다양한 노래 편곡에 밤낮없이 몰두하였다. 잠시 모든 일을 잊고 미친 듯이 바쁘게 일하면서 곡마다 들어오는 유로화를 모두 트렁크에 가득하게 담았다.
벨기에 사람들의 노래 사랑은 한국 사람 저리 가라 할 만큼 대단했다. 그녀는 자신이 편곡한 곡들이 수많은 장소에서 불리는 것을 보는 즐거움에 밤을 새우며 작업했다. 고국에서 있었던 일들은 멀찍이 밀어놓을 수 있었다. 차츰 그녀에게서 잊혀지기를 바랬다. 그녀는 사죄하듯 누구하고도 이성 교제를 하지 않았다.
준성이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지 삼 년이 지났다.
단 한 번도 카드 청구서는 날아오지 않았다. 그가 준 카드는 그녀에게 보낸 그의 마음이었을 뿐이었다.
준성은 계절이 바뀌면서 흠칫 지나치는 바람처럼 그녀를 떠올리곤 했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준성은 아이 아빠가 되어 새 생명의 성장을 보는 기쁨을 누렸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바빠졌다. 자신의 유전자를 받고 태어난 생명의 신비는 그를 벅찬 감동으로 채웠다. 이 모든 일이 기적처럼 느껴져 감사했다.
아내 연희는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돌보았다.
한 달만 도우미의 도움으로 산후조리를 한 그녀는 마치 직장 생활하듯 야무진 손끝으로 육아와 함께 자신의 몸 관리도 하였다. 하루 한 번은 아이를 업고 공원을 걸었다.
아침마다 간단한 식사와 함께 준성이 입어야 할 셔츠와 타이, 양말, 구두까지 챙겼다.
수고하라는 다정한 입맞춤 역시 빠지는 날이 없었다. 알뜰한 그녀의 보살핌을 받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준성은 연희에게 온 마음을 주지 못했던 게 미안했다. 그녀가 아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마음은 예전보다 훨씬 그녀에게 다가갔다. 성인이 된 후 그를 붙잡아준 건 미연이 아니라 연희였음을 알았다. 적어도 아들을 출산한 이후는 더욱 그랬다.
아버지로 인해 입었던 상처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지 못한 좌절은 그를 마치 진흙탕처럼 혼탁한 슬픔에 오랫동안 잠기게 했다. 그러나 그 진흙 속에서 피어난 한 떨기 연꽃처럼 연희는 해맑고 아름답게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아들을 안고 거울 앞에 선 그는 순간 어린 시절 자신을 안아주었던 아빠를 보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는 어디서 살고 있을까?
자식들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던 그의 얼음처럼 차가웠던 마음이 안고 있는 따스한 생명의 온기로 덥혀지고 있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꾹꾹 눌러왔던 서러움이 터지는 듯 준성은 아들을 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가엾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식을 보지 못하고 사는 그의 가슴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짐승도 제 자식을 돌보는데 하물며 인간인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가족을 잃은 아버지에게 측은지심이 일어났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소식은 듣지 못한 채 지냈다.
준성은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고향과 함께 할머니가 살아 계신지 물었다.
모른다고 딱 잡아떼는 어머니에게 실망하여 그는 외삼촌에게 물었다.
형규는 이제 제 자식을 낳고 아버지를 생각한 조카를 기특하게 생각하며 여동생에게 시어머니가 사시는 곳을 알려주라고 설득했다.
“김서방이 너와는 남이 되었지만 준성이에게는 아버지이다. 그러니 무정하게 굴지 말고 김서방 어머니가 사는 고향을 알려주어. 나중에 원망 듣지 말고...”
며칠 뒤 엄마에게서 연락을 받은 준성은 시골에 혼자 산다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그러나 집은 비어 폐가가 되었고 옆집에서 나오는 할머니가 말했다.
“댁은 뉘시오? 그 할머니는 오랫동안 자식을 그리워하다 작년 말에 돌아가셨는데...”
준성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계시는 그곳에도 다녀가지 않은 지 오래되어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자식을 찾지 않은 아버지가 어머니인들 찾아 보았겠는가!
준성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발길을 돌렸다.
어린 시절 그를 귀애한 아빠였다. 할머니께도 왔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그동안 삶이 편안치 않았을 거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어머니가 너그럽게 포용하고 기다렸다면 아버지는 돌아왔을까?
재혼한 어머니 또한 그리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준성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도 다행한 일이었다.
한 집안의 가장은 대들보 같아서 그가 무너지면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일이었다.
준성은 동생과 함께 운 좋게도 외숙모의 덕으로 이제껏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처럼 지켜야 한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시간이 강물처럼 쉬지 않고 흘러갔다.
어느 날 준성이 회사에서 기획한 연말 이벤트에 참석하기 위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갔다. 공연 프로그램 표지에는 ‘연출 및 기획 장미연’이 쓰여 있었다.
무심코 열어본 준성은 미연의 사진을 보고 그녀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이미 창작 뮤지컬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은 지 한참 되었다.
음악에 별반 관심이 없었던 준성은 오랫동안 그녀의 활약을 모르고 지냈다.
그녀의 사진을 보는 순간 준성은 숨이 멎는 듯 놀라웠다.
태양 빛이 하얗게 부서지며 반짝거리는 바다의 무수한 포말처럼 그리움이 밀려들어 주체하기 힘들었다.
강물처럼 흘러간 세월이 무색했다.
창작극 ‘봄밤’의 시대적 배경은 6·25 전란 이후 졸지에 헤어지게 된 두 남녀의 지난한 삶과 변함없는 사랑을 그리고 있었다.
남쪽으로 잠시 내려간 사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다 못해 찾아 나서는 여인과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녀에게 돌아가려는 길이 어긋나버리는 두 사람의 운명이 소용돌이치는 나라 정세와 맞물려 가슴을 저미게 하는 노래와 춤으로 이어졌다.
여인은 그의 아들과 함께 사내의 싸늘한 주검 앞에서 그에게 닿지 않은 마지막 편지를 들고 오열하며 막이 내렸다. 먹먹한 감동이 박수갈채로 쏟아졌다.
배우들이 하나하나 나와서 인사하고 마지막으로 나와 중앙에서 그들의 손을 잡고 인사하는 미연.
준성은 먼저 일어나 나와 무대 뒤로 뛰어갔다. 꽃다발과 함께 사진 찍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나오는 미연을 몇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는 준성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눈가에는 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미연의 눈이 그를 발견하자 커지면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웃으며 악수했다. 마주 보는 눈빛으로 흘러간 수많은 시간의 그리움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잠시 쥐고 있던 손을 놓고 준성은 물러났다. 그들의 마음이 서로를 보듬었다.
소유하지 못한 사랑으로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을 대신하였다.
준성의 육체적 삶이 꽃피었듯이 미연의 정신적 자유가 꽃피고 있었다.
어느새 연희가 그의 뒤에 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준성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아내의 손을 잡고 긴 계단을 내려갔다.
극 중 주제처럼 반복되던 멜로디의 한 부분을 휘파람으로 불었다.
애잔한 음률이 밤바람을 가르며 퍼져갔다.
준성은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연도, 자신도, 연희도 행복하다 생각하며 깊어가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무대에서처럼 밝은 달이 둥실 떠 있었다.
연희는 그녀가 준성의 첫사랑이었구나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동안 쌓였던 궁금증이 풀리며 속이 시원해졌다. 행여 그가 돌아설까 봐 꺼내지 못했던 그의 침묵하던 사랑을 이제는 알았다. 무엇보다 그가 자신을 선택하여 결혼한 것이 중요했다. 그의 마음 한구석 묻어두어도 상관없을 소중한 첫사랑의 기억을 그녀는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오랜 시간 공들이고 인내하며 그를 사랑했다. 그와 함께 이룬 가정이 지금처럼 평화롭기 위해서 그녀는 최선을 다해 남편과 아들을 사랑할 뿐이었다. 그는 과묵하고 성실했다. 연희를 존중해주고 아들을 성심껏 돌보았다.
연희는 그에게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만족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던 쓸쓸함, 따라서 그녀가 느끼던 막막함도 점차 옅어져 갔다. 그는 아들을 보면서 자주 웃었다.
미연은 일행과 헤어져 집에 돌아와 샤워하며 멋지게 성숙한 준성과 함께 그의 뒤에 서 미소 짓던 어여쁜 아내를 떠올렸다.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어린 그를 처음 안았던 시간이 성큼 그녀의 기억 속으로 들어오며 웃음이 번졌다.
참 어이없는 이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의 지순함을 생각했다.
그녀는 마르고 매끄러운 몸의 물기를 닦고 로션을 바르면서 거울 속에서 웃고 있는 얼굴을 보았다. 살짝 잔주름 지는 눈으로 웃고 있는 그녀에게 윙크를 보냈다.
새하얀 이불 속으로 들어가 지금 이곳에서 벌어진 삶을 음미하며 심신을 쉬었다.
그간의 고생이나 외로움이 모두 보상받는 유쾌하고 신나는 날이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되었어.’ 그녀는 만족감을 느꼈다.
준성이 가정을 이루어 뿌리를 내리고 그녀는 그간의 애쓴 열매를 맛보며 성취감과 함께 더 큰 무대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았다. 그녀는 가정을 꾸리는 일보다 음악적 성취를 경험하는 일이 더 신나고 재미있었다.
이 혼탁하고 힘든 세상에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종속되는 삶을 살 자신이 없었다. 또한 엄마처럼 한 남자를 지배하며 사는 삶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배당하는 것도 누굴 지배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녀 자체로 충만한 삶을 지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 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고 싶었다.
그녀는 한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고 마치 날개를 단 듯 이곳저곳 낯선 장소를 옮겨 다니는 꿈을 꾸었다.
정기는 주말이면 집에 오는 아내와 아들을 돌보기 위해 작업을 쉬었다. 아이를 돌보는 시간을 내어 부모님을 힘들지 않게 하였다.
옹알이하는 아들에게 말을 할 수 없어서 답답했다. 그러나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다시 살아난 것을 감사했다. 말 대신 함박웃음으로 아이에게 반응했다.
아이를 안고 우유를 먹이고 등을 쓰다듬으며 그 작은 아기가 트림하는 소리가 신기하여 활짝 웃었다. 이런 어여쁜 생명체를 태어나게 한 자신이 대견하다 못해 뿌듯한 감격을 느꼈다. 이런 게 세상에 왔다가는 보람이구나 생각되었다.
그림 그리며 느끼는 몰입과는 또 다른 차원의 희열감이었다.
조그만 아이가 울기라도 하면 얼른 기저귀를 살폈다.
주말에나 아들에게 오는 며느리가 밤잠을 설치지 않게 하려고 어머니는 손주를 그들의 방으로 데려갔다.
그동안 좀 여윈 듯 피곤해 보이는 아내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면서 쌍둥이를 키우신 어머니의 수고를 실감했다. 이래서 자식을 키워보아야 어른이 된다고 하는구나 생각했다.
아내는 정기의 지극한 아들 사랑을 질투할 정도로 투덜대면서도 흐믓했다.
친정어머니는 아이를 돌보아주기 위해 아예 그녀를 들어와 살라고 하셨다.
그녀는 친정으로 들어가서 어머니께 아이를 맡기고 마음 놓고 직장을 다닐 수 있었다. 친정 부모님과 남편, 시부모님까지 돌봄을 아끼지 않는 가운데 아들은 탈 없이 잘 크며 그녀를 행복하게 하였다.
정말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라고 만족했다.
정기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화가로서 신비감을 더할 뿐 그녀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하는 그가 더욱 멋있게 느껴졌다. 그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시부모님의 자애로운 인품이 그녀를 배려해주셨다. 그녀의 부모님보다도 더 정이 가는 분들이었다.
친정엄마의 결혼하라는 채근이 심해지자 갈등도 커지면서 멀어졌었기에 생각보다 쉽게 결혼 허락을 받았지만 화가 사위가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꾸려가야 한다고 믿음으로 상관치 않았다. 또한 육아도 친정어머니께서 힘들면 언제든지 시어머니께도 맡길 수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였다.
그녀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시부모와 정기가 그녀를 모시고 산다고 생각할 만큼 그들은 친절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남편의 그림들이 맘에 들었다.
결혼한 후로 그녀는 그의 그림을 팔지 않았다. 그녀가 버는 돈으로도 생활하는데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다음 전시회를 준비하였다. 그가 예술가로 대성하도록 뒷바라지할 생각이었다.
정민은 우울한 민주를 신경 쓸 새 없이 바빴지만 아내의 심기를 살피곤 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한 달 내내 연수가 시작되어 불만스럽겠구나 했는데 의외로 그녀의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보면서 의아스럽지만 다행스러웠다.
무겁게 가라앉던 침묵의 공기가 걷히고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화장을 곱게 한 그녀의 얼굴이 화사했다. 악세사리를 더한 옷차림도 보기 좋았다.
민주는 교사 연수회에서 잊고 지냈던 옛 동료를 만났다.
그녀는 반가웠지만 눈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한때 번뇌했던 그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연수받는 내내 마음이 들뜨고 그를 생각했다. 퇴근 시간 자동차 문을 여는 그녀 앞에 그가 나타났다.
“여전하군. 잘 지냈어? 같이 식사할까?”
민주는 그의 자동차에 나란히 앉았다.
시동을 건 그는 한 손으로 민주의 손을 감싸 쥐었다. 따뜻한 그의 온기가 순식간에 민주의 몸에 퍼져갔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민주에게 입 맞추었다.
민주는 놀라며 그를 밀어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머리 위 거울을 한 번 쓱 쳐다보고는 운전을 시작했다.
그들은 그날 밥만 먹고 헤어지지 못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했지만 민주는 그의 뜨거운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
그녀는 외로웠다. 남편과 정신적으로 결속되지 못하는 거리는 점점 더 외로움을 느끼게 했다. 그 역시 가정이 있었지만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민주는 그런 자극적인 성격의 그가 불안해서 정민을 택하였지만 행복은 잠시, 그녀와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고상한 정민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민주를 정신 차리지 못하게 휘몰고 가는 그의 되살아난 욕정은 그 순간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마치 마약에 취한 것처럼 그녀를 행복하게 하였다.
정민과는 누릴 수 없는 파격적인 격렬함으로 그녀를 불사르는 쾌락을 거부할 수 없었다. 남편인 정민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조차 그 순간은 장애가 되지 않았다.
방학 내내 연수받는 동안 그들의 정사는 계속되었다.
소유할 수 없는 관계여서 본능적인 육체는 더욱 서로를 밀착시키며 불타올랐다.
충분히 쾌락을 즐기며 연수가 끝나자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간절히 바라던 일이 실현되었다.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몹시 불편했지만 그녀는 지우고 싶지 않았다.
정민은 입양을 원하지 않았는가! 그것보다는 나은 일이 분명했다.
아이를 갖지 못한 것은 그녀의 탓이 아니라 정민의 탓이라는 게 밝혀진 거다.
남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통정을 한 사내의 아이였다.
민주는 오랫동안 정민과 잠자리하지 않은 사실을 상기하며 황급히 그의 곁에 가 누웠다. 그리고 그를 애무하여 살 섞음을 하였다.
오랜만에 정민도 만족한 쾌감을 느끼며 사정했다.
그녀의 우울했던 마음이 회복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가 그녀를 멀리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지만 자신의 부덕함을 반성하며 아내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받아들였다.
과거는 지나간 일, 지금 아내인 민주를 회의하는 건 정민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 후 민주는 산부인과에서 확진을 받고 정민에게 임신한 사실을 알렸다.
정민은 함께 기뻐하며 무엇보다 민주가 쾌활해진 것이 반가웠다.
그는 마음 놓고 자신의 학문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였다.
민주는 이제 더 이상 동료를 만나지 않아도 마음이 흡족하였다.
육체적 욕구를 충분히 채웠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은 이상 일이 잘못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만나자는 것을 핑계를 대고 두 번 거절하자 서운한 그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갈 것이었다.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양심의 가책 따위는 묵살했다.
처음이 힘들었지 두 번째 일탈은 태연함과 함께 삶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삶은 다양하고 복잡하게 뒤엉켜 흘러가고 사람에 따라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욕망을 채우며 살기도 한다.
준성은 아들의 유치원 재롱잔치에 어머니 대신 외삼촌 부부를 초대하였다.
연희는 시어머니를 무시하는 것 같아 염려했다. 그는 상관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출장이 있어 대신 그들을 참석해주십사 청하였다.
은경과 형규는 오랜만에 사돈 내외와 인사를 나누고 무대를 향해 박수를 보내며 즐거움을 나누었다.
연희는 일찍 퇴근하여 아들의 재롱잔치를 보고 어른들께 식사대접을 하였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관심과 애정을 받은 준성의 아들은 반짝반짝 빛났다.
집으로 돌아오며 은경은 남편에게 말했다.
“연희랑 애가 정말 사랑스러워요. 예전에 준성이 어렸을 때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준성이 애가 벌써 저렇게 컸다니, 정말 세월이 빠르네요.”
“모두 당신 덕이지. 자칫 삐뚤어질 수 있었는데, 당신이 내 동생 대신 엄마가 되어주었잖아. 녀석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정말 기특했었지. 너무 말이 없어서 나도 그 애가 어려웠어. 얼마 전 자기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더라구.”
“그래요? 그렇게 오래 소식을 몰랐는데 어떻게 만났대요?”
“준성이가 수소문했다나 봐. 영등포 고시촌에서 혼자 사는 걸 준성이가 오피스텔로 옮겨드리고 돌보기로 한 거 같아.”
“아, 정말 어른이 되었네요. 자기애를 낳아 키워보니 아빠를 생각하게 되었군요.”
“그렇지. 이제 진희 걱정은 덜었으니 대신 아버지를 챙기는 거지.”
“진희는 어릴 때 늘 아파서 걱정했는데, 미혼모까지 되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그 애만 생각하면 늘... 이제 좋은 남자를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아이도 잘 크고... 모든 게 정말 감사해요.”
은경은 손수건을 꺼내 눈시울을 닦았다.
형규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토닥였다.
“당신이 모두 희생 헌신한 덕이야. 정말 고마워.”
젊어서 연애할 때 말해 본 이후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그는 늘 아내를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여보. 사랑해.”
은경은 멋쩍어하며 무슨 안하던 말을 하냐는 듯 웃으며 남편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힘들어도 굳굳하게 버틸 수 있었던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남편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를 향한 믿음이 흔들려본 적 없었기에 자식 둘과 함께 조카들도 돌볼 수 있었다. 이제는 그들을 모두 독립시키고 홀가분해진 노년을 보낼 수 있어 감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늘 노심초사하며 바라보았던 아이들,
직장과 양육을 함께하며 지칠 대로 지쳐도 그들이 보내던 사랑스러운 웃음과 성장은 그녀가 사는 즐거움이었다. 또다시 태어난다 해도 가족을 사랑하며 돌보는 생활을 반복할 것이다. 더 지혜롭게 더 잘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 역시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에게도 딱히 그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몸으로 그 사랑을 실천했을 뿐이었다.
은경은 발걸음을 멈추고 남편의 볼에 다정한 입맞춤을 하였다.
그러자 형규도 그녀의 어깨를 싸안으며 그녀의 볼에 입맞추었다.
한 몸처럼 나란히 걸어가는 그들을 비추는 달빛이 은은한 고요한 밤이었다.
민주는 3년 휴직계를 내고 출산을 무사히 하였다.
건강하고 예쁜 딸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민주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흡족하였다.
8시간의 산통도 기꺼이 잘 견디고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무 이상 없는지 간난 아기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한구석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민에게서 소외되는 듯한 허전함을 이 아기가 다 채워줄 것처럼 기뻤다. 자신의 일부분을 떼어낸 소중한 생명이었다. 종일 들여다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고 신기하기만 했다. 어떻게 이런 신비스럽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아이를 낳았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던 평범한 일이 자신에게서 일어나자 그냥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민주는 삶의 의미를 찾은 듯 힘이 났고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서 퐁퐁 튀는 활기를 뿜어냈다.
정민은 몹시도 기뻐하며 생기 가득한 아내를 보면서 어자는 아이를 낳으면서 완성되는 존재일까 생각했다. 그로서는 그렇게까지 기쁘다기보다는 새로운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삶이 시작되었구나 생각했다. 그도 아내와 함께 꼼지락거리는 그 생명을 들여다보며 웃곤 했다.
정민이 아내와 함께 부모님을 만나러 왔다.
민주는 활짝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아이를 안은 그녀의 모습은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은경은 며느리 둘을 모두 앉아서 이야기나 나누라 하고 남편과 식탁을 차렸다.
싱글벙글 웃음이 가득한 정기와 진희 남편이 함께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은경의 손주들이 마당을 뛰어다녔다. 진희의 딸 하나는 사촌 동생이 다칠까 봐 그 뒤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붙들어 주었다.
이제 민주는 그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갓난 딸을 꼭 껴안았다.
남편 정민이 거실에서 노트북을 열어놓고 강의 준비에 몰두하고 있어도 괜찮았다.
그녀는 이 평화롭고 다복한 일가의 일원으로 당당히 존재하는 기쁨을 만끽했다.
무사히 출산을 마치고 품에 아이를 안았을 때의 환희!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꼭 껴안았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번도 회의하지 않았다.
정민은 입양해도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입양보다는 백번 나은 행운을 감사하며 이 아이는 정민의 아이라고 스스로 세뇌하였다.
아이를 별반 원하지 않았던 정민이였지만 막상 아이를 낳았을 때는 기뻐하며 그녀에게 수고했다고 입맞추었다.
그는 아내가 기뻐하는 모습에 자신도 기분이 좋았다.
출퇴근할 때는 아이를 한 번씩 들여다보며 신기한 기분에 휩싸였다.
민주는 아이 양육에 전념하면서 나날이 행복함을 즐기며 육아일기를 썼다.
정민은 우연히 화장대에 놓인 병원에서 준 아기 예방접종 수첩을 펴보고 무심히 지나쳤다가 문득 다시 펴보았다.
키 52cm 체중 3.4kg 혈액형 A형 예방접종 사항...
딸이 A형인 것을 보고 자신이 AB이니 민주가 O형인가 보다 생각했다.
“당신 혈액형이 O형이야?”
“아니, B형인데, 왜?”
민주가 다가와 함께 아기 수첩을 보았다.
“우리 애가 A형이어서...”
“당신은?”
“난 AB형.”
“그럼 A형 나올 수 있지 않아?”
민주는 순간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얼른 아기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잠자리에 들었다.
정기는 예전에 배운 지식을 생각해 보며 석연찮은 느낌을 밀어놓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아이의 A형 혈액은 두 사람 사이에서는 나올 수 없는 유전이었다.
AB형과 B형 사이에서는 B형과 AB형만 나올 수 있는 조합이었다.
다음날 정민은 혈액의 유전자 조합을 다시 찾아보았다.
자신의 기억이 맞았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기도 한다는데... 그리고 바쁜 일과에 묻혀 잠시 잊어버렸다.
틈만 나면 떠오르는 미심쩍은 느낌이 성가셔질 만큼 시간이 흐르고 정민은 찜찜한 사실을 확실히 하고 싶어서 유전자 감식을 의뢰했다. 진실을 알아야 했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정민은 갈등했다.
만에 하나 그의 딸이 아니라면?
기재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왠지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은 십중팔구 적중하는 법이다.
결과는 그의 아이가 아니었다.
정민은 이 난데없는 일이 충격이었지만 아내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이 충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내 모르게 아이의 혈액 검사를 다시 해보았다. 병원에서 잘못 기재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여전히 A형이었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는 많이 다른 민주라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보듬지 않고는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이미 단단히 쳐져 있었다.
아이를 안고 저토록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기쁨이 넘치는 아내,
불륜으로 낳은 아이를 감쪽같이 속이고 태연한 그녀가 어이없었다.
아기가 생기지 않는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구나 생각하자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사랑은 무엇일까?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한다면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그는 아내 외의 다른 여자와 동침한 적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아내는 그와 달랐다.
나와 다른 아내가 성적 욕망을 이성적으로 통제하지 못해 이탈하여 벌어진 행동을 벌하고 분노해야만 마땅할까 생각했다.
일 년 전쯤 우울했던 아내가 갑자기 환해지며 생기발랄해 보였던 때 그저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를 대하는 태도는 변함없이 다정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그때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구나 생각되었다.
결혼하기 전에도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났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었다.
그녀의 성적 욕망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껴야 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다. 그럼에도 스스로 그녀를 선택한 이상 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육체적 욕망에 휘둘릴 만큼 한가하지 않은 나날을 보내면서 늘 그의 곁에는 그녀가 있다는 사실에 외롭지 않았다.
그녀와 아이를 버릴 만큼 정민은 그녀에게 심한 분노나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 놀랍고 불쾌한 느낌이 든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오래 생각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학문을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의 주된 일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아내가 그를 속였다는 부도덕함이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낳을 수 없는 아이라면 아내가 낳은 아이와 가족을 이루어 사는 일이 나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녀와 사랑스런 아이를 볼 때마다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그리고 민주가 그랬듯이 그 역시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무덤까지 묻고 가자 마음먹었다.
진실을 알았으니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바람직한 선택을 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친자식보다 한 발짝 떨어져 아이를 바라보며 지도할 수 있는 이점도 있는 일이었다. 자식을 키우는 일은 한 인간이 독립적으로 삶을 살아가도록 양육해주고 그 사실을 보람되게 생각하는 것이다.
아내와 아이를 잘 보살피며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일에 몰두하며 살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는 교육자이니 그의 삶 자체가 참교육을 실천해야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자 정민은 마음이 가벼워지며 합리적인 자신이 맘에 들었다.
아내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부모님에게도 후덕한 여자였다.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선택한 가정을 해체하고 싶지 않았다.
민주 또한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화들짝 놀라서 그 사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확인하였다. 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민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태도도 변하지도 않았다.
민주는 폭탄을 묻어놓은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며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부담감을 깨부수기 위해 그녀 스스로 이 사실을 자백하고 용서를 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정이 깨진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루었다고 생각한 목표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은경은 뒤이어 온 준성의 가족을 맞으며 연희의 두 손을 꼭 쥐며 따스함을 전했다. 그의 귀여운 아들을 껴안고 볼에 입맞추었다.
그녀가 힘들게 돌보았던 자녀들이 모두 가족을 이루어 그녀의 생일에 찾아왔다.
마당에는 큰 식탁이 놓여졌고 그들이 가져온 음식들이 더해져 진수성찬이 되었다.
그들은 어린애들의 재롱에 웃음을 터뜨리며 즐거움을 나누었다.
은경의 희끗희끗해진 머리와 곱게 주름진 얼굴에는 미소와 함께 감격의 눈물이 맺혔다. 인생에 이보다 더한 성공이 있을까 생각했다. 세상에 와서 자손을 낳아 그들의 삶이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는 행복은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값진 삶이었다.
형규는 지혜롭고 성실한 아내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온 세월이 농부의 수확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은 것을 보면서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신혼의 단꿈을 즐기는 진희는 둘째를 임신하였다.
아직은 표가 나지 않아 아무도 모르지만 남편은 입덧을 하는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세심하게 그녀를 돌보았다. 이제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된 하나는 할머니를 도와 수저를 놓고 심부름도 잘했다.
지난밤 정기의 아내는 아이와 함께 왔다.
아이는 이제 아장아장 걸으며 조부모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 손 저 손 옮기며 정성스런 돌봄을 받은 아이는 낯을 가리지 않았다. 보는 이마다 안아보며 사랑을 보내는 것을 조그만 아이는 아주 잘 알고 방글방글 웃는다.
그들 부부는 만날 때마다 애틋하고 사랑이 식지 않았다. 서로 뜨거운 눈빛을 교환했다. 정기는 아들 하나에 만족하고 영구피임을 하였다. 일하는 아내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으며 더는 책임질 자신도 없었다. 아내는 좀 서운해했지만 동의했다.
정민은 딸을 안고 젤 늦게 부모님 집에 도착했다. 그동안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주는 방으로 들어가 딸에게 수유하였다.
가슴이 아무리 무거워도 딸은 그녀의 희망이고 사랑이었다. 이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생명을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순간은 세상의 모든 시름을 밀어놓을 수 있었다.
정민의 침묵이 무슨 뜻인지 그의 성격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음으로 그녀를 수용했는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그래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일이다. 나를 용서한 그에게 성심을 다하며 살아갈 것이다.
달라지는 사실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변할 수 있는 일이다. 그의 말처럼 더는 욕심내지 않고 지닌 것들을 사랑하며 행복해지고 싶었다.
은경은 라일락 꽃향기 살짝 날리는 마당에서 저무는 황홀한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부모님과 시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슴 가득 일어나는 그리움을 느꼈다.
마당끝 생울타리 아래로 하얀색, 보라색 제비꽃들이 앞다투어 고개를 내밀고 노오란 수선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끝. (202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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