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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낡고 오래된 기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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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은 석가의 금강경 경전을 해설하는 법문을 배우고 이토록 다사다난한 삶이 허상인 것을 깨달았다.

작은 책자에 압축된 ‘보르헤스의 불교강의’는 완벽하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 다시 읽어보았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별 볼 일 없는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듯 아주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버린 시간을 하루하루 꺼내며 그리운 존재들을 만나는 시간여행을 떠났다.

 

1. 서울시 용산구 신흥동 산 2번지 7통 1반 

 

나는 1953년 따스한 봄날 아침녁, 서울시 용산구 신흥동 산 2번지 7통 1반에서 태어났다.

6·25 사변과 함께 굶주림이 끝나갈 무렵 사십세 된 늙은 어머니는 어렵사리 쌍둥이 딸을 낳았다. 산파는 시어머니뿐 이미 여덟 번째 경험으로 치루는 출산이었다. 너무 작은 크기의 아기와 정상적인 크기의 또 한 아기, 신기하게도 작은 아기가 살고 큰 아기는 죽은 채 나왔다.

며칠 전부터 배 한구석이 더 묵직했던 건 바로 이 아이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은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던 것도, 어미가 죽지 않고 산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부모님의 정력은 대단하다. 그 난리 통에 마흔 살이나 된 어머니께서 임신하여 쌍둥이를 낳다니!

어쩌면 불안하고 고단한 삶에 부부 행위만이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전쟁을 겪고 영양부족이었던 어머니의 자궁은, 용량이 작았던 나는 간신히 연명할 수 있었지만 덩치가 컸다는 또 한 생명은 버티지 못하였다. 며칠간이나 죽은 생명과 함께 뱃속에서 살기위해 얼마나 몸부림쳤을까? 그때 진이 빠진 신생아는 젖 달라고 울지도 못하고 줄곧 잠에 빠져 수시로 어미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할아버지가 통장 일을 보신 덕에 배급받는 일이 수월했다. 어릴 적 옥수수죽, 분유 등을 먹은 기억이 난다. 구호물자인 분유에 설탕을 조금 치고 버무려 밥 뜸 들이는 가마솥에 넣어 살짝 찌면 알맞게 뭉쳐져서 먹기 좋은 간식이 되었다. 

오빠만 셋 있던 집에 터울이 6년이나 지는 고명딸로 태어난 덕에 특별대우를 받곤 했다. 귀하던 알사탕도 여기저기서 받아먹었다. 그 덕에 치아가 탈이 나서 지금도 고생 중이다.

 

내가 기억하는 집은 꽤 넓은 마당과 언덕이 있는 적산가옥이었다. 그 집은 일본인들이 살다가 버리고 간 집을 정부에서 인허해준 집이다. 욕심이라고는 없는 아버지는 지대가 높은, 월남한 사람들이 마을을 이룬 해방촌(지금의 이태원 일부)으로 넘어가기 전 동네에 터전을 잡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설득해 공산당 세력을 피하여 이북에 시댁 식구들을 남겨두고 자식 셋만 데리고 월남을 하셨다. 아마도 이북에 재산이 많았다면 그렇게 빈손으로 넘어오실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들은 말이었지만 시아버지께서 노름으로 마지막 남은 소 한 마리까지 잡히고 집에도 들어오시지 못하는 것을 어머니께서 모셔 왔다고 한다.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던 어머니로서는 얼마나 기가 막히고 앞날이 막막했을까 상상이 간다. 더군다나 이북에서 벌어지는 공산당의 참사를 본 어머니는 서둘러 남쪽으로 갈 결심을 굳히셨다.

서당이라고도 가본 적이 없는 어머니,  서당에 다니는 동생들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쳤어. 네 대까지는 여자가 공부하지 않아도 살림만 잘 배워 시집가면 된다.’고 외할아버지 말씀을 회상하셨다. 그 못 배운 한이 자식을 잘 키워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겁도 없이 그 먼 길을 떠나오신 거다. 뒤이어 바로 내려오신 조부모님, 외가댁 식구들도 함께 정착하였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으시고 성실한 덕에 목수, 미장이 일로 가족을 부양하였다. 아버지가 등욕하시고 입은, 양잿물에 삶아 깨끗하게 빨은 새하얀 런닝셔츠는 자잘한 구멍들이 나있곤 했다. 

 

넓은 마당에는 닭들을 키웠다. 아침이면 갓 낳은 달걀을 조부모님, 또는 큰오빠나 서영에게 주시곤 했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하얀 쌀밥을 두어 숟갈 뜨면 보이던 달걀노른자를 기억한다. 식구대로 모두 줄 수 없었던 어머니는 몸이 약하고 입이 짧았던 어린 막내딸을 좀 더 생각하곤 하셨다.

윗집과 경계선을 이루던 언덕에는 앵두나무, 보라색, 하얀색 도라지, 돌나물 등이 봄이면 흐드러져 마당을 치장하였다.

유월이면 새빨간 앵두가 나무 가득 열렸는데, 개구지던 작은 오빠가 몰래 올라가 따먹곤 했다. 할머니는 그 앵두를 내 생일에 따먹게 하려고 손대지 말라 엄포를 놓았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군것질거리가 귀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뒤집은 ㄴ자 모양의 기와집에는 마루가 있었고 안방에는 다락이 붙어 있었다. 그 다락 밑이 부엌이었다. 부엌과 안방 사이에는 작은 창이 있어 음식을 전달하곤 했었다. 넓은 부엌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걸린 부뚜막이 있고 그 아래 아궁이가 있었다

식모 아이와 자주 드나드는 군식구까지 커다랗고 둥근 밥상에는 십여 명의 식구들이 빙 둘러앉아 함께 식사하였다.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일거리가 많은 아버지는 쉬지 않고 노동하여 식탁은 풍성했다.

금강산 밑 장전 바닷가에서 살았던 부모님은 늘 생선을 먹고 살아온 습성으로 밥상에는 생선 반찬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골에는 장날이 따로 있었지만 서울은 상설시장이 있어서 거의 매일 장을 보러 가셨던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가곤 했다. 서영은 군것질을 할 수 있어서 신이 나서 따라가곤 했다.

우리집에 세 들어 살던 부부가 시장 건어물 가게에서 설탕 등을 팔았는데, 딱딱하게 굳은 흑설탕 덩어리를 한 개 집어주곤 했다. 어른들이 예쁘다고 집어주던 사탕을 많이 먹은 나는 어려서부터 충치와의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치과가 없었던 때라 아픈 이 때문에 징징거렸던 기억이 난다. 엄마나 열 살이나 위였던 둘째 오빠가 업어주며 달래주곤 했다. 동네에 치과가 없었고 어릴 적 외갓집에서 외삼촌이 치아치료 하는 것을 보았다. 속칭 야매라고 하는 간단한 치료였을 것이다. 자격증이 있는 치과의사였다면 조카를 치료해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지금 외사촌 하나가 뒤늦게 치과 치료 중 의치 만드는 기술을 익혀 종사하는 것은 아마도 외삼촌의 영향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 어린 시절 

 

우리 집 맞은편에는 할아버지와 사촌인 큰아버지가 살았는데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나온 지식인이었다. 내 기억에는 한겨울 대낮에도 이불 속에 누워있었던 부부의 모습이 기억난다. 강릉에서 왔다는 큰어머니는 곱상한 외모의 얌전한 여인이었다.

본처가 죽고나서 강릉에서 그녀를 만나 함께 서울로 왔다고 한다. 그는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때 당시 직업이 없었다. 그의 높은 학력과 고생하지 않고 산 인생은 어디에도 고개 숙이고 들어갈 수 없었다. 어쩌면 그의 사상이 허무주의에 빠져 무력한 인간이 되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건강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

어릴 때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해하던 것이 기억난다. 오죽하면 넉넉지도 않은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께서 쌀을 한 가마 보내며 한숨짓던 것이 기억난다.

“아니, 아비가 벌이를 못하면 어미라도 나가 호떡이라도 팔아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지 어떻게 저렇게들 밥을 굶고 들어앉아 있나. 기생하던 여자라더니!”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까지 어머니는 물심양면 그들을 도왔다. 나와 동갑이었던 육촌은 공부를 못했지만 몹시 착했다. 명절에 모여 윷놀이할 때 말을 잘 놓지 못하는 그 애가 불쌍했다. 

그의 형이었던 나보다 다섯 살 위였던 오빠는 나를 예뻐했는데 하루는 방에서 혼자 누워 만화책을 보고 있는데 그가 담요 속으로 들어와 가만히 내 성기를 만졌던 기억이 난다. 나는 놀랐지만 평소 잘해주던 오빠라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오빠는 놀라는 내얼굴을 보자 곧 손을 치웠다. 그가 사춘기 때라 그리했었나 보다. 나는 누구에게도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건 그가 곧 집을 나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 역시 가엾게 느껴졌다.

그의 소식은 그 이후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집 큰아들은 ‘만리장성’이라고 불리던 덩치가 코메디언 이모씨 만큼이나 큰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마음씨가 선선하고 애교도 많아 어른들이 처음에는 기겁했지만 점차 받아들이며 인정을 해주었다. 그녀는 어린 나를 ‘애기씨! 애기씨!’부르며 친절하게 대했다.

처음 라면이 나왔을 때 맨 먼저 할아버지께 맛보시라며 끓여 드리는 둥 어른 공양을 잘하였다. 무엇보다 자기보다 덩치가 작은 막노동하는 신랑을 잘 보필했다. 그리고 오갈 데 없는 막내 시동생을 그녀가 보살폈다.

하루는 그 동네에 경사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아이가 없는, 부유한 집에 쌍둥이 업둥이가 들어왔다. 문 앞에 두 생명이 고이 싸여 놓여있었다. 며느리가 아이를 낳지 못한 주인은 감사하며 그중 한 명을 착한 그녀에게 주었다. 그 과정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시절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친하게 지내던 때라 아마도 사람들의 협의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이는 아주 튼실하고 인물이 좋았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들 덕담을 나누며 기뻐하였다. 

 누구에게나 머리를 조아리며 굽실거리며 살던 그녀에게 복이 굴러온 게 아닐 수 없었다. 아이는 그녀의 생존 이유가 되고 그녀는 마음껏 아들을 사랑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아는 마을 떠나 멀리 이사를 했다. 귀하게 얻은 아이를 소문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어른이 되어 들은 바로는 그 아들이 잘 자라서 부모에게 극진한 효도를 한다고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옛말은 진실이다.

 

자상한 둘째 오빠는 짓궂은 장난을 하기도 했다.

자주 날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놀리며 웃었다. 어머니도 주위 가족들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아서 나는 그 말이 사실인 줄만 알았다.

한 번은 화가 나서 친엄마에게 데려다 달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오빠는 데려다준다면서 어두워진 거리로 내 손을 잡고 나섰다. 언덕 아래로 한참 걸어가던 오빠는 풀어진 운동화 끈을 다시 매야 하니 먼저 내려가라고 했다.

어린 나는 독하게 마음먹었으나 눈물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종종거리며 앞으로 한참을 걸어갔다. 가로등도 없는 캄캄해진 거리가 무서워서 뒤돌아보니 오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다시 집으로 뛰어 올라갔다.

가족들이 나를 보자 배를 잡고 웃었다.

둘째 오빠는 웃음을 멈추고 우는 나를 업어 달랬다.

한 여름밤에 잘 익은 수박을 쩍 갈라서 얼음을 둥둥 띄우고 설탕까지 한 숟갈 듬뿍 넣어 수박화채를 만들었다. 셋방 식구와 놀러 온 사촌들까지 모여앉아 한 그릇씩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시간은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리운 장면이다.

집 뒤로 펌프가 있어 차가운 지하수를 퍼 올려 사용하였다. 함지박에는 호박, 과일 등을 둥둥 띄워놓았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담벼락을 따라 봉숭아, 붓꽃, 채송화 등 앙증맞은 예쁜 꽃들이 피어났다.

여름밤 엄마가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주면 양 손가락을 뻗치고 잠들었었다.

다음 날 아침 실을 풀면 손톱뿐만 아니라 손가락 한 마디가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톱에만 빨간 물이 남아 곱디 고았다.

초여름이면 이삼십 분 걸어서 남산을 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어머니께서 이불 빨래를 하실 때였다. 지금 내 기억으로는 어릴 때여서인지 꽤 멀게 느껴졌는데, 그때 남산은 지금의 개발된 남산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숲이 몹시 우거지고 계곡이 깊어서 물이 넘쳐 흘렸다. 이불 호청을 빨아 널따란 바위에 활짝 펴놓고 어머니는 당신의 몸뿐만 아니라 나도 씻겨 주셨다.

한번은 어린애들 대여섯 명이 남산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웬 곱상한 청년이 우리를 불러 모아놓고 과자를 주더니 순식간에 바지를 내렸다.

그는 홍두깨를 잡고 흔들면서‘순희야! 순희야!’불렀다.

하얀 액체가 몽글몽글 쏟아졌다.

우리는 깜짝 놀라‘엄마!’부르며 냅다 도망쳤다.

어린 나이였지만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가슴이 쿵당거리고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애들끼리는 절대 산에 가지 않았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지금 남산 도서관 맞은편으로 길게 경사진 길에서 오빠들이 썰매를 탔는데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나는 무서워서 태워달라고도 못하고 구경만 했다.

우리 동네 아래쪽 마을 내리막길에서도 동네 개구쟁이들이 모두 나와 썰매를 탔다. 그 썰맷길이 녹을 때까지는 리어카나 차가 다닐 수 없었다.

지금처럼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을 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의 낭만이었다.

오빠들이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면서 생활비가 모자랐다.

어머니는 사랑채에 전세를 놓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자 고등학교 선생님 한 분을 하숙 들였다. 조석으로 작은 밥상을 그 방으로 가져가던 식모 언니가 생각난다. 그때는 전라도 지방에서 많은 처녀 애들이 가난 때문에 식모살이하였다. 부유하지도 않았던 우리 집에도 몇 명의 처녀애들이 거쳐 갔다.

그분은 몹시 식성이 까다로워 어머니는 여간 고심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노총각이었던 그는 방 둘을 사용했는데 방 하나는 가득 새를 키웠다.

별별 예쁜 새들을 구경했었다. 얼마 동안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곧 근무하던 고등학교 교장의 딸과 결혼하면서 우리 집에서 이사했다.

둘째 오빠는 그때 일을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못생긴 노처녀를 가난한 그 선생님이 구제해 준 거야.”

그는 훗날 장인의 뒤를 이어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인명은 제천’이라고 명은 타고난다는 옛사람들의 말은 무슨 근거일까?

할아버지는 병약한 손녀딸이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이름 자에 길영(永)자를 넣어 장수를 빌었다. 부모님이 여러 자식을 키우다 잃었기 때문이다. 여덟 번 출생에 쌍둥이까지 아홉 명을 낳았는데, 키우다 죽은 형제가 넷, 낳았는데 죽은 생명이 하나, 그렇게 다섯이나 되니 어미의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작고 연약했던 내가 설상가상으로 사고가 난 건 오빠들이 두어 살 먹은 나를 의자에 앉혀 끌고 다니다가 넘어뜨려 다쳤기 때문이었다.

“네가 다리를 잘뚝잘뚝 절어서 보니까 왼쪽 발목이 통통 부었어. 그래서 병원에 데려갔더니 관절염이라고 해서 기브스 하고 일 년 동안이나 주사를 맞았지. 처음에는 병원에 가서 맞다가 나중에는 아버지가 직접 주사를 놓았어.”

난 그 일로 사십여 년을 통증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았다.

오빠들이 때때로 원망스러웠다. 가지런하지 않고 짝 짜기인 두 다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안 좋았다.

심지어 중고등학교 내내 스커트를 입어야 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에도 바지를 입어서는 안 되는 욕 나오는 교복!

게다가 풀을 바짝 먹여 곽대기처럼 빳빳해야 하는 흰 카라는 쉬는 시간 잠시 책상에 엎드릴 수도 없는, 그야말로 곤욕스러운 규율이었다. 나는 복장 점검에 대비하여 그 카라를 반 접어 공책에 끼워 넣고 다니고 보통 때는 풀 먹이지 않은 부드러운 카라를 달고 다녔다.

지금 자유로운 학생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학생들을 위한 규율이 아닌, 규율을 위한 규율을 지켜야 하는 시절이었다. 식민지 일제 교육의 잔재로 지나치게 엄격한 통제를 한 것이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기브스를 풀었을 때 약간 차이 나던 다리는 종내 똑같아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달리기하거나 고무줄놀이 등을 하고 나면 하루 이틀씩 끙끙거리며 앓아누웠으니 자연히 운동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좀 더 자랄 수 있었던 키가 오차범위 10cm는 작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삼학년 때는 입시 공부로 잠을 제대로 못 자니 발목통증이 심해져서 관절염 약 등을 한 움큼씩 먹고 약 기운에 휘둘러서 정신 차리지 못해 한두 시간씩 책상에 엎드려 있거나 결석이 잦았다.

얼굴이 퉁퉁하게 부어올랐다. 괴로운 나날 속에 입시 공부를 하자니 죽을 맛이었다.

고 삼 담임선생님은 출석을 부르다 말고‘서영이 왔어? 그럼 출석 안 불러도 되겠네.’출석부를 덮자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성품 좋은 선생님은 웃자고 한 행위였지만 나로서는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큰오빠는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는 못 배운 부모님의 한을 풀어주는 희망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가 고려대에 들어갔을 때 부모님의 마음은 그간의 고생이 별 게 아닐 만큼 흐믓하셨다. 대학생이 많지 않던 시절 그 동네에 대학생은 오빠밖에 없었다.

“그 애가 공부한 연습 종이가 얼마나 많은지, 그걸로 방마다 초벌 도배를 다 했지.”

말씀이 별반 없는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어머니는 큰아들이 공부하는데 필요한 돈이라면 언제든 어느 집 문턱이라도 가서 빌려다 줄 만큼 자존심을 밀어놓으셨다.

그런 오빠가 힘들다는 군대까지 갔다 오고, 대학 4학년 졸업을 얼마 앞두고 그만 덜컥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런 날벼락이 없었다.

그때는 군대 복무 기간이 삼 년이나 되고 훈련 또한 고되어서 있는 집 자식들은 뇌물을 써 안 보내기도 하던 이승만 정권 시절이었다.

큰오빠가 훈련소에서 나와 첫 휴가를 오던 날 어머니는 대문을 들어서는 아들을 보자 버선발로 뛰어나가 부등켜 안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이 기억난다.

졸업을 앞둔 큰오빠는 처음 감기로 며칠 되게 앓았다가 일어났다.

그때 오빠는 이화여대 메이퀸이라는 부잣집 여학생을 사랑하여 가슴앓이하던 때였다. 아마도 실연의 아픔이 크지 않았었나 짐작해본다.

과외선생을 해서 용돈을 벌어 쓰던 오빠가 내게 ‘에비오제’라는 종합영양제를 사다 준 건 어머니를 감동시켰다.

큰오빠는 무심했던 아버지 대신 어린 여동생에게 애정 표현을 자주 해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나를 번쩍 들어 올리며 볼에 뽀뽀해주던 오빠였다.

개구지고 말 안 듣던 셋째 오빠는 큰오빠가 있을 때는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자주 장난치고 괴롭혀서 나를 울리곤 했다.

“걔는 살을 풀로 붙였으니 제발 건들지 좀 말아라.”

어머니는 작은오빠에게 당부했지만 소용없었다.

사랑이 좌절된 큰오빠는 미국으로 유학 가고 싶어 했다.

국비 유학 시험을 보려고 영어 공부를 많이 해서 책꽂이에는 영문소설이 엄청 많이 꽂혀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는 지나치게 피곤했었다.

다시 자리에 누워 앓기 시작한 지 꼭 일주일 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의학박사라는 병원의사는 장질부사라고 오진하여 집안을 모두 소독하고 식구들을 조심시켰다.

나는 오빠가 세상을 떠나던 날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가 나오는 걸 보았다. 견딜 수 없는 나는 윗동네 단골병원이었던 한의원으로 뛰어가 의사를 불러왔다. 그는 도착하여 오빠의 맥을 짚더니 고개를 흔들고 돌아갔다.

울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체온이 40도에 이르던 오빠는 장질부사가 아니라 간에 이상이 생겨서 높은 열로 간이 심하게 훼손된 것이었다. 그 병명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성실했던 오빠는 그렇게 맥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눈물이 마를 새 없는 어머니를 향해 할머니는 쏘아붙였다.

“아들 잡아먹은 년이 뭘 잘했다고 허구헌날 울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말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셈이다.

더는 견딜 수 없는 어머니는 짐을 꾸렸다.

금방이라도‘어머니’부르며 나올 것 같은 아들의 목소리가 집 안 구석구석에서 들려왔다.

나 역시 불현듯 오빠의 환영을 보곤 했다.

우리 형제들이 마음 놓고 살던 둥지를 떠나야 한 건 어머니가 강원도 철원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주 아팠던 것만 빼면 그래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평화롭고 안락한 집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은 둘째 오빠의 애인이었던 여인이다.

그녀는 내게 퍽 다정했다. 볼 때마다 그 당시 유행했던 비스켓을 사주고 나와 친구에게까지 한자 공부를 가르쳐주기도 했었다. 그녀의 집에 가보았는데, 예상외로 초라하고 가난했다.

아버지가 아내와 사별하고 얻은 둘째 부인은 여동생을 여럿 낳았다. 그러나 사업에 실패해서 일자리를 잃고, 할머니가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단아한 차림새를 하고 다녀서 나는 부유한 집 딸인 줄 알았다. 그녀의 어깨까지 오는 구불구불 웨이브 진 긴 머리는 미장원을 다녀온 것처럼 아름다웠고 늘씬했던 몸매는 언제 보아도 멋있었다. 그녀의 친구하고도 만나 셋이 놀러 간 적도 몇 번 있었다. 얌전했던 나를 친구와 함께 많이 귀여워하며 데리고 다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큰오빠가 결혼하기에는 이른 나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좀 마땅치 않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시골에 내려가 계셨으니 젊은 남녀의 연애 행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똑똑했던 오빠가 군대 갔을 때 병장시절 카투사 근무를 했는데 그때부터 그들의 사이는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오빠는 제대하면서 그녀와 헤어졌다. 

나는 지금도 그녀의 다정하고 고상했던 모습이 생각난다. 전적으로 오빠가 그녀에게 뭔가 잘못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들은 이십 초반이었으니 철이 없었던 때였다. 나는 오랫동안 그녀가 궁금하고 그리웠다.

오빠도 첫사랑 그녀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사진을 오랫동안 품에 넣고 다녔노라 말했다.

 

3. 소녀 시절

 

부보님이 강원도 철원으로 내려가신 연유는 그곳에 작은아버지가 살고 계셨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고향 이북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으로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북에서 넘어와 젊었을 때는 군수물자 공급하는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단다. 아버지보다 키가 더 크고 강원도 사투리 억양이 섞인 어투로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처복이 많은, 그는 세 번이나 아내를 얻어 딸만 일곱을 낳았다. 이북에 아내와 딸 둘을 남겨두고 월남했는데 다시 돌아가지 못하였다. 큰딸은 이북에서 어릴 때 죽었고, 이남에서 얻은 아내에게서 딸을 넷 낳았다. 산아제한을 하지 못할 때이긴 했지만 연달아 딸을 낳아 여간 실망이 크지 않았다.

나의 할머니께서 막내 오빠를 작은아버지 양자로 보내자 하였다. 그러나 어린 자식을 여럿 잃은 어머니는 순종하지 않고 아들을 보내지 않으셨다.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 손을 잡고 작은집에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가평 밤나무골에 사셨는데, 그때만 해도 얼마나 시골이었는지 마치 동화속 나라처럼 밤나무에 둘러싸인 아늑한 동네였던 기억이 난다.  

 

작은아버지는 딸들을 공부시켜 뭐하냐며 중학교까지 밖에 보내지 않고 서울로 올려보내 공장에 취업하게 하였다. 재혼한 아내에게는 전남편에게서 낳은 과년한 딸과 소년이었던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을 양자로 삼아 공들여 키웠다면 좋았을 것을 그리하지 않았다. 그는 시집간 누나에게로 옮겨가 살았고 가끔씩 엄마를 보러 오곤 했다.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형제들은 그 보잘것없는 논밭을 가지고 싸웠다. 작은 어머니는 가엾은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싶어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다른 오빠와 큰 언니를 제외하고는 세 자매가 의좋게 살아간다. 작은어머니는 아들에게 집을 주고 그 바람에 큰딸은 그들과 의절하고 말았다. 불행히도 그녀의 딸 하나가 교통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녀는 어머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과 집안의 경조사가 있을 때만 얼굴을 보는 정도로 소원하게 지낸다. 제각각 멀리 떨어져 살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여러 가지로 많이 다르게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얼마전 둘째 사촌의 아들이 타국의 여자와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서 가보았다. 남자보다 열살이 넘게 어린 여자였지만 잘 어울려 보였다. 둘째 사촌은 수년전 고도비만의 딸을 잃고 슬퍼했다. 나는 어릴 적 통통했던 딸의 모습은 기억나는데 성장하면서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몹시 비만했는지는 몰랐다. 

 

장성한 큰아들을 잃은 슬픔을 좀 추스른 어머니는 자식들이 걱정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오셨다.

죽기 전에 어머니 성경책에서 몰래 꺼내 쓴 헌금을 사죄하고 부모님께 좀 더 효도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여 분명히 천국에 갔을 큰아들을 그리도 그리워하는 건 어쩜 천국을 믿지 못한 건 아니었는지 의아스럽다.

둘째 오빠는 서울공업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부터 견습공이 되어 돈벌이를 시작했다. 졸업하자 월급을 좀 더 많이 주는 동대문 시장 포목점으로 옮겨갔다가 군에 입대했다. 그는 운동을 많이 하여 건강한 체격과 잘생긴 외모, 사교적인 성격으로 내 눈에는 배우처럼 멋있었다.

언젠가 잠들기 전 식구들 앞에서 유행하던 맘보춤을 신나게 추어 온 가족을 웃게 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흥이 많았던 오빠는 감성적이고 멋진 청년이었다. 

한 번은 부모님과 형제들, 외사촌, 이웃까지 모두 영화 구경을 시켜준 적이 있었다. 잊지 않고 생각나는 그 영화는 ‘벤허’였다. 지금 남영동에 있었던 이류 극장 ‘금성’극장이었다. 구경거리가 귀하던 시절 얼마나 두고두고 생각나는 추억인지 모른다. 오빠는 결혼하기 전까지 가족에게 많은 것을 베풀던 바람직한 청년이었다.

셋째 오빠는 육군에 지원했지만 호적에 두 살 어리게 기재가 된 바람에 탈락하자 한 살 어린 나이도 받아준 해병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더니 청룡부대 일원으로 월남전에 참석해 어머니의 애를 태웠다.

오빠 부대가 떠날 때 구백여 명이었던 장병은 돌아올 때는 그 반 정도밖에 안 되었다니 새파란 청춘들이 남의 나라 전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것이다. 아니 그 전쟁은 강대국 간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전쟁이었으며 장기간 이어진 전쟁에 수많은 목숨을 잃은 미국은 전쟁을 끝내라는 국민의 압박에 결국 철수해야 했다.

베트남은 공산주의 나라로 통일되었고 우리나라는 파월 장병으로 외화벌이하여 경제부흥에 이바지하였다. 그 덕에 한국인 사생아들이 생겨났다.

내가 아프리카를 여행하였을 때 숙소에서 일하던 한 여인은 우리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고 그녀의 자식이 한국 사람인데 아빠를 만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돌아오겠다고 떠난 한국인 남편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단다. 그런 피해자가 그 나라에 엄청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마음이 아프고 죄송한 마음이 컸다.

 

부모님은 나 하나만 데리고 서울역 근처 어느 주상복합 빌딩 삼 층에 방 두 칸을 빌려 거주하였다. 방 두 칸이라지만 윗방은 어른 하나는 거뜬히 들어가고도 남을 무지막지하게 큰 트렁크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 사층 빌딩은 부모님이 교회를 통해 친하게 지낸 지인의 건물이었다. 아마도 아버지가 빌딩 보수, 관리 등을 하는 조건으로 그 집을 내준 것 같았다. 주인은 일 층에 가방 가게를 하고 있었다. 옆 가게는 순대국을 파는 식당이었다.

어머니는 몸이 아파 기력이 없을 때 내게 냄비를 주고 순대국을 사오라 하셨다. 함께 먹자 하였지만 맛있게 드시는 어머니를 바라볼 뿐 나는 돼지고기와 선지까지 든 기름진 음식을 한 숟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비위가 약한 편이라 그런 기름진 음식을 싫어했다. 아주 입이 짧아 편식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여간 무던한 분이 아니다. 그리고 돈 벌 궁리는 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누가 불러야만 가서 목수 일이든 미장일이든 하시는 분이었다.

일이 늘 있는 게 아니니 결국 어머니가 나서서 사방 일 미터쯤 되는 간이 점방을 꾸려 건물 옆에서 다른 노점상과 함께 장사하였다. 문구류를 포함한 여러 잡화를 가득 담아놓고 파는 데 그게 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시거나 했을 때 내가 잠깐 물건을 파느라 서 있었는데 그 노릇이 여간 창피하지 않았다.

가장 창피했던 날은 그 빌딩에 함께 살던 나보다 두어 살 위로 보이는 교복 입은 남학생이 내게서 볼펜과 편지 봉투를 사 갔을 때였다.

나는 그 후로 단정했던 그 남학생만 보면 피하며 마주치지 않았다. 가난했던 집이 싫었던 철없는 열등감이었다.

군에 근무하던 둘째 오빠, 이제는 그를 큰오빠라 부른다.

추운 겨울, 오빠가 휴가나와 내 손을 잡은 손을 군복 포켓에 넣고 양동 거리를 지나가는데 앳된 아가씨가 '쉬었다 가세요.’ 말하며 오빠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야, 동생 안 보이냐? 저리 가.”

난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녀가 매춘한다는 것을 알았다.

양동 거리 구석구석에 어린 처녀들이 화장을 짙게 하고 몸을 팔고 있었다.

나는 어렸지만 그들이 참으로 불쌍하게 보였다.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더라면 저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생각했다.

두 오빠가 카츄사 군복무를 하여 맛보았던 간식 박스는 잊혀지지 않는다. 생전 처음 맛보았던 쵸코렛과 젤리, 과자 등이었다. 우리 나라 비스켓이나 사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강하고 부드러운 단맛의 간식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졸업식 때였다.

눈이 펄펄 날리는 운동장에서 식을 마치고 부모님은 담임선생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별명이 칠면조일 만큼 멋쟁이였던 선생님은 추워서 얼굴이 파랗게 얼어붙은 듯 보였다. 코트도 입지 않고 밖에서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진을 본 오빠는 말했다.

“고명딸이라고 졸업식 때 부모님이 가셔서 사진을 다 찍고, 너는 호강한 줄 알아. 큰형 빼고 우리는 12년 학교 다니는 동안 한 번도 학교에 안 오셨어. 큰형하고 너나 낳지 우린 왜 나셨을까?”

오빠 둘은 큰 형과 나를 편애한다고 생각하며 서운함을 표현했었다.

"다섯 손가락을 깨물어보아라.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는가? 너희들은 잘 먹고 건강했잖아."

어머니의 이 설명은 충분치 않았다. 작은 오빠는 반발이 심해서 자주 어머니를 속상하게 했다.

학교를 나와 식사를 한 후 어머니는 내게 졸업선물로 영화를 보여주셨다. 아마도 내가 보고 싶다고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목이 ‘유관순’이었다. 눈물 콧물 닦으며 이 영화를 보고 애국심을 잔뜩 지니고 집에 들어오니 세상에! 세간살이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윗방에 있던 문짝만큼 커다란 트렁크에 옷가지까지 싹 쓸어가 버린 거였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현관문에 잠근 커다란 자물통이 무색했다. 아예 자물통을 매다는 쇠고리를 뜯어내고 들어갔다. 곧 중학교 입학하면 입으려고 사놓은  내 교복까지 깡그리 가져간 어지간히 궁한 도둑이었던 것 같았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은 도둑이 참 많았다.

그 빌딩에서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일은 깡패 같은 불량배가 피 흘리는 한 청년을 옥상 끝에 밖으로 반쯤 떨어지게 걸쳐놓고 한쪽 무릎으로 가슴을 짓누르고 한 손으로는 목을 조르며 폭행하는 데 금방 사람을 죽일 것만 같았다.

무슨 일로 4층 옥상에 올라갔다가 혼비백산하여 뛰어 내려와 어머니께 이야기하니 아무 소리 말라는 듯 입에 손가락을 대셨다.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고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깡패들의 싸움질이라고 하셨다.

나는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보복당할 일이 두려우셨던 것 같다.

이런 일도 있었다.

좁은 복도를 지나가는데 어른 허리만큼이나 커다란, 검은색 섞인 개를 붙잡고 선 어른을 지나가야 해서 잔뜩 겁을 먹고 아버지 뒤로 숨어서 조심조심 지나가는 순간 개가 왕! 내 허벅지를 물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아버지를 꽉 붙들었다. 주인은 놀라서 사과하였지만 아버지는 약값이나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건물 옆 약국에서 약을 사다 치료해 주셨다.

나는 그 후로 개만 보면 무서워서 피하게 되었다. 그 트라우마는 나이 들어 아주 작은 귀여운 강아지를 키우게 되면서 좀 나아졌지만 지금도 덩치 큰 개는 여전히 무서워 피한다.

 

중학교 들어가서는 성북구 미아리 낮은 산언덕 아래 한 주택에 세 들어 살았다. 안채와 뒤채가 따로 있는 집이었다. 방 두 칸에 부엌이 딸린 조용한 집이었다.

토요일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날이면 트랜지스터 작은 라디오를 들고 언덕에 올라가 나무 그늘에 앉아 팝송을 들으며 책을 읽곤 했다.

한 번도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는 주인집 딸은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데 늘 쌀뜨물로 세수하였다. 왜 그럴까 궁금해서 어머니께 물어보니 피부가 좋아지라고 그런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도 한번 따라 해보았지만 개운하지 않아 찬물로 헹구고 말았다.

공부 시간에 화학 선생님께서 ‘찬물에 산소가 많으니 세수할 때 헹구는 물은 찬물이 좋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피부가 좋아서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는데, 안색이 창백했던 그녀는 지성으로 매일 쌀뜨물로 세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농약을 쳐서 농사지은 쌀을 씻은 물이니 그리 좋았을 것 같지도 않다.

이 집에 살 때도 도둑이 들었는데, 문밖에서 담배 피며 식구들이 잠들기를 기다린 듯 담배꽁초가 여러 개 남아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아버지가 ‘누구요!’ 소리 질렀는데 아무 소리가 안 나서 다시 잠을 청했다고 했다. 장지문을 열어놓은 윗방에서 자는 내 머리맡 위 벽에 착 달라붙어 있다가 도망을 갔단다.

좀 후에 도둑이 후다닥 나가는 소리에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불을 컸지만 뭘 훔쳐간 것 같지 않아 쫓아가지 않았다고 하셨다.

나는 며칠 동안 윗방에서 혼자 잠들 수 없어서 아랫방 어머니 곁에서 자야했다.

부자도 아닌 가난한 집에 도둑질하러 오는 그는 얼마나 더 궁핍했을까? 측은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 일 때문인지, 주인이 전세비를 올려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좀 후에 다른 집으로 이사 갔다.

작은오빠가 월남에 파병 가서 부친 돈을 모아 샀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집주인이었고 별채에 세 들어 살던 집 아줌마는 젊고 예쁘장했다. 그 집에는 내 또래 남학생이 있었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그를 만나면 우린 몇 걸음 떨어져 집까지 아무 말도 없이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함께 왔다.

그것을 본 작은 오빠가 짓궂게 말했다.

“너, 내 동생하고 함께 다니지 마, 쪼그만 것들이!”

아니, 우리가 뭘 어쨌다고!.

오빠는 괜한 심술을 부리며 우리를 무안하게 했다.

나는 단정하고 수줍어하던, 인물 좋은 그에게 호감을 지녔는지 모르겠지만 오빠 덕에 사춘기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연정의 싹을 잘라 버렸다.

삼양동에서 아버지가 시작한 집 장사는 자본이 필요했다. 집이 빨리 안 팔리면 빚을 내서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으므로 버티기 어려웠다.

파란 기와를 올리고 붉은 벽돌로 지은 반지하가 있는 이층 양옥집에서 잠시 살았는데 아주 쾌적한 좋은 집이었다.

그때는 오빠 둘이 모두 집에 있었다. 큰오빠는 동대문 시장에서 일했고, 작은오빠는 월남에서 돌아와 아버지를 도와 집을 지었다.

아버지는 건축설계도 없이 그 당시 유행하던 새 집을 눈썰미와 그간의 경험으로 지었다. 성품이 정직한 아버지는 좋은 재료로 튼튼하게 새집을 지었지만 결국은 여유자금이 없어 집을 팔아 생활비로 진 빚을 갚고 언덕 꼭대기에 허름한 집을 한 채 사서 이사했다. 내가 태어나서 네 번째 한 이사였다.

이 모든 일을 주관한 이는 아버지가 아니라 그나마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였다.

마당을 보고 긴 마루가 이어진 옆 방에 세를 주었는데, 그 집에 처제가 와 머무르고 있었다. 그녀의 언니 내외는 맞벌이를 나가고 낮에는 그녀가 혼자 있곤 했다. 그녀는 갸름하니 곱상한 얼굴과 날씬한 몸매를 한 예쁜 여성이었다.

한 번은 우리 방에 들어와 다과를 먹는데, 목덜미까지 내려온 단발머리가 고개를 숙일 때면 한쪽 눈과 빰을 가렸다. 답답함을 느낀 어머니는 실핀을 가져다 머리를 올려 꽂아주며 말했다.

“예쁜 얼굴을 왜 그렇게 가려. 이래야 정신이 나지.”

그녀는 무안한 듯 웃으며 잠자코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지나친 참견이 껄끄럽게 느껴지는데 반발하지 않는 그녀가 착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공부하다 저녁 늦게 집에 왔는데 난리가 났다.

작은오빠가 자살소동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 갔단다.

엄마는 한숨 지며 눈물을 훔쳤다. 이유인즉 옆방 처제와 결혼하겠다고 해서 형한테 얻어맞고는 다음 날 약을 한 움큼 삼켰다는 거다.

나이 찬 형도 형편이 어려워 아직 결혼 못하고 있는데, 나이도 어린 놈이 마땅한 직장도 없이 무슨 결혼이냐고 때려주었다는 거다. 물론 되잖은 말대답을 하며 반항하다 맞았을 것이다.

나는 도무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형은 동생을 때려도 되는 걸까? 작은오빠에게 한 차례 빰을 맞은 적이 있는 나는 그 두 오빠의 억압이 정말 싫었다. 내가 맞은 이유는 합창단을 그만두지 않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니던 여고의 합창단은 전국 합창대회에서 일등을 하고 학교의 명예를 드높인 대단한 합창단이었다. 따라서 고등학교 일학년 초 오디션에 붙은 나는 정말 열심히 합창단 활동을 하였다.

학교 가는 낙이 된 그 활동은 그만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신입생인 우리는 등교하자마자 합창실 청소를 돌아가며 했다. 그리고 수업 시작하기 전 삼십여 분 모여서 연습하고 교실로 흩어졌다가 점심시간이면 다시 모여 노래 연습하고 방과 후에 또 한 시간 정도 연습했다. 따라서 점심시간 전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다 먹고 가야만 했다. 나는 두어 번에 나누어 급하게 밥을 먹곤 뛰어갔다.

연주나 발표회가 있는 때는 그보다 연습 시간이 더 늘어났다. 그래도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즐겁게 한 건 그 활동으로 많은 감동적 경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하모니에 도취되는 것은 물론, 여러 곳에서 연주하며 박수를 받는 기쁨이 컸다. 지금도 기억나는 연주는 세종문화회관의 원조인 시민회관에서 성악가들과 가을 음악회를 한 일, 또 합창단 단독 콘서트도 그곳에서 했었다. 흰 저고리에 보라색 치마 한복을 입고 연주했다. 사람들은 '하얀 천사들'이라며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때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문화 경험이 없는 부모님은 그런 공연을 관람할 생각을 하지 못하셨는지, 내가 오시라고 주문하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둘다였는지 아무튼 그랬다.

가장 인상적인 건 그 해 레코드까지 만든 일이다. 그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졸업한 동창이 CD로 바꾼 그 음반은 지금 들어도 음색이 곱고 가슴이 뭉클했다.

몇 년전, 합창단을 지휘하고 음악을 가르쳐주셨던 선생님께서 요양원에 계신다는 말을 어찌어찌해서 듣고 친구와 한 번 찾아가 뵌적이 있었다. 사모님께서는 무척이나 반가워하시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쉽게도 선생님은 많이 변해버린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잘 생기시고 인품도 좋으셨던 멋진 선생님이었는데...

인간의 한 생이란 누구나 이렇게 생노병사를 흐르는 강물처럼 겪을 뿐이다.  

부활절에는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연주하기 위해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나가 성가를 부르고, 명동성당, KBS 방송국에서 성악가들과 가곡을 녹화했던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학교 강당에 초대되어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활동이 많다 보니 자연히 밤새워 밀린 공부를 하게 되고 내 몸에는 이상이 생겼다.

가슴 밑부분이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매일 계속되었다.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어머니께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국에 데려가 물어보자 위궤양이라며 비싼 미국산 위장약 한 병을 주었다.

어머니는 합창단을 그만두라고 하셨다.

나는 싫다고 했고 곁에 있던 오빠는 급기야 내 빰을 한 대 때리며 명령했다.

“너 안 그만두면 내가 학교 가서 선생님께 말할 거야!”

나는 합창단 한 지 일 년 만에 낑낑대고 들고 다니던 세계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악보집과 합창단 옷을 반납하였다.

나의 학창 시절 육 년 중 가장 빛났던 일 년이 서글프게 막을 내리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작은오빠와 잠깐 사귀었던 그녀는 언니에게 쫓겨 지방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내려가 버렸고 실망한 작은오빠는 원양어선을 타고 집을 떠나고 말았다.

 

4. 사춘기

 

나는 땅거미 지는 저녁 어둑해지는 마당에 서서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동네를 바라보았다. 협소하게 다닥다닥 붙은 집들, 하나둘 불빛이 커지고 있었다. 오빠와 떠나간 그녀까지 가난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같았다.

그래도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어느 날 내게 가슴 뛰는 연정이 찾아들었다.

독서실 뒤쪽에서 걸어 나오는 훤칠하게 키가 큰, 준수한 용모의 그를 보는 순간 나는 첫눈에 홀딱 반하여 그 밤 내내 가슴이 설레였다.

어떻게 해야 저 남학생과 알고 지낼 수 있을까 밤새 생각하는 내게 행운의 여신이 살며시 손짓하듯 그가 새벽 동이 트기 전 내 옆 빈자리에 와서 앉더니 곧 엎드려 잠드는 게 아닌가!

나는 수없이 망설이다가 만나자는 약속을 적은 쪽지를 접어 그의 머리맡에 놓고 독서실을 빠져나왔다.

성북구 삼양동 집에서 한참 먼 그 독서실을 가게 된 것은 그 동네에 외갓집과 초등학교 친구가 있고, 내가 다니던 교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내가 나서 살던 동네의 아랫동네였다.

토요일 외갓집에서 자고 다음 날 교회에 갔다 오겠다고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외숙모에게 독서실에 간다고 말하고 밤새 독서실에서 밀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나의 첫 순정이었던 그의 이름이 기억한다. 김원경!

그는 약속 장소에 나왔다. 그도 상대가 누구일까 몹시 궁금했다고 한다.

우리는 남산 도서관 분수대에서 색 색깔로 변하며 뿜어져 오르던 분수의 물줄기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배재고등학교 삼학년 축구부 골키퍼였다. 까무잡잡한 그의 매끄러운 피부는 매력적이었다. 반짝이는 눈빛이 총명해 보이는 그는 내게 호감을 표시했고 우리는 그 후 두 번 더 데이트했다.

나는 종일 그의 생각으로 가득한 시간을 보내며 그리움으로 안타까웠다. 그러나 대학입시를 앞둔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약속을 청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내가 다니는 교회에 와서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는 나를 바라보았다.

끝나고 나오는데 그가 날 불러세워 깜짝 놀랐다. 예고 없이 그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제과점에서 콜라를 마셨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콜라를 마시고 콧잔등으로 올라오는 트림에 당혹스러웠다. 그가 나를 보러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지금도 기억난다.

그리고 사복을 입고 그와 딱 한 번 같이 영화관에 갔었다. 통속적인 사랑이야기가 바다에서 벌어지던 영화였는데, 지금까지도 영화제목이 생각나는 것은 그와 갔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이 없던 그 시절 단 한 번 쓴 편지가 사달이 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순진한 나는 어리석게도 그에게 편지가 전해지리라 믿었다.

약속 장소에는 그의 어머니가 나와 있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내 아들 대학입시가 코앞인데, 여학생 만나는 것을 허락할 수 없고, 더군다나 S여고 다니는 여학생과는 교제하게 할 수 없어요.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나는 한마디 변명도 항의도 하지 못한 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머리를 숙이고 돌아섰다.

그날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내 첫사랑은 고배를 마셨다.

나중에 친구가 말했다. 그의 여동생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삼류 B중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그럴 말을 했다는 것은 교수 사모님으로서 교양 없는 짓이라며 비난했다. 그 친구 역시 나처럼 일차로 치룬 입시에서 떨어져 이차로 간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류학교였다. 그때는 모든 중고등학교를 일류, 이류, 삼류로 분류해 평가했었다.

한참 지낸 어느 초겨울 밤 외갓집에서 언덕을 내려오면서 그의 동네를 지나칠 때 나는 상상 속에서 행여 그를 만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어떤 말을 할까, 나는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눈앞에 그가 떡 나타났다.

나는 숨이 멎는 듯 놀라웠지만 큰 상처를 받은 나머지 도망치듯 달아나 버스에 올라탔다. 그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를 본 마지막이었다.

나는 한동안 웃음을 잃고 슬퍼했다.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던 초등학교 친구가 그 사실을 듣고 좀 지나 내게 위로 편지를 보냈다. 내가 그 후로 그 동네에 발길을 끊었기 때문이었다.

국어 선생님이었던 담임이 편지를 먼저 읽어보고 나를 불렀다. 빙긋이 미소 지며 말씀하셨다.

“잘 웃던 네가 요즘 좀 우울해 보여서 네게 온 편지를 먼저 보았어. 이제 알겠다. 근데 그건 전혀 슬퍼할 일이 아니야. 대학에 가면 네가 생각했던 것 보다, 아니 그 남학생보다 훨씬 잘난 남학생들이 많단다. 그러니 잊어버리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보란 듯이 더 좋은 친구를 만나면 되는 거야.”

아니, 어른들은 왜, 무슨 권리로 남의 편지를 가로채 먼저 읽어보고 자신들 맘대로 판단하는 걸까? 어린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되는 거라고 믿는 걸까? 나는 다시 한번 수치심을 느끼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눈물이 났다. 혼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교회 또한 나가지 않았다. 왼쪽 발목 때문에 건강이 안 좋아 공부가 벅차고 힘들었다.

아예 그 동네는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상처를 입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자 교회 전도사님이 총무였던 남학생을 데리고 가정방문을 오셨다. 어머니는 예배가 끝난 후 갑자기 온 그들을 붙들고 잠시만 기다리라며 나가셨다. 전도사님은 나를 귀애하시며 관심을 많이 보여주셨던 분이지만 학생회 활동을 같이하던 남학생에게 집 형편을 보인 게 부끄러웠다.

잠시 후 어머니는 서둘러 새 밥을 짓고 김치찌개를 끓여 상을 차렸다. 돼지고기를 숭숭 썰어 넣고 땅에 묻어 찡한 김장김치를 썰어 두부까지 넣은 김치찌개는 맛있었다. 그들은 남김없이 밥그릇을 비우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는 그 이후 할 수 없이 교회에 몇 번 나갔지만 성가대도 학생회 활동도 참여하지 않았다.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았다. 그는 열병처럼 지나간 사춘기의 낡은 추억이 되었다.

 

5. 대학 시절

 

형편이 어려웠던 때라 대학 진학을 포기하라는 큰오빠의 말은 나를 몹시 좌절하게 했다. 나는 무조건 대학은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왼쪽 발목 통증이 심해 관절염약을 계속 먹으면서 공부하는 일은 역부족이었다.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면서 우 반에서 밀려났고 약 부작용 때문인지 얼굴이 퉁퉁 부었다.

보통반에서는 일등을 해도 기쁘지 않았고 우반에 있는 친구들에게 창피했다. 한 반에 오십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실업반, 예능반까지 열 학급이었는데 그 중 우 반은 두 반이었다.

심지어 시험 성적을 복도에 쭉 붙여놓은 적도 있었다. 서로 경쟁하여 좋은 대학에 많은 합격자를 내고 싶은 학교 측의 전 근대적인 처방이었지만 어른이 되어 생각하니 얼마나 졸렬하고 비교육적인 처사였는지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어떡해서든지 꼭 대학에 가겠다고 다짐하면서 새끼손가락을 살짝 베어 혈서까지 썼다.

큰오빠가 일기장을 보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보셨는지, 입시원서를 써야 할 때 오빠는 꼭 대학에 가고 싶으면 2년제 교육대학에 가라고 했다. 학비가 저렴하니 2년이라면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큰오빠의 월급으로 생계를 이어갔기 때문이었다.

서울교대는 예비고사 점수가 부족하고 인천교육대라면 충분했다.

나는 일반대학 국문과를 희망하였기에 시무룩하니 내키지 않았다.

“서울대나 연·고대도 아니고 기껏 기집애들 다니는 사립대는 못 보내. 교대 가기 싫으면 그만둬.”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원서를 들고 인천교육대학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마침 마주 보는 앞좌석에 앉았던 청년은 시무룩하니 창밖만 내다보고 있는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우석대 임상병리학 삼학년이라고 묻지도 않는 자기소개를 하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그때 임상병리학이 뭘 공부하는 건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우석대라는 이름도 몰라서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 대학은 좀 후에 고려대 의과대학에 편입되었다. 그는 우울한 내 기분을 좀 풀어주고 싶었는지 이것저것 물어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다시 만나자는 그의 청을 거절하고 제물포역에서 내렸다.

나는 좀 아쉬워서 슬쩍 창을 바라보니 곤색 바바리코트에 흰 와이셔츠가 상큼해 보이는 그가 웃으며 손을 들어 흔들었다.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거리는 찬 바람이 불고 을씨년스러웠다. 학교 정문에 들어서니 웬 기업 건물 같은 진회색 건물이 대학교 맞나 의심스러웠다. 그 회색빛 건물을 지나 언덕 아래쪽으로 넓디넓은 운동장과 하얀 대학 건물이 보였다.

맘에 없어 싫은 학교를 다녀야 하는 마음은 장거리 통학이 더욱 불편함을 가증시켰다. 서울역까지 버스 타고 가는데 한 시간, 기차 타고 또 한 시간, 걸어서 십여 분 이상 모두 왕복 네 시간 이상을 소비하는 고생스러운 일이었다.

행여나 시간당 한 번 오는 기차를 눈앞에서 놓치면 낭패였다.

첫 수업을 들을 수 없는 데다 그만 학교가 가기 싫어진다. 몇몇 교수들의 마땅치 않은 강의도 한몫했다. 고등학교 선생님보다도 못해 보이는 교수의 강의는 들어가기 싫었고 타 대학보다 초라한 학교 규모도 싫었다.

게다가 오빠의 빡빡한 귀가 시간 규제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인하대 남학생 세 명과 교대 여학생 세 명이 함께 하던 동아리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 당시는 소규모 동아리 활동이 유행했는데, 명색이 취미 동아리이지 사실은 만나서 대화하고 놀러 다니는 데 불과했다. 억압받던 중·고교 학창 시절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싶은 욕망의 명분이었다.

그중 한 명이 나를 좋아하여 집까지 바래다준 것을 대문에서 본 올케는 그 사실을 큰오빠에게 말했다.

나는 큰오빠에게 귀싸대기를 맞고 억울했지만 한 마디 항변도 하지 못했다. 억눌린 자아를 펼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억압받는 생활에 십수 년 길들여져 살았기 때문이다.

 

이학년 올라가는 새 학기가 다가올 무렵 외출금지령까지 받은 나는 가출을 했다. 나를 지키라는 책임을 맡은 할아버지께 마당에 잠깐 나간다고 말하고는 미리 내다 놓은 책가방을 들고 살며시 대문을 열고 달아났다.

아직 날씨가 쌀쌀한 이월 마지막 주 어느 저녁이었다.

갈 곳이 딱히 없었던 나는 초등학교 동창인 친구를 만나기 위해 전화를 걸고는 남영동 어느 제과점 빌딩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기다렸다.

단정해 보이는 용모의 한 청년이 다가와 물었다.

“누구 기다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이야기를 나눌 기분은 아니었지만 인상이 좋은 그에게 반응했다.

“친구 올 때까지 나랑 이야기 나눌래요? 나도 친구가 좀 늦는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인데... ”

나는 울적한 기분도 달랠 겸 그가 안내하는 대로 밖이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우유 한 잔과 빵 한 개를 먹었다. 그는 내 큰 책가방을 보고 물었다.

“어디 가세요?”

“그게 아니고, 사실은 집을 나왔어요. 친구 집에 가려구요.”

순간 그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스치는 듯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그는 왜 집을 나왔는지 묻지 않았다. 다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좀 더 늦게 나타났어도 좋을 친구가 도착했다.

나는 고맙다며 일어나 나왔다.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그가 활짝 웃으며 손을 쳐들었다. 그는 다정한 청년이었다.

별다른 사심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지금도 그 청년이 생각나는 걸 보면 꽤 괜찮아 보였던 학생이었던 것 같다. 그 잠깐의 따스한 배려는 내 낡은 기억의 사진 한 장을 남겼다.

그때는 남성이 호감 가는 여성에게 말을 걸고 데이트를 신청하는 문화가 만연했던 시대였다. 지금처럼 데이트 범죄가 난무하는 무서운 세상이 아니었다.

 

나는 학교 근처에 사는 대학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다 잠들었다. 그녀의 첫사랑은 진행 중이었는데, 문제는 초등학교 동창인 그가 그녀와는 퍽 이질적인 존재여서 나조차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는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았고 건달처럼 유흥업소를 드나드는 부잣집 막내아들로 카리스마 강한 반항아였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사랑해도 좋을 대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춘기 때부터 품은 사랑이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감정이 끌리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미성숙한 시기였다.

그 후 친구는 인하대생과 진한 연애를 했지만 그를 사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결국 헤어졌다.

내가 보기에는 그 동창보다 후자인 남학생의 사랑이 훨씬 진정성 있게 느껴졌는데, 그녀보다 인물도 좋은 그는 단지 후발주자라는 이유로 상처 입고 슬퍼하며 그녀를 떠났다. 

교사가 된 후 우리는 서로 분주한 나머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인천에서 교육연수를 받는 동안 우리는 반갑게 만났고 그녀의 신혼집에 갔다.

그녀는 결국 동창생인 그와 결혼하였다. 부자 시댁은 그들에게 아파트를 사주었다.

원 없이 예쁜 여자들을 사귀어본 그는 교사인 그녀를 아내로 선택하였다. 오랫동안 변함없이 그를 사랑해온 그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S대 다니던 형제들처럼 머리가 좋았다. 다만 학업을 소홀히 했을 뿐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아파트 방 하나 벽 가득 앙증맞은 예쁜 꽃 화분에 희귀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의 엘리트 누나가 선물한 인테리어 장식이였다.

나는 부유하지만 성실하지 않은 남편과 그녀가 행복하게 잘 살까 회의했지만 덕담과 함께 그녀의 결혼을 뒤늦게나마 축하했다.

내가 가출하였을 때 자취하는 그녀의 친구 집에 머물기로 하였는데 개학하자 올케가 학교로 찾아왔다.

큰오빠는 아내를 통해 내가 돌아올 것을 종용했다. 나는 사립대학 등록금의 반의 반쯤 되는 등록금을 친구에게 빌려서 내고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자 어머니는 자취를 허락하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내가 하룻밤 신세를 진 음악교육과 친구는 발령받은 지 일 년도 안 되어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졌다. 겨울방학에 집에 가 있다가 개학하기 전날 돌아와 연탄불을 피운 자취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토록 허망한 목숨이기도 하다.

 

나는 자유를 얻어 기뻤다. 그러나 가난한 자유는 여전히 부자유스러웠다. 동아리 친구들과 맘 놓고 어울렸고 그들은 자취방에도 놀러 왔다. 함께 자취하는 같은 과 친구가 집에 가는 주말에 한 친구는 자고 가기도 했다.

그는 연애 감정을 느꼈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의 말 없는 친절함이 마음 편했고 궁색하지 않은 그의 선심을 모두 고마워했다.

동아리를 만들게 된 건 동창이었던 송희로 인해 시작되었다. 그녀는 나처럼 키가 작고 날씬하며 멋을 내던 친구였다. 성격은 자로 잰 듯 정확하고 새침하여 남학생들이 말 붙이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그녀와 나는 교회에서 큰오빠 결혼식에 들러리를 서기도 했다.

그녀가 인하대 축제 때 미팅 상대로 만난 남학생이 맘에 들었는지 내게 함께 나가자고 하였다. 둘 다 말이 없어 어색한데 내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길 기대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어떤지 알고 싶어 했다. 그녀는 단순한 친구가 아닌 연애 대상으로 그를 생각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가며 부담스럽지 않은 내게 호감을 느꼈다. 우리는 그렇게 여섯명이 동아리가 되어 자주 어울렸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내게 둘만의 데이트를 신청했고 나는 송희가 마음에 걸려 물어보았다.

“그를 좋아하니? 그가 내게 데이트 신청했어. 네가 그와 사귀면 따로 만나지 않으려고.”

"아니, 괜찮아. 만나도 상관없어."

내가 느끼기에는 분명 그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내게 진심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내게 데이트하자고 한 사실을 용납할 수 없어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녀를 친구라고 생각해서 솔직하게 물었지만 그녀의 어투는 냉랭했다.

유월이었던가 주말에 춘천으로 뱃놀이 갔을 때 우리들의 간편한 복장과는 달리 그녀는 미니스커트에 까만 하이힐을 신고 나와 돋보이다 못해 뭐지? 의아함을 느끼게 했다.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걸까? 우리는 예쁘다고 탄성을 질렀지만 속으로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는 그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가볍게 생각하고 단순히 호기심으로 그를 만났다. 함께 식사를 하고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의 내가 종달새처럼 재잘거리고 그는 웃음으로 호응했다.

몇 달이 지난 여름 방학이었다. 개구리 울음 소리 가득한 깜깜한 시골길에서 그는 헤어지기 전 순식간에 나를 안고 입을 맞추었다. 생전 처음 경험한 키스에 놀라서 가슴이 쿵탕거렸다.

그가 특별하게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의 낭만은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다.

나는 쌍둥이여서일까? 여자 형제가 없는 탓에 친구들을 좋아하고 외로움도 많이 느꼈다. 더군다나 한창 성에 눈을 뜰 나이이다 보니 나를 좋아하는 그에게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송이는 동아리에서 말없이 빠지고 우리들의 모임은 시들해졌다. 나와 그는 따로 만남으로 동아리는 그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재미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내게 지극했다. 매일 만나고 싶어 하지만 나는 곧 권태감에 빠져들었다.

일학년 내내 친구들이 주선하는 미팅을 한 번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친구가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간곡히 부탁하여 나갔던 미팅에서 돌아오던 날 그는 내 자취 집 앞에서 기다렸다.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어서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오래도록 기다렸던 그는 화가 나서 내 목에 걸려있던 진주 목걸이를 낚아챘다. 진주알이 바닥에 튕겨 흩어졌다. 지난 생일날 그가 선물했던 진주 목걸이였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를 뿌리치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도 자신이 한 충동적인 행동에 놀랐는지 금방 잘못했다고 빌며 용서를 구했다.

나를 보자 참았던 질투심이 용솟음치며 이성을 잃었던 모양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하였다.

 

한편, 우리 과에는 나를 좋아한 남학생이 있었다. 군대 갔다 와서 교대에 들어온 남학생이 세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인 그는 기타를 잘 치고 수줍어하는 성격으로 별반 말이 없는 학생이었다. 우리 과 대표는 사회생활을 몇 년 하다 입학한, 키가 작고 야무져 보이는 청년으로 일학년 전체 학생 대표였다. 그들은 친하게 어울렸다.

나는 그가 기타를 잘 치는 것을 보고 배우기를 청하였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 한 번씩 연습했는데, 악기에 소질이 없는지 잘 배우지 못했다. 집에서 연습할 기타를 사 달라고 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주 일 회 한번 짧게 쳐보고 잘 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악기 연주보다는 노래를 부르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내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자신은 반주와 함께 화음을 담당하며 노래 부르는 것을 즐겼다.

서울에 있는 라이브 까페에서 그와 함께 나가 노래를 부르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의 눈에서 다정함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덕분에 신입생 환영회 때 그와 함께 대표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유행했던 가요 한 곡과 외국 번역 곡 한 곡을 불렀다.

음악과 학생들이 보기에는 우스웠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민망하지만 학생회 일을 하는 그들 덕분이었다. 그때만 해도 목소리가 고왔을 때라 무난히 해낸 일이었다. 별반 떨리지도 않았던 건 고등학교 시절 일 년 합창단을 하면서 무대에 서 본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참 봄날이 흐드러질 때 친목을 위한 야유회를 영종도로 갔었다.

배를 타고 가는데 새벽 일찍 나온 나는 졸음이 몰려와 갑판에 앉아서 졸았다. 순간 내 머리와 어깨에 따스한 감촉이 전해져 살며시 눈을 뜨니 그가 내 곁에 앉아 내 머리를 기대주고 있었다. 나는 고마움을 느끼며 다시 조금 더 잠들었다. 우리는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즐기며 서먹했던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며 많이 친근해졌다.

그날 제물포에서 뒤풀이로 몇 사람이 남아 야식을 먹으며 술도 한 잔씩 나누었다. 나는 술을 먹지 못해서 안주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그만 막차 시간을 놓쳤다. 전화가 없는 집에다 연락할 길이 없었다. 몸이 많이 피곤했다. 내일 다시 새벽같이 나와야 하니 그가 자취하는 방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그는 인하대생과 함께 자취하고 있었다. 나는 전혀 불안한 마음이 없이 그의 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새벽녘 잠결에 느껴지는 따스한 손, 그는 내 손을 꼬옥 쥐고 있었다. 나는 그를 믿었고 그는 내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좀 어색한 채로 아침을 간단히 먹고 강의 시간에 들어갔다.

친한 친구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나를 보았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 이후 그의 상사병은 소문으로 내게 들려왔다.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어울리던 훈에게 그는 말했다. ‘너 서영이 건드리면 가만 안 둬.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이야기를 나중에, 나를 멀리하는 훈을 느끼고 물었을 때 들었다.

그 전에 순영은 어렵게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했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성적으로 말고, 오빠 동생으로 지내요.”

나는 그때 동아리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때였다. 순영은 그 사실을 알고 인하대생들을 수소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기타를 때려 부수며 괴로워했다고 훈이 알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연민 같은 감정을 느꼈지만 그에게 마음이 가지는 않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막걸리를 거침없이 마시고 기타를 치며 답답함을 달래던 그는 가난했던 나와 같은 부류였다.

막막한 현실이 주던 번뇌에 빠져 날아오를 날개를 지니지 못했던 청춘, 젊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아름답고 희망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미숙하고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일학년이 지나고 이학년이 되자 그는 마음을 다잡았는지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강의실에서 그의 옆자리가 비어서 내가 앉자 말없이 일어나 멀찍이 뒤로 물러나 앉았다. 민망함을 느낀 나 역시 그 뒤로는 그의 곁에 의도적으로 가지 않았다.

내가 그를 다시 한번 만난 것은 부천 원미동에서 살 때였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그가 등교지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깜짝 놀랐지만 출근 시간이 바뻐 그냥 지나쳐 걸어가다가 뒤돌아보니 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 학교에서 근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인사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되돌아가지 않고 바삐 걸음을 재촉하며 지나간 시간의 그를 떠올렸다.

 

함께 자취했던 또 한 친구가 생각난다. 

그녀는 일학년 내내 결석이 잦아 학점이 모자랐다. 평소 말이 없는 그녀는 다행히 국어과 교수의 배려로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학점을 만회하기 위해 재수강을 하면서 주말에도 집에 가지 않았다. 한 번은 그 이유를 물으니 엄마가 싫다고 했다. 사춘기 시절 자신의 일기를 보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엄마를 그렇게 싫어한다는 게 나로서는 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선생님이었던 엄마를 정말 싫어했다. 사사건건 간섭하고 지배하려는 엄마가 싫다고 했다.

배정숙. 그녀는 자의식이 강한 친구였다.

그녀와는 졸업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한 번은 명절 때 한복을 곱게 입고 아들의 손을 잡고 내게 온 적이 있었다.

선생직을 그만두고 책 판매를 한다며 내게 값비싼 ‘세계의 명화’시리즈를 구매해주길 바랬다.

나는 정말 미안했지만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을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나 혼자 생활비를 벌고 있는 데다 어린 아들을 맡기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지만 나중에 살게.”

지금도 후회스럽게 느끼는 일이었다. 무조건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었어야 했다. 그녀가 책 판매를 나선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그녀의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오후에 아이들 여러 명을 모아 미술 지도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자기에게 의존하는 게 싫어서 직장을 그만두었더니 생활비가 아쉽다고 했다. 괜히 교직을 관둔 셈이었다.

우리 때는 남편이 직장을 잘 다니면 대개의 아내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림만 하였다. 나 역시 그렇게 살길 희망했다. 병약했던 육체는 정신적으로도 남편에게 의존하고 싶은 나약함을 형성하였다. 

그 후로 그녀를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눈이 작고 얼굴이 통통했던 단발머리의 그녀가 결혼 선물로 준 반짇고리함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어 가끔씩 그녀가 생각나곤 한다. 

 

대학 생활 이년은 참 빨리 지나갔다.

잊혀지지 않는 일 중 하나는 전국체전에서 마스게임을 하기 위해 한 학기 내내 연습했던 일이다. 무용, 체육 시간을 모두 할애해서 천여 명의 여학생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단체 동작을 연습하는 일은 지루했다. 더군다나 전신 타이즈 위에 입었던 나풀거리던 짧은 진분홍 치마는 날씬한 학생들에게는 예쁜 곡선을 드러내며 예뻤지만 좀 뚱뚱한 학생에게는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들은 날씬했던 나를 예쁘다고 말했지만 약간 짝다리인 게 드러나 몹시도 싫었다.

참 운이 좋은 건지 아닌지,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 대학교 때까지 마스게임에 동원되었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교직에 근무하는 동안 네 번이나 마스게임 지도가 주어져 고군분투했다. 보여주는 사람의 고단함이 클수록 보는 사람의 즐거움이 큰 게 마스게임이다. 지금은 다 사라진 전 근대 교육의 한 양상이었다.

한번은 개학하자마자 시작된 마스게임 지도가 너무 힘들었는지 급성신우신염에 걸려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밤새 끙끙거리며 앓다 간신히 병원에 갔더니 바로 입원하라고 했다. 그렇게 죽을 것처럼 아파보기는 처음이었다. 팔월 말부터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는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수 백 명 아이들을 지도하는 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단한 일이었다.

 

교대에서 힘들었던 과목이 오르겐 연주였다. 집에 피아노가 없었으므로 학교 연습실을 사용해야 했는데 부족한 시설은 수업 끝나고 가면 이미 빈자리가 없었다. 기다리기 싫은 나는 그대로 뒤돌아서기 일쑤였으니 학점을 잘 받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간신히 낙제를 면하였다.

그렇게 부실했으니 고학년 음악 수업 반주를 잘하기 어려워 연습을 따로 미리 해야만 했다. 나중에는 다행히도 반마다 피아노를 잘 치는 학생이 한 명은 있어서 반주를 맡기고 지휘할 수 있었다. 더 나중에는 음악 수업 방송교재가 나와서 더 수월해졌다.

올갠 반주를 제대로 잘하지 못한 게 걸려서, 뒤늦게 친구가 딸이 치던 영창 피아노를 판다고 해서 내가 중고 가격을 주고 샀다. 그러나 은퇴 후 레슨을 받으며 연습을 했는데 팔꿈치 엘보 증상이 너무 심하여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노래 부르기로 취미를 바꾸었다. 음악성이 좋은 아들이 자기가 치겠다며 못 팔게 했지만 별반 치지도 않고 모셔놓고 있다. 늙어서 한가해지면 치려나? 조율만 몇 번 해서 피아노에게 많이 미안하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절실히 필요한 악기일 텐데...

 

6. 자유의 꽃잎을 바람에 날리다

 

나는 사귀던 그과 헤어지고 싶었다.

그의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었다.

그는 나를 사랑했지만 내게 그는 친구 이상은 아니었다. 그를 남편감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가 군대 가기 전 교대 졸업과 함께 헤어질 결심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동안 내게 잘해준 그에게 신세를 갚고 싶었다. 그는 12월생이었다. 가난한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주고 떠날까 생각했다. 친구 커플과 함께 네 명이 일박이일 여행을 떠났다.

그는 그때까지 성욕을 잘 다스리며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아서 고맙게 생각했다.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기쁜 선물은 아마도 나의 순결일 것 같았다. 나는 순결을 결혼의 필수가치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문학작품들을 읽으며 이미 기성세대들이 여자에게만 강요하던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터무니없는 자신감이었는지, 아니면 성적 호기심의 발로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는 강렬한 포옹과 입맞춤을 하면서도 옷을 벗기지는 못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점잖음인지 위선이었는지 그 둘 다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스스로 옷을 벗었다.

“오늘은 날 가져도 돼. 내가 주고 싶은 생일 선물이야.”

가진다는 건 참 우스운 표현이지만 달리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떠나기 위해서 그에게 육체를 허락하겠다는 짧은 기만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내게 베풀었던 그간의 친절과 물심양면의 사랑을 어떻게든 보답하고 떠나고 싶었다.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될 육체적 쾌락을 제공하고 싶었다.

첫 경험은 아팠을 뿐 내게는 그리 쾌락적이지 않았는지 지금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 후에 친구 커플에게 들은 말은, 내가 처녀여서 놀랐다며 감개무량하더라는 이야기였다. 이미 자유연애로 인한 순결의 의미를 외면한 세대였지만 아마도 그는 감동한 모양이었다.

나는 순결이라는 딱지를 뜯어낸 자유로움과 함께 이제야말로 성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군대 가기 위해 휴학하고 잠시 그는 미친 듯이 내게 집착했다. 만나기만 하면 성관계를 하고 싶어 했다.

나는 임신이 두려워  배란기를 계산하며 거절함으로 그를 애태웠다. 왜 콘돔을 쓰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우린 성교육의 부족으로, 사회적 금기시 때문에 섹스를 몹시 수줍어했다. 아니 마음이 떠난 나는 별로 성관계를 하고 싶지 않아서 준비하지 않았는데 그의 유도에 휘말리곤 했다.

외로움, 나는 젊은 날 내내 늘 외로움을 느꼈다.

형제를 잃은 쌍둥이여서였는지, 다른 여자 형제가 없어서인지, 심신의 나약함 때문이었는지 자주 감성적인 나머지 그의 따스한 포옹에 무너지곤 했다.

드디어 예상치 않았던 임신을 하고 말았다.

그 당황함과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어머니와 큰오빠의 분노가 두려웠다.

준비되지 않은 우리의 무능한 실책은 좌절 그 자체였다. 형성된 생명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죄책감은 설득력이 없었다. 두려움이 지나쳐 양심의 가책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쾌락의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 삶. 섹스는 곧 임신을 뜻한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험하였다. 고민과 불안으로 보낸 하루하루, 내 삶에서 난생처음 겪는 최악의 고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만 이해해주면 낳아서 키워도 되는 일이었다.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해도 되는 일에 불과했다. 지금은 미혼모가 수정란을 사서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아 키워도 무방한 세상이 되었다. 출산율이 떨어져 아우성을 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엄격한 어머니와 불같은 큰오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맞아 죽지 않으려면 감쪽같이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버지? 아마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평생에 아버지의 꾸중이나 비난을 단 한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진 도통한 도인처럼 세상사에 불평이나 불만이 없이 잠자코 살아가는 분이셨다. 마치 바보가 아닌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그분이 화낸 것을 나는 유년 시절 딱 한 번 보았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노래를 좋아하셨는지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국악 창을 듣고 있는데,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돌아오신 어머니께서 가자는 교회는 안 가고 계집년들 노랫가락이나 듣고 있다고 한 마디 했다.

순간 아버지는 라디오를 마당에 내동댕이쳐버렸다.

어떤 변명도 항변도 없이 아버지는 분노를 라디오에 실어 박살 내고 끝을 내버렸다.

그 뒤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교회 가자는 말도, 그 외 어떤 잔소리도 하지 못했다.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겠는가!

무엇보다 그나마 없는 재산을 축내면 안 되는 일이었다.

다시 돌아와서, 목돈을 마련할 수 없는 나는 그의 도움을 청했지만 풍족한 용돈을 받아 쓰는 그도 목돈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면서 나는 점점 두려워졌다.

잉태된 생명을 지워야 하는 죄책감에 앞서 주위에서 받아야 할 비난과 걱정에 잠을 이룰 수 없는 나는 차라리 멀리 도망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경제적 능력이라고는 없는 나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다행히 입덧은 하지 않아 표가 나지는 않았다. 고통스러운 나날이 끔찍하게 흘러갔다.

몇 달이 지나자 그가 돈을 마련해 왔다. 전화번호부에서 여자 의사가 운영하는 산부인과를 찾아내 예약하고 낙태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나는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있어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강원도로 이박삼일 여행을 떠났다.

한 민박집에서 코펠에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는데 그가 옆에 쪼그려 앉아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으니 주인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아유, 그렇게 좋을까? 도무지 색시한테 눈을 떼지 못하네.”

그는 민망해하며 물러났다. 나는 담담히 산과 바다를 즐기며 그와 함께 쓴 흑역사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죄책감과 우리가 한 실수에서 비롯된 고통은 나의 뇌리에 검은 흔적을 남기고 자괴감을 실어왔다. 섹스가 어떤 것인지 알고도 탐닉한 자신에게 회의하며 이성 간의 육체적 친밀함이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태양처럼 빛나는 열정과 함께 비천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행위를 멈추고 싶었다. 그를 남편으로 선택하고 싶지 않은 이기심과 그의 독점력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유의지는 그가 군대에 가면서 연락을 단절하였다. 마치 모든 잘못이 그에게 있다는 듯이 그를 영원히 잊어버리고 싶었다.

발령이 나기를 기다렸던 시간은 지루했다.

강원도 부모님께 가 있다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무작정 올라왔다.

인천 선배가 운영하는 카페 겸 경양식집에서 몇 달 숙식하며 일을 도와주었다. 나보다 나이가 두어 살 어린애와 함께 한밤중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정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선배와 친척이었던 착한 처녀였다.

그러다가 동인천에서 가장 큰, 주간 다실 야간 술집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곤 했던 인연으로 취직하여 주간에 차를 날랐다. 근무 시간이 짧고 보수는 더 많았다. 오후 시간에만 대학생들로 번잡하여 좀 힘들었다. 지금은 카페나 테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그때는 그런 문화가 시작되기 전이라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전이면 넓고 안락하던 홀 가득 흐르는 음악은 나를 위안해주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어린 청년들은 모두 착하고 순진했다. 나는 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순한 성격의 여자애와 근처에서 자취했는데 신기하게도 그녀는 내 이름을 가명으로 쓰고 있었다.

나는 생떼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읽으며 심취해 있었다. 그 주옥같은 문장에 매료되었다.

소나기가 내리는 오후 창밖의 빗줄기를 내다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어제 그곳에 갔던 임 영주입니다. 내일 저녁 같이 식사할래요?”

그는 선배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도 몇 번 왔었는데 친절하고 인상이 좋았다.

여동생들과 함께 와서 식사하며 자리에 동석하자고 권하였다. 나는 사양하였지만 그의 친절이 고마웠다.

어제 홀에서 차를 나르는 나를 보고 그는 반갑게 인사하였다.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는 사이사이 나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빗소리와 함께 들리던 그의 성량 좋은 목소리가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나와 어두운 경인선 기찻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군대를 다녀와서 인하대에 복학한 졸업반 대학생이었으니 나보다 네 살 많았는데, 여동생이 넷이나 되는 주유소 집 외동아들이었다. 그래서 졸업 후 취직하면 곧 결혼할 거라고 했다. 늦게 결혼하신 부모님은 그가 빨리 결혼해서 손주를 낳기 바라신다며 웃었다.

나는 그때 ‘결혼’은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감명 깊게 읽은 ‘어린 왕자’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를 다른 별 어린 왕자 곁으로 데려갔다. 그는 즐거워하며 어린 왕자가 아닌 내게 빠져들었다.

나는 빨간 중간 높이의 통굽 구두를 신고 그와 걸었는데 갑자기 한쪽 발에 쥐가 나서 기차 레일에 주저앉았다. 그는 구두를 벗기고 나의 발을 정성껏 주물러 혈액 순환을 순조롭게 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자신의 심장에 큐피트의 화살을 쏟았노라고. 

그는 자기 집이 근처라며 잠깐 들리자고 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호기심에 따라갔다. 일전에 본 적이 있는 여동생이 나와 인사를 나누고 그의 방을 구경했다. 방에는 책이 많은 책장과 책상, 침대, 그가 치는 것 같은 기타, 오디오 등이 있었다. 나는 행여 부모님이라도 만날 까 봐 금방 나왔다. 그가 자기 집까지 나를 데려간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하였다.

별이 총총하던 여름밤 그와 함께 했던 낭만적인 시간이 몇 장의 사진처럼 내 기억에 남아 그리움을 불러온다.

그후로 그는 내가 결혼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연락하지 않았다.

그는 길들인 존재에 대해서 책임지는 나의 왕자님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준비되지 않은 어린 장미에 불과했다.

 

그곳에서 일한 지 딱 일주일 만에 큰오빠가 찾아왔다.

“네가 술이라도 날랐으면 넌 나한테 무사하지 못했어. 당장 올라가자.”

나는 주간 근무를 끝내고 자취하던 집에 가 있었는데 호출당하였다. 한마디 반박이나 변명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나서야 했다.

열 살이 위였던 큰오빠는 상전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아빠 같은 위세였다. 어떤 저항이나 설득도 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순순히 오빠를 따라 갔지만 그 일은 부부 사이에 합의된 일이 아니었다. 오빠는 어려움에 처한 동생을 잠시 데리고 있는 일을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아내는 시누이를 동의도 없이 데리고 온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부부가 다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성질이 불같았던 오빠는 처가댁 형님과 누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그들 앞에서 내 가족을 몰라라 하는 이런 아내와는 살 수 없으니 이혼하겠다며 그녀에게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말했다.

오빠와 친했던 사돈 형제는 말했다.

“진정해. 이럴 일이 아니잖아. 우리를 봐서 참아. 너는 어서 잘못했다고 빌고 고모에게도 사과해.”

놀란 그녀는 남편에게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그리고 내게도 사과했다. 나는 이 사태가 몹시 불편했다. 나로 인해서 벌어진 분란에 자존심이 상하였다. 그러잖아도 싫었던 올케가 정말 너무도 싫었다. 그녀는 또 얼마나 내가 싫었을까? 선택의 여지 없이 큰오빠에게 순종해야 하는 내 처지가 서글펐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원도 부모님께 가 살면서 잠자코 기다려야 했었다. 그러나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무력한 시간을 참지 못하고 독립을 꿈꾸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큰오빠는 정말 이혼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에게 반발하는 아내의 기를 누르고 동생을 보살피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올케는 그때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정말 두려웠을 것이다.

큰오빠는 자신이 다니던 회사에 취직시키겠다며 내게 영문 타자학원에 등록하게 했는데 두어 달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큰오빠의 수양 누이이자 올케의 언니였던 이가 상가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남대문 시장에 있는 일명 도깨비시장이라는 곳인데 진짜 없는 물건이 없을 만큼 다양한 수입 상품들이 가게마다 가득한 상가였다. 바로 상가로 들어가는 길목을 몇 계단 내려가면 코딱지만 한 잡화점에 점원이 되었다.

나는 아침 9시경 출근해서 물건을 진열하고 커피 우유를 한 잔 마시며 한갖지게 하루를 시작했다. 악세사리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잡화를 팔았다. 한두 시간 지나면 사돈 언니가 물건을 사가지고 왔다. 나는 상품을 예쁘게 진열하는 것을 좋아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우리는 친해졌다.

그녀는 이혼하고 빚을 내어 가게를 차렸다. 그 가게는 여러 사람이 망해서 나간 자리인지라 싸게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결혼 전에 종로에서 음식점 등을 한 경력이 있고 수완이 좋아서 일 년 만에 빚을 모두 갚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시장에서 알게 된 용어 중‘홈런’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건 원가의 배를 받고 팔았을 때를 말한다. 간혹 그런 물건들이 있었다. 다른 가게에는 없는 꽤 좋은 물건들이었는데 진짜 수입품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홈런을 치면 기뻐서 언니는 퇴근할 때 꼼장어 구이를 사주었다. 나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것이라 꺼렸지만 차츰 그 고소한 맛을 알게 되었다.

밤거리 시장 바닥 나무 의자에 앉아 그녀와 꼼장어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은 즐거웠다. 그녀는 어쩌다 진상을 만나면 간 후에 작은 소리로 '좆 같은 ×' 하며 웃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기겁했다.

'괜찮아. 그런 말 들어도 싸잖아. 스트레스 푸는 거야.'

그녀는 한 푼을 아끼는 구두쇠였지만 써야 할 때는 선뜻 쓸 줄도 아는 통 큰 여자여서 인색한 내 올케와 한 형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가 이혼한 이유는 남편의 음주 후 폭행 때문이었다. 평소에 양반처럼 온순해 보이는 남편은 술을 먹고는 그녀를 때렸다고 하는데 가족들은 믿기지 않아 그녀가 대들다가 맞은 게 아니겠느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당한 폭행에서 응급실에 실려 가는 참사를 보고는 그녀의 말이 다 사실이라고 믿고 이혼에 동의하였다.

그녀는 헤어졌다 합치기를 여덟 번이나 했는데, 폭행의 정도는 갈수록 심해졌다. 마지막으로는 문을 닫아걸더니 골프채로 때렸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남편이 그녀에게 심한 열등감을 느낀 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부모의 집안 형편이 넉넉한 그는 직업을 그만두기 일쑤였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으니 그녀는 당연히 불만이 쌍였을 것이다. 평소에 아주 양반이던 그는 한 번씩 술을 많이 먹고 행패를 부리며 그녀에게 화풀이하였다. 그 과정을 모두 겪은 어린 딸은 반푼이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시설 좋은 요양원에서 산다고 한다.

그녀는 사업수완이 좋고 성실한 사람이라 오래지 않아 의류 사업을 일구어 퇴계로에 빌딩을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 물론 큰오빠가 그녀를 도와 사업을 번창하게 해주었다. 처음으로 컴퓨터 시설을 도입하여 백화점마다 매장을 두고 번성했다. ‘데미안’이라는 의류 상표를 지금도 기억한다.

나는 그녀와 일한 지 몇 개월 안 되어 발령이 나서 그만두어야 했다.

“네가 선생만 아니면 나랑 같이 장사를 하자고 하고 싶지만 그래도 상인보다는 교육자가 나으니 좋은 선생님이 되어, 봉투 같은 거 받지 말고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어.”  

그녀는 가게에서 파는 좋은 수제 가죽구두를 선물로 주었다. 그 구두는 갈색 통가죽에 예쁜 무늬를 넣은 엔틱 구두였다. 내 마음에 쏙 드는 고급스럽고 질 좋은 디자인이었다. 지금의 ‘탠디’ 양화점의 시초가 된 구두 중 하나였다.

그때는 직원이 몇 컬레의 구두를 가져와 팔아달라며 금액도 후불로 받았다. 좀 비싼 구두였지만 반응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 시장에서 근무할 때 맞은편 식료품 가게에 나와 부모님 대신 잠깐씩 일을 돕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나를 지나치면서 슬쩍 윙크했다. 싫지 않은 인상의 청년이었지만 나는 못본 척했다. 그곳에서 장사하는 청년과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먹지 않는 음식도 많고 가리는 것도 많은 정신적으로 몹시 미숙한 인간이었다.

며칠 후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그가 말을 걸어왔다. 차를 한 잔 마시자는 청을 거절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는 호시탐탐 노리며 두어 달 동안 말을 걸어왔다. 마치 기어코 나를 승복시키겠다는 의지를 지닌 것처럼 늘 웃는 얼굴로 선선히 대했다.

나는 손님이 없을 때 무료함 대신 그가 보내는 관심을 싫은 척 즐겼는지 모른다. 그는 키가 크고 육체적인 매력을 느끼게 하는 청년이었다. 결국 그와 차를 마시고 밥을 먹게 되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서슴없이 내 손을 잡고 야외로 나갔다.

한여름 무창포 바닷가로 놀러 갔다.

노을이 붉게 물드는 저녁 시간 그는 윗몸을 드러낸 채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이종용의 ‘너’를 열창하는 그의 얼굴에 송송 맺히던 땀방울, 석양은 그를 아름답게 조명하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게 되는 노래를 좋아하고 부르게 되는 모양이다. 그 당시 히트했던 곡인데 그 내용은 이별 뒤의 쓸쓸함을 노래한 곡이었다. 나는 이 노래를 그를 통해 처음 들었다.

마치 늘 입고 있던 외투를 벗고 버리고 느끼는 추위처럼 나는 남자친구와 헤어진 쓸쓸함을 느끼고 있을 때라 그의 유혹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청춘을 즐기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을 것이다.

하룻밤을 같이 지내게 되었을 때 나는 한사코 그를 거절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나를 유혹하며 회유했다.

“나 처녀야. 네가 날 임신시키면 책임져야 해. 그러니 제발 선을 넘지 마.”

나는 거짓말까지 하며 그를 말렸지만 그는 소리내 웃으며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나랑 결혼하자. 내가 너 책임질 수 있어.”

나는 그를 이길 수 없었고 우린 뜨거운 욕망을 즐기며 현실에서 멀리멀리 달아나 우리 둘만의 세상으로 날아갔다

육체적 쾌락은 그 자리를 벗어나면 제정신을 차리게 된다. 나는 그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그는 그럴수록 내게 더 자주 다가오며 집착했다.

우연히 그가 떨어트린 주민등록증을 집어본 나는 그 역시 내게 거짓말한 것을 알았다. 그는 나보다 두 살이 어렸는데 오히려 두 살이 위라고 말했었다. 그는 나이로 내게 밀리기 싫었다고 실토했다. 우린 결국 서로 거짓말한 것을 인정하며 웃고 말았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나는 온갖 핑계를 대며 그를 만나지 않자 그는 분노하기에 이르렀지만 나는 단호하게 그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마침내 그는 물러났다.

요즈음은 데이트 폭력이 무서운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 만 해도 젊은이들이 그토록 그악스럽지는 않았다. 그는 착하고 육체적 매력이 강한 사내였지만 내가 원하는 동반자는 아니었으므로 거절했을 뿐이다.

당시 결혼 적령기라고 하기에는 이른 나로서는 이성 관계의 경험이였으며 선택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 끌려서 잠시 즐겼지만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나보다는 그가 더 나를 좋아했던 입장에서 보면 상처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중년이 되어 친구와 함께 그 상가에 물건을 사러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얼핏 그처럼 느껴지는 중년의 남자를 보았다. 얼른 지나쳐 먼발치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십 대 초반의 그보다 훨씬 더 보기 좋게 나이 든 모습으로 편안한 인상이었다. 아마도 부모의 장사를 이어받아 좀 더 확장한 것 같았다. 나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와의 추억이 몇 장의 사진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7. 초임 교사 시절

 

철없는 대학 시절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덕에 꼬박 일 년이 지나 발령이 났다. 그래도 발령받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간 교육청에서는 먼저 온 사람부터 가까운 곳을 준다며 역에서 10분 거리 안에 있는 학교를 배정해 주었다.

나와 같은 졸업반이었던 동창 둘은 그곳에서 또 한 번 시외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벽지로 배정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야말로 운이 좋았다. 나중에 그들을 만나니 교통의 불편함을 호소하였다. 하루에 두 번 다니는 시외버스를 이용하던지 놓치면 요금이 턱없이 비싼 택시를 타야한 거다. 심지어 같은 과 동창은 그곳의 불편한 교통으로 인해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로 파면까지 당하였다. 군인 차를 자주 얻어타고 드나들면서 구설수에 오르고, 무남독녀였던 그녀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했는지 연애를 하였는데 한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동네 어른들의 지탄을 받아 결국은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다. 또 한 동창은 너무 이야깃거리가 많아 그녀만의 이야기를 따로 써야 할 사람이다.

발령장을 받고 학교를 물어물어 찾아가니 36학급의 생각보다 큰 학교였다. 이층 본관과 좀 떨어져 낡은 목조건물이 길다란 건물이었다. 넓은 운동장 아래로는 자연 학습용 숲도 있었다. 큰 바위들과 함께 작은 관목들, 풀이 우거진, 자연스러운 계곡 느낌의 학습장이었다. 그 당시에는 서울에서 먼 곳이라는 불편함만 생각할 뿐 얼마나 좋은 근무지였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이미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며칠 지난 때라 교장 선생님은 빨리 근무를 시작할수록 좋다고 하셨다.

다음 날로 큰오빠는 이불 보따리를 들고 함께 와 학교 근처에 월세방을 얻어주었다. 근처에 물어보았으나 하숙은 아예 없다고 했다.

“한달치 월세는 냈으니까 다음 달부터는 네 힘으로 살어.”

그렇게 난생처음 와보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에서의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먼저 발령받아온 대학 동창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이곳이 무서워서 일 년이 다 되도록 짐을 다 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했다.

나는 의아했지만 어느 날 저녁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역에서부터 군인들이 많이 보였는데, 이북이 가까운 곳이라 군인들이 훈련하는 대포 소리가 뻥뻥 들려서 처음 듣는 이들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몇 달 지나자 익숙해져 그러거니 적응할 수 있었다.

나는 홀로 저녁이면 음악을 들으며 다음날 학습 준비를 하거나 소설책을 읽다 잠들었다. 새벽잠이 많은 나는 행여 늦게 일어날까 봐 자명종이 울리는 탁상시계를 준비했다.

빵, 짜장면, 라면, 다음날도 빵, 짜장면, 라면을 거듭하다 주말이면 집에 가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집밥을 먹으면 정말 맛있었다.

5학년 아이들 담임을 맡았는데, 그 반은 전 담임이 일 년간 수업 훈련을 잘 시켜 분반하지 않은 채 그대로 올려보내어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아이들은 나를 누나나 언니처럼 따르며 좋아했다. 화단의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을 때 나는 잔디와 잡초도 구분하지 못해서 아이들이 알려주며 웃기도 했다.

옛날 시골 학교는 수업보다 여러 가지 잡일이 많았고 행사도 많았다.

가장 잊혀지지 않는 행사 중 하나가 학예회와 운동회였다.

가을 운동회 때는 처음 마스게임이 주어져 마음고생이 심했다. 3·4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포크 댄스를 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는데  쪼그만 녀석들이 남녀 내외를 하는지 손을 잡지 않는 통에 애먹었다.

수준 높은 교장선생님은 학예회 때 뮤지컬 연극을 주문하셨다. 그분은 선생님들과 동네 유지분들에게 존경받는 분으로 남다르신 분이었다. 다른 곳으로 옮겨 가셔서 은퇴하시기 전 석사학위를 받을 만큼 학구력이 강하였다. 그 이유를 선생님들의 본이 되고 싶어서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배 선생님과 함께 학예회 때 쓸 각본과 음악 등을 준비해야 했다. 지금처럼 음악 문화가 성행하지 않았던 때라 뮤지컬을 본 적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 드라마센터에서 본 연극이 다였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해야 하는 시대였으니 그 난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두어 달 기간 중 한 달을 낑낑거리며 궁리하다 연습을 시작하고 드디어 5월 8일 어버이날 막을 올렸다.

전공하지 않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는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무대의상도 배경도 모두 손수 준비해야 했다. 동물극을 준비해서 가면을 만들고 익숙한 동요들에 가사를 붙여 아이들에게 율동을 가르치고 노래를 부르게 했다. 배경음악으로는 클래식 음반을 구해 곡을 선별하여 녹음하며 편집했다. 

아이들을 매일 만나 연습하며 가르치는 일은 어려움에 비례하는 즐거움도 컸었다. 순진무구한 아이들과 교감하며 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웃기는 일이 많았다. 저·중·고학년 아이들 중에서 똘똘한 아이들을 선별하여 공연했던 기억이 난다. 수업이 끝나면 모두 한 교실에 모여 연습했다.

 

그런데 정말 잊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공연을 한 차례 보여주고, 오후에는 면에 하나 있던 군인극장에서 부모님과 지역유지분들을 모시고 공연하였다. 프로그램은 다채로워서 어린이들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기들을 총동원하여 보여주었다. 그중 뮤지컬 연극은 단연코 인기가 있었다.

프로그램이 반쯤 지나고 뮤지컬을 시작한 지 십여 분쯤 지났을까? 

“학교에 불이 났다!”

순식간에 모든 관객이 일어나 웅성거리며 나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뛰쳐나가 학교를 바라보니 시뻘건 화염이 치솟으며 타고 있었다. 젊은이들을 비롯한 주민들이 일제히 한 줄로 늘어서더니 양동이 물을 릴레이로 날랐다. 지금 생각해도 그 광경은 대단히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한 컷 뛰어난 영상이었다 

어둠 속에서 재빠르게 줄지어 운반되던 양동이들이 불이 붙은 교사에 퍼부어졌지만 불은 여섯 개 교실을 순식간에 모조리 훨훨 태우고서야 잦아들었다. 그리고 동두천에서 싸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소방차는 남은 불씨를 제거하기 위해서 물을 더 퍼부었다.

오학년이 공부하던 교실 6개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시커멓게 남은 재에서 매케한 연기가 코를 찔렸다.

교실에 있던 물건들이 사라진 건 말할 것도 없고 고사리손들이 매일 공들여 반질반질하게 왁스칠 해 문질렀던 복도의 마루는 흔적조차 없었다. 몇십 년이나 되었다는 낡은 목조건물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불이 번졌다고 목격한 마을 사람이 말했다.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처리가 되었다.

일학년이 사용하던 본관 교실을 5학년이 사용하고 그들은 이학년 학생들과 오전·오후반으로 나누어 함께 교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교육청에서는 곧 교실을 새로 지어준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 달 후 같은 목요일 저녁 8시경 또 한 번의 화재가 일어났다.

이번에도 5학년이 사용하던 본관 2층 교실과 3층 교실 일부가 불탔다. 결국 5학년 어린이들은 또 다른 학년을 밀어낼 교실이 없어서 운동장 끝 계단식 관람석에 가서 수업하게 되었다. 주입식 교육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제대로 수업이 될 리 없었다. 누전이 아닌 방화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특수부 형사가 오기에 이르렀다.

이북에서 넘어온 간첩들의 소행인가도 조사했지만 의심되는 부분이 나오지 않자 범위를 학교로 좁혀 당직 교사를 집중적으로 심문했다. 순찰표에 쓰여진 시간대로 순찰하지 않고 거짓으로 써넣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선생님들마다 한 분 한 분 모두 조사를 받았다. 내게는 주말에 뭘 하는지, 남자친구는 없는지, 월급은 주로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 물었던 기억이 난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라 괜히 불안하고 조심스러웠다.

조용한 교무실에 전화벨이 따르릉! 울리면 모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거나 벌떡 일어났다. 며칠간 계속된 조사에 성과가 없자 5학년 학생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화재가 일어난 시간 학교 근처에서 아무개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압축되면서 5학년 한 아이가 지목되었다.

바로 당직했던 선생님이 담임이었던 나의 옆 반 어린이였다. 놀라운 것은 그 작은 아이가 사실대로 말할 뿐만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게 현장 재현까지 하는 것을 본 선생님은 몸서리를 쳤다. 나는 그때 수업 중이라 보지 못하고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개는 가난한 집 막내아들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채 살았다. 무능한 펀부 슬하에 나이 터울이 큰누나는 동두천에 있는 술집으로 일하러 갔다

아이는 처음 화재 때 교실에 있는 옥수수빵을 가지러 들어갔다고 말하였다.

옥수수빵이라니!

복도 창문은 밖에서 꽤 높아서 창문으로 기어들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는 다람쥐처럼 제 키보다 훨씬 높은 담벼락을 타고 기어 올라가 유리창을 열고 복도로 들어갔다. 복도유리창이 잠겨있지 않았고 교실 창문도 열 수 있었다. 담임은 보안에 허술한 채 퇴근하고 그날 당직도 하였다.

아이는 어두운 교실을 밝히기 위해서 평소 담배를 즐기던 선생님 책상 위에 있던 성냥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교탁 속에 있던 옥수수빵을 꺼냈다. 그 과정에서 불씨가 책상 위에 잔뜩 쌓여있던 시험지에 떨어지고 순식간에 커튼으로 옮겨 붙었다.

빵을 챙긴 아이는 얼른 교실을 나와 다시 유리창을 넘어 담을 타고 운동장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타오르는 화염을 보면서 빵을 먹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불을 끄는 과정을 모두 바라보았다. 아이가 생전 처음 보는 난리통이었다.

배고프고 공감 능력이 부족했던 지적 수준이 정상아보다 낮은 아이는 두려움이나 걱정 따위를 느끼지 못했을까? 자신이 벌인 일의 위중함으로 오히려 으쓱해졌을까?

담임은 행사 준비에 바쁜 나머지 주 1회 공급되던 몇 개의 옥수수빵을 교탁 아래 넣어놓고 깜박 잊은 채 나누어주지 못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 반마다 대여섯 개의 옥수수빵이 지급되었는데, 바로 수업을 중단하고 나누어주지 않으면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오십여 명 어린아이들과 함께 5, 6교시 수업을 진행하면서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 애들 같으면 ‘선생님, 빵 안 주세요?’ 라고 물었을 텐데 그 당시 순한 애들은 선생님을 많이 어려워했었다. 아마도 받아본 몇 명의 아이들만 생각할 뿐 다른 아이들은 의식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선생님이 넣어두고 주지 않은 빵을 기억하고 교실로 찾아간 것이다.

그때는 선생님이 교실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었던 믿기지 않는 시절이었다. 책상에 성냥곽을 두었다는 것은 큰 불찰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한 달이 지나갔다.

 

아이들은 내가 자취하는 집에 가끔 놀러 오곤 하였다. 지대가 좀 높은 언덕에 있는 주택에 살 때였다. 저녁때 아이들이 놀러 왔는데 화장실에 다녀오던 한 아이가 소리쳤다.

“선생님! 저기 불 나요!”

두 번째 불이 나는 학교를 보고는 모두 뛰쳐나가 학교로 달려갔다.

아이는 첫 번째 화재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데다 생전 처음 보는 구경에 기분이 좋았었는지 다시 도둑질을 시도하였다. 어이없게도 이번에는 방위성금을 훔치려고 들어갔다.

교실마다 방위성금통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난한 시골 아이들 코 묻은 돈까지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학교마다 시행했던 일이었다. 권력자들은 엄청난 비리를 저질러 부를 축적하면서 공산주의 척결을 내세운 애국심을 바탕으로 그런 치졸한 행위를 나라 지침으로 전국에 시행토록 하였다.

아이의 담임이 또다시 방심한 건 잔돈이 들어있는 방위성금통을 교무실에 갖다두지 않은 일이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이 좌천되어 다른 학교로 떠나고, 담임이자 당직을 했던 담임 또한 좌천은 물론 일 년 감봉까지 당하며 곤혹을 치루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담임 선생님께는 불만이 없다고 말했다.

촉법소년이었던 아무개는 가족과 함께 이사했을 뿐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담임은 아이의 생활기록부에 방화 사실을 기재하여 전학 서류를 보냈다. 우리는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육청에서는 서둘러 본관 건물을 보수하고 새 건물을 증축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새 건물을 바라보는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아무개가 난 놈이야!’ 회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공무원이란 상관이 책임을 지는 조직이기 때문에 그분의 능력이나 인품이 소용없었다. 대통령의 측근이라면 피해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시대였지만 그분은 누구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8. 근무지에서 만난 동창들

 

오빠가 얻어준 월세방에서 몇 달을 살고 서둘러 전세로 방을 옮겼다. 좀 더 돈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에 몇 달분 월급을 모은 돈에다 친구에게 3부 이자로 백만 원을 빌려 학교 근처 아담한 붉은 벽돌집 문간방으로 이사를 했다.

친구에게 3부 이자를 받은 동창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그냥 빌려주었을 것이다. 물론 내가 먼저 제안한 것이지만 선선히 이자를 다 받을 줄은 몰랐다. 친구에게 고리대금을 하다니!

나는 선생님들이 하는 계를 들어 친구 돈을 갚았다. 이자가 원금의 1/3이 넘었다. 월세를 그 친구에게 준 셈이다.

계라는 말이 나와서 생각이 난다. 결혼하고 아들을 낳은 후 있었던 일이다.

그 이후 친한 처녀 당수 선생님과 동네 유지분들이 하는 낙찰계를 들었다가 모두 날렸다. 그때 친정어머니께서 잠깐 아들을 봐주셔서 어머니 몫으로 들었던 계였다. 낙찰계라는 게 나중에 탈수록 이득이 있어서 11개월이나 돈을 물고 다음 달에 탈 예정이었다. 시장 안에서 가게를 빌려 10년 동안이나 속옷 장사를 하던 계주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빌려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처럼 그녀는 정말 얌전하고 착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여자였다. 아무도 그녀가 그럴 리가 없다고 손사래를 칠 만큼 신용 있고 평판이 좋은 여자였다. 남편과 딸도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며 시치미를 떼고 그녀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꽤 많은 사람의 돈을 가지고 날라버린 거다. 어리숙한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당한 첫 번째 실수였다. 나 말고도 세 사람의 선생님이 함께 했는데 두 사람은 이미 계를 타고 둘이 남았다가 낭패를 보았다.

뒤를 캐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십여 년 전 경상도에 살 때도 그런 일을 벌이고 이곳에 온 전과가 있는 여자였다.

세상에! 십 년간이나 신용을 쌓은 후 횡령한다고!

그렇게 감쪽같이 위장하고 사는 인간도 있다니 놀라웠다.

다시 친구 얘기로 돌아가자.

그 친구는 좀 더 벽지로 들어간 연천군 왕징면 왕산초등학교에서 근무했다.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이라서 아예 처음부터 그곳을 희망했다.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내던 고교 동창이라 그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녀의 집에 두어 번 갔었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지나가는 달구지를 얻어 타고 한참 들어갔다. 땅콩을 많이 생산하는 곳이라 밥도 땅콩밥을 해 먹을 정도였다. 그녀는 몹시 보드랍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날씬하고 균형 잡힌 아담한 체형으로 성격은 좀 무심하고 단순한 편이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나는 돈 벌면 독일제 폭스바겐 차를 사서 탈 거야."

나는 그 딱정벌레처럼 귀여운 차를 그때 처음 알았다. 

대학 때부터 알던 인하대생과 결혼하여 남편이 거제도에서 근무하게 되자 그녀도 옮겨갔다.

한여름 나는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그녀에게 놀러 갔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젊은 시절 세 번째 첩이었다는 시어머니를 공경하며 살고 있었다. 손재주가 좋아 커튼도 손주 만들어 달고 레이스 뜨기로 예쁜 원피스를 해 입는 친구였다.

40대 이후 친구들 모임을 만들어 한동안 만났는데, 인천에서 근무하면서 모임에 나오기 힘들다고 하더니 그만 모임에서 떨어져 나갔다. 많이 뚱뚱해졌다고 한다. 그 당시 그녀의 어머니가 많이 뚱뚱했는데,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다. 딸들은 대부분 어머니를 꼭 닮는다.

 

일 년쯤 근무했을 때 만난 동창 중 한 명은 고등학교 일학년 때 합창단을 같이했던 키가 크고 머리를 짧게 자른, 약간 남성처럼 보이는 친구였다.

월요일, 출근하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그곳 중학교 가정교사로 발령받았다.

가정교사라고? 뜻밖이었다. 그녀는 체육 교사가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얼굴이 못생긴 편이었지만 인상은 괜찮았다. 친해진 후 나는 그녀에게 작게 째진 눈을 쌍꺼풀 수술하라고 권하였다. 한창 그 수술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냥 생긴 대로 살련다. 너나 해라.”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당당함이 맘에 들었다. 나 역시 눈이 작았지만 수술은 무섭고 싫었다. 사람들은 눈웃음치는 작은 눈을 귀엽다고 말했다.

그녀는 곧 내가 사는 곳에 와보고 함께 자취하자 했다. 시장 안에 있는 집 문간방이었다. 안채와 분리되어 살림을 할 수 있게 작은 부엌이 딸린 구조였다.

맘에 들었던 빨간 벽돌집에서 또 이사한 것은 주인아저씨 때문이었다. 착하고 교양있던 주인아주머니가 멀리 친정에 간 주말, 농협에 다닌다는 주인아저씨는 술을 먹어서인지 내 방문을 두드리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불안한 나머지 핑계를 대며 방문을 열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집요하게 이어지는 두들김에 불안한 밤을 보냈다. 다음날로 왕산에 사는 친구를 불러 함께 잤다. 주인아저씨가 더 치근대기 전에 주인아주머니가 오시자마자 바로 방을 빼겠다고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기 민망하여 적당한 핑계를 대었던 것 같다. 지금처럼 서류를 작성하지 않고 구두로 계약하던 허술하고 인심 좋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함께 자취를 시작한 새벽잠이 없는 친구는 아침 식사를, 나는 저녁 식사를 맡았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조금씩 나누어 팔지 않기 때문에 주로 밑반찬을 만들어 며칠 먹고 남으면 모두 버려야 했다.

친구가 아침을 하고 도시락을 싸기 전까지 나는 거의 아침을 굶고 출근했다. 점심에는 중국집 음식을 시켜 먹는데 짜장면, 우동도 하루 이틀이지 정말 진력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라면이나 빵을 많이 먹었다. 지금처럼 배달이나 제과점 고급 빵이 흔한 세상이 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몇 달 밥을 해 먹던 우리는 곧 지쳐서 근방 음식점에다 한 달 분 식사비를 내고 사 먹어보았다. 여러 가지 메뉴를 돌아가며 먹었지만 집밥하고는 달랐다. 곧 그것도 진력나서 그만두었다. 우리는 다시 밥을 하고 도시락을 쌌다.

친구는 새벽에 일어나는 대신 초저녁이면 학교에서 다 못한 일거리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깊이 잠들었다. 한 마디로 감성적이지 않은 친구였다. 나는 홀로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몇 시간씩 더 있다 잠들었다. 휴대용 축음기로 좋아하는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외로움을 달래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노래는 송창식, 윤형주의 트윈폴리오 음반이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눈물을 글썽이며 들었던 ‘웨딩 케잌’...

친구는 깨지도 않고 쿨쿨 잘 잤다.

그녀는 대학 때 사귄 선배와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다. 결혼하기 전 그가 휴가를 나와 자취방에서 셋이 잠든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유치한 언행을 어렴풋이 들으며 나라면 저런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 생각하며 잠들었다.

결혼 후 그들은 참 많이도 싸웠다. 한 번은 그녀의 신혼집에 갔다가 깜짝 놀랐는데 가재도구가 망가질 만큼 육박전을 했단다. 덩치 큰 그녀답다. 그래도 그들은 헤어지지 않고 끝까지 함꼐 살았다. 주색을 좋아하던 그는 아이스하키 선수를 할 만큼 건강한 체육 교사였지만 ‘술에는 장사가 없다' 는 말을 증명하듯 췌장암 투병을 하다 육십 초반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그를 돌보며 넋두리 했다.

"술 · 담배 좀 그만 먹으라면 내가 술 못 먹는 날이 제삿날이야. 큰소리 치더니 이젠 틀렸어."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는 수도사처럼 마른 몸으로 맑은 안색이 보기 좋았다. 그는 만삭의 뚱뚱한 몸으로 검붉은 안색이었는데 몰라보게 변한 모습이었다.  · 담배 모두 끊고 잘 먹지 못하면서 몸에 쌓였던 지방질과 독소가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는 죽는 날까지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 못했는지, 희망의 줄을 놓을 수 없었는지 그가 떠난 후 친구가 찾아낸 통장에는 비상금이 일억이나 되었다.  그녀는 횡재한 느낌이었다며 웃었다. 

젊었을 때도 하지 않던 쌍꺼풀 수술을 하였는데, 얼마나 인상이 사나워 보이던지 꿈에 볼까 무서웠다. 그렇게 몇 년 동안 계속 사나워 보였다. 지금은 눈꺼풀이 쳐지면서 좀 나아졌다. 

그녀는 그리 슬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점차 멋을 내고 마음껏 여행하며 자유롭게 인생을 즐겼다.

 

또 한 동창이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전근을 왔다.

그녀가 전근 오기 전에 우연히 버스 터미널에서 그녀를 만났었다. 나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이었고, 그녀는 어딜 다녀오는지, 하루 두 번 근무지로 들어가는 시외버스를 놓쳤다며 난감해했다. 나는 내 집에서 하룻밤 자고 낼 아침 일찍 들어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선뜻 응하며 고마워했다.

친구는 아니었지만 같은 학교를 나온 친근감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중고교 때 같은 반을 한 적이 없고 대학 때도 졸업생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다만 오며 가며 얼굴은 보아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복도에 성적순으로 이름을 쭉 나열해 붙였는데, 그녀는 나와 이름이 같아서 자기인 줄 알고 보면 아니어서 실망했었다고 말했다. 늘 자신보다 한참 앞에 있었다고 기억하며 웃었다.

“내가 차를 잘못 탄 거 같아. 그런데 내릴 수가 없어.”

그녀는 막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왔다는데 그런 말을 해서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알고 보니 결혼을 잘못했다는 고백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전근해 와서 동학년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또 한 마을에 집을 얻어 살면서 자주 왕래하고 마음을 터놓고 지냈다.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는 멋쟁이였다. 길지 않은 머리는 곱게 웨이브 지고 그녀의 고운 손에는 항상 메니큐어 칠이 반짝였다. 양장점에서 맞춘 정장을 주로 입었다. 시골에서는 눈에 띄는 세련된 옷차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고 일 처리가 빨랐다.

나는 허약 체질인데다 일 처리를 꼼꼼하게 하면서 늘 힘에 부쳤다. 

“넌 피곤하지 않을 때가 언제냐? 왜 매일 피곤해?”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나를 그녀는 딱하게 여기면서 식사 자리에 자주 데리고 나갔다.

이 친구와는 십여 년 이상 알고 지냈는데, 멀리 떨어져 살면서 소원해졌다. 지역적 거리 때문은 아닌, 나와는 너무 다른 의식의 이질감 때문이었다. 내가 본 그녀의 삶은 소설 한 편을 따로 써야 할 만큼 다양한 연애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다. 지금이라면 아마도 그녀를 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는 그녀를 계속 친구로 여길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그녀를 소재로 소설을 쓸 생각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다. 언젠가는 소설 속에서 그녀를 만날 것이다.

 

9. 결혼 적령기

 

이 년간 헤어졌던 그를 다시 만난 건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신앙과 상관없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날이다. 나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특별한 크리스마스 날을 맞이하곤 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어릴 때 교회 선생님은 ‘착한 어린이는 산타할아버지께서 선물을 주신다’고 했는데 나는 한 번도 선물을 받지 못해서 내가 착한 어린이가 아닌가? 산타할아버지는 왜 내게 한 번도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교회에서 주는 선물이 그나마 위안이 되긴 했지만 정말 서운했었다. 나중에 그건 부모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속은 것이 억울했다. 그래서 내 아들의 유년기에는 매년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면서 즐거움을 나누었다.

그는 군 복무를 마칠 때쯤 자유롭게 외출을 할 수 있었다. 헤어졌던 시간이 무색하게 우리는 다시 친숙해졌고 함께 욕망의 춤을 추었다. 덜컥 임신하자 스물네 살이면 결혼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결혼 적령기가 따로 없지만 그때는 스물다섯 즈음이면 결혼하기에 좋은 나이라고 여겼다. 올드미스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였다.

그는 복학해야 했지만 내가 직장을 다녔으니 생활하는데 지장은 없었다. 

지금은 결혼 전 임신도 축복이지만 그때는 흉이 되던 시대라 결혼을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형과 누나가 있는 그는 말을 꺼내기 힘들었는지 상견례 날짜를 잡지 않고 미루어서 나를 초조하게 했다.

나는 그와 헤어졌던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며 갈등했지만 결정했으니 그를 믿고 기다렸다. 다시 아이를 지우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왜 우리는 피임에 철저하지 못했을까? 그가 콘돔만 사용하면 되는 일인데, 나는 어리석게도 배란주기만 계산했을까? 왜 성욕을 그토록 부끄러워했을까? 피 끓는 청춘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욕구였는데 학교에서 가정에서, 또 교회까지 금욕을 권장하는 사회 분위기는 혼전 관계를 죄악시하였다.

그가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어리석은 나는 편안한 그에게 너그러웠다.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나의 채근에 그는 부모님께 나를 데려갔다. 어머니께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해서 셀러드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셀러드가 흔한 음식이지만 그때는 별식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손수 음식을 한 상 가득 준비하셨다.

야채와 과일을 마요네즈에 버무린 셀러드도 한 접시 내 앞에 놓아주셨다.

음식을 먹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체격이 크고 인자해 보이는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네가 힘들겠구나. 우리 애가 아직 졸업을 안 해서... 혼수 걱정은 하지 말거라. 우리가 다 알아서 준비할 테니 너는 건강에만 신경 쓰거라.”

대기업에 다니시다 좀 일찍 은퇴한 시아버지는 경제력이 있어 내게는 아무 부담도 지우지 않으셨다. 흔쾌히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 보조를 해주겠다고 하셨다.

결혼 날짜가 잡히자 나는 부모님과 오빠에게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결혼 안 시켜줄까 봐 이 난리를 쳐!”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큰오빠는 쇼파 위의 쿠션을 내던지며 화를 냈다.

어머니는 큰오빠를 말리며 그를 보자고 하셨다.

“우리 귀한 딸 고생시키면 안 되네.”

그 말씀을 했을 뿐 다른 말씀은 없었다. 그는 모든 조건이 나보다 못할 게 없는 데다 임신했다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사실은 제가 알아서 알맞은 나이에 남자를 구하고 아이도 가졌으니 잘한 일이었다. 인물이 빼어난 것도 아니고 집이 부자도 아니고 학벌이 그보다 나은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도 졸업하면 취직을 할 것이고 그러면 딸이 직장을 안 다녀도 살 수 있을 테니 자식 키우며 오순도순 살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다. 시댁에서는 혼수도 마다하셨으니 걱정할 일이 없었다.

다만 노처녀인 둘째 시누이에게는 최고급 모직 옷감을 한 벌 선물하였다. 시어머니께서 넌지시 알려주셨다. 유명 모직 회사에 다니던 큰오빠가 그 옷감과 시아버님, 시아주버니 모직 홈웨어를 선물하였다. 수출하는 쳬크무늬 모직 홈웨어인데 쳬격이 컸던 시아버지께 잘 맞았다. 양재 기술을 배운 시누이는 맘에 들어 하며 자기가 만들어 입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잘 만들어 입었는지 물었더니 망쳤다고 짧게 대답했다. 

 

시댁에서는 간단한 패물과 옷값을 주셨다. 나는 진주 목걸이와 반지를 사고 채도가 낮은 빨간색 투피스 한 벌과 품이 넉넉한 하늘색 코트를 종로 유명 양장점에서 맞추었다. 최고급 옷은 모두 양장점에서 맞춰 입었던 시대였다. 또 한복을 지어 입으라고 살구색 계통의 실크 옷감을 주셨는데,  그 고급 옷감을 소화 시킬 자신이 없어 계속 가지고만 있다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구를 준비한 전셋집도 마련해주셨다. 바로 전 해에 세째 딸을 결혼시켜 집까지 사주었다고 하니 돈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딸들에게는 미리 유산을 나누어주신 것이라고 그는 알려주었다. 그 시누이는 순서를 기다리다 못해 언니보다 먼저 결혼하였다. 둘째 시누이는 동생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있는대로 심술을 부렸다고 한다. 물론 우리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다. 그만큼 순서에서 밀려난 형제는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던 시대였다. 

바로 전 해에 세째딸을 결혼시켜 집까지 사주었다고 하니 돈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딸들에게는 미리 유산을 나누어주신 것이라고 그는 알려주었다. 그 셋째 시누이는 순서를 기다리다 못해 언니보다 먼저 결혼하였다.

인상적인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내가 꽃을 한 다발 사서 집에 가져갔더니 그녀는 수반에다 멋지게 꽃꽂이했다. 노처녀였던  둘째 시누이는 인물도 제일 빠지고 성질도 못됐지만 재주가 많았다.

나는 부러워서 직장에서 마침 기회가 생겼을 때 꽃꽂이를 배워 사범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고급과정으로 갈수록 돈꽂이라고 생각될 만큼 고급식물들을 사용했다. 바쁜 와중에 교장실과 교무실 꽃꽂이를 맡아 하면서 칭찬받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말마다 몇몇 동료들과 꽃꽂이하러 가면서 즐거움을 나누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종로에 있는 유명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했다. 전날 신부 화장을 위해 처음으로 마사지도 받았다. 그러나 신부 화장을 세련되게 하지 못했는지 나중에 친구가 말했다.

“평소 네가 하던 화장이 더 낫더라.”

하얀색 펄이 들은 아이새도우 색조가 맘에 들지 않았는데, 역시 별로였나보다. 예식장 비용을 시댁에서 다 부담해서 예식장에서 해주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했다.

그는 바로 제대해서 머리가 짧은 게 싫다며 가발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가발은 무슨, 짧은 머리면 어때. 괜찮아.”

나중에 사진을 보니 그의 짧은 머리가 유치해 보이고 머리를 올린 나보다 그가 어려 보였다.

나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남에게 보여주고 인정받아야 하는 결혼식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내가 이제 가정을 이루어 산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외로움이 사라지고 남편과 행복하게 살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전날 꿈을 꾸었는데 드레스를 입고 미장원을 못 찾아 헤매며 안타까워하다 깨었다. 그건 안 좋은 예감이었다. 

주례사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혼자 속 끓이며 이런저런 갈등했던 시간들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화장이 지워질 텐데 생각했지만 한 손은 그의 팔짱을 끼고 또 한 손은 부케를 들었으니 눈물을 닦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몸을 돌려 하객들에게 인사하기 직전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10. 애가 애를 키우다

 

주위에서는 ‘애가 애를 낳았어.’ 라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체구도 작고 날씬한데다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동안이었다.

봄의 축제가 벌어지는 환한 오 월 이십 일 오후 두 시 사십 팔분.

6시간이 넘는 산통을 견디고 아이를 낳았다. 이젠 내가 죽나보다 하는 순간 아이가 태어나고 통증이 사라졌다. 아니 잠깐이지만 다시 따끔따끔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살짝 찢긴 회음부를 꿰매는 것이라고 했다.

그 신기한 경험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겠는가!

“아기가 건강한가요?”

출산하기 전 혹시라도? 불안감이 있었기에 물었다.

의사는 만족한 얼굴로 건강하다고 답해주었다.

3.2kg의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은 기쁨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여자가 생명을 잉태하고 세상에 내놓는 일보다 위대한 일이 얼마나 더 많을까! 그 생명의 소중함은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나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모성은 본능일 수밖에 없다. 입덧으로 잘 먹지도 못하고 무거운 배를 몇 달씩 안고 가슴을 치받는 통증을 참으며 발길질하는 생명을 느끼는 신비함은 나라는 존재를 특별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한편 남산만 한 배가 많이 부끄럽기도 했다. 이제는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놓고 알리는 일이 남사스럽다고 할까? 결혼하면 당연한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랬다.

출산 예정일보다 일주일 늦게 태어난 아이는 그때부터 뭐든 미루는 성격인 것을 진즉에 알았어야 했다. 한 달 휴가를 아기가 일주일 먼저 사용한 셈이다. 너무 힘들어서 출산일보다 일주일 먼저 쉬기 시작했으니 결국 삼주일 만에 직장을 나가야 했다. 출산휴가가 딱 한 달이었다. 교단에 섰을 때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는 감당할 수 있었다.

지금은 세 달 휴가에다 원하면 삼 년까지 휴직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향상된 복지인가! 아기의 심신 발달을 위해 최소한 삼 년은 엄마가 아이를 양육해야만 한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알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초유는 꼭 먹여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직장을 계속 다니면서 젖앓이 하는 딸을 본 시어머니는 애도 어미도 고생하니 아예 젖을 물리지 않는게 좋다고 하셔서 그대로 순종했다.

초유가 아기의 면역성에 그토록 중요한지 알았다면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조석으로 두 번은 먹였을 것이다. 의사는 단 한마디 권유도 하지 않고 조치를 취해 주었다. 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선배가 재래식 화장실에서 아픈 젖을 짜버리는 것을 보고 놀랐던 나는 수월하게 통증 없이 직장에서 일할 수 있었다.  

아들을 안고 우유를 먹이는 내 모습을 보고 친정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아기가 어미젖을 못 먹고 소젖을 먹다니, 쯔쯧...”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지만 준비가 철저하지 못한 나는 너무 쉽게 어미가 되었다. 결혼 수업도 엄마 수업도 받아본 적이 없는 데다 스스로 공부해볼 새도 없이 바쁘고 고단한 날들이 이어졌다.

소젖을 먹어서일까? 중요한 시기를 10여 년 헤어져 살아서일까? 아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하는 편이다.

지금도 아기처럼 수시로 우유를 먹는다. 한겨울에도 얼음을 잔뜩 넣은 커피우유를 마신다. 위장에 부담을 줄 텐데 걱정이 되지만 아들을 임신했을 때 나도 찬 얼음이 많이 먹고 싶었다. 추운 겨울 문밖에다 얼음을 얼려 깨 먹었다.

언젠가 주역을 공부한 지인이 그의 사주를 보니 불 火가 많아서 몸이 뜨겁기 때문이었다. 체온이 높으면 면역력이 좋고 열정적이지만 허영심이 많은 단점도 있다. 그의 사주를 보고서야 이해하기 어려웠던 아들의 허영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타고난 성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치아를 제외하고는 잔병치례를 하지 않는다.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는 아들이 대학 때 어깨 쪽 등에서 지방 덩어리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지방 대학병원에서는 일주일간 입원까지 시키면서 수술하고 흉터도 둥그렇게 남았다. 몇 년 후 재차 또 한 번 지방 제거 수술을 받았는데 서울 유명 병원에서는 한두 시간 만에 수술을 끝내고 집에 왔다. 숙련된 의사의 차이였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에 있는 동안 친정어머니께서 오셔서 산후조리를 해주셨다. 며칠 안 되어 아이 몸에 온통 발긋발긋 반점이 솟고 울어대서 얼른 병원에 데려갔더니 땀띠가 솟은 거란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예전에는 너희들 다 그렇게 키웠는데...”

어머니는 열이 많은 아기를 강보에 싸서 따뜻한 방바닥에 이불까지 덮어주었으니 탈이 난 거였다.

친정어머니보다 십 년이나 젊은 시어머니께서 너무 어린 갓난애를 못 돌보겠다고 하니 친정어머니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럼 제가 일 년 키워드리겠다고 말씀하셨다.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나는 어이가 없어서 어머니를 나무랐지만 이미 해버리신 말씀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괜찮아. 아직 이 아기 키울 힘은 있어. 그래야 너희도 자주 와볼 거 아니냐.”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나이 많은 친정어머니께 무척 죄송하고 시어머니의 무책임한 처사가 서운하게 느껴졌다.

젊어서도 일하는 사람 두고 살던 시어머니가 혼자 가족 수발하는 것이 힘드셨던 모양이다.

휴가 일주일을 남겨두고 강원도 철원으로 어머니와 함께 아기를 데리고 내려갔다.

그곳에서 남편이 찍어준 사진을 보면 소녀 같았던 내 모습이 아기를 안고 제법 어미 같아 보였다. 세상 잠꾸러기가 아기가 조금만 찡얼거려도 벌떡 일어나 우유를 타곤 했다. 친정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며 다 키우게 마련이라며 웃었다.

며칠 지나 어린 자식을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살짝 눈물이 났다. 그 잠깐 사이 벌써 깊은 정이 들어버렸다.

아기가 보고싶어서 두 주일이 멀다고 부모님께 내려갔다.

어머니께서는 그 어린 아기를 돌보면서 즐거움이 넘쳐 힘든 줄을 모르셨다. 워낙 자식들만 바라보고 사셨던 어머니께서 자식들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은 유배 생활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피곤해서 자주 헐던 입병도 싹 나았다고 하셨다.

자식을 키우는 일은 이렇듯 힘든 줄 모르는 사랑으로 하는 일이다. 그걸 알아가면서 부모의 은혜를 깨닫고 어른이 되는 일이었다.

큰 올케는 아들들을 방학 때도 조부모님께 데려가지 않았다. 학원 다녀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손주들 보고 싶어 하는 어머니를 실망시켰다.

친정어머니는 며느리와 일 년을 함께 살다가 분가해 강원도로 내려가셨다. 그러나 자식들이 보고 싶어 몇 년 안 되어 다시 큰아들에게로 갔다. 사실은 강남 논현동에 이층집을 지으면서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올케가 시할아버지까지 계시는 시집살이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워낙 이기적인 성격이어서 오히려 어머니가 며느리살이를 하면서 힘들어하셨다.

어머니께서 내게 하소연하시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화가 나지만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냥 딸이라고 생각하고 너그럽게 봐주세요. 먹을 것도 눈치 보지 말고 꺼내 잡수시구요.”

어머니는 편들어주지 않는 딸이 얼마나 서운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여간 후회스럽지 않다. 경제권이 없는 어머니로서는 며느리 눈치가 보여 대접해주지 않고 아이들 먹인다고 쟁여놓는 고기 한 점을 맘대로 먹을 수 없었다. 얼굴에 바를 로션이 없다고 해서 내가 사드려야 했다. 올케의 화장대에 가득한 유명 화장품들을 보면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돈 없는 시어머니께 로션 한 병 사드리는 후덕함도 없을까 생각했다.

 

11. 아기 안고 혼자 분가하다

 

일 년 후 아기를 데리고 와서 시댁으로 들어갔다. 시어머니는 일하는 사람을 구하셨는데 딱한 사정이 있는지 네 살쯤 된 어린 딸아이와 함께 왔다. 그래도 없는 거 보다는 나았다.

나는 출근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무엇보다 몹시 고통스러웠던 일이 생각난다. 피임약을 먹었는데 장시간 출퇴근하는 일이 힘들어서인지 버스 속에서 구토가 나면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남편에게 정관수술을 부탁했다. 그는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대학생 아빠였으니 아직 그런 수술은 하기 싫었던 것일까? 내가 불임수술을 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살이 많이 찐다는 등 부작용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냥 피임약을 복용하였다.

분주한 생활에 이삼일 잊어버리면 바로 생리를 해 한 달에 두 번 생리하기도 했다. 결국 그와 동침하는 것을 꺼리게 되고 약한 몸이 지쳐서 견디기 힘들었다.

시부모님, 출가하지 않은 시아주버니, 시누이, 우리 내외, 아줌마와 딸까지 대가족이었다. 우리는 넓은 단독주택 본건물 뒤에 증축한 뒤채에서 살았다. 작은 앞마당 화단에는 연보라색 라일락꽃 나무가 한그루 있어 봄이면 잔잔한 꽃과 함께 코끝에 스치는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조용하게 사시던 시아버지는 번거로웠는지 전라도 정읍에 있는 방앗간을 관리한다며 그곳으로 내려가셨다. 아주머니는 어린애 둘을 돌보면서 살림까지 하는 게 힘들어 보였다. 시누이는 쉬는 날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나는 지인의 소개로 열댓 살 먹은 소녀를 하나 구해서 아줌마를 도와 아들을 돌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시누이가 그 애를 몸종 부리듯 하며 이간질까지 시켰다. 그녀의 경우 없는 처사를 몇 번 겪은 나는 더는 감당이 안 되어 아기를 안고 직장이 있는 전곡으로 내려가 월세방을 구했다.

남편은 주말마다 내려왔다 가고, 학교에서 일하는 수위아저씨의 아내에게 아기를 맡기게 되었다. 장거리 출퇴근을 멈추고 시누이와 갈등이 없으니 빈곤한 생활이었지만 마음이 편해 살 것 같았다.

남편이 졸업하면 곧 취업할 줄 알았는데 그는 중앙정보부 시험을 본다며 취업을 미루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잠자코 기다린 것이 일 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남편은 주인집 아주머니의 부탁으로 고 삼 학생들 몇 명에게 영어 과외지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님네 아들이 낮에 몹시 운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일러주었다.

아들은 순해서 잘 울지 않는 아이인데,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물었더니 아주머니는 미안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딸애가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와 있어서, 그 애에게 아기를 맡기고 내가 일을 다녔어요. 잘 돌보도록 주의 줄게요.”

결국은 딸이 아기를 제대로 돌보지 않자 아기가 불편해 우는 거였다. 마음이 많이 불편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둘째 조카 돌에 아기를 안고 큰오빠 집에 갔다가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지나가는 말로 그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집에 가려고 일어서자 어머니께서 대뜸‘재원일 내가 봐주마’하시며 나를 따라 나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며느리에게 맡기고 내게 오시게 되었다. 어쩌면 너무도 싫은 며느리와의 동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크신 차에 마침 명분을 찾으신 거 같았다.

올케는 시아버지는 좋아했다. 심지어 동네 가게에서 두부도 사다 달라고 심부름시킬 만큼 어려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불평불만이라곤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그 집을 다 지은 뒤에도 구석구석 청소와 손주들 씻기는 일까지 마치 집사처럼 일해 주셨다. 한 마디로 권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착하고 무던한 분이셨다. 그에 비해 어머니는 사리 분별이 명확하시고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었다. 그날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 인사를 드리니 호적초본을 펴놓고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씀하셨다.

“상은 어미는 우리 호적에서 파내야 한다.”

나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버님, 상은 어미 들으면 어쩌시려구! ”

어머니와 나는 서둘러 할아버지 방에서 나왔다. 그동안 얼마나 노여움이 쌓였으면 저렇게 심한 말씀을 하실까 생각되어 마음이 안 좋았다. 그녀의 이기적인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편만 똑 떠내서 살고 싶은, 생각이 미성숙한 여자였으므로 시댁 식구들을 배려하지 않고 제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성격이었다. 식구들은 그녀의 철없는 행동들을 꾸역꾸역 참으며 살았다.

아침마다 양해도 없이 모든 창문을 열어젖혔다. 노인 냄새를 환기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안녕히 주무셨어요?’ 공손한 인사 한마디 없이 뽀루퉁한 얼굴로 화난 듯이 창문을 열고 청소기를 돌린다면 할아버지는 언짢았을 것이다.

“불고기를 재워놓고도 제 새끼만 주지 아버님 상에는 한 접시 올리지도 않아.”

후덕한 성품의 어머니로서는 당연히 노여워하실 일이었다. 사십 년 넘도록 시부모님을 모셔온 어머니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불손함을 일상생활 속에서 다반사로 겪으며 살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야단치거나 다툴 수 없었다. 아들이 벌어오는 생활비로 살아야 하는 데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 오빠는 왜 꼭 상은에미가 용돈을 주게 하는지...”

어머니는 아들이 번 돈을 싫은 며느리에게서 받는 것이 자존심 상하였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반박하지 못하는 게 속상했다. 큰오빠는 고부 사이의 화합을 위해서였는지, 그냥 생활비를 모두 아내에게 주고 알아서 하길 바랬는지 나로서는 잘 몰랐다. 혼자 버는 빈곤한 나로서는 어머니께 용돈을 자주 드리지 못하는 처지가 죄송할 뿐이었다.

결국 어머니는 마침내 괴로웠던 아들네 집을 벗어나 내게로 오셨다.

나는 아들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어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 어머니의 지배 아래 놓이는 사실은 부담스러웠다.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고명딸이었지만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거나 떼를 써본 적이 없이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자식 사랑하는 속 깊은 마음을 알기에 순종할 뿐 저항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시부모님께 무조건 순종했듯이...

큰아들에게 품었던 세속적 희망이 좌절되고 풀이 죽은 어머니가 측은했다. 나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싶었지만 늘 역부족인 체력을 느끼며 스스로 수없이 좌절하며 힘들었다. 그나마 초등학교 교사라도 되어 어머니의 못 배운 한을 풀어드렸으니 다행이었다. 병약했던 딸이 교사라도 되어 흡족한 어머니는 내게 최선을 다하고 싶으셨다.

어머니께서 오시고 어린 아들은 다시 편안해졌다. 나는 맘 놓고 근무할 수 있었다. 체육 시간 조용한 운동장에서 수업하다 보면 놀이시설 아래에서 놀고 있는 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래놀이에 몰두하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학교 현관 한쪽에 탁구대가 놓여서 교사들이 운동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체력이 약한 나는 동창과 함께 퇴근 후 삼십 분씩 탁구 치고 집에 갔다. 시작한 지 며칠 지난 금요일 저녁 집에 들어서는데, 어머니께서 난데없이 싸대기를 올렸다. 나는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혀 방에 들어가 주저앉았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어머니께 꾸중을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딱 한 번 저학년 때 산수 시험을 65점 맞은 것을 본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시험지를 쫙 찢으셨다. 나는 그때의 공포를 잊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어린 시절, 없는 살림에 보약을 지어 먹인 어머니 몰래 구토가 나올 만큼 쓴 한약을 마지막 한 번 내버린 적은 있었지만, 나는 정말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부모님께 꾸중을 듣거나 매를 맞은 적이 없었다.

남편이 곁에 와 앉으며 물었다.

“왜 늦게 왔어?”

나는 시계를 보았다. 퇴근 시간 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는 퇴근 시간부터 나를 기다리며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직장을 다니지 않는 사위가 못마땅했는데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짜증이 났던 것 같다. 사위를 나무랄 수 없어서 먼저 선수를 치신 것이다. 하룻밤을 묵은 그는 바로 서울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사위가 와 한방에서 자는 것이 불편하였다. 나는 시누이와의 불화를 이야기 하지 않고 출퇴근이 힘들어서 내려왔다고만 말했다. 곧 방 두 칸짜리 월셋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자 남편은 주말마다 내려왔다.

결혼 생활이 행복할 거라고 기대했던 나의 환상은 서서히 깨져갔다.

나는 그가 가장으로서 무능력함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졸업하고도 늘 했듯이 어머니께 수시로 용돈을 받아 쓰는 것 같았다. 성인이 되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고 가능하면 부모님께 용돈이나 생활비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가 마땅치 않았다.

 

겨울 방학 중 일급 정교사 강습을 한 달간 받았다. 시골에서 반복되던 단조로운 생활이 동창들을 만나고 다시 학점을 받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이 되어 힘들었지만 즐거움을 느꼈다.

시댁인 성북구 삼선동에서 다니다 주말에 전곡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시누이가 결혼해 나가고 시아주버니도 결혼하였다. 우리가 살던 뒤채는 전세를 놓고 시아주버니네가 본채에 살았다. 방이 여럿 있으므로 남편이 사용하는 방에서 함께 지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도시락을 쌌다. 시아주버니는 아침을 거르고 일찍 출근하고 동서는 주방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남편과 동서의 아침밥을 준비해놓고 바쁘게 집을 나섰다. 저녁 늦게 돌아와 식사하려고 보면 반찬이 너무 없었다. 시아주버니는 회사에서 저녁밥을 먹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동서는 이화여대를 나와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다 늦은 나이에 시아주버니를 만나 결혼하였다. 나는 비서라면 모두 외모가 예쁜 여성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아니었다. 수수한 아줌마 같은 그녀는 곧 딸을 낳았는데, 아이를 본다는 이유로 살림을 소홀히 했다. 싱크대에 덕지덕지 앉은 때를 그대로 볼 수 없어 청소를 해주는 등 나는 고단한 동거를 하면서 그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에게서는 신혼살림을 하는 여성의 아름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공휴일에 한 번 집에 있었는데 그녀는 아침 먹은 설거지도 하지 않고 한나절까지 전화통을 붙들고 수다를 떨며 웃었다.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주부 노릇만 하는 여유를 즐기며 행복한 것 같았다. 저녁때가 되어도 그녀가 방에서 나오지 않아 내가 밥을 지으려고 싱크대에서 빈 그릇을 꺼내 쌀을 씻으려는데 그녀가 내 손에 쥔 그릇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건 아이용이라 쓰면 안돼요.”

그녀는 아이를 위한 그릇을 따로 놓고 사용하면서 다른 것들은 더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면 그제서야 아이를 맡기고 세탁기도 돌리고 화장실 청소도 하였다. 마치 종일 바빠서 못했다는 듯이...

직장에서 일하고 와 쉬고 싶은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벌이하는 주부도 남편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와 함께 생활하면서 왕복 네 시간 정도를 다니는 것이 너무 피곤해 결국은 일주일을 남겨두고 인천에 사는 친구집으로 옮겨갔다. 몸이 너무 안 좋아 토요일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주말마다 만나 성관계해야 하는 남편이 싫었다. 그를 향한 권태가 얼기설기 쌓여가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약국에서 수면제를 사서 먹고 초저녁부터 잠들기 시작했다. 친구에게는 내가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일요일 한나절까지 자고 일어나 전곡으로 갔다. 남편은 연락도 없이 오지 않은 내게 화가 나있었다. 미리 삼선동 집에 전화했어야 했지만 나는 그조차 귀찮아서 하지 않았다. 전곡집에는 전화가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믿지만 초조해하는 그를 보면서 마음이 몹시 상하셨을 것이다. 나는 몸이 아파서 친구집에서 자고 왔다고 말씀드리고 어머니는 아무말도 하지 않으셨다. 허약한 딸을 누구보다 잘 아셨기 때문이다.

잠자리에 들자 그는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거짓말하지 마. 그렇게 몸이 안 좋았으면 미리 전화하던지 나를 불렀어야지.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안 해?”

"미안해."

“다른 남자 만나?”

순간 나는 그를 참기 힘들었다. 그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비난하는지 지겨움이 몰려왔다. 자기 대신 경제활동을 하며 애쓰는 아내에게 미안해하기는 커녕 거짓말을 한다고 모욕을 주다니, 그래, 다른 남자라도 만나고 싶어. 살아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남편을 사랑할 수 없는 나날이 싫어! 나는 가는 곳마다 사내들이 관심을 보여. 내가 유부녀인 것을 알고 실망한다구!

내가 그를 사랑하기는 한 것일까? 그에게 익숙해져 안일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삶의 변수를 일도 생각하지 못한 어리석음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가장 역할을 하지 않고 제 편한 대로 살아가는 그의 무능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아플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부부의 서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질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랑하는 마음이 권태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와 한 번 헤어졌을 때 이미 알지 않았을까? 왜 그를 다시 만났을까?

첫 남자여서? 그건 합리화일 뿐이다. 나는 그가 쉽고 편했다. 조건도 그가 나보다 나았다. 나는 고생하기 싫어서 그를 선택했다. 이 시행착오를 계속 지고 가기에는 내 등이 너무 무거워서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살며시 일어나 필통에서 칼을 꺼내 오른손 손목을 그었다. 내가 죽던지, 산다면 그를 혼내주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벌써 부부간의 사랑이 식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가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면 생각을 고쳐먹어야 할 것이다.

이혼은 생각하기 싫었다. 내가 내린 결정을 번복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삶을 멈추고 싶었다.

병약했던 나는 예상과 달리 이어지는 고단한 삶에 지치고 좌절했다. 젊은 날 죽음은 낭만적인 동경일 수 있다. 젊은 유명인들의 요절이 팬들의 가슴에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듯이 나도 젊고 아름다운 시절에서 멈추고 싶었다. 늙음의 무용함을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얼마나 철없는 행동이었는지 시간이 흐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깨달았다. 누구의 삶도 그렇게 허접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책임져야 할 어린 자식이 있는 어미라는 사실을...

그는 어둠 속에 누워 조용히 미동 없는 내게 물었다.

“자는 거야?”

그가 일어나 불을 켰다. 방바닥으로 피가 흐르는 것을 본 그는 얼른 수건으로 손목을 감싸고는 나를 업고 병원 응급실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나는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체온이 떨어지고 있었다.

의사는 능숙하게 헤어진 칼자국을 꿰매고 약을 처방하였다.

칠흑같이 깜깜한 밤 그의 등에 업혀 돌아오면서 눈물이 그의 등을 적셨다.

세상에 그보다 더한 불효는 없었다. 한동안 어머니는 말을 잃고 침묵하셨다. 말대신 보약을 지어와 내게 먹이셨다. 묵묵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도와주셨다. 

 

12. 부천 신도시로 이사하다

 

전곡에서 오년을 근무하고 부천시로 발령받았다. 첫 부임지는 약대동 약대초등학교였다. 개발 신도시였던 지역이라 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처럼 카톡맵이 있는 시절이 아니었으니 이른 아침에 집을 나가 물어물어 가야 했다.

낯선 장소에 있는 학교를 찾아가는 버스 속에서 운전기사가 갑자기 밟은 브레이크에 아이쿠! 앞으로 처박히면서 눈물이 찔끔 날 만큼 팔과 무릎을 부딪쳤다.

조회 시간 어린이들 앞에서 인사를 해야 하므로 정장 투피스 차림으로 단정하게 차려입었는데 그만 기분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부임 첫날부터 지체할 수 없어서 아픈 팔과 무릎을 어루만지며 학교로 들어갔다. 치료비 청구를 해야 할 만큼 통증이 심했다. 며칠이 지나도 낫지 않아 결국은 조퇴를 하고 병원에 가 약을 받아먹고야 괜찮아졌다.

전곡 학교의 아이들이 더 깨끗할 만큼 이곳의 생활 수준이 낮았다. 대부분 학부모들이 공사 현장이나 공장에 다녀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기 어려웠다. 가정방문을 하던 시기였는데, 열에 여덟은 어머니가 집에 안 계셨다. 그들의 남루한 살림살이를 보면서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해 4학년을 맡았을 때이었다.

여름 방학 때 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공사장에서 우리 반 아이가 물웅덩이에 빠져서 죽었다고 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현장을 향해 달려갔다.

5대 독자라는 아이는 방학하기 한 달 전쯤 전학을 온 남자 어린이였다.

공사장에서 흙을 파낸 대형 웅덩이에 비가 와 물이 가득하였다. 날이 더우니 아이들 몇이 수영하자며 그 깨끗지도 않은 물웅덩이로 풍덩 들어갔다. 수영을 못하는 우리 반 아이는 물이 깊은 줄도 모르고 얼떨결에 따라 들어갔다.

아이가 소리치며 허우적거리자 놀란 아이들이 물에서 나와 사람들을 부르러 갔다. 어른이 와서 아이를 꺼냈을 때는 이미 숨진 뒤였다.

웅덩이는 생각보다 엄청 넓고 깊었다. 죽은 아이는 말이 없고 몇 아이의 말이 그러했다. 시골에 살던 부모는 취업하기 위해 도시로 이주해왔다가 변을 당했다. 그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사건은 오래도록 내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좀 더 위험사고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했었으면 아이를 구할 수 있었을까 자책하며 괴로웠다.

 

부천시 원미아파트는 연탄불로 난방하는 5층짜리 13평 시영아파트였다.

안방과 작은 문간방, 주방과 함께 거실, 화장실이 있었다. 어머니는 취사용으로 석유곤로를 추가해 사용하였다. 전곡에서 살던 마당 있는 집보다 좁아서 답답했지만 화장실이 실내에 있어 편리한 점도 있었다.

나는 적은 생활비를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 수고비는 따로 드리지도 못하고 소액이나마 적금을 들어 미래를 대비하였다. 알뜰한 어머니는 그 최소한의 생활비마저 절약하셔서 생활용품을 사셨다. 밍크 담요라든가 다용도 식기 등... 죄송한 마음이 늘어갈수록 남편이 더 싫어졌다. 부부간의 대화는 사라져갔다. 나는 그가 들어오고 나가는 일에 무관심해졌다.

그는 장모님 보기 민망했는지 결혼한 지 4년이 지나 취직했다. 화학과 전공을 살린 직장이 아니라 매형이 하는 대리점으로 출근했다. 아마도 큰누나의 배려였던 것 같았다.

그가 직장을 다니자 싫었던 감정이 좀 누그러졌는지 생각지 않게 둘째를 임신하였다. 눈치 빠른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이제 아범이 직장을 다니니 아이를 낳아라. 아직은 엄마가 봐 줄 수 있어.”

나는 어머니 말씀을 거역하고 두 번째로 그의 아이를 지웠다. 다시는 그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 내 손으로 키울 수 없는 아이를 절대로 낳고 싶지 않았다. 직장을 다니며 아들 하나를 키우는 일도 충분히 힘에 겨웠다.

반영구적 피임이라는 루프를 삽입해 그것을 풀지 않는 한 임신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나는 그 모든 사실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이가 유치원을 들어갈 즈음 어머니는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셨다.

며느리에게 시아버지와 남편까지 맡기고 나온 이년 간의 시간은 어머니에게 심리적 해방이었지만 딸과의 일상도 편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며느리는 파출부를 불러 어머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생하지 않았다.

“아유, 거므 같은 게 돈 벌러 나가느라...”

“엄마, 그러지 마. 이 직장도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들 많아요.”

나는 엄마의 한숨 섞인 동정이 싫었다. 내가 선택한 남자가 어머니를 실망시키는 것을 마주할 때마다 기운이 빠졌다.

내가 그와 함께 산 건 칠 년이었다. 직장을 다닌 건 그때 일 년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가 하지 않는 이야기를 묻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입이 과묵하다고 생각했는데, 표현력이 부족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반복되는 일과는 강물처럼 흘러갔다.

소일거리를 찾는 아래 층 사는 아주머니께 아침시간 아이를 유치원 차에 실어주고 오후 시간 돌아온 아들을 돌보게 하였다. 퇴근해서 돌아왔올 때 내 품에 와 안기는 아들이 꾀죄죄한 것을 보면 마음이 안 좋았다.

아들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후 저녁을 차려 먹으며 아이와 종알종알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이 일상의 즐거움이었다. 한참 호기심이 왕성한 아들은 무엇이든지 묻고 또 물어 나를 웃게 하였다.

가끔 삼선동 집에 가서 잔다며 외박하던 남편이 일주일이 지나도록 집에 오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왜 안 오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 관심이 사라져버렸다. 감흥 없는 성관계를 안 한 지도 오래되었다.

군대 간 시동생 면회를 일박이일 간다고 해서 용돈까지 주었다. 나는 그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늦은 밤 곱게 차려입은 한 여자가 집으로 찾아왔을 때까지 그를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놀란 그가 작은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나는 그녀를 집에 들여 자초지종을 모두 들으면서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할 수 있었다. 그를 쳐다보는 간절한 그녀의 눈빛을 보면서 그를 그녀에게 양도하고 싶었다. 그녀가 하는 말들을 화도 내지 않고 선선히 모두 들어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남편이 돈을 벌지 않는다고 헤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생활비를 버는 한, 그러나 다른 여자가 있다면 헤어질 명분이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담담히 말했다.

“이제 그만 헤어지자.”

“안돼. 그 여자 말 모두 믿지 마. 다신 만나지 않을 거야. 미안해.”

그는 미안하다는 사과로 이 일이 수습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아이도 있다잖아?”

나는 짜증이 섞인 말투로 한 음 높였다.

“거짓말이야. 절대 아니야. 예전에 당신과 헤어졌을 때 만났던 여자인데, 자꾸 연락해와서 몇 번 봤을 뿐이야.”

그렇게나 오래도록 만난 여자였다고? 그녀와 정리하지도 않고 나와 결혼한 거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일 출근하기 위해서 잠을 자야 한다. 생각을 뒤로 미루고 자야 한다. 그러나 잠은 멀리멀리 달아나 밤을 밝히며 머리를 어지럽혔다.

아침에 아이를 앞집 여자에게 맡기고 사 층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나는 중얼거렸다.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이어지는 내 말소리에 놀라 걸음을 멈추고 진득이 배어 나오는 눈물을 닦았다. ‘울 일이 아니잖아.’

맑고 푸른 하늘, 노오란 은행잎이 도로 가득 융단처럼 깔린 길을 바삐 걸어 버스에 올라탔다. 구질구질한 시간을 달리는 차창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또 다른 나,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아이들을 만나 체바퀴를 돌리는 다람쥐마냥 쉬지 않고 달렸다.

 

약대초등학교에서 삼 년째 근무하던 해 아동수가 급속히 늘어난 학교는 근거리에 지은 신설 학교로 나누어졌다. 그 동네에 사는 아동과 함께 교사들도 분배되었는데 그 규정이 예전과 달리 거꾸로였다. 경력이 많은, 삼 년 차 교사부터 자르는 것에 반발한 몇몇이 교육청에 항의하자 학무과장이 직접 나서서 설득하였다. 경력 많은 여러분이 신설 학교에 가서 삼 년만 근무해주시면 그다음 전근하는 학교는 무조건 희망하는 학교로 발령내겠다 약속하며 달래었다. 가장 학생 수가 많고 교통이 편리한 A학교는 어차피 근무평점 1위인 교사 한 사람밖에는 배정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새 학교는 일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 예로 과학주임을 맡은 나는 과학실 정비와 함께 모든 교과 자료들을 선정하여 구입하고 대여 관리하는 일을 하느라 퇴근하지 못하고 늦도록 일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쉬지 못했다. 지금처럼 과학 조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병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월 개학 초부터 으슬으슬 춥더니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삼월 한 달은 일 년 학습의 기초를 마련하는 시간인 만큼 아이들을 파악하고 교실 환경 정리, 맡은 부서의 계획을 수립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때이다.

새 학교에서 수세식 좌변 용기를 처음 사용해본 아이들은 깨끗한 화장실을 아예 놀이터처럼 쉬는 시간마다 달려갔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일은 화장실에 휴지를 놓기 무섭게 통째로 없어지곤 했다. 교사들은 화장실에서 용변 후 휴지 사용량까지 알려주면서 지도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은 교실 앞쪽에 휴지를 매달아 놓고 조금씩 잘라 가게 하였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집에서 대변을 보고 오라는 지침까지 내려졌다. 그러나 수세식 화장실이 없는 환경의 아이들은 그 반대로 일부로 학교에 와서 대변을 보는 것이 더 편하고 좋았을 것이다.

병원에 가기 위해 조퇴할 짬을 낼 수도 없는 한 주일을 버티다 병원에 갔다. 주사 맞고 받아온 약을 일주일 먹어도 기침이 멎지 않았다. 또다시 병원에 가 받아온 약을 먹자마자 모두 토하면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다음날, 담당 의사는 X-ray를 찍고 경증 폐결핵 진단을 내렸다.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송구스럽지만 교감 선생님께 진단서를 내밀고 병가를 신청했다.

“우리가 군 복무할 때, X-ray 찍으면 감기 환자 모두 경증 폐결핵이라고 진단 나왔을 거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바쁠 때 아프면 어쩌라는 말인가? 라는 뜻인 건 알지만 그래도 다 살자고 하는 일인데, 나는 다시 한번 웃으며 토를 달았다.

“죄송해요. 그럼 더 악화되면 교감선생님께서 책임지세요.”

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병가 한 달을 허락했다.

강사도 없는 시절, 아이들은 십여 명씩 나뉘어 분반에 들어갔다. 나는 한 달 내내 쉬지 못하고 학교로 불려 나가 과학실 근무를 하다시피 했다. 한 달간 주사를 맞고 육 개월을 어린 아들도 함께 약을 먹었다. 또 없는 돈에 녹용을 넣은 한약까지 한 재 지어 먹고서야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삼 년간 함께 근무했던 이들이 그대로 옮겨갔으니 서로 친할 수밖에 없없다. 친하지 않은 이가 딱 한 사람 있었으니 바로 교장이었다. 그는 경기도 어느 군에서 교육청 학무과장을 했던 이였는데 왜소한 생김새 마냥 그 인품이 볼품없었다. 마치 학교가 당신 승진에 필요한 도구인 양 처신했다.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

아침 교직원 회의 때 국민의례를 하던 중 교장이 버럭 소리 질렀다.

“크게 하세요! ”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그날 일직이었던 여교사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말하던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교장 선생님이 하세요.”

이런 반발은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었던 우리 모두의 당혹스러움을 문지르며 얼른 교무주임의 우렁찬 국기에 대한 맹세가 낭독되었다.

그 당돌했던 후배의 일갈은 우리 모두에게 차가운 얼음물처럼 시원했지만 그 뒷감당은 쉽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 벌레 씹은 얼굴로 몇 마디 하는 둥 마는 둥 교장실로 내뺀 교장에게 얼른 들어가 사과하라고 교무가 말했다.

“싫어요. 오늘 몸이 아파서 출근 못하겠는 걸 간신히 왔어요. 저 잘못한 거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작았던 이유를 모두는 납득했지만 절대 복종이었던 우두머리에게 저항했으니 그때로서는 큰 잘못에 속했다. 교무주임은 당신이 들어가 교장선생님께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 이야기를 얼마나 간곡히 말했는지, 오히려 미안하다는 교장선생님의 사과를 그녀에게 전달했다.

미련하지는 않은 교장은 사정 이야기를 듣자 한발 물러서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또 월말고사를 매달 보았는데, 학년별로 일등 한 반 담임과 꼴등 한 반 담임을 불러서 칭찬하거나 꾸중하여 신참 교사를 울리기도 하였다. 일등에서 꼴등까지 순서가 매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 우리들의 항의를 연구주임이 전달하자 이번에는 과목별로 젤 뒤진 반 담임을 불러 혼을 내기도 하였다.

나는 교장선생님의 이런 자잘한 간섭과 훈계가 비교육적임을 말씀드렸다.

“그럼, 자네가 교장을 해. 아니면 아무 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우리는 더 이상 그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고 침묵한 채 우리끼리 친하게 지내며 서로의 어려움을 도와주었다. 교감, 서무과장을 포함해 삼십여 명이 안 되는 교직원들이 매년 야유회도 가고 회식도 했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은 운동회 때 3·4학년 보자기 마스게임을 아까 그 후배와 함께 지도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 퍼레이드 때 조별로 색 색깔 대형 보자기를 펼쳐 들고 행진하는 장면에서 한 조가 보자기 없이 행진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지휘 교단에 서서 그 모양을 보는 나는 당황했지만 태연하게 아이들과 함께 발을 맞춰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생각했다. 이런, 불호령이 떨어지겠구나! 점심시간 이후 첫 번째 시작되는 순서인지라 조장들에게 밥 먹기 전 미리 보자기를 나누어준 것이 화근이었다. 한 녀석이 보자기를 엄마에게 맡기고 그냥 행렬에 참가해 버린 거였다. 담임들이 똘똘한 녀석을 조장으로 뽑아서 제대로 관리해야 하는 일에 그만 실수가 발생한 것이었다.

마침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며 마스게임은 끝나고 박수 치는 학부모들에게 민망한 나는 그동안의 수고가 물거품처럼 날아가는 낭패감을 맛보아야 했다.

우습게도 교장은 별말이 없었다. 어쩌면 눈여겨보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 일은 체육주임에게 해명하는 선에서 무사히 지나갔다.

다음 해에는 교장 선생님이 교육청에서 나오는 장학 지도에 잘 보이려고 고학년 운동부 어린이들에게 현관에 있는 무거움 고목 테이블을 무리하게 옮기라고 했다가 한 어린이가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는 가끔 아침 출근하자마자 서무에게 라면을 끓이게 하는 것을 보면서 지난 밤 과음하셨구나 알 수 있었다. 결국은 당뇨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전 직원이 학년별로 나누어 병문안을 가기도 하였다. 내가 다른 학교로 간 후 들은 이야기로 그의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고 했다.

그 학교에서 삼 년째 되던 해 일학년 담임을 하였는데, 쉬는 시간 아이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아이들과 함께 화장실로 달려가니 한 남자애가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었다. 바지 지퍼를 올리다 말고 웅크린 아이는 사타구니를 감싸고 쩔쩔맸다. 나는 수업을 계속해야 해서 따라가지 못하고 교감 선생님께서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아이는 몇 바늘 꿰매는 수준에서 치료가 되었다. 한 사내아이가 고자가 될 뻔한 사건이었다. 부모의 보살핌이 제대로 없는 가난한 집 아이는 팬티를 입지 않은 채 바지를 입고와 소변을 본 후 옆의 아이와 떠들면서 무심코 지퍼를 올리다 고추의 살이 찝힌 것이었다. 웃지 못할 씁쓸한 해프닝이였다.

삼 년 근무하고 전근하게 되었을 때 학무과장이 한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은퇴했고 아무도 그가 한 약속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그의 약조를 문서로 남기지 못한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더더욱 화가 나는 일은 그때 순서를 거꾸로 한 게 이유가 있었다는 소문이었다.

경력이 몇년 안된 B교사가 신설 학교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늘 하던 규칙을 변경했다는 것이다. 그때 막 결혼했던 그녀의 시아버지가 교육부 높은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 게 바로 빽이었다.

나는 원했던 A군 학교로 가지 못하고 B군 학교로 발령받았다. 버스에서 내려서 십여 분 오르막을 올라가야 하는 높은 지대에 있는 학교였다. 교사들이 원하는 학교는 첫째, 교통이 편리하고 둘째, 인원이 많은 큰 학교를 희망했다. 그래야 담당하는 일거리가 적어 편하고, 학군이 좋은 동네면 더할 나위 없었다. 학생을 지도하는 일이 그만큼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학교가 가까운 중동으로 아파트를 옮겼었다. 그 과정에서 남편이 계약금 몇십만 원을 꿀꺽한 사실을 알았다. 너무도 수치스러워서 내색 못하고 말없이 부동산에 더 잔금을 치루었다. 그가 무슨 이유인지 돈이 급한 나머지 횡령하고 채워 넣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아니라고 말했다. 부동산에 데리고 가 대질신문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더 이상 망신스러운 게 싫은 나는 그만 물러서고 말았다. 그가 가져간 게 아니라면 손수 나서서 나를 데려가 사실 진위를 밝히면 될 일이었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 그에게 모든 공과금처리를 하게 하였는데, 한 번은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후배 교사와 함께 집에 왔는데 그 날따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나는 촛불을 켜고 창밖을 내다보니 우리 집만 정전이었다. 당장 전화를 거니 두 달이나 전기요금이 밀려 있어 단전했단다. 남편은 삼선동 집에 자주 가 있곤 했다. 이런 일로 다투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하는 나는 어서 전기료를 납부하고 전기가 들어오게 하는 게 상책이었다. 가장으로서 자격이나 책임을 상실한 지 오래된 그를 들볶아서 무엇하겠는가!

이대로 가다가는 나마저 함께 망하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이 나날이 밀려왔다. 아들의 아비라는 구실로 참고 또 참았던 인내가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가로놓여 앞을 막아섰다. 내가 선택한 결혼에의 책임 의식이 목을 조여오면서 나는 도망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더는 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아들을 책임져야 하는 어미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친정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고 강남 모병원으로 달려갔다. 부석부석하게 부은 얼굴로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힘든데 쉬지 않고 이 먼 데까지 뭐라 오니.”

일단 위급해 보이지는 않아 한숨 돌린 나는 웃으며 농담처럼 대꾸했다.

“엄마 돌아가시면 못 볼까 봐서...”

그 말은 씨가 되어 결국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장모님의 자궁암 진단 소식을 들은 남편은 큰누나가 수석간호사로 있는 이대 종합병원으로 옮기자고 하였다. 병원비 할인을 받을 수 있고 더 잘 치료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큰오빠는 그 이야기를 듣자 즉시 병원을 옮겼다. 어머니의 증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강남 논현동은 서울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다시 어머니께 갔을 때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어머니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병상을 붙들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만, 그만 멈춰요!. 그냥, 편안히 가시게 해주세요!”

어머니는 병원을 옮겨 종합 검사를 시작하자 당신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의식하신 것 같았다. 암세포는 순식간에 전신에 퍼지며 회복 불가능에 이르렀다.

큰오빠는 아버지와 의논하여 연명치료를 멈추었다. 인공호흡기 등 의료시설을 제거하자 요동치던 육신이 고요해졌다. 옅은 숨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병원에 가신지 일주일 만에 아들네 집으로 모셔졌다. 그때는 가족이 없는 한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지 않던 때였다. 외사촌 누나는 어서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라고 종용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올라와 아들네 집에서 하루도 묵지 않고 바로 병원으로 가자고 하셨단다. 불편한 며느리에게 신세 지는 것이 싫어 혹시 죽더라도 병원에서 죽겠다는 의중을 드러낼 만큼 며느리는 어머니에게 자존심 상하는 존재였다. 며느리가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던 수많은 일들이 효성스러웠던 종부, 어머니에게는 사사건건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효도하지 못한 나는 어머니의 돌아오지 않는 의식을 안타까워하며 슬피 울었다. 순간 어머니는 의식이 돌아온 듯 눈을 뜨시더니 나와 눈을 맞추자 일그러지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놀린 나머지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울부짖었다.

“어머니!”

찬송가를 부르며 둘러앉았던 가족들이 노래를 멈추고 어머니 얼굴로 몰려들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안타까웠던 마지막 표정은 두고두고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것을 두고 내가 어찌 가나!’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 울음소리보다 더 대성통곡을 하는 올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 왜 그녀는 슬퍼하는가? 이제는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던 존재가 사라진 것을 기뻐해야 할 텐데... 그녀의 저 설움은 무엇일까? 가증스럽다는 생각에 나는 자리를 떴다.

그녀를 포용하지 못해 수없이 마음 아파하시던 어머니, 자식들과 손주들이 보고 싶어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 이제는 이 고단한 인생길에서 훨훨 벗어나 당신이 염원하던 천국으로 가시기 바랬다.

정말 많은 지인들이 어머니의 장례에 오셨다. 후덕한 인덕으로 살아오신 어머니의 가시는 길이 쓸쓸하지 않으실 것 같았다.

다음 날로 내가 근무하는 학교 교장 선생님과 교무, 학년주임, 그리고 동학년 선생님이 한 분 함께 찾아오셨다. 나와 거의 대화를 따로 해본 적 없는 경력 이 년 차 남교사였다. 나는 고마운 마음과 함께 의아한 마음도 조금 들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은 안타까움과 죄스러움, 또 한편으로는 해방감도 느껴졌다. 내 삶의 길목마다 엄격하게 나를 통제하고 이끌어주셨던 분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는 것, 여자는 일부종사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족 모두에게 통용하시던 지배력 강한 어머니께 순종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한 달 후 남편에게 이혼장을 내밀었다. 그전까지 단 한 번도 이혼하자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기에 남편은 당황했다. 그는 이유를 물었다.

세상에! 이유를 묻다니, 자신이 얼마나 무책임한 가장이었는지, 아내를 상처입혔는지 모른다는 말인가!

둘이 함께 망할 것 같은 위기감을 설명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건가!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 더는 당신과 살 수가 없어. 아인 내가 키울게.”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침통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나는 다음 날 그에게 도장을 찍어달라며 준비했던 서류를 내밀었다.

“다음 주 월요일이 개교기념일이야. 그날, 같이 법원에 가.”

나의 확고함에 질렸는지 그는 도장을 찍었다.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그 자식이 누구냐!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물러서는 그라는 인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내의 외도 사실 여부보다 자신의 자존심 상한 것이 더 중요한 모양이다. 아니면 정말 바람이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나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이었을까? 나는 쉽게도 일이 마무리 지어지는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불안했다. 무엇보다 학교에 이혼한 사실이 알려지면 비난받을 교사로서의 결함이 부담스러웠다. 교사가 이혼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사회적 금기 사항에 속하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대였다.

그것보다는 아들이 아빠 없이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수없이 미루고 마음을 고쳐먹곤 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돌아버릴 것 같은 위기의식과 함께 그와 한 공간에 있는 한 질식할 것만 같은 진저리쳐지는 느낌을 견딜 수 없었다. 욕망의 좌절! 젊은 여자의 애정욕이 파묻힌 나날이 고통이었을 것이다. 사랑할 수 없다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마음을 터놓는 한 친구는 말했다.

“그놈이 그놈이고 그년이 그년이야. 그냥 남편은 울타리에 불과해. 남편을 사랑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과 연애하면 되잖아. 뭘 번거롭게 이혼하고 그래?”

“남편을 두고 다른 사람과 연애하라고?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난 거짓말이나 상대를 기만하는 짓은 할 수 없어.”

“잘 났다! 다들 그냥 그렇게 살아. 자식을 위해서, 체면 때문에 그냥 같이 사는 거야. 사랑이 언제나 한결같을 수 있다고 믿었어?”

한결같을 수 없는 사랑? 그 순애한 감정을 지니지 못하고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고 영악한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남편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믿고 결혼했다. 단란한 가정을 평범하게 꾸려갈 줄 알았다. 그는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그를 사랑하기는 했을까? 사랑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뿐 내가 사랑해서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는 사랑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상대도 내 맘 같은 줄만 알고 그를 믿었다. 이혼은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 시간도 그가 절대 안 된다며 나를 붙잡고 애원한다면 마음 약한 나는 울면서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이혼 후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감, 내가 선택한 결혼을 스스로 물리는 자괴감을 감추고 태연하게 일상을 보내는 일은 마치 잡아당겨 늘어날 만큼 늘어난 고무줄이 탁 끊어질 것 같은 위기감으로 옥조여 왔다.

며칠 전 놀라는 친구 내외에게 이혼서에 증인 두 명의 도장을 미리 받아 놓았다.

아침밥을 간단히 차려 먹고 아들을 아래층 여인에게 맡긴 후 나는 그와  만나 법원으로 향했다. 차가운 침묵이 둘 사이를 아주 멀리 떨어뜨려 놓으며 나란히 걷고 있는 거리를 무색하게 했다.

법원에서는 서류를 받은 후 오후 두 시 이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초봄의 덕수궁 돌담길은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몸을 감싸고 나는 몸을 떨었다. 그리 차가운 바람이 아니었음에도 이가 부딪힐 만큼 추위를 느꼈다. 그는 자신의 자켓을 벗어 내 어깨를 감싸주었다. 나는 뿌리치지 않았다. 그의 친절에 저항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근처의 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지연되는 것이 몹시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꼼짝없이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있어야 했다. 서너 시간 동안 불필요한 대화를 해야 하다니! 나는 혼자 말처럼 말했다.

“왜 오후에 오라고 하는 거지?”

“충동적인 경우, 진정시키려는 거겠지.”

“이런 일을 충동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나?”

“사람들이 모두 당신 같지는 않으니까.”

그 역시 담담하게 대꾸했다. 나는 따뜻한 물을 마시며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려고 애썼다. 그와 마지막 시간이다. 한때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닌가!

나는 그와 살면서 큰소리치며 싸워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싫으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원래 말수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우리 사이는 그리 대화가 많지 않았다. 내가 주로 말을 하고 그는 웃으며 들어주는 편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학교 회식이 있던 날 여느 때보다 몇 시간이나 늦게 귀가했다. 동료들과 이차까지 갔다 왔기 때문이었다. 삼선동 집에 가 있던 그가 올 줄 몰랐다. 그는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평소보다 격앙된 목소리로 나가라고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벗었던 코트를 다시 집어 들고 백을 챙겨 나가려고 하자 그는 나를 와락 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너무 오래 기다려서 화가 났어.”

나는 말없이 나가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몇 시간을 기다렸을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마음먹고 순순히 그날 밤 그와 동침했다.

“나가란다고 진짜 나가냐?”

나는 서서히 그와의 동침에 감흥이 사라져갔다. 아니 전혀 오르가슴을 느낄 수 없었다. 점점 부부 행위가 싫어져서 그를 피하고 싶었다. 활짝 피어나지 못한 꽃봉오리가 시들어버리는 비참한 심정이었다.

지루하게 흘러간 시간을 뒤로 다시 법원에 갔다. 이혼 허가를 받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삼 개월 이내 서류를 제출하면 이혼이 확정된다고 알려준다. 그는 나보다 먼저 자기가 제출하겠다며 서류를 받아 챙겼다.

순간 불안해졌다. 만약 제출하지 않으면 이 시간이 헛수고가 되고 말 텐데... 내 불안한 표정을 본 그는 말했다.

“걱정 마. 내가 꼭 낼게.”

나는 더 이상 실랑이하기 싫어서 뒤돌아섰다. 순간 그는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꼭 이래야 해?”

나는 한숨이 나왔다. 대꾸하지 않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그날 이후 집에 오지 않았다. 그의 물건을 단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나는 그의 물건들을 박스에 가지런히 담아 그가 사용하던 방에 가져다 놓았다. 어린 아들은 오지 않는 아빠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어리지만 눈치가 빠른 아이는 엄마가 하지 않는 이야기를 먼저 물어보지 않았다. 나와 아이의 일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심리적 외로움을 느꼈을 뿐이다.

아이는 두 번, 울면서 부모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을 알았다.

아이가 나가 노는 일요일 오전,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하는 말들을 참을 수 없어서 삼자 대면을 하기 위해 그녀를 만나러 나갔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집에 없었다. 곧 뒤돌아서 집에 왔는데, 아들이 문 앞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나는 아들을 껴안고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면서 치솟는 눈물을 참느라 애썼다. 경황이 없어서 아들이 밖에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늘 하던 습관으로 문을 잠그고 나갔던 것이다.

시간은 잠자코 흘러갔다. 그러나 우리 관계는 회복될 수 없었다. 수없이 맘을 고쳐먹기 위해 애썼다. 아들을 위해서 참고 이겨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다지기 위해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남편의 말을 믿고 이 가정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 구석 똬리를 틀고 나를 괴롭혔다. 그녀를 만나 결론을 지어야 했다.

어두운 시간을 털어버리려는 듯 새하얀 투피스를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초여름 햇살이 부서지며 가로수 잎들이 반짝거렸다. 나 역시 푸르른 초목처럼 다시 반짝거리며 살아나고 싶었다.

아들의 손을 잡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지만 그녀는 대학원에 장학금을 신청하러 갔다고 했다. 나는 혹시나 해서 그녀의 언니가 알려준 K 대학으로 택시를 타고 달려갔다.

서무실에서 나오는 그녀와 맞닥뜨렸을 때 그녀는 편한 티셔츠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안경을 쓰고 화장하지 않은 그녀의 맨얼굴이 놀라움으로 사나워지면서 이야기 좀 하자는 내게 내밷었다.

“부부 문제를 자기들끼리 해결하지 못하고 왜 나한테 와서 지랄이야!”

예의 바르게 대하는 내게 상스럽게 대응하는 그녀에게 화가 치민 나는 그녀의 빰을 한 대 때렸다. 순간 그녀는 나를 강하게 떠밀었고 나는 그녀의 한쪽 팔을 움켜잡자 균형을 잃은 채 함께 언덕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아이는 놀라서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약간의 물이 흐르고 있었던 계곡에서 그녀가 떨어진 안경을 찾는 동안 나는 지나가는 한 남학생을 불러 수고비를 건네며 택시를 불러달라고 급하게 사정했다. 학생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챈 듯 곧 택시를 부르러 가고 나는 우는 아이를 달랬다. 곧 도착한 택시에 그녀를 태우고 잠실에 있는 큰 시누이 아파트로 갔다. 놀란 시누이는 시어머니께 전화해 오시라 했다.

“고모, 애 아빠가 사귀는 여자를 데려왔어요.”

나는 아이를 시조카와 놀게 하고 작은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 그제야 온몸이 쑤시는 통증과 함께 온 힘이 빠져나가 버린 듯 맥이 풀렸다. 이 삼류소설에 나올법한 장면들이 진저리쳐졌다. 아이를 데리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지만 기운이라곤 없었다.

“앞날이 창창한 아가씨가 남의 가정을 깨서 좋을 게 뭐 있어요.? 앞으로 더는 만나지 말아요. 이제 그만 집에 가세요”

점잖은 시누이는 착하기도 하다. 잠시 쉬었던 몸을 일으켜 집에 가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급하게 들어오셨다. 나는 인사말도 생략하고 고개만 잠시 숙였다. 어머니는 내 손을 붙잡으며 마주 앉으셨다. 나는 힘없이 말했다.

“어머니, 더는 참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는 술 먹고 때리는 남편도 있단다.”

“저는 그렇게 못 살아요.”

어이없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기가 막힌 나는 더 이상 대화하기 싫어 아이 손을 잡고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무엇이든지 종알종알 묻던 어린 아들은 집에 오는 동안 아빠에 대해서, 오늘 본 여자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을 것이다. 나는 아이의 어깨를 안으며 따스한 작은 손을 꼭 쥐었다.

 

모두가 일직하기를 싫어하는 구정 명절이었다. 가정이 해체된 나는 일직을 바꾸어 어린 아들과 함께 학교에 갔다. 현관 입구에 있는 남자 교사들이 숙직하는 방은 특유의 냄새가 좀 났지만 춥지는 않았다. 연료 절약을 위해 교무실 난로를 피우지 않고 숙직실 온돌방에서 일직 근무를 했다. 일지를 쓰고 순찰을 몇 번 돌고 혹시나 걸려 오는 전화를 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일과였다. 나와 아들이 읽을 책과 장난감, 도시락 등을 챙겨왔다.

차오르는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내가 희망했던 삶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싶었을 뿐이다. 난데없이 찾아든 이 불행을 어떻게 걷어내야 할지 암담했다. 한 사내를 믿고 때가 되어 가정을 꾸렸을 뿐이었다. 나는 한없이 서글퍼지는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와 교사를 순찰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이 있지 않은가! 한 여자로서의 삶보다 더 막중한 어미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나약해지는 마음을 거머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느 날 난데없이 당하는 교통사고로 죽거나 병신이 되지 않는가! 그처럼 내게 닥친 불행일 뿐이다. 이 불행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이 모든 일이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고 선택이었다. 인생의 무대에서 주어진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대를 내려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역할이 주어지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어린 아들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 앞에서도 직장에서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상심을 유지했다.

긴 터널을 지나는 듯 힘든 시간을 버티는 가운데 반복되는 일상은 시간을 강물처럼 실어 갔다.

 

아들의 생일을 맞아 용인 어린이 대공원 동물원에 데려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토요일 출근하면서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아 기력을 차리기 어려웠다. 약속을 번복하고 싶지 않았지만 도와 줄 사람이 없었다. 생각 끝에 알고 지내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결혼하기 전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 기차 안에서 마주 앉아있던 내게 말을 건네온 그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다. 내가 학예회 연습을 위해 들고 가는 음반 몇 장이 궁금했는지 물어보았다. 음악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 달쯤 후 다시 우연히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반듯한 인상이었지만 약간의 반항기가 느껴지는 졸업반 학생이었다. 점심을 거른 나는 역에서 나와 교복을 입은 그와 그의 친구 두 명과 함께 제과점에서 빵과 음료수를 먹고 계산하였다

학기 말 방학하기 전 화창한 토요일 퇴근 시간에 맞춰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 운동장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 타고 한탄강을 드라이브하며 시원한 바람을 맞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그는 내게 연락했다. 내 결혼식에도 왔었다. 누나가 없는 그는 내게서 누나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잊을 만하면 연락해 왔다. 물론 누나라고 부른 적은 없었지만 나는 그를 동생처럼 대하였다. 군에서 제대하기 전 그는 친구와 함께 나를 찾아왔었고 나는 아들을 데리고 나가 그들을 만났었다. 그는 내가 아기 엄마가 된 것을 신기하게 여기며 아들을 안아보았다. 그도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우리는 아주 뜸하게 소식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내 부탁을 들어줄 것 같아서 혹시나 시간이 되는지 물었다. 다행히도 그는 시간을 낼 수 있다며 흔쾌히 달려와 주었다. 나는 아들과 한 약속을 어기지 않게 되어서 기쁘고 오랜만에 그를 만난 것도 반가웠다. 그러나 도저히 함께 동물원을 구경 다닐 기운이 없어서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쉬는 동안 그는 아들의 손을 잡고 동물원 구경을 시켜주었다.

저녁을 함께 먹고 집까지 바래다준 그가 많이 고마워서 잠깐 차라도 한잔 하고 가라고 말했다. 현관문도 열어놓은 채 차를 다 마시기도 전에 느닷없이 남편이 들어왔다. 그는 얼른 일어나 남편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에게 남편과 헤어지게 됐다고 말했던 차라 그는 좀 놀란 것 같았다.

나는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던 방에서 아들과 하룻밤 자고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도 아들의 생일을 기억하고 온 것 같았다. 나는 그러라고 했다. 남편은 그를 내가 사귀는 사람이라고 오해하겠구나 생각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남편은 이제 이혼서류를 제출할 것이다.

아침에 잠이 깨어 방문을 여니 아들과 그가 없어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아들을 데리고 서울집으로 간 것일까? 내게 아무 말도 없이...

어떡해야 하나? 그를 쫓아 서울로 가봐야겠구나 생각하며 외출할 준비를 하는데 피곤한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아들이 엄마! 부르며 들어왔다. 나는 볼이 발갛게 상기된 아들을 껴안으며 물었다.

“아빠는?”

“서울 가셨어. 아빠랑 바다에 갔었어. 내가 삼학년 되면 데리러 온다고 약속했어.”

나는 안도하며 아들과 늦은 아침을 차려 먹었다.

그 후 남편이 곧 이혼서류를 제출한 것을 동사무소에서 확인했다. 서류상으로 남남이 되었음을 인식하면서 쓸쓸한 해방감을 느꼈다. 나는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아파트에서 이사하고 싶었다. 전세 재계약을 하지 않고 대출을 좀 받아 작은 아파트라도 사서 이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마도 남편이 사라진 결핍을 집이라도 있기 바라는 안정감으로 대신하고 싶었다.

나는 방학하자마자 집을 보러 다녔다. 혼자 집을 사본 경험이 없어서 작은오빠에게 부탁하여 함께 몇 군데 집을 둘러보고 학교에서 가까운 삼익아파트 16평을 계약했다. 물론 전세금에 대출금을 보태야 가능했다. 높은 담장에는 초록 담쟁이덩굴이 가득하여 운치있었다. 새로운 미래를 펼치는 보금자리이기에 여간 소중하지 않았다. 슬픔이여! 안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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