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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

 

1. 그 분

  

그녀에게 남자는 존경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녀를 사랑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녀 또한 사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편이 죽었을 때 그녀는 그가 죽기를 바란 사실을 까맣게 잊고 몇날 며칠을 서럽게 울었다. 아니 이 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을 글썽인다. 증오하고 경멸하던 대상이 사라진 허전함...

벗어나길 간절히 바라던 맘에 안 드는 감옥이 홀랑 사라지고 얼떨결에 맞은 자유는 날기를 잊어버린, 새장을 나온 새처럼 막막했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남편의 친구인 그가 그녀에게 접근하기란 눈독을 들인 물건을 훔치는 일보다도 수월했다. 그녀를 위로해주겠다며 수시로 그녀의 부동산 사무실에 들러 말없이 버티고 앉았다 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없는, 부동산 중계사 자격증도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영어강사를 하던 그녀가 남편이 죽기 전 차려놓은 부동산 사무실을 울며 겨자 먹기로 떠맡은 건 그래도 이 학교 저 학교 돌아다녀야하는 강사 수입보다 나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제 사무실에서 손님이 없는 오전에는 조용히 책을 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처음엔 강사를 쉬는 시간 동안 몸이 불편한 남편을 돕지 않을 수 없어서 사무실에 나오라는 말에 순종을 했지만 사사건건 부려먹는 남편에게 부아가 나는 일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계속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건 약과였다. 한번은 들은 척도 안 하자 급기야 욕지거리가 날아오고 기겁을 한 그녀는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가 눈물을 훔치며 그를 저주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 골목에서 이상한 남자의 천사 같은 아내로 소문이 나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서서히 죽어가는 그에게 시달렸다.

‘돌아버릴 것 같아. 이러다가는 내가 미치고 말거야!’

 '너도 남편이 못되게 굴면 욕하고 싸워. 그래야 그런 횡포를 막을 수 있지. 꾹꾹 참기만 하면 병 걸려.’

 ‘나도 욕해. 차라리 죽으라고. 소리 내서 말하지 않을 뿐이야. 난 너 같은 인간하고는 다르다고 그를 경멸해.’

 더는 할 말을 잊은 듯 친구는 그녀를 위로했다.

 ‘그는 환자잖아. 오래 살지 못할 거 같다.’

 ‘그래... 자기도 힘들어서 그러겠지. 근데 지금도 술을 감춰놓고 나 몰래 마셔. 정말 지겨워.’

참다못한 그녀가 한숨을 쉬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꼭 한 달 만에 남편은 죽었다.

심한 당뇨병을 앓고 있던 남편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심신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그에게는 제 맘대로 부릴 수 있는 아내와 세 아들이 있었다. 죽은 남편은 그들 소왕국의 제왕이었다.

아침 여섯시면 일어나고 밤 열시면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규칙을 누구도 어길 수 없었다. 물론 일요일도 예외는 없었다. 시험공부에 시달린 막내녀석이 말을 안 듣다가 장장 두세시간 설교를 들은 이후로는 그녀를 포함한 그들 모두는 나름대로 그를 속이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이층으로 올라간 다음 그들은 다시 침대 속에서 일어나 스탠드를 켜고 못다한 제 할 일들을 했다.

 

언젠가 그는 그녀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함께 근무했던 그녀의 남편을 만나러 갔는데 다소곳이 순종하며 미소 짓는 그녀는 그야말로 천사의 모습이었다. 정성껏 저녁상을 차려 대접하며 많이 드시라던 그녀의 목소리는 앳된 소녀처럼 맑고 예뻤다.

그는 놀란 듯 그녀를 찬찬히 보았다.

‘자네는 정말 복도 많네. 나도 저런 아내와 한 번 살아보면 원이 없겠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그의 말을 또렷이 기억했다. 처음 그가 이성으로서 자신에게 접근한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그녀는 그의 전화를 고의적으로 받지 않았다. 그러면 다음 날 영낙없이 그는 사무실에 들렸다. 그녀는 사무적으로 인사를 하고는 무관심한 척 그를 의식하지 않고, 손님이 없을 때는 책을 읽거나 또는 손님을 모시고 일을 보러 나갔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가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숨겼다.

그가 그녀를 몇 십 분씩 바라보고 앉아있으면 그녀는 일어나 커피 두 잔을 타서 조용히 그의 앞에 한 잔을 놓고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는 사무실에 들릴 수 없는 날 메시지를 보내왔다.

‘당신은 진정 아름다운 여자예요. 나는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제발 나를 거절하지 말아요. 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이제라도 당신을 만난 것은 신의 축복. 먼저 간 남편 대신 당신을 돌봐주고 싶어요.

당신의 외로움을 잘 알아요.’

‘나 혼자 바라보는 석양의 황홀함이 왜 이리 쓸쓸한지 모르겠오. 함께 이 광경을 보고 싶어요.’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으며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 날 새벽녘에 조금 눈을 붙인 그녀가 아들들이 먹을 밥과 반찬을 이것 저것 준비해 놓고 대충 로션과 비비크림을 재빠르게 펴바르고는 바쁘게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어젯밤 읽었던 메시지를 다시 열어보려고 할 때 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얀 목련이 나비처럼 내려앉는 봄이 오고 있건만 아직 춥고 긴 겨울인 내 가슴에 봄처럼 화사한 그대.

하루도 보지 않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요. 많이 보고 싶소!’

그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되면서 느꼈던 사랑의 감정, 죽을 것만 같았던 열정을 그가 고스란히 옮겨놓는 듯 했다.

처음 대학을 입학하고 교정을 내려오던 계단에서 마주 올라오던 남학생, 순간 그녀는 숨이 막히는 듯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를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그를 뒤돌아 본 그녀는 적당한 키에 검은 코트를 입은 그가 학교 건물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에 반듯한 콧날과 적당히 다문 입술, 약간 구렛나루가 거뭇한 그는 무슨 생각인가 골몰하는 표정이었다. 그날부터 그녀는 행여 그를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남학생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그녀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봉사 동아리 신입회원 축하모임에서 부회장인 그는 법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눈시울이 뜨거워져 그를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그러잖아도 입시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던 그녀의 학교생활은 즐거움으로 가득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 그를 볼 수 있는 수요일은 그녀에게 특별한 날이 되어 나머지 육일은 그 날을 위해 존재했다.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하는 강변도로를 시원스레 달리며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나와주어 고마워요”

그녀는 그가 민망하지 않게 미소 지으며 살며시 손을 빼내어 가방을 열고 마치 땀이라도 닦는 듯 손수건을 꺼내 살짝 이마와 볼에 대었다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명멸하는 불빛들이 아름다운 강변은 바람이 좀 찼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따스하게 녹아있었다.

그에게서 약간 거리를 두고 걷는 그녀에게 춥지 않냐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자신의 포켓에 넣었다.

그녀는 차마 그 손을 빼낼 수 없어 망설이며 말했다.

"괜찮은데..." 

그의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며 그녀의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아내와는 오래 살았지만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냥 자식 키우며 의무적으로 살았어요.”

그녀는 의아스런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아내는 억척스럽고 도무지 사랑스런 구석이라곤 없어요. 철없을 때, 부모님께서 결혼을 재촉하는 바람에 몰라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살았어요. 이제 아이들이 다 크고 여유가 생기니까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게 되더군요. 마치 돈 버는 기계처럼 열심히 벌어 부모님을 모시고 자식들을 키웠지만 별 낙이 없었어요.”

“......”

그녀는 그의 얼굴에 쓸쓸한 빛이 스치는 것을 보며 잠자코 들었다.

“녀석은 정말 행복한 놈입니다. 이제 저에게 바턴을 넘기고 간 것 같아요.”

그는 그녀를 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전 아내 있는 사람과 사귀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그의 포켓에서 가만히 손을 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하지 말아요. 시간을 주세요. 제가 알아서 할께요.”

그녀는 그와 헤어져 돌아와 생각을 하고 또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욱 생각났다.

앞으로도 얼마를 더 살지 알 수 없는 수십 년의 세월을 혼자 살아갈 생각을 하면 그만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랑하여 결혼한 남편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세째아들을 낳고 오래지 않아 점차 소원해지는 관계에 마음이 상하곤 했다.

점차 그를 사랑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울타리가 되어준 듯 오로지 세 아들을 사랑하며 키우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다.

남편은 둘째를 낳은 이후로도 생활비를 올려주지 않았다. 둘이 신혼살림을 할 때 주던 금액 그대로였다. 물가가 오르고 아이들 교육비가 들면서 그가 주는 생활비는 최소한의 기초생활비 밖에는 되지 않았다. 아무리 아껴써도 큰 애를 유치원에 보내면서부터 생활비는 모자랐고 그녀는 영어교습을 해서 생활비를 보태기 시작했다. 그리고 셋째 아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중학교 시간강사까지 나가야만 했다. 

그녀의 하루는 이십사 시간이 모자를 만큼 바쁘고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에게 생활비를 더 달라고 계속 말하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죽고 난 이후 진저리나던 그를 용서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자식들 앞으로 적금을 들어 결혼자금이 되기에 충분한 돈을 마련해 놓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인연이라는 걸까?

남편이 오십도 안 되어 퇴직계를 낸 사실을 알고 그녀가 은행으로 뛰어가 조금만 유보시켜주길 간절히 바랬을 때, 그는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일 년이라는 시간을 미룰 수 있게 도와주었지만 남편은 결국 그만두었다. 은행 업무는 남편의 생리에 맞지 않았다.

은행을 그만 둔 후 남편은 대학원을 두 군데나 졸업하며  석사 학위를 두 개나 받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에게 학위는 자기만족 이상이 되지 못했다. 그동안 그녀의 고생스러움이 힘에 부쳤지만 그래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 아니 그보다는 그를 피해 집에서 나올 수 있어서 더 좋았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세 아들들을 하나씩 낀 영어교습을 일주일에 세 팀 하면서 강행군을 할 수 있었던 건 자식을 지극하게 사랑한 모성애 때문이었다.

이제 막내까지 대학에 들어가고 그들은 자기들의 세계에 그녀를 들여놓지 않았다.

그녀는 아내가 있는 그에게 쏠리는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애썼지만 어느덧 그의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매일 수없이 쏟아지는 그의 메시지는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시로 핸드폰을 열어보게 하였다.

그녀가 출근하는 아침 시간, 그는 사흘이 멀다 나타나 그녀를 기다렸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손님이 오면 사무실을 지켜주었다.

이 상상치 못했던 사랑받고 있다는 행복감은 그녀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남대문 시장에 가 철지난 가장 싼 옷을 사 입던 그녀가 백화점에 들렸다. 젊은 이들이 입는 최신 유행 디자인의 고운 원피스를 사 입었다.

퍼머값이 아까워 미장원에 가지 않던 그녀가 근처 미장원에 아예 한달치 미용료를 계약하는 단골이 되었다.

“어? 연애하나보네! 왜 이렇게 예뻐졌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대뜸 탐색전을 벌인다. 그녀는 즐거운 마음을 감추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너 내가 대학때 우익분 좋아했던 거 기억하지? 그땐 내가 일방적으로 그 사람을 좋아했던 거지만...”

 “무슨? 결국은 그가 네게 결혼하자고 했다며?”

 “그랬지. 근데 지금 그 분이 정말 나를 원해. 그 분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야.”

 “그래? 독신이야?”

 “아니, 그래서...”

“그래서?”

웃음기가 가신 친구는 정색을 하고 다그쳤다.

“그 분, 이혼할꺼야. 약속했어.”

별일 아니라는 듯 그녀 특유의 가만가만 속삭이는 목소리에 친구는 놀라서 되받아쳤다.

“뭐? 얘가... 너 그런 짓 하지 마. 죄 받아.”

“나도 그러구 싶지 않아. 근데 얼마나 간절한지, 내가 예전에 우익분 사랑하던 일 생각하면, 도저히 마음이 아파서 그를 거절할 수 가 없어. 이젠 아이들도 다 커서 둘째도 곧 결혼할거래. 이제 남은 여생은 제 뜻대로 한번 살아보고싶다고 하셔.”

“세상에, 아니 그럼 여태까지는 제 뜻대로 안 산 거래?”

“...  안 만나겠다고 하니까 한강에 빠져 죽을거래.”

“하! 갈수록 태산이군. 죽더라도 지갑이나 꺼내놓고 빠지라고 해라.”

친구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물을 벌컥 들이킨다.

“얘는... 농담 아니야. 정말 그럴 수 있는 사람이야. 얼마나 순수한 사람인지, 너도 만나보면 생각이 달라질거야”

"소년 소녀 만나다'군!”

그녀는 배지시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들은 결국 아내에게 꼬리를 잡혔다.

그가 평소보다 좀 늦는 일이 잦아지는 걸 이상하게 느낀 아내는 그가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그의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남아있는 메세지는 없었지만 그녀의 전화번호가 여러 개 찍혀있는 것을 보았다. 아내는 그와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지만 번번이 은행 고객이라며 발뺌을 했고 특정한 한 여자와 오래 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왠지 가슴이 덜컥하는 위기감이 느껴지는 건 왤까?  

아내는 좀 더 두고 보기로 하고 내색하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그의 아내는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주 이회 정도 일찍 나가던 그가 네 번이나 일찍 나갔다. 그리고 주 일회 정도의 저녁 회식이 이삼회로 늘어났다. 무엇 보다 변화를 보인 것은 그가 거울을 수시로 자주 본다는 것이다. 그는 늘 깔끔한 정장차림을 퇴직 후에도 변함없이 고수했지만 유독 넥타이를 바꿔 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한 회사에 경제고문을 맡아 여전히 주말을 제외한 며칠은 출근을 했기 때문에 주의 깊게 보지 않는 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일이었다. 그러나 그와 삼십년을 넘게 산 아내가 아닌가. 그의 눈빛만 보아도 그의 속을 훤히 꿰뚫을 수 있을 만큼 밀착되어 살아온 세월이었다.

아내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목소리는 삼십대 여자, 아니 이십대 여자처럼 앳되고 상냥했다.

"명성부동산입니다."

부동산이라고? 아내는 괜한 짓을 하는 건가 의아했다.

"이지현씨를 만나고 싶어서 전화했는데요?"

아내는 약간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전데요. 무슨 일이세요?"

"김현우씨 알지요? 좀 만나야겠어요."

순간 그녀는 그의 아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 역시 그의 아내가 몹시 궁금했다. 아내를 배신할 수 있는 남자라는 혐오감은 처음부터 생기지 않았다.

원래 남녀관계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보이는 법이다. 성실하게 산 그가 자신을 보자 마치 예전에 자신이 그랬듯이 그만 어쩔 수없이 끌리고, 그녀 역시 자상하고 낭만적인 그의 사랑에 빠져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불가항력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녀는 이성과 사랑의 느낌을 나누어 본지 정말 오래 되었다. 언젠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편과는 셋째를 낳은 이후부터 각 방을 썼어. 그 사람과는 사랑의 감정을 나누지 못하고 살았어.’

‘그래, 딱 세 번 했지.’ 그러자 곁에 있던 친구가 폭소를 터트렸다. 그녀도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그들은 이제야 얻은 자유를 또 다른 남자에게 반납하는 생활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말렸다. 그러자 그녀는 대뜸 말했다.

‘그럼, 내가 불륜을 하란 말이니?’

‘상황윤리라는 게 있잖아. 정 헤어질 수 없다면,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에서 친구로 만날 수는 없어?’

답답한 듯 한 친구가 말했다. 그들은 그녀와 헤어져 돌아가면서 말했다.  

'이미 불륜을 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제 넉넉한 재산 있겠다. 애들도 다 컸겠다.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또 족쇄를 스스로 차려고 하는지 모르겠네. 그 고생을 하고 남자가 지겹지도 않나?'

 

그녀는 최근에 산 화사한 봄옷을 골라 입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단장한 후 그의 아내를 만나러 나갔다.

화려한 브롯치를 꽂은 정장 차림의 그의 아내는 그녀의 생각보다는 젊어보였다. 그러나 화장으로 곱게 가린 주름진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속물스러웠다. 그녀를 멸시하듯 비껴보는 눈초리는 거만하고 사나웠다.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

대뜸 반말을 하는 건 상대를 위압하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그녀는 어이가 없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 안 됐어요. 그리고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런 사이가 아니예요.”

“그래? 그럼,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이는 여자들을 만나도 가정을 버리는 남자는 아니니까. 정신 차려! 뭐 할 짓이 없어서 남의 남자에게 꼬리를 쳐!”

그녀는 순간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저 정도니까 남편이 바람이 나지 생각하면서 약간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다시는 만나지 마. 만약 또 만나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에 대해서 다 알고 있어.”

그녀가 도대체 뭘 안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교양 없는 아내와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일어섰다.

그날 저녁 그의 아내를 만난 이야기를 하며 그녀는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그는 그녀를 감싸 안으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달래었다.

그녀가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말할수록 그녀를 안는 그의 팔에 힘이 가해지고 그녀의 서늘했던 마음은 다시 따스해졌다.

 

아내의 감시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집요했다. 평소 그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아내의 돌변한 태도에 그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옥신각신하는 양을 눈치 챈 그의 노모는 그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이르렀고 그는 별일 아니라고 얼버무렸지만, 아내는 그가 바람이 났다며 떠들어 그를 민망하게 했다. 둘 만의 방으로 들어온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이 이러면 정말, 당신과 헤어지는 수가 있어. 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살은 사람이야. 이제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자유는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자유? 자유 좋아하시네. 그러면 내게도 그 자유라는 걸 한번 줘 봐. 집안꼴이 어떻게 되는지, 이날까지 당신 부모님 모시고 산 내 인생이 불쌍하다. 늙은 놈이 마누라 두고 연애하는 게 자유냐?”

“시끄 러! 당신이 나한테 함부로 하는 거 이젠 정말 질렸어.”

아내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누구지? 하는 낯선 느낌의 눈길을 힘없이 거두고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는 자리에 누워 생각했다. 어떻게 같은 여자가 이리도 서로 다를 수 있는 걸까?

아내와는 달리 그녀는 한 번도 자신에게 존댓말을 놓아본 적이 없다. 대개의 여자들이 잠자리를 한 번 하고 나면 그 친밀함에 말을 놓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그녀의 수줍은 듯 상냥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봄빛처럼 따스한 그녀의 여린 마음이 전해지면 그의 발길은 자동적으로 그녀에게 향했다.

그가 일찍 퇴근하는 그녀와 함께 사무실에서 나와 몇 걸음 옮기는 순간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그의 아내를 보고 후다닥 놀라 뒤돌아서자 그의 뒷덜미를 잡는 고함소리가 골목 안을 쨍하니 휘저었다.

“야! 김현우! 거기 안 서!”

그녀는 그만 질겁을 하며 다시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함께 일하는 미스 안은 영문을 몰라 그녀를 뻔히 쳐다본다.

당황한 빛이 역력한 그녀는 가만히 입에 손가락을 대고는 쇼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들의 심상찮은 거동을 느낌으로 눈치 채고는 있었지만 미스 안은 괜히 자신이 불안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자

일어나 정수기에서 냉수를 받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그의 아내에게 쥐 뜯기는 상상, 아니 셋이 엉겨 붙는 상상을 하자 진저리가 쳐졌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아내는 그녀의 사무실로 쳐들어오지는 않았다. 아마 그는 아내를 달래어 함께 집으로 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별별 생각을 다하다 한 정거장을 지나쳤다.

밤거리를 터벅터벅 걸으며 먼저 죽은 그녀의 남편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가 이혼을 하던지, 나와 만나는 것을 그만 두던지 조만간에 해결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애들 장난도 아닌, 이 깊이 든 정을 어찌 끊을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났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는 버스 속에서 그의 다정한 메세지를 열어본 그녀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사람들이 볼까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미안하오. 조금만 기다려요. 이럴수록 당신을 더욱 사랑하는 내 마음을 이해하기 바라오’

점심을 먹고 나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쉴 때 그는 다시 메세지를 보내왔다.

‘당신은 내 사람이요. 날 믿고 조금만 참아요. 내일 연락하리다.’

그러나 퇴근하기 전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의 아내가 들이닥쳤고, 그 상황을 참을 수 없는 그녀는 지례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미스 안은 119에 응급구조를 청했고, 그의 아내는 어이가 없어 말 한 마디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미스 안은 그녀의 막내아들이 달려오자 상황을 묻는 아들에게 얼버무리고는 재빨리 사무실을 벗어나 집으로 갔다.

“엄마, 괜찮아요?”

아들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묻는다. 감았던 눈을 뜨며 그녀는 말했다.

“괜찮아. 너무 무리했나 봐.”

“그게 아니잖아요?”

“......”

“엄마가 사귀는 아저씨, 그 아저씨 꼭 만나야 해? 정말 이래야 돼냐구!”

아들이 내미는 핸드폰에 찍힌 메시지를 본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남의 남자와 놀아나는 네 엄마 부끄럽지도 않니?’

이건 분명 비열한 짓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기가 막혔지만 잔뜩 부은 아들에게 정말 미안했다.

“그런 게 아니야. 민섭아,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할게.”

그녀는 링거를 다 맞고 돌아오면서 어떻게 어린 아들에게 그럴 수 있는지 그의 아내에 대한 증오심이 일어났다.

그들이 이혼할 수 없다면 그를 만나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히며 잠들었다.

 

다음날 나란히 누운 그는 그녀의 헤어지겠다는 말에 펄쩍 뛰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아 목에 난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며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가늘게 딱지 앉은 상처는 면도칼에 스친 게 분명했다. 깨끗이 면도한 구렛나루 아래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상처를 본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기겁을 하며 말했다.

“어머! 뭐예요?”

“내가 이혼하자고 단호하게 말하니까, 그 사람이 너 죽고 나 죽자며 칼을 들이댔어. 정말 끔찍한 여자야. 정말 단 하루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아.”

그는 아침에 면도하다 아내가 내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살짝 목을 스치며 피가 났다. 삼십년 넘게 산 아내가 진저리쳐졌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우리 어떡해요? 네?”

“현금으로 삼억을 주면 이혼하겠대.”

“정말이요?”

“응. 근데 지금 당장 그 돈을 만들 수가 없어. 건물을 내놓아도 시간이 걸려. 집으로 가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 당신과 아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다.”

그의 강렬한 포옹과 키스를 받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 분을 구해야 해. 나 역시 이제는 이 분 없이 살 수 없어. 그 사나운 여자한테서 이 가엾은 분을 구해내야 해.’

그녀의 가방 속 전화기에서 진동음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전화온 거 같은데...”

“괜찮아요. 지금은 아무 전화도 받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오늘 친구 둘과 약속을 했다.

그들이 사무실에 오기로 했는데 갑자기 그가 불러냈기 때문에 미처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나가야 했다. 이미 그들이 집에서 떠났을 시간이었다.

잠시 후 다시 진동음이 울렸다. 그들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그녀는 수화기를 꺼놓았다.

그들과 별 용무가 있는 것은 아니니 서로 친한 그들은 내가 빠져도 반가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갈 것이다.

“정말 돈을 받으면 이혼할까요?”

“그런다고 했어. 돈에 환장한 여자니까, 평생 돈타령이었지. 부모님과 자식만 아니었으면 벌써 헤어졌을거야.”

“저 때문에 자식과 부모님을 버릴 수 있으세요? 정말?”

“버리긴 무슨, 이제 다 컸는데... 막내도 곧 시집갈꺼야. 결혼할 사람이 있어. 연로한 어머님이 좀 걸리지만, 내가 계속 모시면 되지.”

 

그녀는 자신이 마련할 수 있는 돈을 계산해 보았다. 통장에 있는 돈과 아들들 앞으로 든 적금, 보험금까지 해약하면 이억 칠천은 되었다.

만약 이 돈으로 깨끗이 해결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치루고 싶었다. 그러나 과연 잘 하는 짓일까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남편은 그렇게 그녀에게 구두쇠 노릇을 하면서 아들들 앞으로 그녀가 예상치 못했던 돈을 모아놓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십여 년을 고생스럽게 일해야 했다. 사실 그 돈은 그녀의 노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망설이던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는 급기야 그녀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끝이 없을 것처럼 퍼붓는 그의 아내의 욕설에 그만 전화기를 내려놓고 싶었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그녀가 전화기를 내려놓으면 분명 그 불똥은 남편에게 튈 것이고 차라리 그녀가 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잠자코 듣고 있는 그녀에게 어느 정도 분이 풀렸는지 그 목소리가 흐느낌으로 바뀔 때 그녀는 물었다.

“삼억을 받으시면 이혼하실 건가요?”

“쌍년아, 그래, 너 돈 많구나? 니가 삼억 내놓을래?”

“딴소리 안 하실 거죠?”

“딴소리? 니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내 두 눈 똑똑히 뜨고 볼거야. 어디 그 놈하고 한번 살아봐라. 다 늙은 놈이 그렇게 좋으면!”

“알았으니 그만 주무세요.”

그녀는 수화기를 놓았다. 아예 수화기 코드를 뽑아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 저런 상스러운 여자와 살을 섞고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이 저려오는 듯 아팠다.

다음날 그의 전화를 받은 그녀는 그에게 통장번호를 물었다.

"통장번호는 왜?"

"그렇게 시달려서 어떻게 살아요? 어젯밤 전화 왔었어요."

"저런, 어젯밤 내가 회식이 있어서 좀 늦게 들어갔더니, 미안해요. 그런 일 없도록 할게. 얼마나 힘들었어? 정말 미안해."

"괜찮아요. 제가 이억 칠천은 마련할 수 있겠어요. 나머진 당신이 어떻게 해 보세요"

"아니야, 내가 어떻게 해보아야지. 당신한테 그런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아."

"나중에 갚으시면 되잖아요. 더는 견딜 수가 없어요. 애들 보기도 민망하구..."

"이따 보자. 일 끝나는 대로 다시 전화할게."

그녀는 은행으로 가 금방 송금할 수 있도록 자신의 통장에다 모든 돈을 모아 넣고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는 큰돈이니 만큼 공탁을 걸어놓아야 안전하다며 괜찮다는 그녀를 재촉해 자신이 아는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들은 안면이 있는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난 후 몇 가지 조항에 합의한 후 사인을 하게 했다. 그녀는 변호사가 자신들의 일을 아는건지, 아니면 단순히 돈을 빌리는 것으로 아는건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주는 서류를 받아들고 어정쩡하니 인사를 하고 나왔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주변의 레스토랑에 들어간 그들은 붉은 포도주 잔을 마주치며 건배했다.

그녀는 벌써 모든 일이 해결된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랑하는 이를 얻기 위해서는 이만한 대가는 치룰 수도 있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환하여 그의 나이보다 십년은 족히 젊어보였다. 그녀는 바라만 보고 있어도 눈물이 날 만큼 그가 좋았다.

이제는 남들 신경 쓰지 않고 그를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곧 그와 결혼을 할 수 있다니 날아갈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녀는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아들들을 불렀다.

“엄마가 사귀는 아저씨와 결혼을 한다면,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막 제대한 첫째는 동생들에게서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엄마 입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탓에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형은 진아랑 곧 결혼을 할 거야. 그리고 둘째 너도 내후년에 졸업을 할 거구, 민섭이도 대학 졸업을 하면... 몇 년 안에 너희들 모두 가정을 꾸리게 될거야. 그리고 나면 엄마는 혼자 남게 돼. 난 너희들 부담주고 싶지 않아. 지금 사귀는 아저씨를 사랑해. 그 분이 곧 이혼할거야. 그리고 나면 엄마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셔. 너희들이 반대만 하지 않으면...”

그들은 모두 TV 화면을 주시한 채 말이 없었다.

“싫으니?”

그녀가 아들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희생적인 엄마였다.

첫째가 얼른 엄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뇨. 싫어할 일이 아니잖아요. 다만 좀 갑작스러워서...”

“그래, 너희들 모두 결혼할 때까지 서두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근데 상황이 좀 그래. 너희들 생각을 알아보고 싶어서 물어 보는 거야.”

둘째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좌우로 흔들어 목운동을 하고는 일어서며 말했다.

“저희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예요.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면 그렇게 하세요.”

“민섭이 넌? 싫어?”

잠자코 있는 셋째에게 물었다.

“싫다고 안 했어요. 전 상관하지 말고 엄마 맘대로 하세요.”

그녀의 차분한 얼굴을 뒤로 막내아들은 방을 나가 버렸다.

 

한 달이 지났지만 그들은 이혼하지 않았다. 아니 그의 말에 의하면 아내의 마음이 변했다고 한다.

이제 아내는 그의 늦은 귀가 시간이나 외출에 대하여 이전처럼 난리치지 않고 아예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메시지와 전화를 받았고 그를 만났다.

그의 아내는 답답한 마음에 점장이에게 갔었다.

‘그냥 살게 놔 둬. 지금은 안 떨어져. 한 일 년 살고나면 틀림없이 돌아와. 그러니 그때까지 그냥 참고 기다려.’

이런 이야기를 그에게서 전해들은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혼도 하지 않은 그를 그녀의 집에 와 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얘, 그 사람, 정말 널 사랑하면 너네 집에 와서 살 수도 있는 건데, 꼬박꼬박 집에 가는 걸 보면 좀 이상하다?’

친구의 말에 아들들 땜에 자기가 거절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들들에게 이야기를 한 후 그녀는 그를 집에 초대하여 아들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그가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기를 바랬지만 그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심려케 하면 안 된다며 번번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서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이 지나갈수록 그녀는 초조함을 감출 수 없어 그에게 물었다.

“나 때문에 당신이 곤란을 겪는 건 싫어요. 이혼하기 어렵다면 지금이라도 안 만나고 싶어요. 사실 당신이 나와 결혼을 하자고 말한 적도 없잖아요.”

“무슨 소리요? 이혼하면 당연히 당신과 결혼을 하는 것이고, 이혼을 하겠다던 아내가 절대로 이혼을 할 수는 없다면서 저렇게 버티니 나도 죽을 맛인데...”

그녀는 마음속에 품은 말을 하는 대신 눈물이 나서 고개를 떨구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 내 말 안 믿어요?”

그녀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불신의 찌꺼기를 말끔히 거두는 그의 진심어린 다정한 말과 포옹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그녀는 그대로 헤어져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분 아내가 일억을 주면 헤어지겠다고 하는데, 그 분이 지금 현찰이 없어. 그 여자가 나보고 해 내래.”

그녀는 친구가 그간의 사정을 궁금해하자 말했다. 차마 이미 이억 칠천만원을 주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뭐라구? 얘가 미쳤어. 네가 왜 그 돈을 해 줘. 이혼을 하든 말든 그가 알아서 할 일이지, 왜 네가 나서서 그래. 그건 옳지 않아. 아내가 난리 친다며, 당분간 좀 만나지 말고 정말 이혼이라도 하고나면 만나지 그러니?”

남의 집 불구경하듯 친구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친구가 마치 모르는 남 같이 느껴졌다.

“지현아, 아무리 두 사람이 좋아해도 조강지처를 버리게 하는 건 말이 안 돼. 그 여자가 싫다고 나앉기 전에 네가 나서면 안 되는 일이야. 그 나이에 이혼을 한다는 건 그 남자의 뿌리를 뽑는 짓이야. 자식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 모두가 등을 돌리게 하는 짓이잖아.”

“나도 그 분이 헤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어. 근데 그 분은 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떡해.”

“야, 너는 그 말을 정말 믿니? 정 그렇다면 그 사람이 알아서 다 해결할 때까지 잠자코 있어. 그리고 너 내 앞에서 그 분, 그 분 하지 마. 이름 있을 거 아니야? 그 분은 무슨, 그 놈이지.”

친구는 웃는 얼굴이긴 했지만 짜증스럽게 말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더니 맞는 말인 모양이다. 괜한 이야기를 했구나 생각되어 그녀는 서글퍼졌다.

“재혼을 해도 얘들 출가나 시키고 하든지 해야지, 양쪽 다 애들이 반대 안 해?”

“우리 얘들도 만나봤어. 내가 좋다면 괜찮다고 했어. 그 쪽도 이야기 다 했대.”

“그래서, 모두들 찬성이야?”

잠시 잠자코 있던 그녀가 말했다.

“사실은 그 분 아들이 집에 왔었어. 왜 꼭 우리 아버지여야 하냐고, 우리 엄마 좀 살려달라고 빌어. 그래서 나는 지금이라도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으니까, 어머니가 그 분과 잘 살 수 있다면, 나는 염려 말라고 말했어.”

그 말은 그녀가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정말 난리군, 너 그 말 진심이야?”

친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이야. 그 분이 아내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만나지 않을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핸드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벌써 몇 번째 안경을 밀어 올리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그녀를 친구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내가 그를 만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무슨 낙으로 살지 자신이 없었다.

단 하루도 그를 느끼지 않고 지나간 날이 없었다. 남편이 떠난 후 이런 행복감을 경험할 줄은 상상도 못해 본 일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지옥 같은 끔찍함을 동반했다.

 

한 달에 두 번 쉬는 일요일, 그녀는 종일 청소와 세탁 등 집안일을 하면서도 수시로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왠일인지 어제 오늘 그는 소식 한 번이 없었다. 아들들과 저녁밥을 먹던 중 핸드폰 문자음이 울리자 그녀는 얼른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막내는 엄마를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자신의 핸드폰을 열어보고 답장을 하었다. 그녀는 민망하여 일어나 물을 가지러 싱크대로 갔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녀의 마음은 초조함으로 들끓었다.

며칠 전 그는 자동차가 낡아서 자꾸 돈을 달란다면서 조만간 차를 바꾸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종일 발이 아프도록 손님을 모시고 다니는 제 처지와 비교되어 조금은 서운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늦은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드는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야. 잘 지내? 애들 만나는데, 나올래?"

그녀의 친구였다. 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멍한 느낌 속에 가슴이 싸하니 아파왔다.

"지현아? 너무 늦게 걸었니?"

친구의 되물음에 후딱 정신을 차린 그녀는 대답했다.

"아냐. 그래 나갈께. 언제 만나?"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근데, 애들이 네 소문을 알던데... 괜찮겠어?"

 "뭐? 네가 말했어?"

 "얘는! 그게 아니고 명희가 나가는 모임에서 나온 것 같아. 너 명희랑 친하잖아."

 "... 결혼한다고 그래."

그녀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근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얼마전 내가 그 분한테 돈을 좀 해주었어. 가을에 딸 결혼하면 꼭 이혼한다고 했어."

"얘가, 얘가, 미쳤어! 얼마나 줬는데?"

잠자리에 누운 그녀는 펄펄 뛰던 친구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만한 희생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그러나 친구는 명분없는, 고약한 일을 했다며 그녀를 질타했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불륜을 계속해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저지른 일인 것을 친구는 냉정하게 몰아세웠다.

'너는 젊지도 않은, 늙은 남자를 돈으로 산 꼴이다. 또 그 아내는 남편을 돈에 팔아먹은 것이다.  남자는 자기보다 젊은 여자를 꼬드겨 조강지처를 팔아먹은 부도덕한 인간이다. 다 늙어서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냐'

'그럼 너는 내가 이대로 혼자 살기를 바라니?'

대답이 궁한 그녀가 되묻자 그녀는 말했다.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아. 네 삶은 네가 원하는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그건 희생도 뭣도 아닌 네 욕심일 뿐이야.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가족이 돈이 없어 죽어간다면, 돈 아니라 네 목숨이라도 내줄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나 그렇지도 않은, 너보다 결코 형편이 못하지 않은 그에게

그런 짓을 한 건 그의 재산 축적을 보태준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나쁜 사람이야!'

그녀는 기가 막혔다.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딱 잘라 말하는 친구를 후려갈기고 싶을 만큼 미웠다. 그러나 한편 친구의 말이 일리가 있는 말이라 그녀는 후회하는 마음도 일었다. 그에게 가정을 버리게 한 만큼 자신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으니 그만한 댓가를 치룰 수도 있다고 합리화했다. 또한 그의 말대로 건물이 처분되면 돈은 되돌려 줄거라고 생각했다. 잠을 이룰 수 없는 그녀는 안정제를 한 알 삼키고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출근하면서도 그녀는 소식 없는 그에게 전화를 걸까, 메세지를 띄울까 망설이며 사무실까지 갔다.

조그만 화분 몇 개에 물을 주고 차를 한 잔 놓고 자리에 앉자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조카? 잘 지냈어? 다름 아니고 자네 어머니가 위독하셔."

그녀는 그의 전화인 줄 알고 그러면 그렇지 생각했다가 난데 없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에 맥이 쑥 빠졌다.

그녀를 낳아준 어머니, 고등학교 때 처음 본 어머니는 놀라운 만큼 왠지 낯설지 않았다. 담담하게 그녀를 대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정작 그녀가 쉴새없이 눈물이 쏟아졌던 이유를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녀의 집보다 궁색한 살림이 가엾어서 그랬을까?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때까지 몰랐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가난 때문에 자식없는 여자를 대신하여 그녀와 그녀 동생을 낳아주었다는 어머니에 대한 서러움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어머니를 가엾게 생각하기에는 키워 준 어머니의 사랑이 남달랐다. 부족함 없는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그녀는 곧 친어머니란 존재를 잊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나이 든 지금, 자신이 붕어빵처럼 닮은 그 어머니가 싫은 만큼 측은했다. 그렇게 줄줄이 자식을 낳고 과부가 되어 그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남에게 자식을 낳아주어야 한 여자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자 그녀는 모르는 새 눈물이 핑 돌았다.

어른들 일이라 세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그녀라면 절대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이 있었다.

이래저래 심란한 하루였다.

끝내 그에게 전화를 하지 않은 채 저녁까지 일을 보고나서야 그녀는 국수 한 그릇을 먹고 병원으로 갔다.

그녀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늙고 늙은 어머니의 얼굴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살집 좋던 얼굴이 여위어 뼈가 드러난 채 푹 꺼진 눈에서 눈물이 흘렸다.

그녀는 얼른 어머니의 손을 잡았지만 이상스레 담담하여 고개를 돌렸다. 

죽음! 두렵고 싫다. 그렇게 애쓰던 인간들이 그리 쉽게 죽는 것을 볼 때마다 그녀는 몸서리쳤다.

신앙심조차 없는 사람들, 지옥으로 갈 그들의 죽음은 너무도 무서웠다. 그녀는 지옥이 무서워서라도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 괴로움 없을 천국, 거긴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다. 착하고 성실하게 주님을 믿고 산 사람들만이 가는 곳이다. 천국의 자리를 사는 일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가는 지옥행을 면치 못할 것이다. 착실한 기독교인이던 친구가 어느날 신을 부정하며 의식 전환을 이야기할 때 그녀는 너무 놀랐다.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신앙심을 버리다니! 그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을 창조한 신에게 감히 반기를 들다니 친구의 교만한 어리석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주제넘게 자기에게 충고를 하려드는 것은 절대 허용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생모의 죄를 용서하시고 회개하게 하옵소서. 마지막 가시는 길이 너무 고통스럽지 않도록 은헤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빌었다. 병원을 나오면서 그녀는 지갑에 있는 지폐를 모두 꺼내 생모의 친척에게 전했다. 칠만 원이었다.

 

딸이 결혼하면 한다던 이혼은 다시 미루어졌다. 그녀는 낙심하여 그에게 그만 헤어지고 싶은 마음을 내비쳤다.

그의 말인즉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지금은 안 된다는 것이다. 기다린 김에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반드시 오래지 않아 아내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그녀의 집에라도 와 살겠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그가 적을 두었던 회사에서 퇴임하고 시간이 많아지자 그녀의 사무실에 자주 나와 많은 시간을 다정하게 보냈다. 사정을 뻔히 아는 미스 안이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해 그만 두겠다고 알려온 날, 그녀는 차라리 잘 되었다 생각하고 그에게 부동산을 함께 운영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면 미스 안에게 나가던 급료는 지출이 되지 않을 것이니 좋은 일이었다.

책상을 달리 배치하고 낡은 간판을 다시 도색한 후 그녀는 입구에 늘어선 작은 화분들에 물을 주면서 점점 안정이 되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의 자격증이 걸렸던 자리, 잠시 미스 안의 자격증이 걸렸던 벽에 그가 뒷날을 예비하여 따놓았던 그의 자격증이 걸렸다. 그리고 그의 책상은 높은 칸막이로 가려졌다. 언뜻 밖에서 문을 열면 그녀 혼자 있는 듯 보인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전화를 받고 손님들을 모시고 나가 여기저기 구경시켰다. 이 든든함을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돈을 준 이후 그의 아내는 다시 전화를 거는 일은 없었다. 그의 이어지는 설득과, 말은 밷었지만 생각지 않았던 거금의 돈은 아내의 초약들린 듯 날뛰던 심정을 가라앉혀주었다. 어차피 이제는 소 닭 보듯 데면데면한 사이의 남편이다. 방을 따로 쓴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아내는 그가 곁에 와 건들면 귀찮을 만큼 그에게 아무런 감흥이 없는지 오래 되었다. 그래 맘대로 해라, 더 늙고 병들면 그때는 싫다해도 넘겨주마.

그녀는 그에게서 받은 돈으로 지니고 있는 건물의 사무실 두 개를 월세로 전환하여 생활비를 풍족하게 하고 예전보다 자주 쇼핑을 하며 멋을 냈다.  

그 역시 난리치던 아내가 잠잠하여 한숨 돌린 것이 다행스럽고, 두 여자를 거느리는 일이 그리 싫지 않았다. 가정은 가정대로, 애인은 애인대로 자신과 잘 지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는 일이었다. 

옛날에 능력있는 남자는 으례 여자를 몇씩 거느리던 조상의 후손이 아닌가?

자신의 할아버지는 첩이 둘이나 있었고 아버지도 딴살림을 하였던 분이었다. 그래도 그 자손은 다 잘만 살았다. 요즘들어 여자들이 부쩍 권리 주장을 하고 나서며 가사노동력까지 위자료로 청구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어디 여자들이 남자 없이 산단말인가? 그저 여자란 남자 그늘에서 살아야 팔자가 편한 법이다. 이것이 그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는 차를 새로 바꾼 첫 날 그녀를 태우고 시운전 삼아 야외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식당에서 서빙하는 종업원 앞에서 그는 '여보, 많이 먹어' 라고 말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 무안함을 감추었다. 

새로 산 차를 처음 타게해준 그의 배려에 만족하여 그녀는 기분 좋은 휴일 하루를 보냈다. 그의 따스한 품은 마치 봄날 같았다.  

좀 늦게 집에 돌아오니 막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와 다짜고짜 말한다.

"저, 휴학할래요."

긴 앞머리가 온통 한쪽 눈을 다 가린다.

"왜?"

그녀는 나이트 크림 바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

아들은 다른 쪽 벽을 쳐다보며 말이 없다.

"재수해서 다시 간 학교를 또 쉬면 어떡해?"

"군대 가려구요."

그녀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아들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아들 셋 중에 막내여서인지 유독 더 정이 더 가고 많이 예뻐했던 아들은 늘 성이 차지 않는 부족함으로 그녀를 안타깝게 했다.

그래도 그 아들의 모든 짓이 용서가 되는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금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 

대답하지 않는 건 무슨 뜻일까? 그냥 현실을 피하기 위해서 내린 선택인가?

"알았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녀는 아들이 자신의 애정을 질투하는 걸까? 생각해보지만 다큰 녀석이 엄마의 장래에 대해서 그렇게 이기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위안하며 잠들었다.

아들은 휴학했지만, 군대라는 생소한 환경에 접하는 것이 싫은지 연기를 하고 집에 있었다.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알 수 없는 채로 그녀는 밤이 되어 집에 들어가면 다음날 식사준비를 해 놓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의 하루는 지나치게 많은 활동을 요하였다. 그가 아니면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녀가 그의 아내보다 하루라도 더 살면, 그 하루일 망정 사회가 허락하는 그의 아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 두 여자보다 먼저 죽는 일이 생긴다면 그녀의 욕망은 이루어지지 않는 물거품이 될 것이다. 그럴지라도 한 번 맘 먹고 받아들인 사랑을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그녀의 생각은 곧 그녀의 자존심이자 생존 전략이었다.

            

끝.    (2007. 0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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