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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사랑이 떠난 자리

 

 

사랑이 떠난 자리

 

꿈결처럼 한 번 두 번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경희는 잠을 깼다. 전화를 받기 이전에 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가 좀 지난 시간이지만 늦잠을 자도 되는 일요일로는 이른 시간이었다.

“여보세요?”

“나, 형이야.” 좀 머뭇거리는 목소리였다.

“아, 예. 안녕하세요.” 경희는 좀 더 몸을 일으키며 졸린 눈을 비볐다.

“지난번엔 미안했어. 지금 나올 수 있어?”

순간 경희는 얼마전 다녀간 아주버니가 왠일이지? 하던 생각이 확 달아나며 놀라서 정신을 차렸다. 시숙이 아니라 지난주에 만났던 이지훈, 그는 일주일간 소식이 없었다. 아니, 경희는 그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구요? 저...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그가 지훈인 것을 확인하고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와 더 이상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으나 잠은 십 리 밖으로 달아났다.

 

“아니, 이게 누구야?”

신문을 펼친 채로 눈이 커다래진 그를 마주 본 순간, 경희는 놀라웠다. 시끄러운 전철 소음에 휩싸인 채 그들은 서로를 잠시 쳐다보았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헤어진 연인을 우연히 만나기도 하지만, 이렇게 현실 속에서 그들이 우연히 다시 만난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한 달 전쯤 그렇게, 전철을 기다리며 서 있다 그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훤칠한 키에 자연스럽고 편한 복장으로 눈에 한가득 웃음을 담고 있었다.

“경희야, 여전하구나. 더 예뻐졌어. 야! 이렇게 만나기도 하는구나.”

그들은 계단을 내려와 역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경희는 그를 마주 보자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져 고개를 숙여 그의 발끝을 보았다. 그는 세련돼 보이는 감색 캐쥬얼 구두를 신고 있었다.

“결혼 생활은 행복하니? 나, 너한테 연락 오길 이년 넘게 기다렸어.”

경희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그때보다 좋아 보였다.

“연락 없기에 그냥 결혼했구나 생각하고 나도 결혼했다. 좋은 여잘 만났어. 넌 어때?”

“행복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그때도 형아에게 말했듯이 어쩔 수 없었어요.”

그는 경희에게 많이 서운했을 텐데, 그런 내색하지 않는 그가 지금 만족한 결혼 생활을 하고있는 것 같아 경희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 사람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건 거짓말이었어요. 그는 멀쩡해요.”

“그래?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다. 난 네 생각을 많이 했어. 내가 너무 네 생각을 해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됐나 보다. 아이도 있니?”

“예, 아들 하나요. 다섯 살이예요.”

경희는 부천에서 살았고 지훈은 부천역 상가에서 신발가게를 한 지 일 년이 돼간다고 했다. 계약기간이 끝나는 대로 서울로 가게를 옮길 것이라고 했다. 그는 회사생활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그만두고 자영업을 하는데 여러 가지로 더 낫다고 말했다.

지훈은 경희를 만난 것이 무척 반가운 듯 자신의 가게 위치를 알려주며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지훈이 본 경희는 화장 때문인지 예전보다 화사하고 성숙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과 표정에는 살짝 그늘지고 활기차 보이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경희는 차 한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곧 일어나 전철을 타고 가면서 지나간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남편이 귀가하지 않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경희는 아무 데도 전화하지 않았다. 그를 애타게 찾고 싶지 않을 만큼 그에게 무관심해졌다. 그녀는 가정의 단란함을 잃은 지 오래 되었다.

그녀는 귀여운 아들을 사랑한다. 그녀의 직장에서 만나는 아이들도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채울 수 없는 한 구석 빈자리엔 늘상 바람이 불고 그녀를 메마르게 하였다.

그 메마름을 달래기 위해 그녀는 집에 돌아오면 아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아파트 주위를 걸었다. 피곤한 낮의 일과로 금새 다리가 아파서 놀이터 그네에 앉아 아들의 노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앉아 있곤 했다.

우연히 만난 지훈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맺어질 수 없었던 것은 내 탓이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경희는 더 이상의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 동진은 그녀를 간절하게 원했고 그의 아일 임신한 상태로 지훈씨와 결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경희는 대학 시절 사귀었던 동진과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지금 그가 죽을병에 걸렸다는데 그를 두고 지훈씨와 결혼할 수는 없다고, 형아는 나 아니어도 좋은 여잘 얼마든지 만날 수 있지만 그가 날 사랑하니 헤어질 수 없다고 담담히 지훈에게 말했다. 차마 임신까지 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받을 지훈을 위해서였다.

지훈은 너와 결혼할 때까지 범하고 싶지 않다고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의 순결-그에게 있어서의 순결에 불과했지만-을 지켜주고 싶어 했다.

지훈은 현명하지 못한 경희의 처사를 불안해하며, 순간 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그를 더 사랑하는구나 생각했다.

“기다릴게, 다시 잘 생각해보고 연락해. 난 네가 나와 결혼할 줄 알았어.”

그는 씁쓸한 얼굴로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

경희는 동진이 군대에 갈 때 이제는 우리 그만 헤어지자며 동진에게 이별을 선언했다. 그와는 친구 이상의 관계인 것이 싫었다. 그에게 빠져들면 들수록 그에게서 놓여나고 싶어 애를 썼다. 그런 경희를 동진은 지나칠 정도로 집착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와 장래를 약속하기 싫었다. 그가 어떤 사람보다도 경희에게 잘 해주었지만 그녀를 구속했다. 그녀의 젊음을 모두 자신만이 소유하고 싶어 했다.

경희는 점점 조여오는 그의 구속을 피할 수 있는 탈출의 기회로 그가 군대 가는 것을 내심 기뻐했다. 그리고 그를 잊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그때 친구의 학교 선배인 지훈을 동절기 봉사활동을 가서 만났다.

그와 아동교육반을 맡아 함께 활동하면서 그들은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난 바닷가에서 그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쓸쓸히 담배를 피웠다.

섬의 밤하늘을 수놓던 총총한 별들이 웃는 듯 즐거웠던 경희는 그의 쓸쓸한 표정이 마음에 걸려 왜 쓸쓸해 보이는지 물었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신감에 넘치던 그에게 호감을 느끼던 경희는 그의 우울함이 궁금했다.

지훈은 그때 같이 갔던 한 여학생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그녀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고백도 하지 않고 마음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날, 굴을 따서 경희의 입에 넣어주던 그에게 수줍어 얼굴이 붉어지던 것을 보고 지훈의 친구들이 놀리며 웃었다.

일주일간의 봉사활동 동안 그들은 계속 함께 다녔고 지훈은 귀엽고 발랄한 경희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와 얼마 안 있어 지훈도 군대에 갔다.

이 년간 경희는 동진에게는 한 번도 쓰지 않은 편지를 지훈에게 자주 썼다.

제대하기 얼마 전 면회 갔을 때, 지훈은 그녀의 편지를 받는 낙으로 군대 생활을 했다고 웃으며 고백했다.

“네게서 편지가 오면 우리 반 녀석들이 기어코 한 번씩 다 읽어봤어. 그리고 아주 부러워했지. 네 편질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어. 한 녀석이 그러더라, 너 나가면 이 아가씨랑 꼭 결혼해라. 마음이 아주 예쁜 여자야.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얘랑 결혼할 거야 그랬어.”

경희는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경희의 귀여운 얼굴과 구불거리는 머리를 어루만지며 그렇게 청혼했다. 그러나 경희는 그때 결혼은 생각하지도 않은 어린 나이였다.

그에게 면회 간 것도 사실은 그가 경희의 부모님이 갑자기 낙향해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병장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한번 그에게 가본 것에 불과했다.

경희는 아직 누구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녀는 발령받고 교직 생활을 막 시작한 병아리 선생님이었다.

지훈에게 면회 갔던 날, 꾸물거리던 하늘이 한두 송이씩 눈발을 날리고 그는 외박을 나왔다.

“경희야, 난 널 결혼할 때까지 건들지 않을 거야. 난 순결한 신부를 안고 싶어.”

“형, 난 경험이 있어.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순결한 처녀가 아닌데?”

경희는 생글거리며 쉽게도 자신이 처녀가 아니라고 말했다.

충격을 받았는지 지훈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넌 귀엽고 예쁘니까, 날 만나기 전에 누군가 사귀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나와 사귀면서부터는 순결하길 바래. 나도 총각은 아니니까. 아무튼 난 너와 결혼할 때까지는 육체관계를 갖지 않을 거야. 그것 때문에 친밀해지는 관계는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니까.”

그는 경희를 마치 보물처럼 소중히 안고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 일찍 밖에 나왔을 때 세상은 온통 새하얀 눈에 덮여 아름다웠다. 그들은 한 마리 새가 포르롱 날아오르는 것을 보며 함께 웃었다. 경희는 그가 믿음직스럽고 맘에 들었다.

그가 제대한 후 그들은 주말이면 데이트하였다. 그는 친구들에게 경희를 소개시켰다. 짖궂은 한 친구는 그들을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경희를 놀려보려고 애를 썼다. 지훈은 점잖게 그 친구를 말리고 경희를 데리고 먼저 일어났다.

 

제대한 동진이 경희가 근무하는 학교에 찾아왔다.

경희는 그가 반가웠다. 이년이란 세월 동안 비어있던 그의 자리는, 늘 곁에서 그녀를 사랑해주었던 다정함을 일깨워 주곤 했었다.

동진의 예전보다 더한 집요함은 바짝바짝 그녀를 조여왔다.

그는 경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를 가고 싶어 하는지 샅샅이 알고 있었다.

그녀가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경희는 다시금 그녀에게 밀착되는 그가 두려웠다.

“난 결혼할 사람이 있어. 너와는 친구 이상 되기 싫어.”

“난 네가 그렇게 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 처음 군에 입대하고 휴가 나올 때마다 널 찾았지만 만날 수 없어서 정말 안타까웠어. 난 네가 어찌하든 널 사랑해.”

경희는 그의 뜨거운 숨결을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과 쾌락에 빠지는 육체가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경희에게 첫 남자였으며 누구보다도 친절하고 다정했다. 그는 경희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관계치 않고 그녀를 찾아왔다. 아니 오히려 만날 시간을 주지 않기라도 하려는 듯이 하루가 멀다고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그와 서둘러 시외버스에 오르곤 했다. 소문이 날까 두려웠다.

그가 복학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몇 달간 경희는 그에게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예전에 그들이 함께 놀러 갔던 유원지에서 밤을 보내던 날, 그는 말했다.

“난 얼마 살지 못해. 그때까지만 날 떠나려고 하지 마.”

“무슨 소리야?”

“간암이래, 군에 있을 때 술을 많이 마셨어. 널 잊으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수록 네 생각이 간절했어. 난 너와 헤어져 살 수 없어. 차라리 잘 됐지.”

“거짓말이지? 그럴 수가!”

그는 쓸쓸히 웃으며 말없이 담배 연기를 날렸다.

경희는 벌떡 일어나 강가를 빠르게 걸었다. 나 때문에 그가 그런 병이 걸렸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날 사랑한 죄밖에 없는데, 나의 배신이 그에게 그토록 큰 상처를 주었다면 나는 정말 나쁜 여자구나.’ 경희는 자책감에 눈물이 났다.

그가 쫒아와서 경희의 팔을 나꿔채 듯 붙잡으며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다 내가 못나서 그래. 난 지금 너와 이렇게 있는 게 행복해. 더는 아무 것도 바라고 싶지 않아.”

경희는 그 날밤 그를 진심으로 안았다. 그녀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그의 다함 없는 사랑에 보답이라도 하듯 그와 몸을 섞었다.

그녀는 그날의 정사가 그녀의 배란기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을 다음날 돌아오는 차 속에서 생각했다. 그녀는 날짜를 짚어보았다. 배란기는 아니었지만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그가 군대 가기 전 그와 육체관계를 갖고 임신이 되었던 게 생각났다. 그때 일은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했다.

중절 수술을 받고 그 괴로움 때문에 그를 만나기 싫었다. 한 생명을 무책임하게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와의 이별을 결심했었다.

그러나 지금 또다시 그와 육체관계를 갖고 불안한 자신의 안일함에 그녀는 자괴감을 느꼈다. 그녀는 물끄러미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초여름의 싱싱함을 가득 담고 푸르른 나무들, 밝은 햇빛에 노출되는 산야가 눈부셨다.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여드름 자국이 선명한 얼굴은 죽을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좀 수척해 보였다. 그는 경희를 마주 보고 꼭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경희는 그에게서 놓여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가 경희를 떠나지 않는 한 그에게서는 놓여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무력감이었다.

 

경희가 지훈을 만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 건 사실이었다. 차라리 남편인 동진이 이대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동진은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경희는 어디 가서 무얼 하다 왔냐고 묻지 않았다. 그 역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어린 아들이 아빠가 왔다고 좋아라 종알거리며 어리광을 부렸다. 다툼보다 더 잔인한 침묵이 집안에 가득했다.

경희는 저녁 먹은 설거지를 하고 난 후, 어린 아들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나왔다. 버스를 타고 지훈이 있는 상가에 갔다. 먼발치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늦은 시간이라 손님이 뜸한 가게에서 그가 책을 읽고 있었다.

형아! 부르며 반갑게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며 한참을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집으로 향했다.

밤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이제 와서 그에게 답답한 심정을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행복하게 사는 그에게 한번 나쁜 여자가 되었으면 되었지 또 그를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다리가 아픈데도 버스를 타지 않고 집에 돌아왔다.

그녀는 잠든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왠지 자학하고 싶은 비참한 심정으로 방을 나와 동진의 담배를 한 개 피워 물었다. 삼키지 않고 내밷은 연기가 쓸쓸히 흩어져 날아갔다.그는 건너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꼼짝하지 않았다.

담담히 내색하지 않고 흐르는 일상이 폭발하기 전 지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숯불갈비집으로 경희를 데려가 저녁을 대접했다. 경희는 맛있게 식사하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너를 안고 싶어.”

지훈이 미소 지으며 은근하게 말했다. 경희는 이 추운 가슴을 따스하게 녹여줄 누구라도 필요했다. 인생이 왜 이렇게 원하지 않게 흘러가는 걸까? 사랑이 필요할 뿐인데 왜 내게 진정한 사랑은 허용되지 않는 걸까? 나의 잘못된 선택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아내가 있는 지훈은 왜 나를 안고 싶을까? 잠시나마 나는 그의 기쁨이 되어주어야 할까? 그를 상심케 했던 이년, 그래 이년을 기다렸다고 하지 않는가? 그를 거절하고 싶지 않은 건 사실 나의 외로움 때문이 아닐까?

그는 내 집에서 한참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의 입맞춤은 뜨거웠고 그녀는 잠시 그의 품에서 쓸쓸함을 잊을 수 있었다. 남녀의 뜨거운 포옹과 입맞춤이 가져오는 충만한 짜릿함이 치솟았다. 그러나 문득 그는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조용했다.

“미안해. 안 되겠어. 아내를 배신하고 싶지 않아. 널 정말 사랑했는데...”

경희는 깜짝 놀랐지만 아무 말 없이 그에게서 빠져나와 옷을 입었다.

두 사람의 이탈을 꾸짖는 듯 무겁게 짓누르는 잠깐의 침묵을 뒤로 하고 경희는 문을 닫았다. ‘하느님 맙소사!’

경희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지훈의 아내에게 부러움을 넘어 질투심마저 일었다. 맥없이 그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수치심, 아니 스스로 유혹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외로웠던 자신을 잠시나마 잊고 싶었던 구차함이 비루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진 빚을 이렇게 갚는구나 생각했다. 어차피 잘된 일인데 왜 이렇게 슬픔이 밀려드는 걸까, 다행인 것은 잠시나마 지훈을 향했던 마음을 쉽사리 거둬들일 수 있었다. 하룻밤 꿈처럼 툭툭 털어버릴 수 있는 심정이었다. 어느새 흘러가 버린 강물처럼...

 

토요일 밤 늦은 시간 딩동 딩동 울리는 벨소리에 문을 열었다. 경희는 잠자리에 들려고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은 시간이었다. 누구세요? 묻는 얼굴로 앞에 서있는 곱게 단장한 여자를 쳐다보았다. 설마 동진을 찾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저, 차동진씨 댁 맞나요?”

“그런데요. 무슨 일이지요?”

그녀는 순간 경희 뒤에 나와 선 남편에게 시선을 올리며 작게 부르짖었다.

“동진씨!”

경희는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보는 순간 알았다. 그의 애인이구나! 고개를 돌려 남편을 보는 순간 그는 당황한 채 건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들어오세요.”

경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녀에게 차를 한 잔 대접했다.

이제는 그와 헤어질 수 있겠구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생각하며 물었다.

“집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요?”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 간 적이 있었어요. 산가 받고 들어가셨다고 했어요. 그 후로 동진씨가 연락을 안 해서 제가 수소문을 해서...”

경희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이 여자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매듭짓지 않고 나와 결혼한 것 이었나? 그는 단 한 번도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가 군대에 갔을 때 소개받아 사귄 여자이며 어느 날부터인가 연락이 안 되어서 그녀의 애를 태웠다는 것이다.

“아이가 하나 있어요. 제가 동진씨와 헤어질 수 없는 이유예요.”

경희는 또다시 놀랐다.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제 확실하게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경희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집이 멀 텐데, 자고 갈래요?”

“아니요. 가까운 곳에 언니가 있어요. 실례가 많았어요.”

경희는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측은지심을 느꼈다. 말끔한 원피스에 흰 레이스 장갑을 낀 날씬한 그녀의 자태는 빼어난 미인은 아니어도 충분히 고왔다.

경희가 남편이 있는 방문을 노크하였지만 그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돌아가는 그녀를 내다보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듯 외면하는 저 태도는 무엇일까?

경희는 그를 대면하고 싶지도 않아 잠자코 잠자리에 누웠다. 피곤함이 밀려오면서 맥이 탁 풀렸다. 차라리 잘 되었다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를 억울함이 꾸역꾸역 밀려들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기도 하는구나,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를 선택한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인생이란 연극무대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고약한데, 맘에 들지 않지만 이 역할을 끝까지 잘 해낼 것인가 아니면 그만 무대를 내려올 것인가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을 간단히 차려 아이를 먹이고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도 그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녀를 피할 건지 상관하고 싶지 않을 만큼 그에게 질렸다.

 

월요일 집에서 나와 사층 계단을 내려가며 경희는 작게 중얼거렸다.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일 층 계단까지 내려온 그녀는 계단 내려오는 내내 똑같은 말을 중얼거린 사실을 인식하자 머리를 흔들었다. 이러다 미치는 건 아닐까?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는 좌절감이 온몸을 엄습하며 치가 떨렸다. 멈추어야겠다. 무조건 멈추지 않으면 그녀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작년에 그가 그렇게 자리를 피하고 경희는 이혼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아들이 겪어야 할 결손가정이 싫어서 망설였다. 교직자가 이혼해서 구설에 오르내릴 것도 끔직히 싫었다. 무엇보다 연로한 어머니께서 받을 충격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여자는 일부종사해야 해. 원래 짐승 다음이 여자인 거다. 참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했다. 경희는 어머니가 걱정하실까 봐 이런저런 이야기를 일체 않고 살아왔다. 집에 다니려 오셨다가 그가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자 놀란 어머니가 딸을 다그쳐 실토하게 하신 후 하신 말씀이었다. 경희는 자신이 선택한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허물을 변명할 수 없어서 잠자코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그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한 번은 그의 말을 믿고 다시 노력해보자 마음먹었다.

그녀의 일방적인 주장이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은 그때뿐 그는 다시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군에 있는 동생을 면회하러 간다고 경희에게 용돈까지 받고 일박이일 다녀온 후 그해 또다시 사흘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경희는 그녀가 다녀간 이후로 각방을 쓰며 그와 동침하지 않았다. 그의 화해 시도와 극진한 애무에도 불구하고 전혀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리멸렬함만 겹겹이 쌓이며 외로움이 엄습했다. 이제는 끝났다는 사실이 마음뿐만 아니라 온몸을 통해서 알려왔다. 서른한 살 밖에 안되었는데 사랑이 끝나다니... 욕망의 추락은 비참했다.

 

경희는 그의 말을 믿고 싶어 휴일에 아들 손을 잡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어리석게도 그녀의 말을 다시 듣고 싶었다. 그동안 그의 말처럼 그들은 관계를 끝냈을까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학교에 다음 학기 등록하러 갔다는 말을 듣고 경희는 택시를 타고 학교로 달려갔다. 운 좋게도 행정실에서 나오는 그녀와 맞닥뜨렸다. 아직 개학하기 전이라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그녀는 넓은 교정을 지나 조금 언덕진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올라갔다. 예고 없는 만남에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예전에 보았던 모습과 달리 편한 티셔츠와 헐렁한 바지 차림의 화장하지 않은 그녀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반면 화장한 경희의 얼굴은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운데다 화사한 흰 투피스 차림은 우아해 자신과 비교가 되었다. 게다가 아들의 손을 잡고 나타난 것이 그녀의 눈에 몹시 거슬렸다. 밀리고 있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다.

“동진씨 말로는 이제 관계를 정리했다고 하던데, 그래요?”

“부부 문제를 자기들끼리 해결하지 못하고 왜 나한테 와서 지랄이야!”

순간 경희의 손이 그녀의 빰을 한 대 때렸다. 그러자 그녀는 경희에게 달려들었고 둘은 언덕에서 개울물이 흐르는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경희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지나가는 남학생을 불러 돈을 쥐어주며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어린 아들은 엄마가 싸우는 것을 보고 소리 내서 울었다.

경희는 떨어진 안경을 찾는 그녀의 옷을 단단히 움켜잡고 택시가 오자 그녀를 밀어 넣고 잠실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분노가 치솟아 얼굴이 빨개졌다.

확인만 하려던 것이었는데 생각지 않았던 그녀의 욕설에 그만 이성을 잃고 손찌검을 하였다. 이런 삼류 영화 같은 장면이 벌어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큰 시누이는 들이닥친 그들을 보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진씨와 사귀는 여자예요. 어머니 좀 불러 주세요.”

경희는 아들을 사촌과 함께 놀게 한 후 작은 방에 들어가 누웠다. 그녀와 구르며 부딪힌 몸 구석구석이 아프기 시작했다. 모멸감이 목구멍 가득 차오르며 진저리가 쳐졌다.

“아가씨는 앞날이 창창한데, 왜 남의 가정을 깨려고 해요? 맘을 고쳐먹고 새 출발 하세요.”

그녀는 아무말도 못하고 고개 숙었다. 큰 시누이는 재차

“우리 동생 만나지 말아요. 저렇게 아들도 있는데...”

큰 시누이는 마치 대단치 않은 일을 꾸짖듯 순하게 타이르고 그녀를 내보냈다.

왜 그녀는 나도 자식이 있다고 항변하지 않는 걸까? 동진의 말처럼 거짓말인가? 경희는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하고 흰옷에 묻은 흔적들을 물에 닦아냈다. 이젠 그만 이 촌극을 끝내고 나야말로 새 출발을 하자. 이 지긋지긋한 시간을 더는 반복하지 말자 생각했다.

그 사이 시어머니가 오시고 큰 시누이는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말했다.

“어머니, 이제 더는 그이랑 살 수 없어요.”

경희는 차분히 맘을 가다듬고 말했다. 증거를 보여주었으니 그녀로서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얘야, 술 먹고 때리는 남편도 있단다. 네가 참으렴.”

“어머니, 저는 그렇게 살 수 없어요.”

경희는 저녁 먹고 가라는 그들의 권유를 마다하고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돌아오는 내내 비참한 느낌이 켜켜이 쌓여 가슴이 얼음장처럼 시려왔다. 어린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어서 어린 아들의 작은 손을 꼭 쥐고 참았다. 늘 종알종알 떠들며 질문을 해대던 아들도 엄마의 기분을 헤아리는 듯 오는 내내 잠자코 있었다.

집에 돌아가 저녁을 짓지 못할 거 같아서 아들이 좋아하는 돈가스를 사주러 양식집에 들어갔다. 아들이 엄마도 먹으라고 한 조각을 내밀었다.

“엄마, 화장실 다녀올 게 먹고 있어.”

울컥 쏟아지는 울음을 견딜 수 없어서 서둘러 화장실로 피했다.

‘이게 울 일이냐? 정신 차려. 넌 엄마야. 아이까지 슬프게 하면 안 되잖아.’경희는 눈물을 닦고 거울을 보았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본 만족스러운 고운 모습 대신 화장이 지워진 수심 가득한 얼굴이 보기 싫었다. 이제는 갈 데까지 간 막다른 골목에서 넘을 수 없는 장벽에 꽝! 부딪힌 듯한 충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여전히 출퇴근하고 아이를 챙기면서 하루가 저물었다.

갑자기 작은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단다. 경희는 아이를 데려와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갔다. 얼굴이 부석부석한 어머니가 손주와 딸을 보자 얼굴이 환해지며 말했다.

“아유, 힘든데 뭐라 왔니? 집에서 쉬지 않고...”

“어머니 돌아가시면 다시 못 볼까 봐서 왔어요,”

경희는 웃으며 농담했다. 여러 가지 종합 검사를 하기 위해 입원했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웬만해서는 병원에 가지 않는 강인한 분이셨다. 지금도 새벽기도를 다니실 만큼 활동적이었다. 그런 분이 얼마나 몸이 안 좋으면 자진해서 병원에 가겠다고 했을까 생각되었다. 자식들을 끔찍이 생각하는 어머니였지만 큰 며느리와 맘이 맞지 않아서 일 년을 함께 살고는 아버지를 설득해서 시골로 이주하셨다.

지난해 방학 때 다니러 갔을 때 했던 말씀이 생각났다. 무슨 이야기 끝이었던가?

“난 네 아버지를 피까지 흘리며 섬겼다. 아내로서 할 만큼 했어.”

“무슨 말씀이세요? 피를 흘리다니!”

“관계를 하면 피가 묻어.”

경희는 일흔이 넘은 부모가 아직도 육체관계를 한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엄마, 그럼 산부인과에 가봐야지요.”

“무슨 이 나이에 남새스럽게 병원을 가니? 이러다 죽으면 말지.”

무지한 말씀하는 어머니가 답답했지만 병원을 꼭 가보라는 말만 남기고 다음 날 서울로 올라왔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바쁘고 고단한 일과에 제 코가 석 자인지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이후 어머니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독실한 신앙심만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육체적인 병이 노쇠해져가는 육체를 집어삼켰다. 검사 결과는 자궁암이 전신에 퍼지면서 폐까지 전이되었다. 치료 불능이었다. 조직검사에 온갖 여러 가지 검사가 시작되면서 어머니는 직감하셨을 것이다. ‘내가 살아날 수 없겠구나’ 생각했을 것이고 그 순간 의식불명에 빠졌다. 경희가 다시 연락받고 달려갔을 때 어머니는 의식을 잃은 채 사시나무 떨 듯 요동치고 있었다. 경희는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당장 멈춰요. 제발! 제발, 엄마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요. 그냥 가시게 해주세요!”

오빠들은 울부짖는 경희는 떼어놓으며 의사와 상담했다. 몇 시간 후 그들은 모든 기계를 제거했다. 어머니의 육체는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경희의 울음도 멈추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평생 고생만 하신 어머니! 어머니가 믿으시는 천국으로 꼭 가세요.’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병원에서 더 이상 할 게 없는 어머니는 큰오빠의 집으로 옮겨졌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어머니를 둘러싸고 가족이 찬송가를 불렀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편안히 쉬리로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일절에 이어 이절 삼절 찬송가가 이어지는데 순간 어머니가 눈을 뜨셨다.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던 경희와 눈이 맞은 어머니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유!”한숨을 내쉬셨다. 내가 저것을 두고 어찌 떠나나! 하는 표정에 경희는 “어머니!” 크게 부르며 어머니 몸에 쓰러져 울었다.

모두 부르던 찬송가를 멈추고 어머니와 경희를 쳐다보았다. 아무도 보지 못한 어머니의 마지막 숨거둠을 경희가 마주했다. 늦둥이 막내딸이 행복하지 못한 것을 안 이후 늘 맘이 불편했던 어머니는 그렇게 안타까운 표정을 남기고 딸의 곁을 떠났다.

 

어머니 장례가 치러지고 한 달이 지났다.

그는 이혼에 동의하지 않은 채 시댁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전 전 경희는 시댁에 가서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우리 헤어진다고 오늘 아버님께 말씀드릴게요.”

“안 돼, 아버지 혈압 높은데, 쓰러지신다. 절대로 안 된다.”

“그럼, 어머니께서 나중에 말씀해 주세요. 죄송해요.”

경희는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저녁 식사를 하고 시중을 들었다.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줘. 그녀는 다시 안 만나기로 했어. 내가 앞으로 잘할게.”

“끝난 일을 다시 말하지 마. 난 이제 당신과 살 수 없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 그러니 담 주 수요일 개교기념일이라 학교가 쉬니까 그날 법원에 가. 아인 내가 키울게.”

그녀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기 싫어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간절하게 사랑을 갈망하였다. 이대로 외로운 마음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그와 헤어지고 싶어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에 대해서 캐묻지 않고 침묵했다.

어쩌면 자신과 헤어지고 싶은 이유가 다른 남자가 생겨서라고 책임회피를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지하철을 타고 법원에 가는 날은 4월 초였는데도 꽃샘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했다. 판사는 오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경희는 그와 식사를 하기 위해 근처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큰맘 먹고 스테이크를 주문하였다. 경희가 그에게 베푸는 마지막 식사였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기다리는 잠깐 동안의 침묵. 그와 함께 했던 짧지 않은 시간이 후두둑 후두둑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난타하며 가슴을 적셨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워?”

그는 일어나 자신의 상의를 벗어 경희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 모직 반코트는 작년에 그에게 생일 선물로 사준 옷이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고쳐먹고 그를 용서하고 싶었다. 자식을 결손가정에서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녀의 몸이 아니라 시려오는 가슴을 알지 못하는 그였다. 모든 게 그녀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남편으로 선택한 자신의 불찰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참으며 살 수는 없는 아직은 젊은 자신의 욕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덕수궁을 산책하였다. 경희의 어깨에는 여전히 그의 상의가 걸쳐져 있었다. 경희는 그 옷을 벗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꼭 이래야만 해?”

경희는 그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 얼마나 멀리 왔는지 헤아릴 수 없는 거리를 그는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측은했다. 미움보다 차가운 무관심이었다.

그는 사람들 속에서 지하철 안 출입구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경희는 합의 이혼 서류를 그가 가지고 간 것이 불안했다. 굳이 그가 제출하겠다고 해서 빼앗지 않았는데 만약 삼 개월 안에 내지 않으면 무효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판사 앞에서 당혹스럽고 낯 뜨거운 수치심을 느꼈다. 철저하지 못했던 것 같아 후회스러웠다.

두 달이 빠르게 지나갔다.

아들의 일곱 살 생일이었다. 어린이 대공원을 가기로 약속한 주말이었다.

경희는 계속 몸이 피곤하고 감기 기운이 있는지 미열이 났다. 도저히 혼자 아들을 데리고 어린이 대공원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퇴근하면서 아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퇴근 전이었던 그는 흔쾌히 동행하겠다며 달려와 주었다.

경희는 벤취에 앉아서 그가 아들을 데리고 두어 시간을 돌아다닐 때까지 쉬었다. 왜 이렇게 맥이 없고 지치는 걸까? 모든 것을 잊고 푹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까지 바래다 준 그가 너무 고마웠다.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고 그를 집에 들였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생각지 않았던 동진이 불쑥 들어섰다. 그는 머쓱해하며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동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들을 데리고 건너방으로 들어갔다. 경희는 옷을 갈아입고 아들을 씻기기 위해 방문을 노크했다. 아들은 오늘 즐거웠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얼굴 가득 웃고 있었다. 아빠까지 만나 더욱 기분이 고조된 듯 보였다.

경희는 아들을 씻기고 잠옷을 입혀 건너방에서 아빠와 함께 자라며 큰 이불을 가져다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건너방을 노크했는데 기척이 없었다. 부자가 보이지 않았다. 경희는 깜짝 놀라 아파트 놀이터에 가보았다. 그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황망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들어와 별생각을 다했다. 시댁에 전화를 해보아야 하나? 서성거리는데 아들이 들어오며 소리쳤다.

“엄마! 나 바닷가에 갔었어.”

“아빠는?”

“삼 년 있다 나 데리러 오신다고 약속하고 갔어.”

경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을 껴안았다. 무사히 그녀의 품에 돌아왔으니 되었다 생각했다. 그의 말을 진정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말을 신경 쓸 만큼 책임감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달이 지나기 전 서류가 제출되었는지 확인하였다. 동진은 그날 목격한 아는 동생을 연인이라고 생각했는지 서류를 제출하였다. 경희는 불안했던 마음이 놓이며 앓던 이 빠진 것처럼 후련했다.

그 후로 아는 동생이 연락을 해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는 의도치 않게 연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을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위로했다. 그는 결혼한 가장이었다.

경희를 누나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가끔 안부 인사를 물어볼 정도의 지인에 불과했다.

 

경희는 변함없는 직장생활을 반복하며 아이의 손을 잡고 출근했다. 신학기면 주민등록 등본을 행정실에 제출해야 했다. 결국 그녀가 이혼했다는 사실이 알음알음 알려졌다. 아무도 물어오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게 되었다. 행정실 서무는 그녀가 이혼하고 알리지 않고 받은 가족수당을 환급해야 한다고 투덜거렸다. 경희에게 퉁명스럽고 무례하게 말하여 경희를 당황스럽게 했다. 일부로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마치 사실을 감추고 돈을 받으려고 했다는 듯이 말했다.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은 맞지만 몇 푼 안 되는 수당을 떼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미처 생각지 못해 그녀의 업무를 귀찮게 한 것이 싫었던 서무는 경희가 느낄 모욕감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혼하면 가족수당이 변하는데, 왜 육 개월이나 가족수당을 부당하게 받았어요?”

“몰랐어요. 다시 환급하면 되는 일을 마치 일부로 그런 것처럼 말하네요?”

“어떻게 그런 걸 몰라요? 바로 알렸어야지요.”

“생각하지 못했어요. 미안해요.”

경희는 교실로 돌아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참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월급명세서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도 없이 살아온 자신의 불찰을 반성했다. 그저 이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 그런 것들을 신경써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식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다시금 그녀를 슬프게 했다.

동료들은 밝고 활동적이며 자태가 고운 경희의 불행한 가정생활을 알게 되자 모두 놀라며 한마디씩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듯 그녀는 여전히 고운 모습으로 출근하여 열심히 어린이들을 보살폈다. 본인이 말하지 않는 일을 먼저 꺼낼 수는 없는 동료들은 자기들끼리만 수군거렸다.

교장실과 나란히 붙어있던 서무실이라 교장 선생님이 자초지종을 듣고 서무를 불러 나무라셨다는 말을 친한 동학년 선생이 말해주면서 소개해줄 좋은 사람이 있으니 약속 날짜를 잡자고 했다.

“서울대 나온 똑똑한 사람인데, 딸이 하나 있는 중견기업 부장이야. 그이도 이혼한 지 좀 되었어. 믿을만한 사람이야.”

“고맙지만 아직은 그럴 마음이 없어요.”

“무슨 소리야, 한 살이라고 젊을 때 다시 시작해야지. 아직 젊고 예쁜데...”

경희는 결혼 전에도 한 번도 선보는 자리에 나가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혼한 지금은 더더욱 그런 자리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마는 그런 번거로운 자리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가장 바란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일이었다. 이렇게 결혼에 실패하고 혼자 남게 될 줄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남편을 잃은 상실감은 그것이 자발적인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다. 동진이 원망스럽고 아빠 잃은 아들이 가엾게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그를 믿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한 무능한 가장인 것도 모자라 다른 여자가 찾아오게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린 아들을 생각해 참고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이어지는 거짓말과 무책임은 도저히 그와 함께 살 수는 없겠다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경희에게 남자를 경험하게 해준 첫 사내였다. 내세울 게 별반 없는 경희보다 더 나은 조건들을 지닌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헛헛하고 막막한 나날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는 작은 집이라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에 장기 대출을 낀 16평 아파트를 구입했다. 그녀가 독립하여 처음 마련하는 이 작은 아파트는 일층이라 베란다 밖에는 손바닥만 한 화단도 있었다. 허리가 굽기 시작하는 아버지께서 오셔서 이삿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셨다. 그리고 생각지 않았던 동학년 선생님이 이사를 도와주겠다며 불쑥 찾아왔다.

그녀보다 어린 그에게 이성의 감정보다는 동료로서 이야기를 나누며 인간적 호감을 느꼈던 이인지라 먼지를 뒤집어 쓴 모습을 보이는 게 좀 부끄러웠다. 그는 극구 사양하는 그녀에게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그는 작년 경희의 어머니 장례식 때에도 찾아와 조의를 표했었다. 그는 놀랍게도 수능시험을 다시 보고 야간 외국어대학 영어과에 입학하여 바쁜 나날을 보내는 24세 청년이었다.

경희는 수업 시작하기 전 3층 교실 창문을 내다보다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씨름부 아이들을 훈련시키고 수업하러 달려가는 그의 활기찬 모습은 그녀를 미소 짓게 하였다.

그녀는 매일 그 시간이면 창문 밖으로 뛰어오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퇴근하는 버스 속에서 그와 마주쳐 같은 정거장에서 내렸고, 그가 근처 형님네 집에서 기거하는 것을 알았다. 그와 처음 개인적으로 학교 밖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야간 대학에서 돌아오는 늦은 시간 그녀에게 잘 자라며 짧게 전화했다.

그의 전화는 사흘에서 이틀 사이로 잦아졌고 매일 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마음은 이심전심 불붙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 못하였다.

매일 저녁 ‘따르릉’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축 늘어져 시들었던 그녀의 일상에 마치 새벽이슬처럼 생기를 불어넣고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를 바라보는 것 만도 학교 가는 일이 즐거워졌다.

“오늘 휴강인데 저 가도 될까요?”

“저녁은 먹었어요?”

“네. 선생님 보러 갈게요.”

경희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지만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그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자신도 알고 그도 알고 있었다.

불장난으로 끝나고 말 연정이라면 애당초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성과 달리 그녀는 그를 향한 강렬한 욕망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빨리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조바심치고 있었다.

벨 소리를 들은 경희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문을 열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찌나 강하게 포용하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경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고 지나가는 강한 전율을 느꼈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처럼 가슴 가득 따뜻한 물줄기가 흘러 넘쳤다.   

                                  - 끝 -                                (2024.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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