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향은 30여 년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늘 갑갑함을 느꼈다.
그래도 일기를 쓰면서 자신과 대화를 할 수 있어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바람’이라 칭했다. 어디든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바람이 되고 싶었다. 마치 땅속에 박힌 식물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는 그녀는 일기를 쓰는 밤이면 이 세상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었다.
주변머리 없는 자기 성격에 진력이 나서 여행에 관한 책을 잔뜩 쌓아놓고, 이곳저곳 발을 디디며 돌아다니다 달콤한 잠에 빠져들곤 하였다.
퇴직하면 가보고 싶은 곳들을 순서대로 빼곡하게 적어놓았다. 그곳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랑 먹어보고 싶은 음식까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책을 읽고는 체코를 여행해보고 싶었다.
탱크가 밀고 들어오던 프라하의 거리를 가보고 싶었다. 연인들이 사랑했던 그 거리를 걸어보고 싶었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 몇 달 살아보고 싶다는 지인의 말이 기억난다. 다뉴브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옷자락을 날리며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작곡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선율을 듣고 싶었다.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애니버서리 송이 울려 퍼져도 멋질 것이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책을 읽고는 죽기 전에 꼭 알래스카를 가보고 싶었다.
광활하고 생생한 그 땅에 사는 짐승들과 춤추는 초록색 오로라를 보고 싶었다. 아무리 추워도 그 광경을 볼 수 있다면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튀르키에 작가가 쓴 책을 읽고는 그 나라를 가보겠다고 생각했다. 기기묘묘한 카파토키아에서 색깔 고운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낯선 이국땅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책을 읽고는 신화의 나라 그리이스를 가보고 싶었다.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바람처럼 자유롭고 싶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다. 커다란 쌍꺼풀진 검은 눈은 겁이 많아 보였다. 그런대로 시원스런 이목구비를 갖춘 얼굴에 목덜미까지 오는 단발머리를 했는데 가장 비용이 들지 않고 무난한 스타일이었다.
옷은 단정하고 눈에 띄지 않는 무채색을 선호했다. 구두는 행사용 검은 구두 한 켤레, 여름용 흰 샌들이 한 켤레 있을 뿐 운동화가 두 켤레가 더 있었다. 걷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들 해서 한두 정거장 정도는 걸어서 출퇴근하고 주말에는 등산하거나 둘레길을 걸었으므로 발이 편한 운동화를 좋아했다.
여행을 가려면 돈이 많이 들 것이므로 그녀는 끊이지 않고 적금을 부어 돈을 모았다. 30여 년 모은 돈이 불어나서 일억이 넘었다.
영어 회화도 매일 조금씩 하였다. 이제 쉬운 회화는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었다. 퇴직하면 언제고 떠날 준비를 하며 살았다. 이렇게 결혼도 안 하고 살려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어느새 사십대 후반이 되었다. 이렇다 할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중년이 되어버렸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다.
이십 대나 삼십 대 때 다가오는 사람들을 모두 시큰둥하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소극적이고 덤덤한 성격이 그들을 실망시켰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매달릴 만한 매력적인 그 무엇도 사실은 없었는데 자신만 모른 것이다.
이십 대는 직장 구하고 자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돈을 저축하기 위해서 집과 직장만 오갔다. 그리고 스스로 벌어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작은 오피스텔에서 5년을 월세 살다가 대출을 받아서 18평 오피스텔을 샀다. 더는 월세가 나가지 않자 저축을 좀 더 할 수 있었다.
삼십 대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시고 혼자된 어머니를 올케가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살던 집은 팔아서 그들이 꿀꺽하고 어머니는 내쫓은 거다. 대놓고 나가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무뚝뚝한 아들의 무관심에 올케의 냉정함까지 더해져 어머니는 견디지 못하고 나오셨다.
딸을 볼 때마다 눈물 바람에 넋두리하는 어머니를 더는 볼 수만 없어서 말했다.
“저랑 함께 사실래요?”
엄마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이 활짝 펴며 다음 날로 옷가지를 챙겨 바람에게 왔다. 바람은 자신이 쓰던 방을 내드리고, 주방 겸 거실에 작은 침대를 하나 더 들였다. 그렇게 시작한 엄마와의 동거는 20여 년 지속되었다. 혼자 살 때의 단출함과 쓸쓸함이 덜어지고 서로를 돌보는 번거로움을 통해 따뜻한 유대감이 생겼다. 그리고 저절로 효녀가 되는 칭찬을 보너스로 받았다.
인정머리 없는 올케의 입에 발린 칭찬이었다. 그녀는 앓던 이를 뽑은 듯 시원했을 것이다.
“고모, 정말 효녀야. 요즘 같은 세상에...”
요즘 같은 세상은 모두 각자 살아야 한다는 듯이 말했다. 오빠랑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는 나이가 들수록 실감하는 법이다.
“넌 시집 안 가?”
어머니는 연례행사처럼 물었다. 바람은 대답했다.
“나 시집 가면 엄마는 어떡해?”
어머니는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그래도 빨리 죽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게 생존에의 본능이다. 딸에게 미안한 마음에 더 부지런히 살림을 쓸고 닦았다.
바람은 만족했다. 엄마와 함께 저녁 식사하고 함께 TV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늘 반복되는 일상에 밀려드는 권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밀어내며 살았다.
외로움은 상대가 있다 없어야 심한 법이다. 그녀는 원래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외롭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무사태평하게 어머니와 살았다.
어머니는 80세 되던 해에 넘어진 것이 화근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셨다. 일 년 정도 치매기가 생기며 바람을 좀 더 성가시게 했지만 못 견디게 심하지는 않았다. 노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 약간의 노망을 앓다 돌아가시는 법이다.
바람은 그리 울지 않았다. 적당한 나이에 죽음을 맞으셨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모두에게 오는 피할 수 없는 자연법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당에 잘 나가셨으니 천국에 가셨을 것이다. 텅 빈 듯한 집에 앉아서 생각했다.
나는 임종 때 자식도 없이 혼자 죽겠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인 것을 절감하면서 외로움을 느꼈다. 수녀처럼 정절을 지킨 꼴이 된 자신이 다시 한번 싫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바람이 장례식장에서 손님들을 접대할 때 어머니 영정에 절하고 오빠와 인사를 나누던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중후한 중년의 모습으로 인사하는 그를 보면서 누구일까 궁금했다. 그는 자기 어머니 대신 장례식에 참석한 고향 초등학교 후배였다. 삼십여 년의 세월이 그들의 삶을 가로질렀다. 앞 뒷집에 나란히 살았던 그는 바람보다 두 살이 아래였다. 바람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이사했다. 그 후로 그를 본 적도 딱히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다. 서울로 옮겨온 어머니는 고향 친구인 그의 어머니와 계속 인연을 이어왔었다. 그의 어머니는 지금 맘대로 거동하지 못해 그가 대신 왔노라 말했다.
바람은 그제서야 그의 얼굴에서 어릴 적 초롱초롱했던 눈을 기억해냈다.
그는 장지까지 동행하며 모든 행사가 끝날 때까지 그들과 함께했다.
바람은 이제 어머니 없이 혼자 돌아간다는 사실에 기운 없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슬며시 그의 차가 다가와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타세요. 모셔다드릴게.”
바람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 그는 두어 번 음식을 들고 엄마 심부름을 왔었다. 바람은 내다보지 않았지만, 그의 명랑한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는 설날 새배를 와서 식구들과 윷놀이를 했던 적도 있었다.
그의 차를 타고 서먹하게 앉았는데, 창밖으로 눈발이 날렸다.
“첫눈이네!”
중년의 늠름한 모습으로 변한 그가 바람을 보며 웃었다.
바람은 쓸쓸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흘 후 그에게서 생각지 않았던 전화가 왔다.
토요일 시간 되면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고 청했다.
그녀는 주말이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거나 TV를 보았다. 영화관이나 콘서트 등을 관람하는 건 주로 주중에 했다. 사람들이 많아 번잡한 것이 싫었다. 퇴근 시간이 잘 지켜지는 공무원은 그런 점이 좋았다.
화수분처럼 매달 어김없이 입금되는 봉급은 말할 것도 없다. 바람은 언제나 저축하고 남는 돈으로 생활하며 만족했다.
전화를 받은 그녀는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끼며 이 옷 저 옷 입어보았다.
그러다 픽 웃었다. 그는 유부남일 텐데 내가 왜 이러나 생각하면서도 뭐 한 번 만나 밥 먹는다고 무슨 큰일이겠느냐 지난번 그가 베푼 성의에 보답해야지 생각했다.
몇 벌 안 되는 옷들은 모두 단정하고 무채색이었다. 평소에 좋았던 그 옷들이 우중충하게 느껴졌다. 구두 역시 눈에 띄지 않는 전천후 검은색과 여름용 베이지색 샌들뿐이었다. 거울을 보던 그녀는 조금 화려한 색의 조화가 필요하다 생각되었다. 백화점에 들려 꽃무늬 잔잔한 색깔 고운 스카프를 하나 사서 목에 둘렀다. 검은색 정장을 훨씬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들은 그간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는 인천에 있는 한 중소기업 사장이었고 처자식이 있는 가장이었다. 바람은 여태 결혼하지 않은 자신의 처지가 난생 처음 초라하게 느껴졌다.
“왜 결혼 안 했어?”
그는 이야기 끝에 스스럼없이 말을 놓으며 물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못 한 거야.”
“좋아하는 사람 많았을 거 같은데, 어릴 때 나도 좋아했는데.”
어릴 때 날 좋아했다고? 그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시간을 말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를 관심 있게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어린 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서울 온다며 연락해도 괜찮냐고 물었다.
바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만나서 밥 먹는 정도라면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난주 금요일, 그는 말 한대로 전화했다.
바람은 샤워하다 물을 뚝뚝 흘리며 거실로 나와 핸드폰을 받았다.
점심시간에는 안부를 묻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는 실망하기까지 했다.
퇴근하고 힘없이 집에 돌아올 때는 그가 전화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자 긴장했던 마음이 툭 끊기며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는 바쁜지 몇 마디 나누지도 않고 내일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서둘러 끊었다. 살짝 서운함이 스쳐 지나갔다. 종일 기다렸는데...
바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찬찬히 보았다. 어느새 오십을 바라보면서 배에 살짝 군살이 붙어 있었다. 젖가슴도 좀 탄력이 줄어든 것 같았다.
이렇다 할 운동을 하지 않았어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했었는데 ‘나이가 깡패’라는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앞으로는 신경을 좀 써야겠구나. 근데 내가 왜 이러지? 그는 유부남인데 그의 전화를 무엇 하러 기다리지? 그녀는 물기도 닦지 않고 의자에 앉아 얼굴을 붉혔다. 만나지 말아야 하는 사람 아닌가? 뭐, 친구 정도는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가 다른 마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고향 동생이지 않은가!
바람은 좋아하는 바흐의 교향곡 볼륨을 아주 작게 줄이며 자리에 누웠다. 평소처럼 잠이 오지 않고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 진솔하던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평범한 곤색 골덴 상의에 넥타이를 매지 않은 셔츠,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보기 좋았다. 그녀 앞으로 반찬을 옮겨주며 자상하게 신경을 써주었다. 그가 관심 보이며 연락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변화 없던 일상의 커튼이 활짝 열리고. 달콤한 봄바람이 불어 들었다.
그녀는 오전에 백화점에 나갔다. 주말의 백화점은 사람들로 붐볐다.
바람은 하늘하늘한 봄꽃무늬 쉬폰 원피스를 몸에 대고 거울을 보았다. 어울리는 듯도 하고 좀 어색해 보이기도 했다. 가격표를 보니 생각보다 훨씬 비쌌다. 종업원이 얼른 다가와 미소 띤 얼굴로 말한다.
“입어보세요. 그래야 제대로 알 수 있어요. 색깔이나 디자인은 잘 어울리시는데요.”
바람은 탈의실에서 옷을 입고 나와 거울을 보니 완전 다른 여자가 서 있었다.
“보세요. 곱잖아요? 딱 손님 옷인데요.”
조금 더 날씬해 보이는 거울 탓인지 바람의 눈에도 예뻐 보였다. 아주 여성스럽다.
근데 신발이 어울리지 않았다. 운동화하고는 맞지 않았다. 바람은 입고 온 옷을 쇼핑백에 담게 하고 구두를 보러 갔다. 아무래도 이 옷에 어울리는 구두를 사려면 그대로 입고 가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점원이 골라 주는 구두를 세 컬레 신어보고 그 중 미들 굽의 스킨색 봄 구두를 골랐다. 집에 와서 들던 백을 들고 거울을 보니 또 어울리지 않았다. 허긴 이런 하늘거리는 원피스는 사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어울리는 백도 있을 리 없었다.
바람은 내가 왜 이러지? 그가 뭐라고 내가 이렇게 신경 쓰는 걸까? 갈등이 일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었다. 자신의 여성성에 곰팡이가 앉을 지경이었다.
그와 약속한 시간을 기다리는 순간이 더디게 흘렸다.
안국역에 도착하여 주변을 두어 번 왔다 갔다 걸었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붐볐다. 그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보러 갈 생각으로 이곳에서 만나자 하였다.
약속 시간이 지나는데 그의 모습은 역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이 조바심으로 두근거렸다. 이렇게 초조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10분이 채 지나기 전 헐레벌떡 그의 모습이 솟아 나왔다.
“은향, 늦어서 미안해. 오늘 많이 바빠서 간신히 나왔어.”
아직 꽃샘추위가 남은 기온인데 그는 달려오느라 더웠는지 손등으로 이마를 쓱쓱 문질렀다. 안도의 한숨을 날리고 바람은 얼른 향긋한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는 지난번과 달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바람은 순간 심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미술관에서는 현대 작가 최우람의 ‘작은 방주’라는 거대한 설치 작품이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작품이 노를 저으며 서서히 바뀌는 장관을 보면서 감동하였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멋진 장면에서 그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꼭 잡았다. 따뜻한 감촉이 그녀의 전신에 퍼지며 살짝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처음이었다. 단 한 번도 이런 전율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식사하고 한식 까페에 들려 차를 마시며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바람의 화사한 모습에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다. 무어라 칭찬을 좀 하고 싶었지만 쑥스러워서 그냥 미소를 보내고만 있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바람은 그의 가족에 대해서 물었다. 사실 묻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색함을 지우기 위한 자연스러운 위장이었다. 사실 그의 아내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았다.
“재작년에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어. 지금은 괜찮은데, 그 후로 잠자리를 거부해.”
그가 환하던 미소를 거두고 좀 씁쓸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아내가 수술 전후로 짜증이 늘면서 갱년기 증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제는 각방을 사용한단다. 아직 갱년기 증상을 앓기에는 좀 이르지 않나 생각되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법이니까. 바람은 아직 생리를 하고 갱년기 증상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지하철이 떨어지기 전까지 그녀와 함께 있다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기 전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은향, 어제 즐거웠어. 행복한 하루 보내.”
“고마워~ 그대도 좋은 하루 보내길~^^”
그의 카톡 사진은 햇빛이 비치는 드넓은 바다에 떠오르는 해를 배경으로 부부가 나란히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다정한 그의 이름이 있었다. 박해일.
바람은 자신의 카톡 사진을 다시 보았다. 아름다운 항구에 붉은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 바람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의 핸드폰 카톡에 날아갈 것이다.
잠자리에 누워 그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그의 흰머리가 약간 섞인 머리칼은 구불거렸다. 원래 곱슬머리인지 퍼머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보기 좋았다. 그의 눈은 크지 않았지만 여전히 반짝거리며 총명해 보였다. 적당한 코, 적당한 입술, 약간 검은 피부, 적당한 체격이 모두 바람의 마음에 들었다. 꾸미지 않은 그의 자연스러움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어릴 적 어리게만 느꼈던 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진솔하게 바람을 대하였다. 그의 눈빛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바람은 아무 저항도 느끼지 못하고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오기를 기다리는 바람의 일상이 초록빛으로 반짝거렸다. 세상 만물이 반짝이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늙어가는 독신 여성의 단촐함 대신 싱그럽게 물오르는 꽃봉오리처럼 그녀의 사랑이 꽃피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 도사린 채 그녀를 질책하는 부도덕함은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그의 가정에 누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조금만 그의 사랑을 나누어 받고 싶을 뿐 더 원하는 것이라곤 없었다. 그의 호감을 거부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을 좀 지닌들 무슨 죄가 되겠는가!
바람은 그가 연락하기 전에는 절대 먼저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기다렸다. 똥 마른 강아지처럼 핸드폰을 손에 쥐며 그의 메시지를 기다렸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그의 다정한 아침 인사가 있는 날은 그녀도 다정하게 인사를 보냈다.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하루는 환한 햇빛 속에 있었다. 그야말로 그는 그녀의 선사인이 되고 있었다.
저녁때 그가 바람에게 키스를 보내며 잘 자라고 인사하면 그녀는 그리움으로 몸을 떨었다. 그는 바람이 말하지 않아도 그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아내에게서 심하게 거부당하며 모욕적인 말까지 들었을 때 그는 은향을 생각했다. 아내에게는 성욕밖에 모르는 짐승 같은 남편으로 무시당했지만, 은향 그녀에게는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녀를 책임질 수 없지만 솟구치는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수줍어하는 그녀를 생각하며 자위했다.
“당신을 안고 싶어. 사랑해.”
바람은 그의 메시지를 보면서 몸을 떨었다. 그녀의 질이 촉촉이 젖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이 싱글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사랑해.”
가볍게 응수했다. 부부가 나란히 앉은 사진이 눈에 거스렸다.
그녀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잠 못 이루고 뒤척거렸다.
오래전 젊었을 때 함께 근무하던 동료를 좋아해 본 적은 있었지만 그냥 짝사랑이었다. 그가 결혼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의 허무한 사랑은 사그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여태 단 한 번의 육체적 관계도 해보지 못한 채 48살이 되었다. 이 사실은 자존심상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몇 번 유부남들이 데이트 신청을 했지만 그녀는 아예 시작도 하지 않고 거절하며 그들의 구애를 속으로만 즐겼다.
세상에는 몇 가지 유형의 거만한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잘났지만 거만하지 않은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이들 주위에는 이성이 끊이지 않는다. 둘째는 잘나서 거만하게 거들먹거리는 사람이다. 이들은 이성이 유혹하지 않는 힘든 부류이다. 셋째는 잘나지도 않은데 거만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때론 운 좋게 행운을 잡기도 한다. 넷째는 잘나지도 못하고 거만하지도 못한 부류가 있다. 그들의 삶은 천박함에서 뒹굴지만 즐거움을 추구하며 분주하게 살아간다.
바람은 셋째에 속한다. 그녀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만함을 지니고 있음을 본인은 모르지만 타인은 알고 있어 적막한 삶을 살아간다.
해일은 어릴 적 사춘기 마음으로 그녀를 좋아했었다. 해일의 어머니는 장례식에 다녀오라는 부탁과 함께 그녀의 효성스러움을 칭찬했다.
“갸가 정말 착하데이. 제 오빠가 모시지 않는 어머니를 죽을 때까지 모셨데이.”
그녀의 선함을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뒤늦게 만난 그녀는 교양있고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진실한 깊은 눈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혼도 하지 않고 연애 경험도 많지 않은 것 같은 순진한 그녀를 보면 마음이 흥분되며 홍두깨에 힘이 실렸다.
점차 수위가 높아지는 그의 구애는 바람을 꽁꽁 결박하였다.
어느새 바람은 꼼짝없이 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드디어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안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순결한 처녀였음을 알자 대단한 희열과 함께 부담스러움도 느꼈다. 가정을 깨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두 자녀가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적어도 그들이 자립해 결혼할 때까지는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다만 해소할 수 없는 성욕이 문제였다. 결국 그녀의 동의 아래 그녀와 육체적 관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동침은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밤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그가 12시가 되기 전에 떠나면서 그녀의 번뇌는 시작되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을 만큼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지극한 손길과 따스한 품을 마다할 수 없었다. 생전 느껴보지 못한 열정이며 안락함이었다. 이 세상이 끝난다고 해도 멈출 수 없는 희열이었다. 그의 애무는 섬세하고 뜨거웠다. 절정의 순간 그녀는 무아지경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다정한 인사를 건네왔다.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애정 어린 관심에 바람은 정신줄을 놓을 만큼 기뻤다. 휴대폰을 꺼내보고 또 꺼내보았다. 나란히 앉은 그와 아내의 사진을 보고 또 보아야 했다. 그럼에도 사랑받고 있는 느낌은 이런 것이구나 이제야 알았다.
바람은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매일 반복되는 권태로운 일상을 깨고 그녀를 날아오르게 한 사랑이었다. 번뇌는 그녀의 일일 뿐 그 앞에서 단 한 번도 내색해 본 적이 없었다. 쾌락의 대가를 치루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혼자서만 되돌아오는 돌덩이를 굴리고 또 굴렸다.
해일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몸과 마음을 다해 그녀를 섬기고 사랑하였다. 그녀의 몸은 활짝 핀 꽃처럼 그의 정액을 받아들이며 수액을 쏟아냈다. 그들은 행복했다. 천국이 있다면 이렇게 기쁜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바람은 주위 사람들이 눈치챌 만큼 화사해지며 아름다워졌다. 환한 낯빛은 생동감이 넘쳤고 행동은 민첩해졌다. 동료들은 그녀가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농담을 던졌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말은 그녀를 두고 할 말이었다.
세상일은 무엇이든 끝이 있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법이다.
해일의 아내는 그의 언동이 활기차고 기분이 상승한 것을 알아챘다. 아무 증거도 없었다. 그의 핸드폰은 깨끗했다. 카톡에는 여전히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이 그대로였다. 근래 들어 자주 한 전화 따위는 없었다.
‘바람’이라는 친구가 새로 등장해 있었지만 내용은 없었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독일어 발음의 유튜브 노래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Ich Liebe Dich.
그는 요즘 주말이면 예전보다 늦게 귀가하였다. 어제는 12시가 지나서 집에 왔다. 그녀를 찾지도 않고 제 방에 들어가 잠들었다.
달라진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느낌에 불과했다. 근데 그녀는 왠지 그에게서 제외된 듯한 소외감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그와 동침한 게 언제인지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되었다. 그는 결혼 생활 이십여 년 바람 같은 것은 피워본 적이 없는 신실한 남자였다. 사업상 여자와 주고받는 전화를 들은 적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그와의 지극한 잠자리 때문이었을까?
근데 지금은 뭔가 알 수 없는 야릇한 기류가 감지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미세하지만 확실히 다른 무엇이 있었다. 그에게 무관심한 채 자유롭게 소일하던 그녀의 정신에 반짝 비상등이 켜졌다.
그의 아내는 주말에 그의 회사 근처로 가 멀찍이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자동차를 몰고 전철역까지 가서는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전철역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녀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 차 밖으로 나와 보니 이미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며 내가 괜한 사람을 의심하며 잘못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한동안 그는 그녀의 몸을 안고 싶어 했지만 냉정하게 뿌리치는 그녀에게 풀이 죽어 몇 번 그러더니 더는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시간이 꽤 오래되었다. 나는 왜 그와 육체관계가 하기 싫어졌을까?
뜨겁던 감흥이 사라졌다. 아이들 학업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탓일까? 갑상선암에 걸려 두려움에 빠졌을 때 그가 귀찮아졌고 우울함이 밀려왔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아내에게 그는 성관계를 요구하고 싶을까 생각하니 짐승처럼 느껴지고 싫었다. 그 정도의 암은 수술로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었지만 아무튼 그 후로 무기력함이 몰려오며 갱년기 증상이 시작되었다.
친구들 만나서 맛있는 음식을 찾아 몰려다니는 것도 재미없어지고 백화점 세일 쇼핑을 다니던 것도 시들하니 흥미가 사라졌다. 필요한 물건은 차고 넘쳤다. 아이들 저녁을 차려주는 정도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조차 아이들은 밖에서 사 먹고 학원에 가기 일쑤였다. 깨끗이 쓸고 닦던 집안 살림도 흥미가 없어지고 허전함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성욕이 떨어지면서 생기를 잃어버렸다. 어느 순간 절정을 느끼지 못하는 성생활이 지겹게 느껴졌다. 직장생활로 바쁜 남편에게 자신은 성욕을 해결해주는 존재 이상의 의미가 없는 듯 느껴져 그만 보면 괜히 짜증이 일어나서 번번이 그를 거절했다. 뭔가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무력감에 빠져들곤 했다. 그녀가 남편이라도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지는 못할 것 같았다. 피차 마찬가지인 권태기에 접어든 것이다. 친구들이 권태기를 이야기할 때 그녀는 남의 일처럼 생각했었다.
“한 남자와만 평생을 사는 건 참 지겨운 일이야.” 라고 말하는 한 친구를 보며 깜짝 놀랐다. 주위에 남편 몰래 바람 피는 동창이 있어 그들은 수군거리며 소문을 퍼트렸다. 사실은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이탈행위를 부러워하는 심보가 깔려 있었다.
그녀는 다음 주를 기다리며 말없이 그를 관찰했다.
그의 일상은 변함없이 되풀이되었고 덤덤한 그들의 관계도 여전했다. 그녀는 매처럼 그를 지켜보았고 그는 그녀에게 관심 없이 낙천적인 낯빛으로 나가고 또 들어왔다.
다음 주 토요일 그녀는 다시 그의 회사 앞으로 갔다. 그러나 그의 차는 주차장에 없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그는 아침부터 만사를 제치고 바람과 야외로 나갔다. 그녀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자신의 바쁜 시간을 선물했다. 무엇도 요구하는 법이 없는 그녀가 조심스럽게 시간을 낼 수 있는지 물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바람 쐬려 나가고 싶어서... 봄이잖아. 그리고 내 생일이구.”
그는 무조건 오케이 했다. 그 하루를 빼기 위해서 며칠을 동분서주하며 스케줄 조정을 했다. 귀찮기는커녕 마음이 즐겁기만 했다.
강변의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그들은 자전거 하이킹을 즐겼다. 파릇파릇 물오른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수면에 부서지며 반짝거렸다. 그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이미 사라진 젊음 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 사라지는 청춘을 만끽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번져 갔다. 해일은 그녀를 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아쉽기만 했다.
그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는 물었다.
“어디 갔었어? 전화도 안 받고...”
“바이어들 만나고 바빴어. 전화한 줄 몰랐네.”
그가 안 하던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아내는 직감했다. 그러나 더 캐물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동안 출근한 그에게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는 전화하지 않고 살아왔다.
근데 왜 갑자기 그녀는 초초해지는 걸까?
“왜 전화했는데?”
그가 화장실에서 나오며 물었다. 그녀는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었다. 그는 더 묻지 않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왠지 모를 눈물이 솟았다. 그가 예전처럼 청하지 않는 것이 이렇게나 서운하다니...
그가 문 앞에서 가벼운 입맞춤을 나누고 떠나자 바람은 침대에 앉아 이 행복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생각했다. 그의 아내에게 죄스럽지만 이제는 멈출 수 없는 이 욕망을 누가 알겠는가.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서슴없이 돌을 던졌으리라.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우며 그가 퍼붓던 애무의 손길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앞날의 희망이 없는 도둑질한 사랑은 그녀의 가슴을 저리게 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와 만난 지 세 달이 지나며 계절이 바뀌었다.
그해 첫눈이 내리던 장례식장 이후 화사한 벚꽃이 봄비에 젖으며 꽃비를 내렸다.
낮과 밤이 섞이며 땅거미 지는 파르스름한 창밖을 내다보며 바람은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 휩싸였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오늘은 그가 일주일 중 단 하루 카톡을 쉬는 일요일이었다 그 하루는 길고도 길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그는 출근하면서 그녀에게 아침 인사를 할 것이다. 그러면 바람의 하루는 빛으로 가득해졌다. 그는 퇴근하면서 한 번 더 그녀에게 사랑의 언어를 속삭였다. 바람은 전기 충전하듯 그를 만나는 토요일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세상의 수많은 음악과 시가 그리움을 노래한다.
그녀에게는 피상적이기만 했던 그리움을 이제 바람은 온몸으로 느끼며 자신의 영혼을 불태웠다. ‘그대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그를 사랑하고 사랑했다. 돌아서면 금새 다시 보고 싶어지는 그를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길었지만 그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 시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시간의 상대성에 어리둥절했다.
토요일 오후 그가 현관 키 번호를 누르는 소리는 기다리던 바람의 심장을 멈추는 듯 했다.
문이 열리고 그의 품에 안기는 순간 긴 입맞춤을 하였다. 일주일간 쌓인 그리움은 그그들을 폭풍처럼 치솟는 욕정으로 실어 갔다. 그들은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을 누리며 천상을 날았다.
요란하게 차임벨이 울렸다.
순간 두 사람은 껴안은 채 동작을 멈추었다.
다시 거듭되는 두 번의 다급한 차임벨 소리.
해일은 얼른 일어나 옷을 입었다. 핸드폰을 챙겨 넣었다.
바람은 놀라서 꼼짝할 수 없었다.
해일은 나가기 전 그녀를 한 번 얼른 바라보고 방문을 닫았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옷차림을 바로 한 후 현관문을 열었다.
창백한 아내가 서 있었다.
그녀는 한 시간 남짓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데 망설이며 서성였다.
남편과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를 멈추게 하고 싶은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어서 두려웠다. 질투심에 휩싸여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벨을 누르면서 제발 남편이 아니길 빌었다.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말없이 차로 갔다. 그리고 잠자코 시동을 걸었다.
아내 역시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 입술을 깨물며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손을 가만히 쥐며 말했다.
“여보, 미안해.”
아내는 잡힌 손을 빼지도 않고 말없이 앉아 울었다.
집에 도착한 후에도 그들은 말 없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악다구니 치며 싸우면 무엇하겠는가!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결해주어야 할 일이 남았을 뿐이다.
해일은 변명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할 생각이었다.
은향은? 그녀는 어찌해야 할까? 이혼하지 않는 한 더는 그녀를 취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아플까...
바람은 그가 나가는 문소리와 함께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공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끝났구나!
그가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의 아내가 온 것일까? 믿기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이렇게 돌아갈 리가 없었다.
바람에게 주어졌던 사랑은 오늘 밤 산산조각이 났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와 단절된 세상은 이제 상상할 수 없었다.
그녀는 카톡을 열었다. 처음 시작한 날로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메시지가 쏟아지고 쏟아지고 또 쏟아졌다. 밤새 모두 다시 읽었다. 만리장성을 쌓고도 남을 분량이었다.
그에게서 무슨 연락이든 있으리라. 어두웠던 창이 밝아오고 있었다.
잠들자. 지금은 잠들어야 한다.
해일은 제 방에 들어와 누웠지만 태산처럼 밀려드는 낭패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에게 뭐라고 메시지를 보내야 할까 생각하지만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삶의 활력이 되어준 그녀가 소중했다. 그녀와 나눈 사랑의 시간을 어찌 없던 것으로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까지 뿌리내린 이 가정 또한 소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두 자식을 해칠 수 없었다. 아비로서 그들이 받을 상처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아내는 무엇을 원할까? 순순히 그에게 손을 잡혀 따라 나온 것을 보면 헤어질 생각은 없는지도 모른다. 더는 그의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결단이었을까? 다만 멈추기 바랬을 뿐일까?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해일은 아이들이 눈치채지 않기를 바랬다.
아침이 되어 거실과 주방에서 아이들이 식사하고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해일은 다시 잠들었다.
아내는 평소보다 좀 늦은 아침 식사를 차려 아들들에게 주었다. 아빠는? 묻는 아들에게 좀 더 주무시게 두라 했다.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고 아내는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젯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녀도 밤새 생각했다. 그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더더욱 다시는 그와 동침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잘못한 아빠를 만드는 것이 가장 싫었다. 아들들은 엄마보다도 아빠를 더 따르고 신뢰했다. 그들이 받을 상처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가 만난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화류계 여자는 아닌 모양이다.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싶어 할지 궁금했다. 그와 헤어져 살 자신도 없었다. 그는 살림밖에 모르는 그녀의 보호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점심때가 지나 방에서 나왔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며 다시 한번 마음 아프게 한 것을 사과했다.
“그 여자와 헤어질 수 있어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의 식사를 차려주었다.
그는 꼼짝없이 그녀의 말에 순종해야만 이 가정을 허물지 않고 지킬 수 있었다.
바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핸드폰을 더는 볼 수 없어서 아예 꺼놓았다.
이제 연극의 막은 내렸고 그녀는 퇴장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백여 일 동안 삶의 의미가 되었던 해일. 그의 다정함.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이 솟았다.
남화용이 부른 ‘홀로 가는 길’이 가슴을 저미게 하였다. 유튜브에서 다시 찾아 심수봉이 부른 노래로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뼈를 깎는 사흘이 지나갔다.
허청거리며 직장을 오고 갔다.
아무에게도 말 한마디 없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집을 부동산중개소에 내놓았다.
연금이 아닌 일시불로 퇴직금을 신청했다. 그동안 모은 돈도 모두 찾았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오만 원 지폐를 서류 가방 가득 채워 머리맡에 놓았다.
커다란 트렁크에 꼼꼼하게 짐을 쌌다. 오래오래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내과에 가서 처방받은 수면유도제 삼일 분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이 긴 잠을 자고 나서는 나비처럼 날아가리라.
이제는 갑갑했던 시공간을 떠나 멀리멀리 떠날 때가 되었다.
늘 떠나고 싶었던 바람이 떠날 수 있도록 그는 날개가 되어주었다.
그녀가 책에서 보았던 미지의 낯선 세상으로 원 없이 부는 바람이 되어 깃발을 높이 높이 휘날릴 것이다.
- 끝 - (2023.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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